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개화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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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찬은 쓸데없는 잡기들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은 행운을 불러오는, 행복을 주는, 소원을 들어주는 따위의 상술 가득한 잡기들을 좋아했다. 정작 자기 것은 안 사고 남에게 선물했다. 너 이걸로 좋은 일 생기면 갚아~ 같은 말이나 하면서. 어디서 들은 건지, 이번에 가져온 것은 꽃봉오리가 난 선인장 화분 하나를 가져왔다. 선인장 꽃이 피면 소원을 들어준대. 그리 말하면서 병찬은 상호에게 화분을 주었다. 왜 주는 거예요? 라고 물어보면

 

"나 식물 잘 못 돌봐.“

 

저라고 잘 돌보겠나요... 싶었지만 상호는 그냥 받았다. 병찬이 준 거니까.

 

그날부터 선인장 관련한 정보를 이 잡듯이 뒤졌다. 물을 적게 주는 게 자주 주는 것보단 나은데 식물답게 한 번에 많이 주면 또 문제란다. 그래도 짐작대로 그리 까다롭진 않아서 상호는 그 선인장을 키웠다. 꽃봉오리가 달려있으니 금방 피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선인장마다 달라서 잘 안 보살피면 꽃봉오리가 열리기도 전에 떨어지거나 할 수 있단다. 닫힌 상태로 평생 그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봤을 때는 솔직히 심장이 좀 덜컥거렸다.

그래도 기상호는 선인장을 잘 키웠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고 꽃봉오리도 잘 달려있었다. 가끔 상호의 자취방에 놀러 오는 병찬은 선인장을 볼 때마다 아직 안 폈네? 라고 말하곤 했고 상호는 그러게요. 라고 답했다. 병찬은 뒤늦게 생물을 맡겨버린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라도 차려보려는지 물을 주려고 하는 것에 며칠 전에 줬으니 주지 말라고 말린 게 몇 번이다. 많이 주면 좋은 거 아니야? 라고 말하기에 왜 저한테 맡겼는지 짐작이 됐다. 잘못하면 꽃 떨어져요. 라고 하니 그제서야 입을 삐죽이며 그만 뒀다. 그래도 가끔은 물주기를 탐내서 기어코 몇 번은 맡겼다. 고작 물을 주는 일인데 뿌듯해보이는 얼굴이 예뻐서 상호는 그냥 웃었다.

 


 

몇 달이 지나도 꽃봉오리는 열리는 기미가 없는데 병찬과 상호의 관계는 많이 변했다. 화분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상호의 짝사랑이었는데 화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찬의 고백으로 사귀게 됐다. 기상호의 생일이 이틀이 지난 뒤 였다. 둘은 잘 맞느냐고 하면, 그렇게 잘 맞는 커플은 아니었다. 다만 상호가 병찬을 좋아하니까 안 맞는 부분을 선선히 깎아냈다. 참는 건 아니었다. 병찬이 하자고 하면 좋아서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병찬의 친구 모임에 끌려가기도 했고 팔자에도 없는 스티커 사진은 데이트마다 찍어서 앨범을 샀으며 의외로 단 것을 좋아하는 병찬 덕에 초콜릿 뷔페 따위를 가서 얼마 못 먹고 나오기도 했다. 근데 그때마다 병찬이 환하게 웃어서 그냥 했다. 병찬도 상호가 그러는 거 뻔히 아는데 자기 좋다고 해주는 게 좋아서 그냥 했다.

그리고 작살나게 싸웠다. 싸움은 병찬이 보통 시작했다. 너는 왜 나보고 뭐 하자고 안 해.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바라? 상호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상호도 병찬에게 요구하는 거 많았으니까. 뭔 이상한 코스프레 해달라고 하고 밤에 잘 때마다 하지 말라는 거 꾸역꾸역해댔는데 뭔 소리지 싶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병찬이 해댔던 사랑을 시험하는 짓거리를 상호는 왜 안 하냐는 거였다. 자기만 요구하니까 나쁜 사람 된 것 같다고. 상호는 처음으로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애구나 싶었다. 자기만 하기엔 양심도 찔리는 모양인데, 상호는 병찬에게 그랬다간 어떤 일이 생길지 짐작이 갔다. 아마 한동안 삐져서 말도 잘 안 걸어줄게 뻔하다. 그래도 남한테는 이렇게까지 애처럼 안 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만 모르는 모습을 본 것 같아서, 그게 좀 즐거웠다.

 

어쨌든 사람이니 말로 풀어야 했다. 상호의 사랑의 방식은 병찬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게 아니고 병찬의 방식은 상호를 시험하는 거 였다. 한참 주고받으니 그래도 풀렸다. 어른이니까. 상호도 그 뒤로 나름 병찬을 곤란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병찬도 예전보단 좀 덜했다. 괜찮았는데. 어쨌든 병찬이 안 한다는데 해도 된다고 하는 꼴도 웃겨서 상호는 그냥 아무 말 안 했다.

 

선인장은 계속 꽃을 피우지 않았다. 상호가 지극정성으로 키우니까 때깔은 고운데 꽃은 안 열렸다. 어디서 찾아보니 선인장이 꽃을 피우면 죽는다던데 그 정보를 알고 나니 상호는 어쩐지 꽃이 피지 않았으면 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는 빨리 꽃을 피워서 병찬햄 앞에 갖다 놓고 어서 소원 빌어보라며 말 하나 더 붙일 생각이었는데 이제 선인장에 너무 정이 들어버렸다. 이름도 정 없이 소원이라고 붙여놨는데 더 예쁜 이름 붙여줄 걸 그랬다.

병찬은 이제 선인장에도 삐죽거렸다. 너 나보다 걔한테 더 지극정성인 것 같아. 상호는 또 뭔 소리지 싶었다. 선인장에 정이 든 건 맞는데 영양제 꽂아주고 물 필요한 만큼만 주고 흙 안 굳게 부숴주면서 항상 채광 좋은 자리에 내놓고 가끔 먼지 닦아주는 거 별거 아니다. 기껏 해봤자 가끔 20분 정도 신경 쓰나? 병찬은 툴툴거리며 말했다. 너 선인장 볼 때 나보다 더 멜로눈깔인 거 알아? 상호는 좀 어이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그거 아닌가? 하루에 선인장 얼마나 쳐다본다고... 상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니라며 병찬을 꾹 안아주었다. 병찬은 몇 번 더 툴툴거리다가 맘이 풀렸는지 예의 쾌남 미소 지으면서 넘어갔다. 점점 더 애 같아지는 애인을 보며 상호는 한숨을 삼켰다. 이러는 모습이 익숙해져가는 걸 느낀다.

 

그러니까, 사랑하면 사람이 변한다. 상호도 안다. 친한 사이에서는 좀 어리게 행동하게 되는 거. 희찬이나 다은 앞에서의 상호도 자주 그랬다. 잉잉거리면서 애교떨고 치대고. 병찬은 처음엔 안 그러는 것 같더니 갈수록 애같이 굴었다. 고집부리고 떼쓰고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고. 그러다가도 가끔은 또 어른처럼 굴려고 했다. 상호에게 문제가 생기면 공감하고 들어주고 조언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그게 좋았는데. 우습게도 상호한텐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파악 끝난 것엔 관심이 안 갔다. 더이상 추측이 아니라 예측을 할 수 있는, 파악하지 못한 미지가 없는 상대는 흥미를 끌 수 없다. 이제 기상호는 박병찬의 모든 면모를 알았다.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까지 다. 박병찬은 더 이상 상호의 흥미를 끌 수 없었다. 너무 잘 알아버렸으니까. 이제 상호는 병찬에게 궁금한 것이 없었다.

병찬도 기민한 사람이다. 상호가 더이상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자기에 대해서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것도 알았다. 근데 그게 문제가 되는 줄은 몰랐다. 애초에 그렇지 않나. 알 만큼 알고 나면 그다음은 적당히 그 안정감에 안주하면서 사는 거지. 이 사람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고 이미 아는 것을 편하게 대하면서 사는 거 아닌가. 병찬도 상호를 알 만큼 알았다. 이제 둘은 싸우지도 않는다. 서로의 선이나 성향을 너무 잘 알아서. 병찬은 이게 이상적인 연인 관계 아닌가? 싶었다.

 


 

근데 상호는 아니었다.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관계는 재미가 없었다. 친구라면 소소하게 모르는 부분 남겨둘 수도 있고 애인한테 영향 받아서 변하는 모습도 보고 그러는데 병찬은 의외로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변하는 부분은 상호가 다 바꿔놨다. 병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상호였다. 그게 재미없었다. 상호는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놓았다. 이걸 다시 마음대로 바꿔놔도 그건 상호가 다 짐작할 수 있는 범위 내다. 그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와 같이 별일 없이 흘러가던 날. 상호는 짐을 쌌다. 그때는 마침 병찬이 원정경기가 있어서 멀리 나갔을 때였다. 큰 박스를 가져와 자기 물건 다 실었다. 추억이라고 쌓아놓은 앨범은 쓸데없는 향수만 남기겠지 싶어서 자기가 다 가져갔다. 이곳저곳 올려진 액자도 다 챙겼다. 병찬이 지갑에 저랑 찍은 스티커 사진 넣고 다니는 거 알았는데 그건 어제저녁 취침 시간에 슬쩍 빼뒀다.

모든 흔적을 싹 빼고 나니 집이 좀 널널했다. 그대로 차에 실었다. 가구는 버리고 가다 보니 짐이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캐리어에 남은 잡기들 몰아넣는데 문득 선인장이 보였다. 저것은 상호의 것이다. 병찬마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상호는 선인장을 한참 쳐다보았다. 병찬과 동거를 하기 시작할 때 혹시나 다칠까 봐 품에 꼭 안고 차에 탔던 게 기억이 났다.

그래서 상호는 선인장을 놓고 가기로 했다.

 

카톡이나 전화로 헤어지는 개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던 상호는 그냥 얌전히 기다렸다. 소식을 보니 병찬의 팀이 이겼단다. 진 후에 말하면 좀 그랬을 텐데 이겼다니 다행이었다. 회식을 하고 온다길래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일찍 와줄 수 없냐고 물었다. 병찬은 좀 곤란해하다가 지금 말하면 안 되냐고 했다. 그래서 상호는 좀 고민하다가 진짜 말할게요? 라며 확인을 받았다.

 

"저희 헤어져요."

"뭐?"

"짐 다 뺐어요. 알아서 나갈게요. 잘 지내세요."

"상호야, 잠깐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형한테 뭐 실망하거나 화난 게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관계라는 게 원래 끝이 있잖아요. 지금인 것 같아서요."

"잠깐만. 나 지금 집에 갈게. 어? 집에 가서 얘기해."

"저 더 할 말 없어요. 연락 안 할 테니까... 형도 하지 마세요.“

 

상호는 연락을 끊었다. 음. 전화로 헤어지는 개자식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병찬의 얼굴을 보면 지진 부진 이어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끊어버렸다. 그대로 캐리어 끌고 밖으로 나갔다. 집은 이미 구해놨으니까.

 

상호가 나간 뒤 급하게 들어온 병찬을 반기는 것은 텅 빈 집 안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꼼꼼하기 그지없는 놈이 진짜 자기 흔적을 싹 빼갔다. 옷장의 3분의 1이 비었고 상호가 좋아하던 식기나 칫솔, 침대 시트 등이 사라졌다. 상호가 좋다며 만들어놓은 것은 없어지고 병찬이 제가 마음에 든다고 가져다 놓은 것들만 남았다. 온전히 병찬의 집이 된 것이다. 병찬은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상호의 방을 열었다. 상호의 방은 정말 깔끔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병찬과 붙어있는다고 거의 쓰지 않던 침대와 책상도 밖에 내둔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부터 상호와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에게 다 연락을 돌려봐도 마찬가지였다. 상호한테 말 좀 하자고 전해달라고 해도 하나같이 안 된다는 답변만 받고 왔다. 그러면서 상호를 욕하는 걸 보니 아마 상호가 자기 탓이라 말한 모양이었다. 걔 탓 맞지. 근데...

한 일주일 붙잡고 있다가 병찬은 포기했다. 그래, 헤어졌는데 미련 가지는 것도 웃겼다. 미련도 못 가지게 하려는 건지 상호는 둘이 찍은 사진 같은 것들도 싹 다 가져갔다. 홧김에 버리려고 지갑을 뒤적거렸는데 낡고 꼬질거리던 스티커사진이 없는 걸 알았을 땐 솔직히 좀 울 뻔했다. 기상호 이 미친새끼야... 병찬은 결국 술을 깠다.

버림받은 꼴도 웃기니까 잊으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 가져갈 거면 다 가져가지 망할 선인장은 놓고 갔다. 저 선인장을 빌미로 만나보려고 했는데도 안 된 걸 보면 버리고 간 거거나 만나기 싫어서 버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병찬은 어느 날 울컥 했을 때 그 화분을 들고 던지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선인장을 애정 담긴 눈으로 쳐다보던 상호가 생각나서 그만뒀다. 선인장을 왜 그렇게 애틋하게 보냐고 했었는데. 뻔히 저를 더 사랑한다는 얼굴로 보는데도 그 하나의 애정이 샘이 나서 투덜거렸던 것이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더라.

다시 원래대로 두려는데 화분 있던 자리에 종이가 있었다. 보니 선인장 키우는 법이다. 아, 진짜 놓고 간 거구나... 상호가 왜 이 선인장을 예뻐했는지 가끔 말했다. 병찬햄이 피우면 소원 빌게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햄 소원 들어드리고 싶었어요. 그럼 안 가져간 건 이제 나는 알 바가 아니어서 그런가? 한 번도 울지 않았던 병찬은 그날 처음으로 울었다. 헤어지자는 소리도 듣고 짐도 다 빼지고 연락도 안 받는데, 그 모든 행동보다 이 화분 하나 안 가져간 게 그렇게 서러웠다. 얼마나 아꼈는지를 봐서 그런 것 같았다.

 


 

상호는 잘 살았다. 병찬을 차단은 안 했다. 대신 읽씹, 안읽씹,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로 일관했다. 주변 사람들 다 상호는 미친놈 보듯이 봤다. 왜 헤어졌냐고 물으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서 라고 답했으니까. 다 상호가 개새끼라고 했다. 맞는 말이라서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상대 속 다 까보는 연애는 처음인지라 자기도 이럴 줄 몰랐다. 상호도 사랑할 때는 평생 병찬의 옆에 있고 싶을 줄 알았다. 언제나 제게 미지의 궁금증을 안겨줄 줄 알았다. 근데 병찬도 사람이었다. 이미 헤어졌는데 어떡하나?

병찬도 잘 사는 것 같았다. 일주일 정도 얘기 좀 하자고 계속 전화 걸고 하더니 연락 뚝 끊기고 잘 사는 소식 들어왔다. 원래 병찬은 상호가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상호는 서운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인 거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연인으로서는 끊어졌지만 우습게도 상호는 아직 병찬의 팬이었다. 선수로서의 박병찬은 아직 다 보지 못했으니 그것에는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프로로 뛰는 병찬의 흔적은 모두 찾았다. 여전히 병찬은 잘 웃고 잘 뛰고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상호는 그게 좋았다. 그래서 병찬의 열애설이 떴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야, 그런 사람이면 사랑받는 거지. 축하한다는 연락은 안 보냈지만 마음속으로 축하한다고 보냈다.

 

헤어진지 일 년이 넘었다. 상호는 애인을 전혀 사귀지 않았지만 병찬은 그새 애인이 둘은 바뀌었다. 은근히 애 같은 사람이라 그런가? 그래도 못 받아줄 만큼은 아닐 텐데... 아니면 병찬이 변했을까? 상호는 어쩐지 그 부분이...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병찬에게 카톡이 왔다. 상호는 확인하지 말까, 하다가 이것도 꽤 신기한 변화다 싶어서 확인해봤다. 선인장 사진이었고, 꽃이 피어있었다. 아, 기어코 피었구나. 피어난 꽃은 생각보다 그렇게 예쁘진 않았다. 그래도 옆으로 좀 비껴서 난 분홍색 꽃은 사람 머리에 달린 것 같아서 좀 귀엽긴 했다.

조금 지나니 새 카톡이 왔다. [소원 빌러 올래?] 그 말에 왜 마음이 동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디냐고 물으니 이사를 했다고 해서 그 쪽으로 갔다. 꽤나 호화로워보이는 주택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누르니 문을 열어준다. 웃지 않는 병찬은 좀 오랜만이었다. 많이 지쳐 보이는 것도. 병찬은 인사도 없이 문만 열어주고 들어갔다. 상호는 조용히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식탁 위에 놓여진 선인장의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소원 어떻게 비는 거지? 속으로 비나? 상호가 그런 생각을 할 때에 병찬이 뒤를 돈다.

 

"소원 안 빌어?"

"아, 어떻게 비나 싶어서요."

"말로 해야지."

"그런가요.“

 

솔직히 소원을 빌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었다. 병찬을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었고. 그냥... 왜 왔더라. 조금의 의외성에 흥미를 가졌을 뿐인데. 상호는 선인장을 한참 내려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형이 행복하길 바라요.“

 

피어난 꽃봉오리에 내려앉는 것은 진심이다. 상호는 병찬의 불행을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병찬이 옆에서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에 붙어있으면 알게 된다. 옷, 취향이 바뀌었다. 향수도 냄새가 바뀌었고... 주름이 좀 더 깊어진 것 같은데. 피부는 좀 더 거칠어졌네. 다크서클도 좀 생겼고... 근육, 좀 빠졌나? 상호가 손을 들어 병찬의 허리를 감싸 쥔다. 병찬은 흠칫거리며 상호를 팍 밀쳤다.

상호는 별 다른 생각 없이 병찬을 마주한다. 병찬의 눈 속에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분노, 원망, 미움, 그리움, 절박함, 미련... 상호는 눈을 깜빡인다. 그동안 병찬이 가진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 번도 저를 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싸울 때 마저도 병찬은 노려보면서도 과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했었다. 지금의 병찬은 가감없이 자신의 감정을 내보인다. 상호의 눈이 반짝였다. 병찬은 그 눈을 마주하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호가 병찬을 안 만큼 병찬도 상호를 알았다. 저 표정이 언제 나오는지 알았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다 아시잖아요."

"이제 와서?"

"이제야, 죠.“

 

병찬은 다시 상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다른 이의 흔적이 잔뜩 묻혀지고 상호로 인해 비틀려 새로운 모습이 생겼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다시 파헤치고 싶었다. 제게 상처를 입으셨잖아요. 얼마나 입었나요? 다 나았을까요? 흉터가 있을까요. 나를 얼마나 미워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저를 얼마큼 사랑하고 계세요? 상호는 병찬이 그것을 쉽게 내놓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런 것이야 말로 상호가 사랑하는 것이다. 상호의 얼굴에 익숙한 감정이 떠오른다.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상호를 보고 병찬은 처음으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병찬은 물러서지 않았고... 기어코 상호가 내민 손에 붙들렸다. 기껏 개화한 선인장의 꽃이 그 순간 툭, 떨어졌다. 둘 다 그것이 소원을 빌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원은 죽는다. 꽃을 피우고 떨어트린 선인장도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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