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유료

마법사의 제자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40
2
0

1.

기상호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마법을 쓰고 괴물이 나오고 그 괴물을 칼 한 자루로 베는 사람들이 넘쳐나며 어떠한 이유든 사람이 쉽게 죽는 세계에서 부모도 없이 홀로 12살까지 살아남은 것은 보통 운이 좋은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사지 멀쩡히 살아남기만 했지 몇몇 특별한 사람들처럼 대단한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기상호는 살아남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막막하지만.

기상호의 첫 기억은 5살이었다. 그 때엔 부모님이 있었던 것 같은데, 8살에 마을에 몰려내려오는 괴물들의 습격에 부모님과 도망치다가 결국 부모님이 잡히고 혹시나 싶어 챙겨주셨던 식량들과 몇 귀중품이 든 주머니를 들고 전력으로 달려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정확히는, 그 괴물들이 쫒아오지 않았다. 별로 크지도 않은 아이보다야 어른이 더 살이 많으니까. 기상호는 전력을 다해 뛰었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그 다음 날에는 다리가 너무 아파 부러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강한 근육통이 왔다.

그 후엔, 마을에서 어떻게든 잡일거리를 빌어 살았다.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기에 숙식만 제공하면 뭐든 시켜도 문제가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부려먹을지언정 어디 위험한 곳에 팔아넘기거나 소리를 지르고 때리더라도 밥과 잠은 꼬박꼬박 챙겨줬다는 점에서 기상호는 정말 운이 좋았다.

물론 다시 한 번 쏟아지는 괴물들의 습격에 그 도시마저 풍비박산이 난 이후로는 또 문제가 생겼지만. 12살의 나이. 운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굴이 익숙한 아이에게 나름의 식량을 나눠주었으나 거둘 수는 없었다. 기상호는 현실을 알았기에 감사하다 말하고 가장 가까운 도시를 향해 걸었다. 왜 살아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남는 것은 기상호에게 가장 큰 과제였다. 뭐 사람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기상호는 살아남기 위해 걸었다.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기어코 식량이 모두 떨어지고 가끔가다 발견하는 과일들로 겨우겨우 배를 채우며 걷다가 힘이 모두 소진되어 고통없이 빨리 죽는 것을 소망하는 것 밖에 남지 않은, 그럼에도 살고싶다고 간절히 원하는 기상호의 앞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 속눈썹은 많지 않았고 쌍꺼풀도 없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단정한 느낌을 주는 미인. 첫 만남부터 그는 환히 웃으며 웅크리고 있는 기상호를 쉬이 안아들었다. 상호야. 부드럽게 부르는 것에 기상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남으려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고 일어났을 때는 푹신한 침대였다. 한 번도 이런 푹신한 침대에서 지내본 적이 없는터라 기상호는 순간 자신이 뭔가 이상한 것 위에 올려져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린듯 저를 주운 사람이 편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손을 뻗어 기상호의 머리를 쓸어주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상호야. 일어났어? 배고프지."

"...네, 네에..."

"형 이름 알아?"

"몰라요..."

"형은 박병찬이야. 병찬햄이라고 불러."

"네..."

햄이라.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제 옛 고향의 사람들이 친근함을 표시할 때 쓰긴 하지만 보통 어른들이 쓰는 말이었는데. 어쨌든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기상호를, 박병찬은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기상호는 그것이 참 이상했다. 분명 처음보는 사람인데, 왜 자기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걸까? 물론 기상호에게 다정하게 굴어준 어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각박한 세상속에서 친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내밀 수 있는 친절은 다 비슷했다. 웃어주기,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여유가 있다면 먹을 것을 조금 적선해주고, 칭찬 한 마디를 해주는 것. 그것은 잠깐의 관심이다. 그 누구도 굶어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안아올려 자신의 집에 데려와 푹신한 침대에 뉘여주지 않았다. 기상호는 제 앞의 사람이 정말 이상했다.

살아남기 위해 기상호는 아주 예민해야했다. 그렇기에 제 앞의 사람이 보이는 호의가 이제껏 느꼈던 호의보다 깊다는 것도 느꼈다. 이젠 흐릿하지만 기상호가 버텨내기 위해 몇 번이고 곱씹어 점점 그 덩치를 불려가는 부모님의 사랑보다도 더. 내가 배고파서 미쳐버렸나. 하지만 박병찬이 잠깐 나갔다가 진작에 준비해두었다는 듯이 각종 재료가 푹 고아진 상태의 스튜를 내밀자 모든 생각이 다 날아갔다. 뭐든지 살 수만 있으면 되니까. 기상호는 허겁지겁 스튜 그릇을 비웠고 더 줄까? 라며 묻는 질문에 고개를 급하게 끄덕였다.

어느정도 긴장이 풀린 기상호는, 흔들의자에 편히 앉아있던 박병찬이 이리 오라고 손을 내미는 것에 조금 갈등하다 결국 순순히 그 품에 안겼다. 느릿하게 흔들리며 따뜻한 품에 안겨있는 것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기상호는 오른쪽 볼을 박병찬에게 기대어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여전히 저를 사랑스럽게 보는 눈빛이라 그것이 참 간지러웠다. 박병찬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매만져주며 말했다.

"상호야, 이제부터 너는 내 제자가 될 거야."

"제가 뭘 배워야하나요?"

"나는 마법사거든. 너는 이제 나한테 마법을 배워야해. 알았지?"

"저... 저는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데..."

"괜찮아. 너는 아주 똑똑한 아이거든.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

할 수 있어, 해낼 수 있어...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상호는 조금 울었다. 이 햄은 뭘 안다고 날 이리 믿어주는지. 이유없이 쏟아지는 신뢰와 애정에 기상호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그게 너무 기뻤다. 이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해내고 싶었다. 기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볼게요."

"착하다. 내일부터 형이랑 같이 배우는거야."


마법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선 스승이 없으면 배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나를 다루는 길은 누군가가 뚫어주지 않으면 안 됐고,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태어나면서 부터 마나를 다뤄 제약없이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마저도 아주 어릴 때에 뚫어놔야하는데, 기상호는 많이 늦은 편이라 마나길을 뚫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그것은 굉장히 괴로운 것이라, 기상호는 할 때마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누군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했다. 기상호는 첫 날 너무 아파 울어버렸고 하기 싫다고 말해버렸다.

박병찬은 그런 기상호를 보면서 채근하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엄하게 말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안아주었다. 미안해. 조금만 더 참아줘. 응? 그리 부드럽게 말하며 등을 도닥여주면, 결국 기상호는 훌쩍이면서 알았다고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날 기상호는 4시간 내내 울었고, 어느정도 길을 뚫어놓은 병찬은 웃으며 정말 맛있는 고기를 구워주었다.

그 후로도 병찬은 계속 상호를 달래며 길을 뚫었고 상호는 점점 잘 참아내게 되었다. 병찬은 상호가 하기 싫다고 말하면 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말로 계속 달래주었는데, 상호는 너무 아픈 와중에도 그 다정함이 좋아 결국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기어코 모든 시술을 받았다.

마나길이 모두 뚫렸을 때의 감각은 대단했다. 고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것 처럼 시원함이 느껴졌다. 병찬은 그런 상호를 보며 웃다가, 거울을 가져와 얼굴을 비춰주었다. 내내 눈물을 흘렸으니 부어터진 눈두덩이 사이에서도 상호의 눈이 파란색으로 밝게 빛났다. 상호는 그것이 너무 신기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병찬햄이 내 마나길 뚫을 때랑 색이 비슷해요."

"그렇지? 너는 내 제자가 될 운명이라 그래."

기상호는 그 말이 너무 좋았다. 병찬과 제가 운명이라니. 길을 뚫는 내내 상호는 병찬의 다정함에 매달리며 버텨내면서도 너무 괴로운 탓에 병찬의 저의를 의심했는데 그제서야 확신이 들었다. 병찬햄은 내 진짜 좋아하는구나. 상호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게 너무 기뻤다.

그 후로 병찬에게 마법을 배우는 일상이 시작됐다. 마법사라는 건 슉하면 훅하고 되는 줄 알았더니 굉장히 세세한 이론을 알아야했다. 뭘 계속 계산하고 재고 머리속에서 짜맞추고... 그 뒤 시동어를 말하면 원했던 현상이 나타나는 복잡한 매커니즘. 상호는 그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으나 병찬은 꽤 좋은 지도자였고 상호는 인내심 넘치는 병찬의 지도하에 차근차근 이론들과 술식들을 독파해나갔다.

그리고 가끔 병찬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따라다니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병찬은 굉장한 대마법사라는 것. 얼마나 대단한건지 같이 손을 잡고 나갈 때마다 가는 곳은 누가봐도 대단하다 싶은 영주의 성, 아주 가끔은 왕궁이었다. 상호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예법까지 배웠다.

나갈 때마다 병찬은 로브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렸고 그건 상호도 마찬가지였다. 대마법사는 높으신 왕의 앞에서도 얼굴을 보이지 않을 권한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제자인 상호에게도 내려왔다. 왕 앞에서도 가릴 수 있다니. 어느정도 예법을 배운 상호는 그제서야 제 앞의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실감이 났다.

물론 가장 실감이 나는 것은 병찬이 마법을 쓸 때였다. 병찬은 나갈 때마다 일을 했다. 대부분은 몬스터 소탕, 아주 가끔은 전쟁에 동원되곤 했다. 전쟁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지 못했으나 몬스터 소탕은 병찬이 데려가주었다. 병찬은 주로 바람 마법을 썼는데, 위력이 클수록 시동어가 길다는 법칙을 싸그리 무시한 채 오예~ 한 마디에 수천마리의 몬스터가 그대로 갈리는 것을 보며 상호는 턱이 빠졌다. 이론을 가르쳐준 것은 병찬인데 그 이론을 무시하는 존재도 병찬이었다. 사람 맞나? 하긴 애초에 직업 앞에 '대'자가 붙은 것부터가 에러였다.

병찬이 규격 외의 존재이든 말든 어쨌든 상호는 그의 유일한 제자였다. 병찬의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은 상호였다는 거다. 상호는 모든 이론을 16살에 마스터했다. 병찬이 대부분의 시간을 상호에게 할애했고 또 상호가 공부머리가 꽤, 아니 매우 좋은 덕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마나길도 뚫었고 이론도 다 알았으니 이제 마법을 쓰면 되는데 분명 제대로 계산식을 굴렸음에도 마나를 다루는 실력이 늘지 않아 그저그런 위력의 마법만 나왔다.

병찬이 쉬어도 된다고 했으나 그의 유일한 제자로서 관심을 받고 있던 상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상호는 객관적으로 제 실력을 알았다. 너무 늦게 시작한 탓에 이론을 빠르게 마스터했어도 보통의 마법사들보다는 진도가 느렸고 마법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16살에 어른이 되어 혼자의 외출을 허락받은 뒤 식재료를 사러 마을에 갔을 때, 대마법사의 제자라고 추앙받는 것에 마음이 들뜬 상호에게 누군가 마법을 보여달라고 했다. 상호는 실제로 보여줬고, 이어지는 것은... 비웃음이었다. 대마법사의 제자라더니 저게 뭐냐. 내가 배웠으면 더 잘 배웠을 것이다. 제자가 아니라 그냥 불쌍해서 거둔 게 아닌가? 상호의 출신까지 캐낸 이들은 상호를 대놓고 물어뜯었다.

그 날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온 상호를 보고 병찬은 자초지종을 살폈고 크게 화를 내며 그 지역에서 자리를 옮겼다. 대마법사에게 거리라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지만 어쨌든 마을 근처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안정을 주기 마련이다. 상호를 물어뜯은 마법사들에게 징계를 내리며 병찬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으나 병찬은 듣지 않았다. 상호는 눈치를 보며 맞는 말이라고 했으나 병찬은 노기를 띄운 얼굴로 말했다.

"너는 내 하나 뿐인 제자야. 아무도 널 무시할 수 없어. 나조차도."

어른이 된 상호는 그제서야 병찬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병찬이 제게 쏟아주는 사랑은, 너무 맹목적인 것 같았다. 우연찮게 주운 어린애에게 쏟을 법한 애정이 아니었다. 병찬이 쉽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모를까, 그는 의외로 사랑하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는 상호의 앞에서만 매우 다정했고, 잘 웃었고, 친절하였으며, 상냥했다. 상호는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도 둘의 관계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상호는 여전히 병찬에게 마법을 배웠고 병찬은 상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특히나 병찬이 신경써서 가르쳤던 것은 순수원소 쪽이었다. 순수원소의 마법은 이론이 복잡하며 단순한 암기로는 되지 않고 많은 이해가 필요한 학문이며 아주 깊게 판 소수의 마법사들 외에는 성장의 한계가 있기에 기피되는 학문이었음에도 병찬은 상호에게 이 쪽이 가장 중요하다며 쉽게 구하기 어려워보이는 여러 낡은 책들을 가르쳐주었다.

상호는 그제서야 병찬의 의도를 어느정도 짐작했다. 제게 이걸 가르치는 이유가 있구나.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구나. 내가 무언가... 해내야하는구나. 무조건적인 사랑보다야 이리 바라는 게 있는 것이 편하다. 상호는 그제서야 납득하고 머리를 비웠다. 어쨌든 병찬에게 자신을 증명해보여야하는 것은 여전했다.

상호가 20살이 되었을 때, 병찬은 대뜸 상호에게 물었다.

"상호야, 형 좋아해?"

"네? 네... 뭐 그렇죠?"

"형이 왜 좋아?"

"그야 형은... 죽을 뻔한 저를 살려주셨고, 제자로 삼아주시면서 마법도 가르쳐주시고... 저한테 항상 다정하고 상냥하시니까..."

"그러면 상호는, 형을 스승님으로서 좋아해?"

"..."

상호는 그렇게 말하는 병찬의 저의를 알아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들켰나? 감히 스승에게 저속한 마음을 품은 것을? 하지만 상호로선 별 수 없었다. 가장 많이 보아오는 사람에게 가족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연인으로서의 사랑을 느껴버리는 것은 상호로서도 조절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이 퍽 미안해서 티는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들켰나? 상호는 오랜만에 좆됐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있는 상호를 가만히 지켜보던 병찬은 작게 웃으면서 다가와 상호를 꾹 안아주었다. 여전히 도닥여주는 손길은 다정하다.

"괜찮아 상호야. 너는 날 사랑할 수 밖에 없어. 내가 그렇듯이."

웃는 얼굴로 말하며 이제는 눈높이가 맞는 기상호를 가만히 쳐다보는 눈 속에서 기상호는 묘한 일렁임을 느낀다. 무언가가 잘못 되었구나. 이것은 이상하구나... 기상호의 예민한 감각이 도망치라고 비명을 지른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그만둬야한다고. 하지만 기상호가 지금 도망가면 어디로 가고, 그만두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다가오는, 제가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얼굴이 스르륵 눈을 감으며 다가온다. 기상호 또한 눈을 감았다.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만큼은 잘했다.


병찬은 상호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나이를 먹지 않았고 상호 또한 20대가 되고선 나이를 먹지 않았다. 병찬은 그것을 대마법사의 권능이라고 불렀다. 내 마력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니까. 별 것 아닌 듯이 말하지만 상호는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40이 넘은 상호는 이 세상의 모든 마법 이론을 마스터했다. 아무리 마력이 특별하다지만 그게 정상일리가 없었다.

어느순간부터 상호와 병찬은 서로 다른 곳에서 지냈다. 대단히 다른 곳은 아니었다. 병찬이 사는 집은 작은 성과 같았고 당연하게 방이 많았다. 넓은 집은 언젠가 병찬이 유용할 것이라며 건네준 무생물을 다루는 마법책에 적힌 술식을 응용해 상호가 가사 마법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어 사용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미 똑같은 마법이 있어서 특허는 못 냈지만... 어쨌든 여유로운 마법사 둘은 느긋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잘 지냈던 것은 아니다. 병찬은 생각보다 히스테릭한 면이 있었고, 어린 상호에겐 차마 티를 내지 못했으나 상호가 어느정도 나이를 먹자 그 예민한 성정이 나타났다. 컨트롤 프릭이라고 해야하나? 병찬은 상호가 제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 연구를 한다고 병찬이 하자는 것을 사양하면 기분이 안 좋은 게 티가 났고 특히 그 날 기분이 원래부터 좋지 않으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상호를 집 밖으로 끌어내더니 다짜고짜 마법으로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상호가 죽지 않을만큼이긴 했으나 상호가 얌전히 있으면 죽을 것이기에 상호는 전력으로 병찬과 맞서야했다. 병찬의 화풀이가 상호에겐 잘못하면 죽는 생사결단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그것에 너무 놀라 서운함에 울기도 했고 화도 내보고 눈치를 보며 연구를 미뤄보기도 했으나 그 꼴이 10년 넘게 계속되면 상호도 짜증이 난다. 결국 상호는 참지못하고 이럴거면 따로 살자고 선언했고, 그 날 병찬은 애처럼 엉엉 울면서 상호를 진짜 반쯤 죽여놨다. 그럴거면 차라리 죽으라고 하던데... 홧김에 헛말을 내뱉었다고 무릎이 닳도록 빌고나서야 병찬은 진정했고 그 앞에 피떡이 된 상태로 누워있으면서 상호는 생각했다. 하 씨발... 우는 게 예쁘지만 않았으면... 병찬은 상호에게 안 예쁜 적이 없으니 허황된 말이다. 결국 상호는 그냥 대부분 병찬이 하자는 것을 적당히 맞춰주다가 가끔 맞춰주기 싫으면 개같이 싸웠다. 인생은 실전이라던데 병찬과 싸우며 살기 위해 전력으로 마법을 쓰니 실력도 많이 늘었다. 사실 이게 사랑이 담긴 훈련이었을까? 하기엔 그에 맞춰 병찬의 손속도 갈수록 자비가 없고 상호가 꿋꿋이 서있으면 더 화를 냈으니 아마 화풀이가 맞았을 것이다.

둘이 살며 필요한 돈은 병찬이 벌어왔다. 상호는 언젠가부터 그를 따라나가지 않고 성에 박혀 연구를 했다.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내면 좀 면이 살까 싶었으나 뭘 만들어내도 찾아보면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낸 술식이었다. 와, 내만 생각해낸 줄 알았는데. 상호는 이름 모를 선지자를 조금 원망했다.

그리고 새로운 마법의 빌미가 생각나지 않으면, 병찬을 연구했다. 병찬이 먼저 권유했다. 나에 대해 궁금하지? 연인 간의 사이였으니 그 말이 꽤나 달콤하게 들려야할텐데, 상호는 그 말 뜻을 착각하지 않았다. '내'가 궁금하지.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어떻게 규격을 벗어났는지. 어째서 수백년을 살면서도 노화도 하지 않고 병에 걸리지도, 죽지도 않는지. 인간이긴 한건지.

상호는 그 권유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병찬을 연구했다. 자주 병찬의 마나나 혈액을 뽑았다. 그것을 아주 심도있게 살펴봤다. 표본이 필요해서 이름을 숨기고 다른 마법사나 일반인들의 샘플도 가져와 비교했다. 병찬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특이했다. 혈액에 마나농도가 다른 이들보다 월등하다 못해 압도적이었고 뽑아낸 마나는 마나가 흐르는 맥에서 갓 뽑아올린 것 처럼 불순물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른 이들의 마나와는 격이 달랐다. 마치 마나로 이루어진 인간같았다. 이게 되나? 상호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나로 길을 뚫어서 나도 영향을 받은 건가? 상호는 느른하게 늘어져있는 제 앞의 연인을 쳐다본다.

그 후로도 상호는 연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하게 마나를 받은 저는 특이 샘플이었다. 살펴보니 저 또한 혈중 마나농도가 다른 이들보다 높은 편이었다. 병찬보단 한참 아래였으나 꽤 깨끗한 마나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저 자신을 연구하며 상호가 알아낸 사실은, 병찬이 제게 한 짓이 단순한 마나길을 뚫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길을 뚫는다면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상호가 그렇게 아파했던 이유는 병찬이 마나 길도 제대로 뚫리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육체에 폭력적일만큼 자신의 마나를 쏟아 스며들게 한 것 때문이었다. 상호가 가진 마나는 병찬이 가진 마나였다.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그 스며든 마나가 언제쯤 동이 날지 가늠조차 하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왜?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상호는 연구를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어느날 대마법사의 집에 편지가 왔다. 편지를 확인하는 것은 상호의 일이 된지 오래였기에 상호는 병찬의 앞에 온 편지여도 신경쓰지 않고 뜯었다. 용을 없애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용은 명성이 대단했다.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만큼. 하지만 대부분의 용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건들이지 않으면 되는 존재. 하지만 선을 넘는 인간은 언제나 있다. 기어코 용을 화내게 만들면, 그 수습은 온 세계가 해야했다. 그 수숩을 위해 병찬을 불렀던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병찬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상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병찬의 사소한 습관마저 알고 있는 상호는 언젠가부턴 병찬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하곤 했다. 병찬은 이 일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편하게 살려면 무시할 수 없다. 상호는 그 눈을 마주보다가 다녀올게요. 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짐을 쌌다. 또 다시 상호의 직감이 머리에 비상벨을 울렸다.

용을 잡는 일은 각오했던 것 보다는 간단했다. 상호의 마법은 살아온 세월이 있어 아주 어리숙했던 옛날과는 당연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병찬과 맞서 싸우느라 강제로 좋아진 실력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그 이름 모를 선지자가 남겨놓은 마법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덕에 상호가 쓰는 마법을 모두 그가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대마법사의 제자라고 하시더니 천재적인 발상이십니다. 그리 말하는 것에 상호는 조금 떨떠름했다. 아는 사람이 저 밖에 없으니 잘 다루는 법도 저만 알았다. 가끔은 위력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가끔은 다른 이들에게 적재적소에 도움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는 원하는 전리품을 받을 수 있었다. 용의 시체를 올려다보며 상호는 말했다.

용의 심장을 제게 주십시오.

합당한 요구였다. 용의 심장은 누구나 탐내는 재료였고, 그대로 씹어먹어도 영생을 산다는 소문이 있을만큼 거대한 힘이 있었으니까. 상호가 없었다면 잡지 못했을 것이며 다른 보상을 모두 마다하니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 용의 심장은 온전히 상호의 것이 되었다.


용의 심장마저 해석하기 시작한 상호는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 심장에서 추출해낸 마나의 순수함 정도가 병찬과 닮아있었다. 그럼 병찬은 용의 심장을 씹어먹은 사람인가? 하지만 용의 심장은 그렇게까지 만능의 재료는 아니다. 몇십년 연장은 되겠지. 수백년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 박병찬은, 용인가? 그 점은 아직 연구 표본이 부족했다. 그래서 상호는 병찬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형, 형은 용이에요?"

"아니."

"그럼요?"

"인간이야. 인간을 벗어나긴 했지만."

"어떻게 인간을 벗어났어요?"

병찬이 느긋하게 웃는다. 요근래 병찬은 항상 저랬다.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진 것 같았고, 재밌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거나 앉아있었고 움직일 때는 귀찮다는 듯이 공중을 날아다녔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바쳐도 통달하지 못할 고등마법을 여럿 이용한 묘기에 가까운 것임을 상호는 알았다. 그렇게 둥둥 뜬 병찬은 장난스럽게 상호를 끌어안았다. 상호의 몸도 둥실 뜬다. 병찬은 상호를 마주 안은 상태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 같이 자세를 잡았다. 상호는 익숙하게 왼손으로 병찬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천장이 높아 키가 큰 둘이 공중에 떠도 자료들이나 연구 재료들에 부딫히지 않았다.

병찬은 대답해주고 싶지 않을 때 자주 이랬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다가와 스킨쉽으로 혼을 쏙 빼놓거나, 마치 이러려고 했다는 것 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잡아왔다. 발에 닿는 것도 없는 주제에 병찬의 콧노래에 맞춰 둘이 스텝을 밟는다. 움직이는 것은 온전히 병찬의 재량이었다. 아주 오래 전, 병찬과 같이 데이트를 할 때에 새로 나온 극의 초연을 봤는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추는 것을 보고 둘 다 좋아보인다며 극마다 찾아가 춤을 외워버렸었지. 상호는 이번에도 병찬에게 넘어가주기로 한다. 이번에 넘어가주지 않으면 분명 또 기분이 좋지 않아져 저를 성 밖에 던져버릴 것이 분명했기에 상호는 그냥 얌전히 있었다. 우습게도 상호는 병찬이 기분이 나쁘면 되려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기분이 좋으면 그것을 유지하게 하려 노력했다. 병찬의 기분 나쁨에는 화풀이가 제일 효율적인 것을 알아서였다. 지금은 기분이 좋아보이니까, 상호는 쪽 소리를 내며 병찬의 볼에 입을 맞췄다.

연구에 진척이 없었다. 상호는 자주 머리를 뜯었고 병찬은 그런 상호를 안아들고 나들이를 나갔다. 한없이 어른스럽기만 할 줄 알았는데, 상호의 나이가 백이 넘어가자 병찬은 조금 어린 아이 같아졌다. 자주 웃었고 놀러나가고 싶어했으며 상호가 연구에 바빠 오래 관심을 주지 않으면 그 주위에 둥둥 떠서는 주위를 끌기도 했다. 특히 잠을 잘 때에는 상호가 옆에 와주지 않으면 집 안에서 토네이토를 만드는지라 기껏 정리해뒀던 자료가 다 엉킨 이후 상호는 꼬박꼬박 병찬을 재웠다. 그래, 다 안 부수는 게 어디야... 하는 마음으로.

상호는 병찬을 재울 때면 항상 그를 품에 안아주곤 했다. 병찬은 추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병찬의 집은 언제나 따뜻하게 불을 떼우고 있었다. 상호는 그것이 더워 언제나 아주 얇은 옷을 걸치고 살았다. 병찬은 그 품에 안겨자는 것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엔 병찬이 안아주는 게 좋았는데, 어쩌면 그건 병찬이 제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받아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많은 것을 가르쳐주던 병찬은 언젠가부터 상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았는데. 상호가 연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설명을 해주면 어느정도 이해는 했으나 그 뿐이다. 형은 의외로 연구쪽엔 소질이 없구나. 상호는 간단히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병찬을 재운 상호는 오랜만에 병찬의 품을 파고 들었다. 병찬의 품은 따뜻했다. 그것이 좋아 눈을 감는다. 오래 사는 것은 퍽 지루한 일이었지만 병찬이 있으면 좋았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영생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부디 영원히 함께 하길... 기상호는 눈을 뜬다. 병찬의 가슴에 귀를 댔다. 숨조차 참고 있으면 깨닫는다. 병찬은 숨을 쉬고 있었지만,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럼에도 따뜻하다. 상호는 고개를 들어 병찬을 불렀다.

"형."

"...응?"

잠에서 막 깨어난 목소리가 여전했다. 상호는 눈을 깜박인다. 상호는 물어야 할 것을 묻는다.

"심장이 왜 뛰지 않아요?"

병찬은 웃는다. 드디어 정답을 찾아낸 제 자랑스러운 제자를 보면서.


상호는 병찬의 가슴을 열어보았다. 꽤나 잔인하게 들리지만 마법이 있는 이 세계에서 상대의 물리적 속을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치유마법은 상처 재생 능력을 높이는 것 외에도 외과적인 시술을 돕는데에 쓰이는 것도 있었으니까. 그것도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가진 병찬이 직접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쉬웠다. 그리하여, 제 앞에서 심장을 내보이며 누워있는 병찬은, 뭐랄까. 현실감이 너무 없었다. 상호는 웃기게도 지금의 장면을 남겨둘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 병찬의 심장 부위를 살핀다.

심장이 있어야할 곳에는 딱딱하게 굳은 무언가의 물질이 있었다. 그것이 심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이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그 물질을 만들어내기 위해 쓰여졌을 술식들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느낀다. 마법사들이 술식을 만들어내다보면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지곤 한다. 기상호는 이 술식에 쓰인 패턴들이 익숙했다. 기상호는 천천히 물러난다. 병찬이 열려있던 가슴을 닫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배경 속 기상호의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병찬이 웃었다.

기상호는 자신이 그 유명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상호의 연구가 달라졌다. 현상을 해명하려던 연구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연구로 바뀐다. 병찬형의 연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받아둔 용의 심장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길 시도했다. 몇 번이고 병찬의 가슴을 열었고, 그 속에 알 수 없는 물질에 쓰인 술식을 연구했다. 모든 술식을 알아낸 뒤에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해체해 다시 살펴보았다. 술식이 쓰인 것은 몇백년 전이었고, 탓에 조금 낡은 구석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많은 이들이 다듬은 이론들을 바탕으로 술식을 고쳤고, 고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이 그 물질의 레플리카라고 할 수도 없는 불량품이었다. 실패작이었고.

상호는 포기하지 않았고, 백 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연구는 점점 진전되어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병찬의 모조심장을 카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나아질 수 있을텐데, 무엇이 부족할까? 그동안 상호가 실험에 썼던 재료는 이 세상에 없는 것 외에 전부라고 할 만큼 많았다. 동의하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써봤으니 더 이상의 재료는 없을텐데. 병찬은 그런 상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머리에 제 볼을 기댔다.

상호의 몸이 또 다시 떠오른다. 반항할 건덕지도 없이 침대에 데려가는 것에 상호는 이제 반항하지 않았다. 전처럼 병찬이 상호를 재운다. 상호는 병찬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얇은 살가죽과 단단한 뼈, 그것을 헤치고 병찬의 몸에 존재하는 그것을 떠올린다. 몇 번이고 연구를 하며 그것의 미지를 파헤칠 때마다 알아가는 것이 있다. 만약 병찬이 정말 인간이었다면, 지금 영생을 사는 병찬은 어떤 상태인걸까. 가슴을 열어 심장을 해석할 수는 있어도 머리를 열어 뇌를 살펴보며 생각을 해석할 수는 없었다.

상호는 병찬이 가끔 보였던 불안정함을 떠올린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을까. 아주 옛날, 인간이었을 적의 병찬이 너무 궁금했다. 제가 알 수 없었던 시간이, 이제는 보여주지 않고 있는 면면들이. 하지만 예전의 병찬에게 물었을 땐 그 모든 것이 너무 옛날이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와의 추억을 곱씹는 걸로도 너무 오래 걸려서 모두 잊어버렸다고. 그런 말을 하는 병찬의 표정이 너무 아득해보여서 상호는 더 묻지 못했다.

상호는 너무나도 뒤늦게 자신이 이 물질을 왜 만들어내려고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래야할 것 같았다. 병찬이 기대하는 것이 그것인 것 같아서. 이것을 위해 저를 주워오고 사랑한 것 같아서. 병찬은 자신이 이 물질에 대해 완벽히 알게 되면 그 때엔 무엇을 깨닫게 될까. 그것이 어쩐지 두려웠다. 그동안 잠잠하던 직감이 속삭인다. 이쯤이면 되었다고. 상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상호는 아주 오랜만에, 거의 피떡이 된 상태로 시간 마법을 사용해 개박살이 난 성을 되돌리고 있었다. 옆에선 상호만큼은 아니어도 이리저리 상처입은 병찬이 자기자신에게 치유마법을 쓰고 있었다. 사랑싸움이라기엔 굉장히 너절했고 개싸움이라는 게 딱 맞았다. 이번에도 병찬이 이겼다. 상호는 병찬을 이긴 적이 없었다. 지금도 봐라, 멀쩡해서는 다시 매달리듯 목을 안아오며 제게 치유 마법을 걸며 제게 사과하는 병찬의 목소리를 들으니 화도 안 났다. 상호는 한숨을 삼키며 괜찮다고 말했다.

싸운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처음으로 직감의 편을 들고 싶었다. 연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더니 병찬이 웃으면서 계속 하자고 했고, 더 이상 진전이 없어 의미 없을 것 같다고 했더니 아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호는 순간 울컥하여 연구 자료를 다 불태워버릴 것이라고 말했고 그에 같이 울컥한 병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는 이 꼴이다. 병찬은 여전히 둥둥 뜬 채로 상호에게 매달려있었다. 상호야, 미안해. 포기하지말자. 응? 그리 말하면서. 상호는 이 꼴이 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병찬은 너무 오래 살았고, 상호도 너무 오래 살았다. 규격 외의 인간도 인간이다. 상호는 제가 점점 망가지는 것을 느끼면서 병찬의 망가짐을 깨달았다. 병찬은 삶에 진절머리를 내며 상호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고 상호는, 글쎄. 진절머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주 예전에 들었던,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 때에도 그 말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는데, 이 지경이 되자 무슨 뜻인지를 진정으로 이해했다.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죽지 못하니까. 서로를 이해할 유일한 이해자라서. 어떻게든 살려면 서로를 사랑하는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자신을 낱낱히 파헤친 상대방만을 안심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왜 제 직감이 그것을 두려워했는지 깨닫는다. 그것은 저주였다. 후회하기엔 너무나도 긴 시간을 사랑해버렸다.


2.

병찬이 원했기에 상호는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병찬은 중간중간 상호의 상태를 살피면서 상호가 골머리를 썩는 것 같으면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갔다. 새로운 극을 보기도 했고 그새 새롭게 탄생한 요리나 볼거리를 즐기기도 했다. 아주 먼 지역으로 날아가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를 그만두게 하진 않았다. 느릿하더라도 꾸준히 하자. 자주 쉬더라도 그만두지는 말자. 그리 다독이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몇백 년을 걸쳐 만들어냈으나 결국 상호는 완벽한 물질을 만들지 못했다.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았으나 상호는 정말이지, 쓸 수 있는 모든 재료는 다 썼다. 누군가의 그림자, 악우의 인연, 평생을 약속한 연인의 언약마저도 끌어다 썼다. 세상의 모든 개념을 사용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병찬이 상호의 목을 안아온다. 하도 피를 뽑아댄 탓에 병찬의 손과 팔에는 그인 자국이 잔뜩 생겼다. 치유마법을 쓰면 될 텐데, 굳이 흔적이 남는 게 좋다며 내버려 둔 탓이다. 상호는 피곤함을 느낀다. 손을 올려 제게 기댄 부드러운 흑색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오늘의 병찬은 기분이 좋았나. 글쎄. 히스테릭이 많이 줄었다. 병찬 역시 많이 피곤해 보였다.

상호의 연구가 또 다시 바뀐다. 상호는 이제 병찬의 심장을 파괴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단순히 병찬의 몸에서 떼어낸 심장은 제 멋대로 사라져 병찬의 가슴 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단순한 위력으론 파괴조차 되지 않았다. 무언가의 재료로 쓰고 싶어도 다른 것과 섞이질 않았다. 이 심장을 완전히 없앨 방법은 무엇일까. 상호가 연구의 목적을 말해줬음에도 병찬은 특별히 반대나 찬성의 의견 없이 상호가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심장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 병찬은 하반의 반나절 동안 심장을 내놓고 살았다. 그 탓에 속이 춥다고 웃으면 상호는 온기 조절 마법을 걸어주곤 했다.

상대방에게 규격 외의 마나를 선물해주는 힘. 생명력을 크게 높여 노화를 멈추고 수명을 늘리는 일. 그 모든 것을 해낸 레플리카는 물질 자체의 불멸성까지는 재현해내지 못했다. 물건 자체가 병찬의 완벽한 일부였는데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답은 하나다. 이 물건은 병찬의 무언가를 가졌다. 어떠한 개념이 재료로 들어갔을 것이다. 예상을 마친 상호는 조금씩, 병찬을 떼어낸다. 병찬의 그림자, 병찬이 가진 인연들, 병찬에게 묻은 다른 이들의 악의, 동경, 희망, 기대. 끝을 알 수 없는 병찬의 수명까지도.

그렇게 하나하나 병찬과 관련된 모든 개념들을 박제해놓은 것들을 보며 상호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병찬의 수많은 인연 중에서 저와 병찬과의 인연이 없었다. 둘은 만날 일도, 만나서도 안 되는 완벽한 타인이어야 했다. 본래라면 스쳐 지나가지도 못 할 인연. 상호는 그 빈자리를 가만히 더듬어본다. 완전히 뜯겨나간 빈자리를 살펴본다. 흔적조차 없이 메마른 자리는 만남으로서 생겨야 할 인연조차 흔적이 없었다.

이게 가능한가? 상호가 알고 있는 이론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 계속 떼어낸다면 모를까. 그럼 누가 이 인연을 떼어가나? 그야 상호가 아니라면 병찬이겠지. 하지만 병찬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병찬은 연구를 하지도 않고, 딱히 이런 것을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보다 그냥 마법 한 번 쓰는 걸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상호는 새로운 가설을 새운다. 그 인연이 계속 쓰이고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병찬의 심장을 계속 가동하게 해주는 연료로 말이다.

상호의 연구가 바뀐다. 이젠 심장을 파괴하는 법이 아니라 병찬의 심장과 제가 만들어낸 레플리카를 합치는 연구였다.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병찬의 심장은 융합을 거부했다. 상성이 맞지 않았다. 무언가의 연결점이 있어야 했다. 상성을 억지로라도 맞춰줄...

병찬은 가끔 나가 다른 이들을 만나거나 했을지 몰라도 연구를 하느라 성에 거의 처박히듯이 한 상호에겐 병찬과의 인연 밖에 없었다. 인연은 저를 기준으로 쌓이지만 병찬과 맺은 인연이기에, 심지어 그 긴 세월 동안 함께 해온 덕에 인연의 농도는 그 무엇보다도 높았다. 그럼 내 인연을 쓰면 어떻게 될까? 상호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병찬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느른한 저의 연인은 여전히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못한다.

적성 실험부터 했다. 병찬과의 인연을 떼어내 병찬의 심장에 가져다 대자 무리 없이 그것을 흡수했다. 인연을 재료로 만든 레플리카 역시 흡수당했다. 이제 흡수를 당하는 게 아니라 흡수를 해야 하는데, 병찬의 것이 더욱 성질적으로 우세해 이 연구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좀 더 완벽해야 하는데. 상호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인다.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에서 병찬의 심장과 제가 만들어낸 레플리카. 이 둘의 차이점은 누구의 인연을 쓰느냐다. 이 순간에도 병찬과 상호의 인연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병찬의 심장은 병찬이 가진 상호와의 인연을 잡아먹고 있겠지.

한 사람을 이루는 개념들은 심장에 모인다. 병찬과의 인연이 가장 크게 고인 곳은 상호의 심장이었다. 상호는 그제야 적어두지 않았던 마지막 재료를 깨닫는다.


상호는 연구를 멈췄다. 아예 그만둔 것은 아니고, 머리가 굳은 것 같아 조금 쉬고 싶다는 말로 유예기간을 늘렸다. 병찬은 오랜만에 상호를 독차지하고 아주 긴 잠을 잤다. 이제 병찬은 상호 외에는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았다. 무엇을 봐도 흥미 없다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가끔 들어오는 의뢰는 상호가 처치했다. 원래부터 다른 이들 앞에 얼굴을 내놓지 않으니 아무도 그걸 몰랐다. 상호도 수백 년을 살아온 존재인지라 인간의 실력은 진작에 넘었다.

상호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했다. 이번 실험이 성공하면 병찬이 죽을 테고 실패하면 제가 죽을 것이다. 제가 죽으면 병찬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이미 병찬은 세월에 짓눌려 죽어가고 있는데, 죽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병찬은 어떻게 되는 걸까. 결과를 짐작한다. 적어도 행복하진 않겠지. 상호는 잠들어있는 병찬의 머리에 입을 맞춘다. 내가 꼭 죽여줄게요...

줄기차게 써댔던 용의 심장 대신 상호의 심장을 써서 만들어낸 레플리카, 아니... 새로운 심장? 은 만들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상호의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만들자마자 죽는 거 아닌가 했는데, 애초에 이런 기능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병찬은 신기한 얼굴로 상호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고 들리지 않는 심장 소리에 작게 웃었다.

"완성했구나."

"네. 햄."

"이제 나 죽을 수 있어?"

"그렇겠죠."

병찬은 즐겁게 웃으며 상호의 손을 꾹 잡는다. 아 이제 병찬햄을 죽이면... 그런 생각을 하며 한 발자국 다가가자 병찬이 물러난다. 햄? 그리 묻는 것에 병찬이 오랜만에 즐거운 얼굴로 웃었다.

"상호야. 그러기 전에 해야 할 게 있어."

"...뭔데요?"

"네가 왜 그런 것을 만들었는지 같은 것들."

병찬의 이끌림으로 상호는 침대에 눕는다. 병찬은 상호의 배 위에 올라탔다. 심장들은 가까운 곳에서 공명한다. 마주 껴안기만 하면 일이 끝날 텐데, 병찬은 상호의 가슴을 짚은 채로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잔뜩 깨져버린 검은 색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행복하게 들리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만 전해줄게."

병찬이 짧게 마법 주문을 외운다. 상호는 그 주문을 알았다. 자신의 기억을 다른 이에게 넘기는 마법이었다.


병찬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마나를 다루는 병찬은 자주 사고를 일으켰고, 그게 마탑주들에게 소문이 들어가 수도로 상경하게 된다. 선천적 마나 사용자는 귀한 사례였고 어린 아이인데다 배움도 빠른 그 재목을 모든 마탑주들이 탐냈다. 쏟아지는 탐욕 속에서 병찬을 잡아줄 부표는 없었고 병찬은 그대로 휩쓸렸다. 결국 병찬이 들어간 마탑은 공격 마법을 주로 배우는 곳이었다. 그곳의 마탑주는 병찬에게 처음부터 어려운 마법을 가르쳤다. 경우에 따라 시전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점은 쏙 빼놓고. 주변인들은 병찬의 성취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운명은 재능있는 자에게 박정했다. 처음으로 나간 전쟁에서 병찬은 제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마나를 폭주시켰다. 마나를 담는 심장이 망가졌다. 마법을 쓰려면 마나가 필요하다. 병찬은 마력석으로나마 겨우 마법을 쓸 수 있는 반푼이가 되었다. 당연하게 마탑은 병찬을 버렸다. 병찬은 쫓겨나듯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호는 마법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마나 길을 뚫어주었으나 선천적으로 마법을 다루는 것엔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좋아 다른 이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소소한 마법들을 발명해냈다. 그 재능을 좋게 본 마탑에서 연구자로서 초대하고 싶다는 말에 상호는 좀 더 비싼 재료를 쓸 수 있을까 기대하며 입성한다. 그 후로는 증명의 시간이다. 상호는 계속해서 실적을 냈다. 점점 권한이 많아진다. 기대한 만큼 비싼 재료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는, 마탑주가 연구하던 마법에 대한 검수까지 진행했다. 근데 이거 쪼까 위험성이 큰데 다듬어야겠네요. 그리 말하는 상호에게 마탑주는 병찬을 소개해줬다. 상호는 그가 보여주는 마법을 보면서 깨닫는다. 병찬은 마탑주의 실험용 쥐였다. 자신이 배우기는 위험하니 무섭고 이만큼 재능 있는 이들은 제게 위험이 되니 재능있는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어떤지 보는 용이었던 거다. 상호에게 소개해준 것도 상호의 머리로 문제점을 좀 더 뜯어 고치길 바라서였다. 상호는 처음으로 마탑주가 무서워졌다.

상호는 착실히 마법을 고쳤다. 조금 더 덜 위험하게. 폭주 가능성이 없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정말 완벽하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탑주의 지시로 마법의 위험성을 고지하지도 못하고 최선을 다해 뜯어고치는데, 그 탓에 병찬과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니 둘은 자연스레 눈이 맞았다. 아, 더 빨리. 이 사람이 아무런 문제없이 날아오르면 좋겠는데... 상호는 병찬을 꾹 끌어안았다.

병찬은 상호의 연구가 완료되기 3개월 전, 전쟁에 나갔다 반푼이가 되었고 상호는 완벽하게 고친 마법을 마탑주에게 제출했다. 마탑주는 만족스러워하며 그 마법을 배우고 승승장구를 하다 5년 뒤 마나가 폭주하여 마나길까지 다 태워 먹은 뒤 자살했다. 마나가 폭주할 때도, 그가 자살할 때도 상호는 그 옆에 있었다.

마탑주 다음으로 권한이 높았던 것은 총애를 받던 상호였기에 상호는 그대로 모든 권한을 일임받고 마탑주가 되었다. 그 뒤론 연구, 연구, 또 다시 연구. 연구 끝에 상호는 용을 죽이고 심장을 꺼내어 그것으로 간이 심장을 만들었다. 그것을 들고 병찬에게 달려갔을 때 시간은 이미 많이 흐른 뒤라 병찬은 많이 늙어있었다. 상호는 병찬의 앞에 선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드릴게요. 그러니까 다음 생에도 절 사랑해주실 수 있나요."

구걸에 가까운 요청에 병찬은 픽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생이라니. 허황된 소리라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상호는 병찬이 죽을 때까지 곁을 지켰다. 연구를 하며 섭취한 용의 심장 덕에 상호는 병찬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난 병찬은 여전히 재능이 뛰어났기에 상호는 제 마탑으로 병찬을 데려왔다. 이제는 문제없는 마법을 가르쳤다. 예전의 병찬이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바람을 다루는 마법인지라 마탑주가 연구했던 불 마법의 속성을 바꾸어 선물했다. 병찬은 그 마법을 마음에 들어 했다.

병찬과 상호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상호는 그 마음을 받지 않았다. 상호는 전생부터 그를 알았지만 병찬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생에서도 병찬을 지켜보고 싶었으니까, 상호는 조그마한 욕심으로 병찬과 자신의 운명을 엮었다. 정말 사소한 엮임이었다. 그저 병찬의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정도로만... 상호는 그 정도로 만족했다.

병찬이 25살이 된 날, 상호는 새 심장을 선물했다. 원래도 넘쳐나던 마나에 상호가 만든, 용의 심장을 베이스로 한 그 물질은 병찬의 심장을 잡아먹었다. 이것으로 병찬은 더더욱 강해지겠지. 이미 마법을 다루는 재능은 병찬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세상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강인한 마법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감 넘치는 병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상호는 병찬이 처음 전쟁을 나가는 날, 제 침대에 누워 생을 다했다. 살아있은지 200년이 넘은 날이었다.

그 다음 태어난 상호를 병찬이 주웠다. 병찬은 상호가 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그저 옆에 있고자 했던 운명의 뒤섞임은 둘을 사랑으로 이끈다. 운명은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인데, 감히 건든 죗값인 것 처럼 속절없이 서로를 사랑했다. 병찬은 기어코 욕심을 내고 만다. 제 심장의 마나를 폭력적으로 쏟아부었다. 상호가 우는 것을 달래면서. 상호는 아주 오래 살았으나 병찬보다 일찍 죽었다. 병찬 또한 직감한다.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난 상호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상호는 오래 살았고, 병찬은 상호가 죽기 전에 연구했던 것을 가져다주었다. 상호는 이번에도 새로운 심장을 만들어냈다. 병찬은 그제야 환히 웃으며 제 심장을 내어주었다. 그다음의 생에 여전히 상호를 사랑하겠지. 하지만 인간은 이렇게나 오래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병찬은 망가졌고 죽고 싶었다. 그래도 그다음은 나의 차례니까. 네가 먼저 나를 이렇게 살게 했으니까. 병찬은 홀가분하게 죽었다.

상호가 다시 태어날 때마다 상호는 점점 더 완벽한 심장을 만들어냈다. 병찬은 미쳐버린 상호가 다시금 멀쩡하게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지난한 시간을 견뎌냈다. 완벽한 심장을 만들수록 둘은 살아있는 기간이 늘어났다. 이제 미치지만 않으면 될 것 같은데. 병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또 다시 상호를 주웠다.


상호는 멍한 정신으로 제 앞을 쳐다본다. 병찬이 천천히 떨어졌다. 둘 다 괴로운 일을 겪은 것 같았다. 상호는 폭력적인 거대한 기억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병찬은 상호의 위에서 나와 옆으로 쓰러지며 상호의 손을 꾹 잡았다. 상호는 그제야 병찬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서로를 사랑한 것이 너무 길었다. 정말이지, 끔찍할 만큼 길었다. 쌓인 기억은 서로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장에 담긴 사랑이 그것을 저지했다. 병찬은 지쳤고, 겁에 질렸다. 그는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놓지 못한다. 그리하여 또 다시 상호가 심장과 함께 병찬의 미련을 가져가기 전에 기억을 넘겼다. 애초에 심장이 넘겨지면 알아서 받을 기억이었음에도 일부러 그랬다. 상호는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렸다.

고개를 옆으로 하면 침대에 얼굴을 반쯤 묻은 병찬이 눈물범벅의 얼굴로 상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 같았고, 홀가분해 보였다. 이기적이었으나 먼저 이기심으로 상대를 이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은 상호였다. 상호는 아주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병찬 또한 그랬다.

심장을 만들어 낸 것은 상호다. 그러니 부술 수 있는 것도 상호만이 알 수 있다. 병찬은 그 사실을 알았고, 드디어 용기를 냈다.

상호의 연구가 다시 바뀐다. 그저 간단한 마법 하나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병찬은 상호의 손을 잡고 아주 먼 곳으로 향했다. 아주 넓은 바다 한 가운데, 그리고 한참의 위. 병찬과 상호가 제 심장들을 꺼냈다. 같이 마법을 썼다. 예전, 둘을 망가트렸던 마탑주가 썼던 마법의 부작용이 극대화된 마법이었다. 이미 견고한 심장들은 한두 번으론 끄떡도 없었기에 둘은 계속해서 마법을 썼다.

그 마법은 아주 고요해서, 둘은 그저 바람에 휩싸여 서로를 마주 보고만 있었다. 내놓은 심장에 서서히 과부하가 걸리는 것이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점차 심장이 폭주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의 폭주다. 최고의 연구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물질조차도 부술 줄 알았다. 서서히 마모되어 부서지는 심장을 보며 상호와 병찬이 웃었다.

꼬아놓은 운명은 풀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흔적과 그로 인한 망가짐의 기억 뿐이라. 진작에 버렸어야 했음에도 심장을 품는 순간 그 모든 것을 사랑해버리고 그 괴로움을 놓지 못하는 그 굴레를 드디어 끊어낼 수 있었다. 상호는 웃고 있었고, 병찬은 웃으면서도 울었다. 기어코 망가진 심장이 얇은 소리를 내며 깨어져 나간다. 병찬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떠오른다. 그렇게 만든 것은 상호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꾹 안아주었다. 힘을 다한 탓에 둘이 천천히 공중에서 떨어진다.

"상호야, 나 다시 사랑할 거지. 날 다시 찾아줄 거지. 나 혼자 두지 않을 거지. 나..."

"우린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되어있잖아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그리 말하는 것에도 병찬은 떨고 있었다. 그렇게나 지긋지긋해하며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지긋지긋함마저 사랑해버린 탓에. 상호가 그렇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그럼에도 병찬은 선택했고 상호는 실행했다. 그리하여 끝이 온다. 심장도, 심장을 대신 할 것도 없는 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심장 소리는 원래부터 없었다. 서로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숨소리 뿐이다. 서로를 마주 껴안은 연인은 바다로 추락한다. 숨소리가 먼저 멈췄고, 이어 무언가가 바다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

몇 천년이나 멈추어있던 사랑 노래가 끝을 맺는다. 새로운 노래가 시작 될 것이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사랑에 망가지지 않은 채로.


밑에는 구구절절 잡 설정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