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장난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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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내일까지 마감인데 진행도는 어떻게 되세요?]

[거의 다 했어요. 오늘 파일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딸깍딸깍,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키보드가 멈춘다. 기상호는 피곤한 눈매를 문질렀다. 지금이 낮인데 오늘 보내준다고. 보통 저 말은 자정 전에 아슬아슬하게 보내준다는 뜻이니 일찌감치 퇴근하고 집에서 파일을 받아보는 게 낫다는 소리다. 기상호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맡은 다른 작가들은 아직 마감 기한이 남았으니 독촉 메일 한 번씩 보내주고. 저번에 받은 작가 원고 한 번 더 살펴본 다음에….

차근차근히 할 일을 짚던 손이 3월의 달력을 모두 확인하자 다음 장으로 넘긴다. 4월 1일. 대형 라이브 공연장에서 열리는 공연에 가는 날. 이때 연차를 쓰기 위해 얼마나 눈치를 봐야 했는지. 마른 입 안을 진한 커피로 적신다. 아직 날이 다가오지 않았으며 해야 할 일이 밀렸다간 기껏 만들어낸 휴식에도 노트북을 부여잡아야 할 것이 뻔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일해야 하지. 휴대폰을 꺼내어 독촉 메일을 위한 서식을 불러온다.

 

4월 1일.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브 공연장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일 년 중 단 하루. 꼭 만우절에만 공연하는 전설적인 프론트맨이 있다는 전설이. 실상 전설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일 년 중 단 하루만 볼 수 있다는 희귀성과 함께 그의 화려하다 못해 넋이 나갈 기타 실력, 처음 보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는 매력, 또한 한 번 들으면 다른 모든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만치 감미로운 노랫소리까지. 여러 가지 요소 탓에 그는 만우절 날 라이브 공연장의 매출을 담당하는 스타였다.

그렇게 인기가 많으면 매일매일 공연을 해도 받아주겠다는 사람이 넘칠 텐데 그는 딱 만우절에만 공연했다. 앨범도 내지 않고 밴드를 하지도 않고. 4월 1일만 지나면 밴드 계에서 자취를 감추는 비밀스러운 실력자.

 

그리고 기상호는 그 프론트맨하고 같은 집에 있었다. 동거를 하는 건 아니고, 어제까지 준다더니 기어코 오늘까지 주지 않은 탓에 집에 쳐들어온 것이다. 언제나처럼 집 안은 쓰레기 소굴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기상호는 한숨을 쉬며 익숙하게 챙겨온 쓰레기봉투를 꺼내 들고 고무장갑을 꺼내 끼었다. 널려져 있는 쓰레기들을 싹 다 봉투에 쑤셔 넣고, 그다음 먼지를 쓸어내고 밀대로 마무리하면 그럭저럭 사람 사는 꼴이다. 널브러진 옷가지들도 모아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다음엔 쌓인 설거지를 마무리한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잘 쓰나 확인하고 배달을 시켜 이 반짝스타이자 더럽게 마감 기한 못 지키는 작가님 앞에 밥상까지 차려주면 기상호가 할 일은 끝났다.

며칠 씻지도 않은 게 뻔한 머리는 떡이 져선 아무렇게나 묶여있었고 늘어난 티셔츠와 헐렁한 잠옷 바지만 입은 주제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키보드를 연타하는 꼴을 지켜보면서, 기상호도 제 노트북을 꺼냈다. 독촉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기상호는 아직 퇴근한 게 아니니까. 밀린 메일들과 해야 할 잡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보면 덜컹, 의자를 뒤로 밀치는 소리를 내며 작가가 튀어 오른다. 메일함을 다시 확인해보면 파일이 와있다. 기상호는 그제야 한숨을 쉬며 원고 파일을 열어본다.

 

망할 작가님께서 깔끔히 씻고 나오면 기상호도 한 번 훑어보는 게 끝났다. 교정부호들을 넣으면서 꼼꼼히 체크하고 있으려니 망할 작가, 박병찬도 옆에 와 앉았다. 아, 이건 일부러 한 건데, 헉 이런 실수를. 이런저런 말을 적당히 보면서 끝까지 수정하고 나면 기상호도 오늘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은 끝마친 것이다.

기상호의 머리도 좀 떡져 있었기 때문에, 1차 교정을 마친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하게 몸을 씻는다. 나와서는 세탁기에 돌린 빨래들을 널었다.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약은 아까 챙겨 먹으셨어요?"

[아, 까먹었어요. 지금 먹을게요.]

"약은 같은 시간에 꾸준히 먹는 게 제일 효과 좋다니까요."

[마감 때문에 바빠서 그랬어요! 자꾸 그러실 거예요?]

 

고개를 들면 입을 삐죽거리는 말끔한 얼굴이 보인다. 쯧. 혀를 차면서도 마감을 마쳐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보면 미워하기가 어렵다. 기상호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을 내리자 박병찬은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어지러운 책상 위에서 용케 약병을 꺼내어 약을 먹는다.

그렇게 먹고 나면 병찬은 집 안 구석에 세워진 기타를 집어 들었다. 앰프까지 연결하고 소리는 최저로. 다행히 병찬이 사는 집은 주택이었기 때문에 언제 기타를 틀어도 그 소리에 고통받을 가까운 이웃은 없었다. 그가 익숙하게 기타를 친다. 며칠 뒤 라이브 공연장에서 공연할 곡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보나 마나 저 연습을 한다고 마감을 못 지켰겠지. 기상호는 익숙하게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그 모습을 구경한다. 베이스가 없어도 일렉 기타는 화려함을 잃지 않는다.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당장은, 그가 연주한다는 것만으로도 강렬했기에 기상호는 홀린 듯 제 앞의 프론트맨을 쳐다보았다.

 

 


 

 

기상호와 박병찬의 인연은 우연과 우연, 그리고 기상호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박병찬은 만우절 단 하루를 제외하고선 소설가로서 살아갔고 기상호는 그를 담당하는 편집자였다. 평소에는 마감 기한을 지키다 못해 넉넉하게 맞춰주는 좋은 소설가는, 이상하게 1월부터 서서히 그 기간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3월이 되면 자꾸만 마감 기한을 아슬아슬하게 맞추다 못해 가끔은 지각하는 난감한 상황을 연출했다. 처음에야 안달복달하며 혹시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지, 세 번 정도 그것을 겪은 기상호는 참지 못하고 그의 정보가 적힌 서류에 있는 주소로 쳐들어갔다.

현관 앞에 서니 기타 소리가 들렸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병찬이 나왔다. 생긴 것이야 계약하면서 마주쳤고 아까 본 서류에도 있으니 익숙은 했다. 근데 분명 거기엔 멀끔한 인간이 있던데 제 앞의 작가는 떡이 진 머리로 넋도 나가 보였고 다크서클도 어지간히 짙어야지. 글이 안 써진다고 약이라도 했나? 싶었다. 그 와중에 어깨엔 기타를 메고 있던데. 둘 다 서로의 얼굴을 아는지라 이어지는 것은 짧은 침묵이었다. 그 사이에서 기상호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작가님. 지금 마감 기한이 내일입니다. 연락도 잘 안되셔서 직접 찾아왔어요."

 

병찬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어물거리더니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어 문자를 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병찬은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알아들을 수는 있었으나 내뱉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야 목에 저런 커다란 흉터가 있으면 어련히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죄송해요…. 너무 안 써져서 잠깐 머리 좀 식히려고 했어요.]

"알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요."

[저 집 안이 진짜 더러운데]

"모습 보면 짐작됩니다. 얼른 들어가요. 글만 쓰시게 할게요."

 

그리고 들어온 집은 진짜 끝내주게 더러웠다. 쌓여있는 각종 컵라면과 음료수, 과자 봉지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들, 가득 들어찬 싱크대. 머쓱해 보이는 병찬을 보며 기어코 한숨을 내쉰 상호는 글 쓰고 계세요. 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가 대형 쓰레기봉투를 잔뜩 샀다. 돌아와서는 거의 더러움과의 대전쟁을 치렀고, 그 와중에 저를 힐끔거리는 병찬에게 글 쓰시라고요. 하며 모든 도움을 거절했다. 아! 편집자의 삶이란. 어쨌든 이런 생고생도 마감 기한이 미뤄지는 탓에 단체로 맘고생 하는 것보단 나았기에 기상호는 묵묵히 모든 것을 치웠다.

다 치우고 나니 냉장고에 든 것이 없었는데 요리하고 그걸 또 치울 생각을 하니 막막하여 결국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시켰다. 기어코 병찬은 그날 아슬아슬하게 글을 쳐냈고 상호는 무사히 병찬의 글을 마무리 지어 낼 수 있었다.

폭풍과도 같던 업무를 끝내고 탈진한 상태로 누워있는 상호를 보며 병찬은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이내 상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라이브 공연장에 출입이 가능한 티켓이었다. 일을 시켜놓더니 미안해서 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상호는 그 티켓을 받았다. 솔직히 좀 곤란했다. 상호는 음악에 이렇다 할 조예는커녕 단순한 관심도 없었으며 평소에도 음악을 듣고 다니지 않았다. 음악을 듣는 건 세 경우였다. 길에서 각종 매장이 틀어놓는 음악들, 카페에 들르면 잠깐 듣는 것들, 또 어쩌다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등.

상호가 흥미 없는 눈으로 티켓을 보고 있으니 잠깐 머뭇거리던 병찬이 다시 휴대폰을 든다.

 

[그거 엄청 비싼 티켓인데.]

"아 진짜요."

[한 번 보러오세요. 제가 거기 기타리스트로 나가거든요.]

"아…? 잠깐만요. 그럼 작가님 마감 치셔야 하는데 공연 나간다고 연습하신 거예요?"

[마감 끝났잖아요~ 네? 저 진짜 잘하는데. 들어주면 좋을 텐데.]

"...하. 알았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네요. 작가님 말곤 다들 여유 있으니까 한 번 보러 갈게요."

 

병찬은 기쁜 듯이 미소 지었고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피곤했다. 기어코 작가의 집에 가서 수발들어주는 편집자가 된 것도 피곤해 죽겠는데 이제 작가의 취미에까지 어울려야 한다니. 편집자의 삶을 그린 만화에서 그런 열정남치고 헌신적인 편집자를 못 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병찬이 제게 할 말을 꾹꾹 누르면서 지은 표정에 서린 간절함을 읽어버렸기에 별수 없었다. 안 들어줬다가 괜히 삐지거나 감정 상하면 더 피곤해질 테니까. 상호는 한숨을 쉬며 외투를 집어 들고 병찬의 집을 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라이브 공연장은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빽빽했다. 굳이 사람들에게 치일 생각은 없어 제일 뒤에서 멀거니 무대를 바라본다. 키가 큰 편이라 다행히 시야가 가려지진 않았다. 눈도 좋은 편이었고. 아직 무대는 시작되지 않아서, 기상호는 벽에 기대어 주변의 소음을 들었다. 모두가 들떠 있는 게 느껴진다. 작가님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적당히 좋은 말 해줘야 하나. 그랬다가 또 오라고 하면 어쩌지? 귀찮은데….

순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넋을 놓았던 터라 깜짝 놀라 앞을 본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병찬이었다. 길어서 목을 다 덮고 맨날 뒤로 넘겨 묶던 머리는 깔끔하게 잘라내어 멋을 부린 상태였고 원래도 몸이 좋았던 덕에 가죽 재킷을 입은 모습은 끝내주게…. 멋있었다. 다크서클은 화장으로 가린 건지 보이지 않았고 그런 얼굴로 환하게 웃으니, 정말 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가 환히 웃으며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소리치자 모든 사람이 소리 높여 그의 이름을 부른다. 박병찬!

그 분위기에 따라가지 못한 기상호만 멍하니 그 모습을 본다. 그는 웃으며 바로 기타를 고쳐잡았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동작에 순간, 이 넓은 공간에 침묵만이 감돈다.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어 그가 손을 움직이자 음악이 시작된다. 한 곡이 끝나고 기상호는 생각했다.

1. 기타 진짜 끝장나게 잘 치네….
2. 뭐야, 저 사람 말 못한다며. 왜 노래를 부르지?
3. 노래도 왜 이렇게 잘하는데….

이제까지 상호가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그럴만한 음악을 만나보지 못해서라는 듯, 병찬이 보여준 무대는 정말이지. 정신이 쏙 나갈 정도로 강렬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 병찬과 같이 공연한 다른 사람들도 그 씬에선 꽤 알아주는 실력자들이었던 모양이다. 그 사이에서도 병찬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병찬이 마이크를 사람들 쪽으로 향하면 모두가 노래를 불렀고 병찬이 화려하게 기타 독주를 할 때면 다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으며 또한 병찬이 감정을 가득 담아 노래를 부르면 다들 숨조차 멈추고 집중했다.

상호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2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공연 시간. 그 시간 내내 가끔 다음 곡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 동안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잡담 외엔 계속 노래를 부르면서도 병찬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런 병찬을 보며 상호는 생각했더란다. 저렇게 잘하고, 저렇게 행복해할 거면 왜 소설가 같은 걸 하는 걸까. 물론 소설가가 밴드맨들 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상호는 알아봤을 뿐이다. 병찬에겐 저 모습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무대 밑으로 내려온 병찬에게 수많은 팬이 몰려든다. 다들 병찬과 손 한번 잡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수많은 손길에 휩쓸리면서도 병찬은 꼿꼿이 서 있었다. 옷을 잡아채고, 애매한 터치가 있음에도 병찬은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어색하게만 느껴져 상호는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를 돌아 나갔다. 누구라도 행복하리라고 생각할 만큼 환한 웃음이었는데도 어쩐지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다.

 


 

 

 

병찬은 그 뒤에 공연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상호는 솔직하게 너무 대단했다고 말했고 병찬은 고맙다고 답했다. 그 뒤 병찬은 그 일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상호가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도 모른 체 하거나 관련한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상호가 좀 더 물어보려고 하면 그만 하세요. 라며 딱딱하게 문자를 보내오니 더 얘기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상호는 꾸역꾸역 바쁜 업무를 처리하곤 라이브 공연장으로 뛰어갔다. 병찬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 업계를 아는 건 아니지만 술 좀 먹이고 좀 추켜세워주면 술술 새는 놈이 있기 마련이다. 상호는 그런 놈들 대하는 데엔 이골이 나 있었기에 그런 놈 찾아내는 것도 잘했다. 바로 물어보면 의심을 살 게 뻔하다 싶어 며칠 공을 들였더니 이제 상호는 뒤늦게 음악에 푹 빠져서 밴드하고 좀 친해져 보고 싶은 호구였다. 뭐 나쁘지 않지. 상호는 기꺼이 호구를 자처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병찬의 공연이 끝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사람들에게 물으면 병찬에 대한 말이 술술 나왔다. 다들 병찬의 실력에 감탄하고 질투했으며 또한 그가 왜 단 하루만 공연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가 공연하지 않으면 뭘 하는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실컷 나눴다. 상호는 그 정보들을 주워들었다.

어느 정도 계속 같이 다니자 밴드로 오래 활동한 이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덕에 상호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병찬이 15살부터 밴드 계에 뛰어들었다는 것, 그 나이 때부터 이미 실력이 대단하여 공급이 넘치는 기타리스트임에도 여러 밴드가, 또한 새로운 밴드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러브콜을 날렸다는 것. 그리고 20살, 4월 1일. 공연하다가 조명이 떨어졌고 파편에 목이 꿰뚫렸다는 것.

목 다쳐서 노래 못 부르게 됐다던데 회복이 잘 됐나 봐. 가벼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하는 것을 들으며 상호는 병찬을 떠올렸다. 병찬을 아는 회사 사람들은 그가 말을 못 하는 것도 알았다. 왜냐하면 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항상 수첩과 노트를 들고 다녔으며 목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문득 기억을 더듬던 상호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 공연 때, 작가님을 보면서 느꼈던 묘한 위화감. 어렸을 때부터 온갖 판타지물을 읽던 뇌가 현실에 잔뜩 녹슬고서도 혹시나 하는 의견을 내놓는다.

 

 


 

 

기상호는 언제나 참고 기다리는 것을 잘했다. 마감 기한을 놓칠 것 같은 작가 앞에서는 결국 참지 못했지만 대부분 그랬다는 말이다. 상호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병찬을 내버려 두었고 업무 관련 연락을 가볍게 주고받는 사이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또 3월. 그 전과 같이 시간이 밀린 병찬의 집에 찾아갔다. 저번과 같은 상황이었다. 병찬의 집은 쓰레기통 자체였고 병찬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쓱한 얼굴로 저를 맞이한 병찬이 이제는 더럽다는 경고도 해주지 않고 들어갔다. 상호는 준비해둔 청소 도구를 꺼냈다.

집 안을 깔끔히 치우고 밥까지 해주고 가만히 기다리니 결국 마감을 끝낸 병찬이 거지꼴로 다가왔다. 병찬은 겸연쩍은 얼굴로 휴대폰을 들어 미안하다고 적어 보였다. 그래서 상호는 괜찮다고 말하고, 본론을 꺼냈다.

 

"혹시, 전에 주신 보답을 또 주실 수 있을까요?"

[전에 드린 거요?]

"네. 이번엔 티켓이 없으세요?"

 

그의 손이 얌전하다. 갈등하는 것이 보였다. 상호는 재촉하지 않았다. 병찬은 한참 손가락을 까닥거리다가 다시 휴대폰을 꾹꾹 누른다.

 

[있어요. 보러 오시게요?]

"네, 너무 좋은 공연이어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병찬이 책상 위를 뒤적거리더니 전과 같은 티켓을 한 장 내민다. 디자인이야 저번과 달랐으나 같은 라이브 공연장인 건 똑같았다. 상호는 여상한 낯으로 그것을 받는다.

 

 


 

 

상호는 그날 연차를 썼고, 다시 그 병찬의 공연을 관람했다. 여전히 그는 가장 많은 시선을 빼앗는 사람이었다. 별생각 없이 왔다면 여전히 그에게 빠져들어 넋이나 놓았겠지. 하지만 상호는 볼 것이 있었다. 온전히 드러난 목, 찢어져 가리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 크기의 흉터. 그걸 화장으로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명 아래 그의 목덜미는 매끈했다. 꼭, 그가 아는 그 흉터가 착각이라는 것처럼. 기상호는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그럼 이게 소설이면, 과연 병찬은 어떤 역할일까. 주인공이라 특별함을 받은 걸까? 아니면 주인공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기 위한 장치였을까. 병찬이 무대 위에서 내려온다.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의 상호는 공연을 다 보고 나서 깔끔히 집에 갔지만 이번엔 모든 걸 끝마친 병찬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이곳을 들락날락하며 밴드맨들은 정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담배 쩐내가 진동하는 건물 뒤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이어 작은 문이 열리고 뒤에 이것저것 짊어진 사람들이 나온다. 그 사이에 병찬이 없어 다시 조금 더 기다리면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병찬이 보였다.

무대 위에선 그렇게 행복하다는 듯 웃어놓고 혼자 남은 병찬은 그 누구보다 피곤하고 음울함을 내뿜고 있었다. 상호는 그것에 말을 거는 것을 머뭇거렸고, 이어 병찬이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봤을 때야 제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병찬은 상호의 존재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편집자님."

"...안녕하세요. 작가님."

"... ... ... 저한테 물어보실 게 있겠네요."

"물어봐도 될까요?"

 

병찬이 제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상호는 그 얼굴에서 체념을 읽었다. 아니 체념보다는…. 좀 더 질척거리는…. 글쎄. 얼굴을 마주한 적이 많지 않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술이나 사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밖에서 먹어야 하나 했더니 집에서 먹자는 말에 상호는 마트에 들렀다. 대충 술 네 병에 안줏거리를 만들 재료도 간단히 산 뒤 병찬의 집으로 돌아갔다. 간단한 요리를 내어놓고, 소파에 나란히 걸터앉으면 술자리가 시작된다. 만들어준 것이 입맛에 맞았는지 상기된 얼굴을 보며 상호는 술잔을 홀짝인다. 시선은 아직도 매끈한 목덜미에 있었다. 목을 완전히 가리는 옷이 아닌 이상 보일 수밖에 없던 흉터. 화장으로 지웠다기엔 아무런 굴곡도 보이지 않았다.

병찬은 별말 없이 안주만 집어 먹더니 술 한 병을 까고 병나발을 불었다. 상호는 끔뻑거리며 그 꼴을 보다가 제 빈 잔에 술이나 새로 채웠다. 병찬이 캬- 소리를 내더니 기분 좋게 웃는다.

 

"작가님."

"작가님 말고 이름 불러주시면 안 돼요?"

"엄…. 병찬 씨?"

"네. 그걸로. 저도 상호 씨라고 부를게요?"

"네. 편하신 대로…."

 

병찬이 기분 좋게 웃는다. 상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병찬이 저를 쳐다보지 않았기에 상호도 슬쩍 시선을 돌린다. 저 멀리 벽걸이 시계가 보였다. 11시 34분. 오늘 하루가 많이 남지 않았다. 병찬에게 다시 시선을 주면, 병찬 역시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호는 병찬의 얼굴을 쳐다본다. 익숙하게 하나의 문장이 떠오른다.

'그는 언제나 시계를 바라봤다. 서서히 자신을 좀먹어가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다가오는 그 순간에 자신의 숨이 꺾이기를 바랐다.'

안 그러는 사람도 있다지만, 상호는 소설을 읽으면 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그 순간 병찬이 썼던 소설의 그 문장이 떠올랐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병찬의 모습이 그가 그 문장을 읽으며 떠올렸던 등장인물과 똑 닮아있던 탓이다. 닮아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상상일 뿐인데, 상호는 어렵지 않게 병찬과 그를 매치시킨다. 그 등장인물이 어땠더라.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사고로 그 재능을 빼앗겼고 그리하여 우울증에 걸린 그는….

시계 초침이 흘러간다. 병찬의 얼굴에 우울함이 뚝뚝 묻어나온다. 아, 상호는 이 모습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모습이 더 익숙했다. 계약이나 얼굴 맞대고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그렇게 마주한 병찬의 모습. 웃어 보이면서도 눈가에 묻어나오는 음울함이 숨겨지지 않았던 그 모습.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이 있는 것은 놀랍지 않았으나 그의 우울은 숨겨지지 않아 그 자신에게 처연함을 더해주는 요소였다.

시계 시침이 12시에 가까워져 간다. 이제 병찬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호는 익숙하게 작가님? 하고 부르다 병찬의 시선이 제게 닿자 급히 병찬 씨. 라고 바꿔 불렀다. 병찬이 웃는다. 이 웃음도 익숙했다. 아니, 익숙했을까? 무대 위에서 보았던 그 웃음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못해 비참할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상호가 아직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의….

상호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본다. 시침과 분침, 초침이 모두 겹치는 그 순간 병찬이 고꾸라진다. 상호는 일어나서 병찬을 살폈다. 병찬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괴로워했고, 그리고 제 목을 쥐어 잡고 있었다. 상호는 급하게 그 손을 떼어낸다. 어느새 긁은 모양인지 생채기가 나 있었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매끈하던 병찬의 목에 서서히 흉터가 새겨진다. 마치 무언가에 그이듯이 나타나는 흉터는 마치 병찬을 좀먹는 것만 같았다. 병찬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짧다. 이어 나타나는 것은 아주 깊고, 질척거리는….

 

"...병찬 씨."

 

상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병찬은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신음 하나 내지 못했다. 상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소리를 낼 방법이 없으니까. 색색 내뱉는 숨소리가 거칠다. 병찬은 덜덜 떨면서 울었다. 상호는 망연자실하게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병찬을 꾹 안아주었다. 힘없이 축 처진 몸이 저항 없이 기댄다.

 

 


 

 

20살 봄, 처음 사고가 나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이 났을 때 병찬은 이미 유명 스타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수많은 기사가 병찬의 이야기를 떠들었다. 반짝이던 별의 추락, 비운의 천재, 안타까운 일. 다들 그럴듯한 수식어들을 붙여대며 기사를 낼 때 병찬에게 가장 와닿았던 수식어는 하나였다.

신의 장난.

신에게 사랑받는 재능이라 추앙받던 그가 한순간 신에게 버림받은 꼴이 되었으니, 신이 정말로 있다면 꽤 변덕스러울 것이라고. 병찬은 병원 침대에 누워 생각했더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병찬의 기타 실력 역시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러니 기타리스트로도 활약할 수 있었겠으나 그는 노래 역시 사랑했으므로 기타마저 버린 채 밴드 계를 떠났다. 무대 위에만 서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 괴로웠고 제 앞에서 신난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보컬을 보면 이를 악물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 밴드 할 줄 알고 공부는 손도 안 댔다. 그래도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 했기에 병찬은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많은 게 불가능했다. 우울함이 저를 좀먹는 것이 느껴졌다. 병찬은 살고 싶었고 동시에 죽고 싶었다. 하여튼 당장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병찬이 선택한 것은 의외로 글이었다. 제 속에 쌓인 충동을 풀어내고 싶어 가상의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이 고통받게 하는 것으로 제 고통을 덜어냈다. 자기 파괴적 충동을 털어냈을 뿐인 그 글은 우연히 흐름을 타 유명해졌고 병찬에게 소설가로서의 제의가 들어왔다.

병찬의 문장이 매끄럽진 않았으나 병찬의 글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그리 말하는 것에 병찬은 글을 쓰기로 했다. 뒤늦게 작법서 같은 것들을 샀고 블로그에 올린 글을 다듬어 원고를 보냈다. 많은 수정이 있었으나 기어코 멀쩡한 책 한 권을 낼 수 있었을 때.

사고를 당한 지 1년 뒤. 정말 우연하게도 병찬은 책상에 무릎을 박았고 자기도 모르게 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사고가 난 뒤론 어떻게 해도 목만 아프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는데. 병찬은 꿈만 같은 상황에 엉엉 울면서 부모님에게 전화했다. 나 목소리가 나와요. 과거가 생각나 차마 연락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일일이 전화를 걸면서 기쁨을 나타냈다. 우리 나중에 술 한잔하자. 온갖 약속을 잡으며 병찬은 뒤늦게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일찍 잠든 날. 날카로운 고통에 깬 병찬은 제 목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꼈다. 이 고통을 병찬은 알고 있다. 제가 다쳤을 때, 날카로운 파편이 제 목을 갈가리 찢어버릴 때의 그 고통. 병찬은 고통에 허덕이며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나오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숨소리뿐이었다. 병찬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제 목소리가 다시 사라졌다.

1년 뒤. 다시 4월 1일. 병찬은 일어나며 작게 앓는 소리를 내다가 다시 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마치 다치기 전과 같은 목소리. 병찬은 그제야 깨닫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고가 난 날에만 멀쩡하게 나오는 목소리라니. 병찬은 그때 처음으로 신을 믿었다. 그리고 그 신을 갈가리 찢어버리고만 싶었다. 어째서 제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병찬은 소리 내 울었다.

 

그다음 년도에는 4월 1일에 공연을 잡았다. 작은 라이브 공연장이었고 병찬은 목에 붕대를 감고 웃는 얼굴로 그들과 함께 연습했다. 그들은 목을 다친 병찬이 보컬을 한다는 것에 미친놈 보듯 했으나 병찬이 보상으로 제시한 돈은 꽤 높았기에 뒤에선 그를 씹어도 적당히 맞춰주었다. 어차피 대단한 공연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병찬은 만우절 날 거짓말처럼 멋진 공연을 했다. 꽉 차지도 않은 공연장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병찬이었다. 병찬은 소리높여 노래하며 생각했다. 차라리 오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야 했다고.

 

 


 

 

[...그래서 그 뒤로 계속 공연하고 계신 거군요.]

[그렇죠. 너무 길었나요?]

 

짧지는 않았지. 박병찬은 긴 이야기를 들려…. 아니 써주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알려주었고 연차를 미리 내지 못한 기상호는 회사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아마 어제 병찬이 쓰러지는 것을 보지 못했으면 여전히 믿지 않았겠으나 이제는 알았다. 병찬의 서류에 적힌 나이는 22살. 그 이후 8년간 우리 회사와 계약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일 년 중 단 하루만을 위한 공연을 한 것도 딱 그쯤이라는 거다.

병찬의 소설에는 언제나 불가항력으로 불행해지는 등장인물이 등장했다. 초반의 소설에선 그들이 주인공이었고 근래의 소설에선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그들. 그들은 박병찬의 에고였을까. 그들에게 가해지는 불합리한 고통에 병찬은 언제나 신의 변덕, 신의 장난 따위의 말을 붙였다. 그것은 이제 병찬의 시그니처로서 존재했다. 상호는 그 시그니처를 이해한다.

하지만 하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상호는 다시 스케줄러를 확인했다. 오늘 저녁에는 시간이 없었다.

 

[내일 저녁에 혹시 집에 놀러 가도 될까요?]

[중요한 걸 물어보고 싶으신가 봐요.]

[네, 메신저로 주고받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술 사 오세요. 도수는 낮은 걸로. 술 약하시잖아요.]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병찬 씨.]

[내일 뵈어요. 상호 씨.]

 

 


 

 

상호는 와인 몇 병을 들고 다시 병찬의 집으로 갔다. 안줏거리도 사 오라고 덧붙인 것에 다른 손에는 치킨이 들려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병찬이 문을 열어주었다. 슬쩍 눈으로 훑으니 그새 조금 어질러진 것이 보였다. 그 시선에 병찬이 작게 웃었다. 봄이 오는데 병찬은 시들어갔다. 상호는 눈을 내리깔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먹을거리를 세팅하고 전처럼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술 몇 잔을 주고받으면서 침묵이 이어진다. 여기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상호뿐이었다. 병찬이 제 휴대폰을 들었다.

 

[뭐가 궁금하셨어요?]

"...왜 저한테 티켓을 주셨습니까?"

 

병찬의 손이 멈춘다. 다시 말해 침묵했다. 병찬은 무언가를 쓰다마다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휴대폰을 든 손을 내렸다. 그리고선 병나발 하나를 불었다. 도수 낮은 와인을 꿀꺽꿀꺽 마셔대는 꼴 멍하게 보다가 입을 떼면 사 온 치킨 한 조각 입에 넣어줬다. 병찬은 우물거리며 받아먹었고 상호는 그냥 얌전히 기다렸다.

와인 반병과 치킨 세 조각을 끝장낸 병찬은 다시 휴대폰을 들려고 했다. 상호는 그것을 보고 급하게 손을 잡은 다음 마침 근처에 있는 물티슈를 꺼내어 기름진 병찬의 손을 닦아주었다. 병찬은 얌전히 그걸 당하고 있다가 웃었다. 깔끔히 닦아주고 나서야 손을 놔준다. 병찬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저한테 잘해주셔서요.]

"제가요?"

[요즘 세상에 작가가 마감 안 된다고 찾아와서 집 다 치워주고 밥 먹여주는 편집자가 어딨어요.]

"작가님이(여기서 병찬이 째려봤다) 그. 병찬 씨가 연락이 뜸하셨잖습니까. 잠수타시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지각은 해도 잠수는 안 탔잖아요.]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겠습니까…."

 

투덜거리는 말에 병찬이 웃는다.

 

[어쨌든 고마웠으니까 뭐라도 보답을 해줘야겠는데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거라도 드렸어요. 싫었어요?]

"...음, 솔직히. 그땐 좀 곤란했는데…. 병찬 씨 공연 보니까 좋았습니다."

[그럼 이제 저도 좀 물을 게 있겠는데요.]

"뭡니까?"

[제 뒤는 왜 캐셨어요?]

 

이제는 상호가 침묵했다. 웃음기 남아있는 얼굴로 저를 뻔히 보는 병찬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단 하루뿐이어도 공연을 할 만한 인맥은 있었을 것이고 한 명쯤은 병찬을 궁금해하는 외부인의 말을 전해주었을 수도 있지. 상호는 눈을 깔았고 병찬은 채근하지 않는다. 상호는 대답해야 했다. 느릿하게 심호흡을 한 상호가 고개를 올려 병찬을 본다.

 

"병찬 씨가…. 먼저 저한테 보여주셔놓고 아무것도 말 안 해주셨잖습니까."

[제 탓이에요?]

"...네. 이건 병찬 씨 탓입니다. 안 말해주실 거면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도 안 보여주셨어야죠."

 

맹랑하다 못해 우스울 법한 말인데 병찬은 그냥 웃었다. 색색 숨소리가 난다. 상호는 이제 그의 웃음소리를 알아서, 그가 어떻게 웃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병찬이 눈을 반짝인다.

 

[미안하다고 할까요?]

"아뇨, 어쨌든 뒤를 캔 건 잘못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래요.]

"그래도 궁금한 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요?]

"지금 제가 묻는다고 다 말해주시는 이유는 뭡니까? 남들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셨잖아요."

[상호 씨가 특별해서 그런가?]

"네?!"

[대외적으로 소설가인 저를 아는 와중에 제집까지 쳐들어온 것도]
[그 뒤에 아무렇지 않은 것도 상호 씨가 처음이었거든요.]
[그래 놓고 제 공연 보더니 제 뒤 캔 건 처음이 아니긴 한데]
[캐놓고 얌전히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고요.]
[얌전하다 싶었더니 기어코 절 기다린 사람도 처음이고]
[그냥 다 처음이라서 저도 처음으로 말해보고 싶었나 봐요.]

 

병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호에게 가까이 붙는다. 어쨌든 마셨던 것은 술이고, 병찬은 상호가 술이 약하다는 듯이 말했으나 병찬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느새 휴대폰은 내려놓고 있었고, 상호와 병찬은 마주 본다. 병찬의 입술이 움직인다.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능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상호는 병찬이 하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이런 것도 처음이야.

상호는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는다.

 

 


 

 

병찬은 여전히 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은 하나같이 음울했으며 여전히 신에게 버림받은 천재들이 등장했다. 상호 역시 그의 담당 편집자로서 계속 일했다. 둘의 사이는 변했다. 여전히 동거는 하지 않았으나 상호는 자주 그의 집에 들러 청소를 해주고 그를 챙겼다. 가끔 방에 처박혀있고 싶어 하는 그를 달래어 항상 가는 상담을 기어코 보내는 것도 상호의 몫이었다. 약을 잘 챙겨 먹나 일일이 체크를 하는 탓에 병찬은 전처럼 약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3월이 되면 상호는 병찬의 집에서 그냥 살았다. 출근하면서 그가 먹을 것을 만들어두고 퇴근하면 그의 집을 치웠다. 애초에 글을 쓴다고 책상 앞에서 사는 인간이라 쓰레기만 치워주면 얼추 사람 사는 꼴은 유지하기 쉬웠다. 그렇게 품을 들이면 마감은 빨라졌고, 그러면 남는 시간에 그는 기타를 연습했다. 이제 상호는 밴드 계에서 운 좋게 그 전설의 박병찬의 마음에 들어 매니저 일을 하는 일반인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4월 1일에는 공연했다. 병찬은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그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상호는 익숙하게 캠코더를 꺼내어 그 모습을 찍는다. 캠코더 속의 병찬이 상호를 쳐다본다. 웃는 얼굴로 제게 브이를 해 보이는 병찬을 보며 상호도 웃었다.

 

그렇게 공연을 끝나면 집으로 돌아온다. 11시가 넘고 12시가 다가오면 병찬은 상호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곧 있으면 올 고통은 익숙해질 방법이 없어서, 병찬은 작게 떨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꾹 안아주며 등을 도닥인다. 모든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는 순간 병찬은 언제나처럼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상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헉, 흑. 숨을 들이켜는 소리 속에서 병찬이 울음을 내뱉는다.

그 고통을 간신히 견디고 나면 남는 것은 또다시 버림받아 부스러진 천재뿐이라. 병찬은 상호에게 조금 더 파고들고, 조르듯이 상호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병찬은 이 순간 가장 외로워했다. 상호는 그가 외롭지 않길 바랐다. 그리하여….

 

겨우 잠든 병찬에게 꼼꼼히 이불을 덮어준 상호는 생각한다. 신은 아마 병찬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죽기를 바랐다면 만우절 날에만 찾아오는 기적조차 없었을 테니까. 상호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기적은 병찬을 죽이면서 살렸다. 단 하루의 부활을 위해 병찬은 지난한 시간을 버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기적같이 네가 찾아왔노라고. 병찬은 상호에게 말했다.

상호는 그 말을 들으며 기분 좋게 웃었으나, 글쎄. 상호는 제 존재조차도 병찬을 위한 장난질 같았다. 신은 병찬이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고 고통받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병찬을 알아갈수록 병찬이 고작 처음이라는 이유로 그리 쉽게 옆을 허용해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병찬이 상호를 받아준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상호 같은 구원자를 내내 바랐고, 마침 상호가 그가 버틸 수 없어지기 전에 그의 삶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운명일까? 글쎄….

병찬의 소설 속에서 병찬과 같은 등장인물은 기어코 저를 그 우울의 세계에서 꺼내주는 사람을 만났다. 세간의 완벽한 행복은 아니었으나 그 등장인물은 그것마저 기꺼워하며 끌어안았다. 그것을 보며 상호는, 그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상호는 고개를 내려 병찬의 짓무른 눈가에 입을 맞춘다.

여전히 소설 속 그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당신의 최선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불행 속에 잠겨주어야겠지. 사랑한 값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상호는 그것에 순응하기로 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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