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헤어짐 연습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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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헤어지는 연습 쪼매 하까요?“

 

상호는 사귄 지 석 달이 되던 날. 뜬금없이 저런 말을 했다. 병찬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서 상호를 빤히 쳐다봤고 상호는 마치 내일 뭐 먹을지를 물어본 것 처럼 굉장히 평화로웠다. 잘못 들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 상호는 눈을 마주한 채로 슬쩍 웃어 보였다.

 

"헤어지는 연습 하는 거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헤어지는 연습이 뭐야?"

"짧게 헤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거요."

"예를 들면?"

"뭐... 일단 연락 서로 차단하고 술도 좀 먹고... 서로 생각 안 하고?“

 

상호와의 연애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순탄했으나 가끔 알아듣지 못 할 말을 내뱉을 땐 마냥 난감해지곤 했다. 그래도 대부분은 그냥 알아듣는 척 하거나 적당히 맞장구쳐주면 이해 못했거니 하며 넘겨주곤 했는데 이건... 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헤어지는 연습이라니... 그런 거 보통 야생동물 방사하기 전에 쓰는 말 아닌가? 병찬은 이해 못할 연인을 한참 쳐다보다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음...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지?"

"엥? 전혀요. 가능하다면 햄이랑 평생 사귀고 싶은데요."

"근데 왜 갑자기 연습을 해?"

"그야 가능하다면 이고, 만약 그런 순간이 오면 엄청 힘들 것 같으니까 미리 연습해두고 싶어가꼬.“

 

너는 그걸 사귄 지 세 달 만에 하니... 보통은 영원을 약속하지 않나? 물론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그저 사랑에 빠져서 좋을 대로 내뱉는 허황한 약속임을 병찬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하는 이유가 뭐겠나. 그게 애인 사이라는 거니까. 대뜸 헤어질 연습을 하겠다는 연인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병찬이 난감함과 어이없음을 지우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니 상호는 슬 웃기만 하며 대답을 기다린다.

한참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병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뭔진 몰라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 연습이라고 했으니까. 뭐 이 녀석이 이상한 짓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어쩌고 싶은지를 물으니 일단 처음이니(그럼 다음이 있다는 뜻이냐고 물으니 웃기만 했다) 간단히 사흘 동안 연락을 하지 말자고 했다. 사흘이야 뭐. 훈련을 하다 보면 쉽게 넘어가는 일수다. 알겠다고 말한 뒤 둘은 그날부터 헤어짐을 연습했다.

 

헤어짐의 연습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둘은 자주 놀러 다니는 커플이 아니었으니까. 운동선수라는 게 그렇지. 심지어 둘은 같은 대학이 아니었다. 원래도 시간 쪼개서 연락을 하던 사이라서, 병찬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다음 날부터 깨졌다.

아침에 당연하다는 듯이 오던 상호의 아침 인사 카톡이 없었다. 그 카톡을 확인하는 것이 병찬의 하루 루틴의 시작이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카톡방에 들어가니 어제 만나기 전에 어디냐고 물어본 카톡이 마지막이었다. 덜 깬 눈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굳은 머리를 굴리던 병찬은 뒤늦게서야 어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 헤어지는 연습 중이었지. 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려니 싶어서 커플 프사나 배경 화면도 다 내렸었는데. 새삼스레 헤어지면 이렇게 되는 건가 싶어 가슴이 좀 술렁였다. 뭐 어차피 연습이니까... 병찬은 어제에서 멈춘 카톡방을 한참 쳐다보다가 그냥 씻으러 일어났다.

훈련이나 강의를 하는 와중에 병찬은 가끔 휴대폰을 확인하려다 내려두었다. 자기도 훈련으로 바쁠 텐데 길지 않은 사이사이에 보내던 카톡이 없었다. 그 카톡을 너무 오래두고 싶지 않아서 중간중간 확인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건 어쩐지...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헤어진다는 건 이런 거구나.

훈련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생겨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자기 전에 항상 했던 통화도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루틴이 아니어서 그런가, 영 잠이 오지 않아 병찬은 그날 밤 잠을 설쳤다. 그 상태로 피곤하게 일어나서 확인한 상호와의 카톡은 이틀 전을 가리키고 있다. 얜... 괜찮나? 나만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가? 솔직히 받아들이면서도 저를 아주 좋아하는 상호니까, 못 버티고 먼저 연락하겠지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괜히 싱숭생숭했다. 그러다가도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다. 어린애를 상대로 이겨 먹고 싶은 건 아닌데 못 참고 찡찡거리는 건 좀 자존심이 상하잖아. 애도 참는데.

 

기어코 사흘을 참아낸 병찬은 나흗날 아침 그동안 연락 못해서 죽을 것 같았다며 한참을 찡찡거리는 장문의 카톡을 보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헤어지는 연습일 뿐임을 계속 상기 시켜야 할 만큼 긴장을 했던 탓이다. 그동안 소소한 마음 앓이를 한 병찬은 그것을 보고 조금 삐죽거리는 마음이 솟았으나 그를 넘어서는 안심이 있었기에 저도 그동안 상호가 없으니 심심했다는 카톡을 날려주었다. 그러자 상호가 더 많은 카톡을 보내며 애교를 부리기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뭐, 헤어지지 말아야지. 라고 느끼기엔 꽤 좋은 경험으로 치고 말이다.

 


 

하지만 상호의 헤어짐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상호는 그 이후로도 자주 병찬에게 헤어짐을 연습하자고 말했다. 처음엔 사흘, 그다음은 일주일, 몇 번 후에는 이 주 동안, 나중에는 한 달. 점점 시간이 늘어났으나 그 연습은 언제나 둘이 매우 바쁠 시기에 이루어졌기에 병찬은 이 헤어지는 연습이 그저 바쁠 때 연락을 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가 싶었다. 왜, 너무 바쁘면 아무리 사랑하는 애인의 카톡이라도 피곤할 때가 있으니까. 그런 의무적인 연락을 굳이 하지 말라는 건가 싶어서. 가끔은 이 연습 덕에 너무 피곤해 연락할 기력도 없을 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편했다.

이제 병찬은 상호가 헤어짐을 연습하자고 말을 꺼내도 놀라지 않았다. 일정을 확인하고 언제쯤, 그리고 얼마나 할 것이냐고 물은 뒤 기간을 확인했다. 어느 날은 심심풀이 삼아 전남친처럼 자니? 를 보냈더니 상호가 안 자요. 라고 해서 밤새도록 진짜 전 애인이 된 것처럼 구질구질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장난을 쳤더니 다음 연습에선 상호가 먼저 하더라. 며칠 씹다가 너 나랑 헤어졌잖아. 했더니 상호가 구질거려서 크게 웃었다.

평탄한 연애의 긴장감일까. 병찬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다.

 

병찬은 한 번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라는 것은 유통기한이 있기 마련이다. 10년 사귄 친구와도 연락이 끊기면 남남이 된다. 연애 관계라는 것도 그렇다. 뜨거울 수 있는 기간이 지나면 답은 두 개 뿐이다. 헤어지거나, 인생의 동반자 겸 서로 특별 취급해주는 친구 같은 관계가 되거나. 병찬은 후자의 관계가 될 용의가 있었다. 전보다 뜨겁지는 않겠지. 그래도 상호랑 함께하는 것은 재밌으니까.

 

"병찬햄."

"응?"

"이번엔 기한을 두지 말고 연습해볼까요?“

 

병찬은 그 말을 알아듣는다. 그렇기에 머뭇거렸다. 왜? 나한테 질렸을까. 그렇다면 그저 헤어지자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상호의 마음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물어보는 건 어쩐지 겁이 났다. 그래도 연습이라는 말로 정의해놓으면 언제든 그것을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자세히 따지고 들으면 그런 허울조차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입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병찬의 허락이 떨어지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을까? 하지만 연습은 시작됐다. 상호가 먼저 자리를 떠난다. 병찬은 그 뒷모습만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한 없는 연습은 이제까지와 다를 것 없었다. 여전히 연락을 안 하고 약속을 따로 잡지 않고 서로의 삶을 살아갈 뿐인...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연습이라고 해서 그런가, 병찬은 이 상태가 와닿지는 않았다. 둘은 정기적으로 이런 기간을 가졌으니까. 석 달이 넘어도 그저 연습이 길어지는 것 뿐인, 별것 아닌 일로 느껴졌고 어느새 상호와 얼굴을 보고 카톡을 주고받은 지 여덟 달이 지나도 그랬다.

이대로 평생 지내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냥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계속 헤어짐을 연기하고 있을 뿐인 걸까. 상호가 말한 의도는 전자였을까?

그런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어느 날 들린 상호가 선을 봤다는 소식에 깨진다. 그래, 병찬은 그날 상호가 말한 것을 착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헤어지자는 소리였다. 병찬은 그 말을 확실히 알아들었고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상호가 선을 봤다고 하니 그것이 퍽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야, 어쨌든 네 말대로라면 우린 그저 연습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병찬은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며 고민하다가 기어코 카톡 하나를 보냈다.

 

[상호야. 연습 그만하자.]

 

확인도 하지 않았고, 답도 오지 않았다. 병찬은 가만히 기다렸다. 상호에게서 연락이 온 건 며칠 뒤였다. 딱 훈련이 끝나 숙소에서 쉬고 있던 시간대였고, 기상호 라고 적힌 전화번호에 병찬은 대충 슬리퍼를 신고 나가 문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응, 상호야."

"연습 그만하고 싶으시다면서요."

"응. 그만하자."

"그만둬야 할 이유는 있었나요?"

"...기상호, 똑바로 말해.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

 

격양된 감정을 가까스로 내리누른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연습이니 뭐니 말장난을 할 거였으면 연습인 척이라도 했어야지. 이건 기상호가 먼저 선을 넘은 것이었다. 완전히 헤어지려고 했다면 차라리 헤어지자고 하던가, 그 말장난에 장단이라도 맞추고 싶었다면 실전으로 넘어가자고 해야 했다. 병찬은 끓어오르는 속을 꾹 누르며 제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아뇨,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안 하진 않잖아요."

"그럼 뭐야? 연습이라며. 선은 왜 본 거야?"

"부모님이 주선하신 거라 나가기만 했어요."

"너는, ..."

"병찬햄."

"...왜."

"질투를 하신 건가요, 아니면 그냥 제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 화가 나신 건가요?"

"기상호, 지금 너 그걸 말이라고 해?"

"어서 대답해주세요. 저는 질문에 모두 대답했잖아요.“

 

병찬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낸다. 그야, 네 태도가 문제였던 거지. 어쨌든 우리는... 헤어진 게 아니었잖아. 의도가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완벽하게 헤어지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너도 연습 그만하자는 말에 연락한 거 아니야? 우리는... 그러니까... 헤어진 게 아니라...

 

"... ... ..."

"저랑 헤어지기 싫어요?“

 

병찬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연습이라고 했잖아."

"연습 아닌 거 아셨잖아요. 받아들이신 건 햄이고요."

"..."

"햄도 아시잖아요. 저희 평생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요. 친구 같은 연인 좋죠. 근데 햄이 부모님께 마음의 빚 많은 거 알아요. 부모님 말씀이면 대부분 들어드리려고 노력하는 것도 알고요. 저흰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요."

"상호야."

"그래도 이번엔 오래 갔네요. 햄을 위해서 준비했거든요. 견딜 만 했죠?"

"상호야,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형, 형한테 부모님이 계속 선 좀 보라고 독촉하고 형이 별수 없이 몇 번 나간 것도 알아요. 나가서 다 거절한 것도 알고요."

"..."

"형을 탓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올 때가 온 거죠. 형은 남의 시선에 무딘 사람이 아니잖아요."

"상호야, 나는..."

"병찬 형. 제가 형을 너무 사랑하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

"헤어지는 연습을 할까요. 기한 없이.“

 

병찬은 기어코 고개를 푹 수그린다. 이제야 상호의 발화 의도를 제대로 알아들었다. 헤어지는 연습을 할까요. 연습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로 인해 남는 것이 있었다. 어쨌든 우리의 헤어짐은 연습일 뿐이니까. 진짜가 아니니까. 서로의 연인은 둘 뿐이니까... 언제든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실 한 올과 같은 약속으로 구색이나 맞춰놓듯이 서로를 이어두겠다고.

그리하여 서로가 남들이 바라는 것을 이뤄내고, 어쩌면 다시는 살갑게 굴지 못하더라도 가장 깊은 속 만은 서로에게 내어준 채로 살아야 한다고. 상호치곤 너무나도 소극적이며 이기적인 이야기였다. 그야, 너는 언제나 위를 쳐다보는 애였고 다가오는 역경을 마주하는 애 였고 그 역경에 밀리더라도 꿋꿋하게 일어서있는 애 였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이 선택은 온전히 병찬을 위한 선택이었다. 상호를 사랑하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다른 이의 기대에 부응할 수 밖에 없는 저를 위한... 그러나 결국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얄팍한 말장난 하나로 혹시 모를 기회를 남겨두고자 하는 말에 병찬은 축축한 눈가를 비벼낸다. 제가 이럴 때마다 옆에서 조심히 눈가를 쓸어냈던 이가 당장 옆에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훌쩍이는 소리가 분명 흘러 들어갔을 텐데 휴대폰 너머는 조용하기만 하다. 중요할 때엔 울지 않는 것이 너 였으니 서운할 일도 아니었다. 병찬은 겨우 울음기를 내려놓고 말한다. 노력한 대로 여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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