상쫑

깜짝 이벤트♥ (with. Love & Peace)

상호종수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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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가 좋은 연인이었느냐, 묻는다면 기상호는 솔직히 말해서 연애 초반에는 진짜 끔찍했고 중반에는 참아줄 만했으며 지금은 아주 좋은 연인이라고 답할 수 있었다. 왜 그들의 연애 초반이 개 끔찍했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더럽게 안 맞았다. 최종수의... 의부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증상들 때문에 그랬다. 기상호는 서로 사귄다는 사실에 이미 만족하여 굳이 사랑표현을 하지 않는 타입이었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표현하고 표현받고 싶었던 최종수는 그게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불안해했다.

기상호가 어디 가서 입만 다물면 솔직히 한 번쯤 쳐다보는 훈남인 건 맞지. 근데 기상호는 입을 가만두지 않았으며 걔가 가는 곳이라고 해봤자 훈련장, 경기장, 학교, 집이 끝이었다. 다른 사람 만날 기회도 없었고 있다해도 거진 최종수가 거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상호 남친이 최종수인 거 알면? 글쎄... 웬만한 사람은 깝칠 생각도 못할텐데. 물론 어쨌든 기상호가 대한민국에서 꽤 준수한 남친감인 건 맞았고 뭐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는 뇌빠진 놈들도 어딜가나 있으니까 그건 그렇다치자.

제일 중요한 건데, 상호는 사귀는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거나 눈을 돌릴 만큼 십새끼가 아니었다. 근데 종수는 기상호가 혹시나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까 봐 한참을 전전긍긍했다. 햄만큼 절 좋아해 주는 사람 없을 것이고 저는 저 좋다는 사람이 좋아요. 라고 말했더니 너는 나보다 더 좋다는 새끼가 나타나면 홀라당 갈 거냐? 라고 말하는 꼬락서니 보면 답이 나온다.

이 햄이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상호는 당황스러웠다. 사회 통념적으로, 그리고 그냥 마음을 빼놓고 상식적으로 둘 중에 상대가 너무 잘나서 바람을 필까 걱정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닌가? 왜 인간 태풍이 내 바람을 의심하는 거지? 내가 그렇게 믿음을 못 주나? 나... 티가 안 나나? 그래도 사귀기로 한만큼 최선을 다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올법한 집착남 같은 면모는 단 한 순간도 이해가 안 됐지만 어쨌든 헤어지나... 싶을 때마다 자기 없으면 안 된다고 울면서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헤어지는 게 이 햄 정신 건강에 더 좋을지도? 하고 떠올렸던 생각을 못 본 척 묻어버리게 되었다. 기상호도 자기 좋다고 그렇게 매달리면, 게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마음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꼴을 몇 년 정도 반복하면 종수도 그 나름의 의부증을 고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호의 상대방의 발화 의도를 짐작하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늘고 작은 자극에도 휩쓸려대던 종수 역시 시간이 지나며 점점 유해지고 담담해지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 시작한 중반부터는... 정말 우습게도 그때부터 약간 다른 커플의 연애 초반처럼 알콩달콩 지낼 수 있었다. 기상호가 술을 먹고 들어와도, 외박을 해도 그 전에 꼬박꼬박 전화만 하면 조심하라며 걱정해주고 가끔 기념일을 챙기고 그저 상대방이 생각난다는 이유만으로 사소한 선물을 사 오기도 하는 그런 연애.

그리고 그 과정을 모두 거쳐 지금의 종수는, 이제 좋은 연인이라고 확답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사랑스러운 연인이 되었다. ㅋㅋ 인간 태풍의 깜찍한 애교는 수비 스페셜리스트 기상호 밖에 못 봤다 이 말이다. (실상 옆에서 그 염병을 다 보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여튼)

자, 이제 상호는 생각한다. 솔직히 받아먹은 게 많았다. 인간 태풍이 돈 많은 집안이라 좀 양심 없이 받아먹긴 했지만 데이트 비용도 그렇고 종수가 자기 생각난다며 사 온 선물들이나 가끔 서로가 너무 바쁘면 자신의 자율 시간 등을 빼먹고 달려오는 횟수도 종수가 훨씬 많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랑한다고 보여주는 행동을 종수가 더 많이 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일일이 세지는 않았지만 분명 종수가 더 많이 할 것이다.

사랑은 이득을 안 따지는 거라지만 고백도 종수가, 북 치고 장구 치는 것도 종수가, 챙겨주는 것도 종수가 거의 해주는 꼴을 받다 보면 이제 상호는 하나의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받고만 살 수 없다... 프러포즈는 내가 해야지.


기상호 본인은 자신이 씹타쿠는 아니라고요, 라며 신빙성 없는 발언을 하지만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 쪽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여지없이 씹타쿠여서 그렇지. 특히 어떤 점이 그렇냐면, 깜짝 프러포즈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 종수 몰래 시간을 빼면서 굳이 개 수상하게 굴며 만화에나 나올법한 너! 나 몰래 뭐 하려는 거야? 짜잔! 사실 이벤트 준비였어! 자기야...! 따위의 이미 유통기한이 진작에 지난 클리셰 덩어리 해프닝을 바란다는 점에서 그랬다.

물론 고의성이 다분하면 그것조차 눈치챈 종수가 돌이킬 수 없는 빡침 상태가 될 수 있으니 상호는 대놓고 하진 않았다. 아주 교묘하게 했다. 적당하며 의심받지 않을만한 핑계를 대면서 둘만의 시간을 회피했고 최대한 거짓을 뺀 진실로 말장난을 하면서 의심? 스러울? 지도? 싶은 티를 냈다. 그렇게 도와줄 친구들을 섭외하고 프러포즈를 할 때 쓰기 위한 소품도 친구 집에서 받고, 전에 알아둔 손가락 치수에 맞는 대출혈 프러포즈 링까지 준비한 기상호.

그리고 기상호는 생각한다. 종수햄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며칠 전에 너 요즘 나 몰래 뭐 해? 라고 묻는 것을 보면 상호가 뭔가 하는 것은 눈치챈 거 같은데 종수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준비한다고 가끔 있는 휴식 날에도 상호가 밖으로 나가버리는데 종수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상호는 처음엔 당황했고 나중에는 불안했다. 아이고... 눈치가 너무 좋아져서 이거 다 들킨 거 아니가... 내 일부러 반지도 친구 집에 놓고 다닐 정도로 엄청 신경 썼는데 어케 알았노...

근데 아무 말 안 하는 거 보면 기대하고 있는 걸까? 이미 다 들켰으니 깜짝이라는 말은 빼야겠지만 그래도 프러포즈라는 행위가 주는 느낌은 다르니까. 그래서 상호는 조금 김이 샜지만 착실히 준비를 했다. 참나. 이렇게 말도 안 할 줄은 몰랐는데. 연애 초반이었으면 몰래라는 말이 들어간 순간부터 빡쳤군... 싶었을 텐데 여상한 낯으로 물어오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이제 종수햄도 내가 하는 짓은 다 뻔하다 이거지. 그래서 상호는 좀 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래서 꽃잎만 좀 뿌리려고 했는데 답지 않게 분홍색 아로마 초도 사고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결혼해달라는 플래카드도 만들었다. 상호가 열을 올리니 친구들도 신이 났는지 고백할 때 아카펠라로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상호는 이런 거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나쁘지 않아 하는 그 성격을 알아서 좋다고 했다. 내가 진짜 세상 다시없을 정성 가득 프러포즈를 해줘야지... 상호는 종수가 얼마나 좋아할지 기대가 됐다. 감동 받아가 막 우는 거 아닌가? 그러면 안아주고 뽀뽀해줘야지. 이런 생각이나 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상호는 종수가 개인 사정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날에 프러포즈를 거행하기로 했다. 밖에서 멋진 레스토랑에서 와인 마시며 고백해도 좋겠지만 이왕이면 프러포즈는 둘이 가장 편한 집에서 하고 싶었다. 그래, 실토하자면 그렇게 분위기 잡고 나면 100% 할텐데 호텔에서 하는 것도 좋겠지만 상호도 종수도 가장 편한 것은 집이고 다음 날 자고 일어났을 때 여전한 일상인 것이 더 마음을 간질일 것 같았다. 진짜 염병이었다.

상호는 아침에 종수가 집을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단톡방에 얼른 오라고 카톡을 날렸다. 도착한 친구들은 풍선도 불고 꽃잎도 좀 뿌리고 플래카드를 어떻게 들지도 다시 논쟁하며 시간을 보냈다. 상호는 그런 친구들을 믿고 미용실에 가서 화장과 머리 손질을 받았다. 오늘 애인에게 고백하려고요. 라고 하니 원장님이 나와주시더라. 그렇게 깔끔하게 꾸미고 집으로 오니 친구들이 그래도 나름 예쁘게 배치를 해놨더라고. 와 진짜 이번 프러포즈는 된다. 상호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종수가 집에 오기 1시간 전, 상호는 요리를 했다. 솔직히 상호가 요리를 엄청 잘하는 건 아니지만 종수는 상호가 해준 요리를 좋아했다. 아마 계속 상호가 만들었을 테니 길든 게 아닌가 싶지만 하여튼! 중요한 건 종수가 좋아해 준다는 거다. 그래서 상호는 그동안 연습한(친구들에게 먹이며 연습했다) 성과를 여지없이 발휘하며 파스타와 스테이크, 샐러드를 만들어내어 깔끔히 세팅한 뒤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멋진 옷을 갖춰 입고 종수가 어울린다며 선물해줬던 비싼 향수를 뿌린 상호는 진짜 봐줄 만 하다를 넘어서 꽤 쌔끈하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친구들 모두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내가 여자였으면 반했을 듯? 이라는 게이 친구에게 하기엔 요상한 칭찬들도 대충 흘려들은 상호는 긴장한 얼굴로 종수의 카톡에 들어간다.

[형, 저 오늘 중요한 할 말이 있어요.]

[들어오시면 얘기해요.]

1은 금방 사라졌다. 아 괜히 말했나? 더 놀라라고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근데 어차피 다 들켰으니까 뭐... 종수의 마음 준비를 응원하며 긴장하고 있으니 조금 있다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기상호는 거실 정 가운데에 서서 반지 케이스를 매만진다. 살면서 이벤트 하나 안 해준 건 아니지만 이번 이벤트는 정말 빅 이벤트였다. 좋아해 주겠지? 상호는 너무 기대되었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상호와 종수의 스위트홈은 특이하게도 현관 바로 앞에 거실이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야 거실이 보였다. 실내화 타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비닐봉지 소리가 났다. 바스락바스락... 그리고 뭔가? 종이? 플라스틱? 따위를 뜯거나 구기는 소리도 났다. 뭐지? 순간적으로 친구들과 시선을 부딪히니 빨리 준비하라고 손짓이나 한다. 하긴. 다 티 냈으니까 햄도 날 위해 뭘 준비했을지도? 뭘 가져온 걸까? 상호는 차오르는 기대를 꾹 누르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언제든 반지를 내밀 준비를 했다.

곧 종수가 현관을 빠져나왔고 동시에 부엌에서 대기하던 친구가 거실 등을 키자마자 상호는 외친다.

"햄!!! 저랑 결혼해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는데 답이 없다. 햄도 놀란 걸까. 근데 좀 이상한 게 있었다. 친구들도 말이 없었다. 이렇게 고백하면 아카펠라 해준다매? 결국 못 했나? 상호는 티 안 나게 살짝 고개를 틀어 제 옆의 친구의 얼굴을 확인한다. 넋이 나가고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상호는 여기서부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공기의 흐름이 상호야 좆됐어. 하는 기분? 상호는 그 기이한 침묵의 진원지를 알아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종수의 손에 들린 아무리 봐도 새삥인 장도리, 그리고 식칼이 쥐어져 있으면 상호도 조금 아연한 얼굴이 된다. 에? 어?

"...결혼?"

"...네? 네... 저랑... 결혼해주세요..."

종수는 한참 상호의 눈을 마주하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상호의 바로 뒤에 굳은 친구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를, 이어 바닥에 깔린 장미 꽃잎과 은은한 아로마 향초, 마지막에는 상호의 꾸밈새를 관찰했다. 그 뒤 굳어있던 얼굴이 풀리고 동시에 들고 있던 식칼과 장도리가 달그락, 어쩐지 섬뜩하게만 느껴지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친구들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공유하더니 다들 환히 웃으면서 그 멋대가리 없는 아카펠라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도 안 맞았지만 종수는 당장 제게 내민 반지가 기분 좋은 건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상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고 종수는 수줍게 제 손을 내밀며 말한다.

"진작 말하지... 죽여버릴 뻔했잖아."

다시 한 번 짧은 침묵. 친구들은 좀 더 필사적으로 아카펠라를 부르고 재빨리 둘을 축복하더니 그대로 둘만의 시간이 즐겁길 바란다며 런했다. 그렇게 이 거실에는 장도리와 식칼, 그리고 그걸 가져온 사람이 눈앞에 있었고 상호는 대체 여기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웃었다.


상호의 바람과는 다르게 종수는 상호가 개수작을 부리는 것 까진 알아차렸는데 그게 뭔지 짐작을 전혀 못 했다. 그리고 상호가 착각한 게 있었는데, 종수가 상호와 지내면서 많이 여유롭고 유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제 종수는 예전처럼 상호가 매일 사랑한다고 말 안 해줘도 적당히 짐작하고, 듣고 싶을 때는 나름의 애교를 부리며 받아낼 줄 알았다.

그래. 그러니까 종수가 안정적이었던 건 상호가 티를 내줘서 그랬다. 그리고 기상호는 깜짝 프러포즈 준비를 한다고 반쯤은 별수 없이, 그리고 반쯤은 이 씹타쿠새끼가 종수의 질투에 그렇게 시달려놓고서 그동안 좀 평화로웠다고 추억보정을 먹였는지 질투 해프닝 같은 거 없으려나~ 하며 수상하게 굴었던 탓에? 최종수가 묻어두었던 의부증이 오랜만에 고개를 쳐들었다.

살아오면서 그의 사회성과 멘탈, 그리고 성격은 좋은 방향으로 고쳐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축적해온 불안증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최종수는 아직도 가끔은 자신이 기상호에게 좋은 연인인지를 고민했고 자길 사랑한다고 말해오는 기상호가 언젠가는 제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거에 매몰되지는 않았지만 끝을 가끔은 떠올렸다는 거다. 이건 기상호도 몰랐다.

그리고 기상호가 개수상하게 굴자마자 최종수의 의부증은 비명을 질렀다. 왜 요즘 사랑한다고 자주 말 안 해줘? (원래 그랬다) 왜 쉬는 날에 나랑 안 놀아? (프러포즈에 쓸 커플링이랑 옷 고른다고) 그놈의 친구들은 왜 자꾸 만나는데? (프러포즈 준비를 도와줄 애들이라) 그렇게 놀고 오면 밥도 맨날 먹고 오고... (프러포즈할 때 해줄 음식을 연습한다고) 왜, 왜 요즘엔 나한테 뜨뜻미지근하게 구는데. (이건 고의 맞음)

그리고 최종수는 그 모든 것을... 이 새끼가 드디어 나한테 마음이 떴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저렇게 굴면서도 잠자리를 함께 했고 그러면 예의 개눈깔로 최종수를 깔끔히 잡아먹는 기상호를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긴 한데 하여튼 그 외에는 의뭉하게 굴긴 했으니 최종수의 잘못은 아니겠다.

기상호가 날 떠나면 어쩌지. 최종수는 그 걱정을 하면서 하루하루 말라간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벌써 바람을 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최종수가 가장 처음 한 행동은...

날카롭다고 유명한 장인의 식칼과 그립감이 딱 좋은 장도리를 하나 사는 거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 행동까지 갔나? 여기엔 아주 많은 생각들이 들어갔는데 만약 기상호가 헤어지자고 한다면? 엄청 슬프겠지... 죽고 싶을지도 모르고 한동안 못 잊어서, 혹은 영원히 못 잊어서 쩔쩔 맬 것이 눈에 훤했다. 기상호의 사랑 표현은 최종수랑은 맞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최종수가 불안과 의심을 내려놓은 순간 기상호는 지금 말곤 단 한 번도 최종수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최종수의 불안을 다 받아준 것도 기상호 뿐이었다. 최종수에겐 가장 처음의 연애가 너무나도 헌신적이고 다정했다. 이 사랑을 잊을 자신이 없었다.

근데 여기까지 생각하니 다음 스텝이 있다. 헤어진다고 쳐. 그럼 남이 기상호를 가만히 놔둘까? 프로 농구 선수. 수비에 대해선 최종수, 전영중과 견줄 만큼 대단한 선수. 그 점을 빼고 보더라도 키가 더 큰 녀석은 이제 190대의 키에 벌크업도 열심히 해서 90대 중반의 몸무게였다. 얼굴? 가끔 어떤 선택을 해서 그렇지 저 정도면 대한민국 평균은 진작에 뛰어넘는다. 게다가 어느 정도 친해지면 얼마나 다정한 성격인데. (여긴 최종수 필터가 조금있다) 다른 사람이 그런 기상호를 가만히 놔둘까? 최종수는 아니라고 봤다.

그럼... 나랑 헤어지고 나서 남이랑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럼... 내가 받았던 그 사랑을... 남한테도 준다고?

여기서 인간 태풍의 눈깔이 오랜만에 태풍 눈깔이 된다. 그 사랑을 자기가 못 받는 것까진 진짜 슬프지만 어떻게 상상이 됐다. 근데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남의 사랑을 받고 행복해하는 기상호? 그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고, 저 같은 건 진작에 잊어버리는 기상호... 그렇게 내가 아니라 남과 평생을 기약하는 기상호... 여기까지 생각한 최종수는 어떤 결심을 한다.

기상호의 오타쿠 짓 중 유명한 것은 인터넷 밈을 꽤 잘 쓴다는 거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내 오른쪽 주먹은 대화, 왼쪽은 설득이다. 라고 했던 거다. 그걸 기억하고 있던 최종수는 제 도구들에도 이름을 붙여줬다. 자, 식칼은 사랑이고 장도리는 평화야. 왜? 이걸로 그 두 개를 갈취할 예정이라.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기상호는 자신의 죗값을 마주한다. 왁자지껄 분위기를 띄워주기로 한 친구들은 진작에 도망갔고 최종수의 발 옆에는 사랑과 평화가 나뒹굴고 있었으며 최종수 혼자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얼굴로 기쁘게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기상호는 바닥에 있는 사랑과 평화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플링을 꺼내어 최종수의 왼손 약지에 조심히 끼워주었다. 반지는 정확하게 딱 들어맞는다. 최종수의 눈이 사르르 휘어진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인데 기상호는 하핫... 어색하게 웃어버리고 만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마주하고 나니 어느 정도 짐작이 됐다. 전처럼 낌새를 눈치채자마자 티 낼 줄 알았더니 웬일로 얌전히 있는 동안 무슨 상상 널뛰기를 한 건지 아마 기상호를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근데 어쨌든? 프러포즈했더니 풀린 거 보면? 일단 당장 내 목숨은 괜찮은 거겠지? 기상호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슬쩍 식칼과 장도리를 잡아 제 뒤로 보내놓은 다음 일어나서 최종수의 손을 잡았다. 이미 다 풀린 것 같지만 여기서 떨떠름하게 굴어봤자 둘 중 하나는(어쩌면 둘 다) 큰일 나겠지 싶어서 상호는 자신이 준비해놓은 계획에 뇌를 맡기기로 했다.

"상호야."

"네?"

"내가 너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럼요..."

이 꼴을 보고 모를까요... 딱히 인간 태풍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정말 없었지만 상대방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마 영원히 빠져나갈 일이 없겠구나! 자각하며 기상호는 하하... 웃으며 저도 손을 내밀었다. 최종수도 눈치 빠르게 기상호가 준비한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워준다. 몇 주를 고민해서 그런가, 두 반지는 서로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정말...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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