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괴로움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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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의 총량

박병찬이 농구를 그만뒀다. 프로로 입단한 지는 11년, 나이로는 35살이니 프로로 활약한 시간도 꽤 길고 나이를 따지면 평균적인 시기였다. 박병찬은 그냥 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몸 성한 선수들도 30대면 슬슬 은퇴하는데 무릎 부상을 당한 제가 35살에 은퇴하면 오래 한 것이다. 제 은퇴식 경기는 결국 제 팀의 패배로 끝났으나 그 경기의 MVP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박병찬이었다.

박병찬은 그동안 시즌 MVP도 따봤고 우승도 해봤다. 고등학교 은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국가대표 가드로 나가 3쿼터 동안 맹활약을 떨치기도 했다. 돈은 평생을 쓸 만큼 벌었고 괜찮은 이목구비와 함께 종종 미디어에 얼굴을 비춘 터라 이대로 연예인으로 길을 틀어도 좋았다.

처음 무릎 부상을 당하고 도망가는 것처럼 농구를 잠깐 그만뒀을 때는 상상도 못 한 호사였다. 며칠 광고도 찍고 게스트로 부르는 몇몇 예능 프로에서 얼굴을 내비치며 꽤 바쁜 삶을 살았던 박병찬은 어느 쉬는 날, 문득 제 카톡 제일 아래에 처박혀있는 채팅방을 열어보았다. 잘 지내세요. 짧게 적혀져 있는 한마디는 5년 전을 가리킨다.

충동적인 결정임을 알면서도 이미 소식을 들어둔 터라 병찬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끊는다. 한동안은 신경 써야 하는 스케줄이 없었다. 박병찬은 기묘한 열감에 휩싸인다. 이것이 두려움과 숨길 수 없는 미묘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을 알았다.

 


 

몇 번이고 왔었던 길은 오랜만에 오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파트가 몇 개 더 생겼고, 부산에 내려올 때마다 즐겨 갔던 가게는 리모델링을 한 건지 같은 가게 이름인데도 좀 더 깨끗하고 화려하게 바뀌어있었다. 기억해두었던 몇몇 가게는 문을 닫은 듯 보이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주 찾았던 국밥 가게가 바뀐 것 하나 없이 남아있기에 병찬은 거기를 들러 늦은 점심을 때웠다. 그 뒤 느릿하게 부산 바다를 거닐다가 노을이 지는 것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버스노선이 바뀐 건지 예전과 같은 번호표도 아니었고, 버스 차량도 죄다 바뀐 건지 깔끔한 모양새였다. 병찬은 가장 뒤, 그 앞의 자리에 앉았다. 키가 너무 큰 둘은 맨 뒤에 앉았다간 버스가 한 번 덜컹하는 것에 바로 머리를 박기 좋아 그 앞에 앉았었다. 창밖을 쳐다보며 많은 것이 바뀐 풍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너무 많은 것이 바뀐 것만 같아 그것이 어쩐지 야속했다.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걷는다. 지상 고등학교도 그동안 모습이 바뀌었다. 농구 명문이 된 건지 많은 농구부원의 이름이 적혀진 현수막이 걸어져 있었다. 박병찬은 교문을 지나 익숙하게 체육관 쪽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훈련이 거의 끝날 시간이었는데. 체육관도 개축한 건지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니 유리문 안쪽에 벌써 정리 중인 건지 부원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어른 둘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색소 옅은 머리카락. 점점 듬직해진다고 생각했던 넓은 어깨의 그가 보인다. 병찬은 어쩐지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 나 지금 얼굴 어떻지.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어 살펴보니…. 살펴보길 잘했다. 병찬은 멈춰서서 천천히 표정을 갈무리한다.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누르고,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들을 남겨놓고 어른들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왼쪽 눈가의 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반쯤 감겨 웃음을 띠고 있던 눈이 제 옆의 이를 바라보다 앞을 보는 순간 마주친다.

병찬은, 그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면서도 어쩐지 무서웠다. 놀라기야 하겠지. 근데, 근데 있잖아 상호야. 나는 솔직히 네가 날 보면서…. 조금 당황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주거나 그냥 울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좀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말이야.

그러나 상호는 울지 않는다. 감정에 북받쳐 웃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크게 눈을 뜨더니 부드럽게 웃었을 뿐이다. 병찬은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어쩐지 울렁거리는 속을 게워 내고 싶어 주머니에 넣어 숨긴 손을 꽉 쥐었다. 깔끔히 다듬은 손톱은 손을 파고들지 못한다. 그것이 아쉬웠다.

 


 

"오랜만에 보네요. 형."

"상호~ 형 소식은 듣고 있어?"

"그러믄요. 형 은퇴하구 티비에도 안 나옵니까. 나 그거 다 챙겨봐요."

 

그렇구나. 박병찬은 웃는 얼굴로 제 앞의 술잔을 들이켰다. 상호가 자주 온다는 고깃집은 제가 해외로 나간 뒤 새로 생긴 곳이라고 했다. 익숙한 점이 하나도 없는 가게가 어쩐지 거북했지만, 그런데도 제가 가장 익숙한 이가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잔이 비자 상호가 술을 따라준다. 둘이 고깃집에 오면 항상 제가 고기를 구웠는데, 이젠 저도 어른이라며 집게를 집어 고기를 굽는 손길이 자연스럽다.

그것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다시 술을 마신다. 천천히 마셔요. 그리 말하면서도 술을 따라주는 것에 응. 짧게 대답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지금 술을 잔뜩 마시고 싶었다. 그걸 빌미로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니까. 상호는 물을 가득 따라 제 앞에 내민다. 이것도 마셔요. 그리 말하는 것에 응. 대답하며 담긴 물을 모두 마셨다. 취하고 싶었는데….

 

"희찬이 인스타에서 봤어. 코치 된 지 좀 됐다며?"

"네. 감독님 덕에요. 니는 눈이 좋으니까~ 하면서 불러주셔가꼬."

"이젠 승리를 밥 먹듯이 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아들이 많이 오니까 좋은 아들도 많아가지고요. 좀 일찍 오시지. 그랬으면 아들한테 내가 국가대표 박병찬하고 친구라꼬 소문냈을 긴데."

"나 며칠 있을 테니까 내일 갈게."

 

그제야 묘하게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던 눈이 올라와 저를 마주한다. ...나 지금 표정 어떻지. 웃고 있지? 좋아. 병찬은 좀 더 입꼬리를 올린다.

 

"가도 돼?"

"...내야 좋죠. 오시면 애들도 한 번 봐주실랍니까."

"해달라면 하겠는데, 상호만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다 구워진 고기가 제 접시 앞으로 옮겨진다. 그것을 받아먹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분명 뭘 마시고 있는데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주고받다 보니 술병이 빠르게 비워진다. 거의 저가 마신 것이었다. 새 술병을 받으려고 벨을 누르려는데 그 손을 상호가 막는다. 어쩐지 무언가 들킨 기분이 들어 멈칫했다.

흘끔 올려다보니 담담한 시선이 마주친다.

 

"형, 주량 두 병이잖아요. 더 마시면 위험해요."

"...나 많이 늘었어. 한 병만 더 마시자."

"며칠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숙소는 잡으셨어요?"

 

손이 움찔한다. 티가 났을까. 저도 모르게 기색을 살피자 누르지 말라는 듯 제 손을 살짝 밀어두고 놓아준다. 손을 물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야 젓가락이라도 집어 들었다. 조금 식은 고기를 뒤적거리며 먹을 듯이 하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툭 내뱉는다.

 

"어~ 별 계획 없이 내려와 버려서. 그냥 근처 모텔이나 잡을까 했어."

"그럼 우리 집 오실래요? 혼자 살아요."

"그래도 돼?"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병찬은 제 입 속살을 깨물며 조용히 안도한다.

 


 

기어코 술은 더 못 마셨고, 둘 다 멀쩡한 정신이다. 병찬은 상호의 뒤를 따른다. 예전엔 상호가 저를 따라오는 것이 익숙했는데, 이것마저 달라졌나. 관계가 달라지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적당히 차오른 취기가 괜스레 눈을 시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 차라리 잔뜩 마시면 그걸 핑계 삼을 텐데. 한 병도 다 안 마신 상태에서 추태를 부려봤자 그것이 맨정신이라는 것을 상호도, 저도 알았다.

병찬은 가만히 뒤를 따라가다 가만히 멈추어 선다. 제 발걸음이 들리지 않자 기민하게 같이 멈추어 서선, 그대로 저를 돌아보는 상호를 마주한다. 여전히 별 감정 없는 표정이 어색했다.

 

"상호야. 너 내가 왜 내려온 건지 알지."

"네."

"왜 데려가는 거야?"

"형이 원하시니까."

"내가 원하면 다 해줘?"

"...글쎄요."

 

병찬은 제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멈춰 선 곳이 가로등 아래가 아니지만 길은 충분히 밝았다. 제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해서 고개를 숙인다. 큰 보폭의 발걸음이 제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 제 손을 감싸오는 온기를 느낀다. 그대로 끌어당기는 것에 저항 없이 걸음을 옮겼다. 꽤 어둑해진 골목길에 들리는 것은 불협화음 같이 맞지 않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상호가 말리더라도 그냥 더 먹을 걸 그랬나. 억지로라도 먹었으면…. 차라리 편하게 울어버렸을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우습게 느껴진다.

 

도착한 상호의 집은 혼자 살기에 딱 좋은 원룸이었다. 집에 들어온 상호는 그대로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꺼내더니 더 마실 거냐고 물었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냉장고에 있는 것을 꺼내어 나름대로 안주를 만들고 거실의 탁자에 마주 앉는다. 지금 보니 상호도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주름은 아직 없지만도, 어른의 태가 나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마지막에 본 너는 그때도 볼살이 덜 빠졌었는데.

잔에 소주와 맥주를 같이 따라주는 것에 어쩐지 입 안이 써진다. 원하는 건 다해주려는 모양이다 싶어 사양하지 않고 한 번에 들이켰다. 괜스레 감탄사를 내뱉으며 흘끔 눈치를 보니 제 잔을 받아들여 다시 한 잔 만들어주는 것에 그것 역시 쭉 들이킨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히 변명이 될 것이다. 실제로 조금 알딸딸한 기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안주를 뒤적이며 말한다.

 

"상호야."

"네."

"예전에 내가 해외 가기 전에 네가 했던 말들 기억나?"

"네. 다 기억해요."

"나 네가 말한 거 다 해봤어."

 

이번엔 상호가 술을 들이켠다. 나보다 주량이 약한 녀석이었으니 저런 페이스로 먹으면 몇 번 못 가서 뻗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번엔 제가 잔에 술을 잔뜩 따라 준다.

 

"네가 말한 대로 친구도 잔뜩 사귀고, 애인도 사귀었어. 데이트도 해보고. 유명 배우랑 결혼도 할 뻔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건 무산됐다? 이건 네가 말한 게 아니긴 한데, 마약도 할 뻔했어. 내가 하려던 건 아니고 누가 주더라."

 

고작 한 잔 마셨을 뿐인데 네 안색이 변하는 게 느껴진다. 넌 술 마시면 원래도 솔직한 애가 더 솔직해졌지. 그 점이 귀여워 함구했더니 아직도 모르는 것 같았다. 슬쩍 마시라는 듯 말아놓은 술을 내민다. 그것을 다시 끝까지 마시는 것을 본다. 더 이상 먹으면 아예 쓰러질지도 모른다 싶어 잔을 채워도 네게 내밀지는 않았다. 어느새 네 몸은 느릿하게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네게 시선을 두다가 탁자 아래에서 쭉, 저를 피해 뻗어진 네 오른 다리를 본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한 뒤 프로에 간신히 입단하고 환히 웃었던 네가 아직 선하다. 그때 유니폼을 받고선 부리나케 저를 찾아와 자랑하고, 뿌듯해하는 얼굴로 있다가 제 요청으로 환히 웃는 너와 찍은 사진은 아직도 제 휴대폰에 간직되어있었다.

그 해, 맞붙게 된 상대 팀은 꽤 거칠었고 너는 거기서 결국 다리가 부러졌다. 재활하면 될 줄 알았고, 저는 바쁜 시간을 내어 저 또한 계속 뛰고 있다며 격려를 했으나 네 다리는 결국 재활이 되지 않았다. 여기 오는 내내 계속 절뚝거리던 너를 생각한다. 웃어 보이면서도 자주 힘들어하던 너를 안다.

그때 제게 헤어짐을 말하는 너를 잡지 못한 것은 죄책감 때문이다. 네게 의미 없을 격려를 전하고, 네 옆에서 멀쩡히 뛰고 있는 저 자신을 마주하며 동경이 사라지고 괴로움만이 남는 것을 보는 것은 저 또한 괴로움뿐이기에. 눈치가 빠른 너는 그것을 알고 제게 그리 말했다.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그중에 좋은 사람이랑 사귀어요. 전 좋은 애인은 아니잖아요. 청첩장은 주세요. 꼭 갈게요.‘

 

그리 말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은, 혹여나 제가 매달리는 것이 너를 더 힘들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의 저도 어지간히 겁쟁이였다. 힘들어하는 너에게 무엇이라도 짐을 얹을까 모든 게 조심스럽고 두려워서 저는 잡을 용기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상호야.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네가 떠오르는 거 있지. 너만큼 나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그냥, 적당히 멀어지려고 했는데. 기어코 저는 상호를 만나러 부산에 왔다. 아직도 절뚝거리는 다리를 제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상호의 마음을 어림짐작하면서도 보고 싶어서. 혹시나 시간이 많이 지난 네가, 마음의 상처가 나아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제 의심할 여지 없던 호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너는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숨기는 것이 능숙해진 건지, 헤어지고 나서 마음도 멀어진 건지. 저는 멀어질수록 네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는데 너는 아주 홀가분하게 나를 놓아버린 건지.

 

"상호야, 형 봐봐."

 

햄이라는 호칭도 쓰지 않고, 단정히 형이라고 부르는 네가 서운하면서도 그 점을 말하면 듣게 될, 혹은 알게 될 이유가 무서워 묻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술이 어느 정도 채인 네가 얼마나 솔직해지는지는 저만 알았다. 너는, 의외로 너한테는 관심이 없잖아.

네가 고개를 든다. 일부러 소주를 잔뜩 넣었던 탓에 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마주한다. 병찬은, 기어코 눌러두었던 마음을 꺼내 든다.

 

"아직도 나 좋아해?"

 

제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아, 나는…. 엄청 절박하구나. 지금 제 표정이 상상도 가지 않았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애초에, 맨정신임에도 어쨌든 술을 마셨잖아. 그럼…. 물어볼 수 있잖아. 그렇지, 상호야. 응?

상호는 바로 답하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속이 곪아가는 것만 같았다.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 왜 좋아한다고 안 해줘. 차라리 아니라는 답이라도 해줘. 뭐라도, 뭐라도 하게 해줘. 너를 완전히 포기하던지, 너를 잡게 해줘. 상호야.

 

"모르겠어요."

"...왜?"

"햄을 보면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싶어요.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응."

"근데…. 햄 옆에 있고 싶지 않아요. 햄은 너무 빛나서, 옆에 있는 걸 상상만 해도 괴로워서…. 멀리 있고 싶어요."

"..."

"햄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 더 이상 안 미안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상호야."

"햄 옆에 있으니까 죽을 것 같아요…."

 

네가 손을 뻗어 술잔을 들더니 그대로 쭉 들이킨다. 휘청거리는 몸이 끝내 한쪽으로 쭉 무너진다. 그런 너를 바라보다가, 문득 제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호야. 네가 나를 결국 놓지 못했다는 것에 안도를 느끼는 내가, 너에겐 정말 끔찍하게 잔인하겠구나. 하지만 너도 나에게 잔인하게 굴었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너를 둘러업는다. 아직 정신이 말짱한건지 네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는 것을 확인하고 네 방 침대에 눕혀주었다. 침대가, 혼자 쓰는 것치곤 꽤 넓었다. 이불을 덮어준 뒤 가만히 너를 내려다보다가 너를 살짝 밀어내곤 네 옆에 누웠다. 조금 버겁긴 하지만 둘이 눕기에 너무 모자라진 않은 이 공간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너는 똑똑하고 눈치가 좋았으며, 나에 대해선 뭐든 알았으니까. 내가 기어코 네게 돌아올 것 또한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가만히 끌어안는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뜨끈하게 느껴지는 네 품에 머리를 부볐다. 잠결인지 술기운인지, 저를 마주 끌어안아 오는 팔에 몸을 맡긴다. 조금 기다리면 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린다.

네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어도 포기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너는 나를 여전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내가 너에게 뭐라도 된다고 말했다. 병찬은 좋아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제겐 다시 기회가 생겼다. 저는 태생이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병찬은 작게 웃는다.

멀리서 각자 괴로워하는 것보다, 함께 힘들어하자. 상호야.

그리 속삭이며 병찬은 몰려오는 졸음을 받아들인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병찬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손길을 느꼈을 때였다. 상호는 자주, 잠든 병찬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거나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병찬은 잠든 척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상호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투박한 손이 계속해서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는 것에 들키지 않음을 짐작한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한참이나 계속되더니, 이내 병찬의 머리를 자연스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상호가 일어나는 것으로 끝났다. 느른하게 늘어진 팔 안에서 상호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잡을까, 하지만 인제 와서 깨어나는 척을 해도 어색할 거란 판단으로 병찬은 힘을 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 이어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병찬은 한참이나 그렇게 굳어있다가 음…. 깨어나는 소리를 내며 조금 뒤척인 뒤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상호가 없었다. 그렇겠지. 그럼에도 병찬은 혹시나 제가 깬 것을 들킬까 봐. ...의미 없이.

멍한 정신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냈다. 상호와 만난 뒤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탓에 많은 연락이 와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연락은 적당히 답하고 중요한 연락은 꼼꼼히 읽고 답을 보낸 뒤, 병찬은 익숙하게 자신의 SNS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비공개를 걸어두고, 가장 위로 올라오게 만들어둔 글을 누르면 그 안에는 행복했던 시절의 상호가 가득 있다. 헤어지고 나서 사진을 정리하며 상호가 웃는 얼굴들만 모아 올려두었던 글. 병찬은 아침에 일어나면 연락을 정리하고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루틴이 생겼다. 버릇처럼 그 사진들을 훑어보려다 문득 시간을 본다. 고등부 코치는 언제 나가야 하더라…. 어차피 사진을 볼 시간은 충분히 있겠지. 병찬은 휴대폰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고 있진 않아도 당장 제 앞에 있는 상호를 보고 싶었으니까.

 

밖으로 나오면 상호는 씻은 건지 수건을 머리에 얹고 밥을 하고 있었다. 어제 만든 안주 위에 대충 그릇을 덮어놓은 덕인지 그것을 새로 볶아두고 국을 끓이는 것 같았다. 그릇이 두 개씩 나와 있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 가슴이 울렁거렸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이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말한다.

 

"씻고 나오세요. 형. 밥 먹을 거죠?"

"응."

 

간단히 씻고 나오면 모두 준비해놓고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상호가 보였다. 그 앞에 앉으니 제게 시선 한 번 주고 상호가 수저를 든다. 문득 예전에, 네가 장난인 듯이 어른 먼저 수저를 들어야 한다고 까불거리며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땐 울컥해서 제가 삐져버렸던 것 같은데. 아, 이런 기억은 오랜만이네. 그것이 반가워 저도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밥을 먹고 상호는 뛰어가야 한다며 바삐 나갔다. 코치라서 그런가 편하게 입고 나가네. 처음 만났을 때도 편한 운동복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병찬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멍을 때린다. 점심 먹고 와달라고 했으니 그때까지 할 것이 없었다. 설거지는 진작에 해두었고. 뭘 하면 좋을까. 그러다 병찬은 일어난다. 거실을 천천히 둘러본다. 사람이 사는 곳이지만 TV도 없는 거실은 사용감이 거의 없었다. 운동할 때 쓰는 것인지 요가 매트 같은 것이 구석에 세워져 있는 것은 보이지만 먼지가 조금 쌓여있어서 요즘 쓰진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찬은 발을 옮겨 상호의 방을 다시 연다. 처음 들어왔을 땐 술을 먹은 데다 어두워서 둘러볼 생각을 못 했고, 아침에는 멍한 정신이라 둘러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상호의 방을 천천히 살핀다. 방문은 방의 왼쪽 구석에 자리해있었다. 문을 열면 가운데에 있는 넓은 창에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오른쪽 구석의 침대는 한쪽 면을 거의 차지할 만큼 넓었다. 문 바로 앞에는 넓은 탁자형 책상이 있었고 그 위의 책꽂이에는 한눈에 봐도 두꺼운 책들이 꽂혀있다. 농구공은, 없나. 예전의 집에는 항상 있었는데. 병찬은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문 옆의 벽에는 옷을 걸어두는 행거와 옷장이 있었다. 병찬은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뭘 기대하는 건지, 잠깐 심호흡하다 옷장의 문을 연다. 여전히 농구공이 없었다.

병찬은 정처 없는 시선으로 옷장 안을 살핀다. 옷장 안 커다란 상자가 보였지만 언뜻 보니 옷을 넣어두는 곳이겠지 싶어 옷장을 닫았다. 걸음을 옮겨 책상 앞으로 간다. 전공 책으로 보이는 책들은 죄다 재활이니, 물리치료니, 선수 지도에 대한 것들로 가득했다. 상호, 다리 그래가 선수 못한다 하더만 물리치료사 하겠다던데요. 선수 지도에 관한 책은 비교적 새것 같았다. 병찬은 그것을 보다가 물리치료에 관한 책을 뽑아 든다. 별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는데, 많이 폈던 페이지에 알아서 페이지가 멈춘다. 무릎에 관한 것에 꼼꼼히 필기하고 줄을 그어둔 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 조금 더 해야 했었나….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고 책꽂이에 다시 넣는다.

 

아침에 먹다 남긴 것으로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다시 설거지를 깔끔히 한 병찬은 지상고로 향했다. 어제는 가게에 들렀다 왔던 탓에 가는 길을 몰라 지도를 열었다. 버스로 10분, 세 정거장. 이 정도면 뛰어가는 게 나으려나. 상호는 어떤 길로 갈까. 병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큰길을 따라가니 중간중간 있는 휴대폰 판매점이나 슈퍼 같은 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저런 데서 나오면 유명한 음악이겠지, 싶어 들어보았으나 딱히 아는 건 없었다. 아주 예전에는 상호가 요즘 유행하는 노래라면서 알려주고 같이 듣곤 했는데. 저를 재촉해서 뭔 이상한 챌린지를 했을 때는 웃기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조회수가 높게 나왔다며 자랑도 했었지. 아, 이것도 오랜만인 기억이야. 병찬은 작게 웃었다.

느긋하게 주변을 구경하며 걸은 덕인지 40분이 넘어서야 지상고에 도착했다. 중간에 마트에 들러 애들에게 먹일 아이스크림도 챙겼다. 감독님에게 드릴 술도 한 병 챙겼으니 이 정도면 적당히 눈인사는 할 수 있을 터다. 어제처럼 체육관 쪽으로 다가가니 문득 문 근처에 있던 상호와 눈이 마주친다.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꽉 찬 양손을 슬쩍 들어 보였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온다. 보나 마나 제가 언제 오나 기다렸을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다가온 상호가 무거워 보이는 아이스크림에 손을 뻗기에 순간 뒤로 미루려다 무겁다 너스레를 떨며 상호에게 건네주었다. 눈치챘을까. 슬쩍 눈치를 봤지만 상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받아 간다. 무거운 것을 드니 자연스럽게 상호의 절뚝거림이 조금 더 눈에 보인다. 병찬은 그것을 못 본 체하며 발걸음을 빠르게 해 상호보다 조금 앞서 걸었다.

지상고의 감독님은, 솔직히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찾아온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감독님이 소개하기도 전에 어! 하며 저를 알아본 듯한 몇몇 아이들이 있었으나 감독님이 자랑하듯 저를 소개하자 모든 아이들이 감탄사를 흘리며 저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본다. 귀엽네. 예전 상호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웃는 얼굴로 양손을 작게 흔들어 보였다. 상호는 제 옆에 서서 가만히 그런 아이들을 바라본다.

 

"박병찬 선수는 여긴 와 오신 겁니까?"

"마! 니 친구도 아니고…. 어…."

"박병찬 아저씨?"

"와, 그 말은 좀 아픈데?"

"죄삼다…."

"아냐~ 너네한테는 아저씨 맞지."

"국대 가드한테 아저씨가 뭐고. 그냥 형이라고 해라. 괜찮제?"

"어휴. 그럼 저는 감사하죠."

"그럼 박병찬 형은 여기 왜 오신 거예요?"

"나는~ 상호랑."

 

잠깐 말이 멈춘다. 우리가 뭐였더라…. 처음엔 맞붙은 적수였고, 그 뒤로는 네 일방적인 호감에 기댄 친한 형·동생. 그러다 같은 대학 선후배가 되었고…. 그다음엔 연인이었지. 그 후엔 헤어진 전 애인이 되었고. 우린 지금 뭘까. 전 애인? 친구? 아는 형·동생? 짧은 침묵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상호가 뿌듯함을 내포한 얼굴로 으쓱거리며 말한다.

 

"나랑 병찬 형은 친구야. 같은 대학도 나왔거든."

 

어린아이들의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몇몇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상호를 보았고, 상호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억울하다는 듯 꽥, 소리를 질렀다. 예전이면 제게 뭐라도 말해보라며 매달렸을 텐데 그저 삐진 티만 내는 꼴을 멀거니 보다 아무렇지 않게 상호의 어깨에 제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팔 안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상호는 보란 듯이 웃었다. 저 또한 보란 듯이 웃었다. 나중에 연기를 해도 되겠네. 순수한 감탄…. 글쎄. 순수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제가 먼저 친한 척을 하자 그제야 의심의 눈이 풀린다.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얼마나 친한지를 질문에는 감독님과 상호가 아이들에게 연습이나 하라며 해산시킨 덕에 둘러대지 않아도 되었다. 제 팔 안에 있던 상호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간다. 저도 모르게 그것을 꾹 잡으니 아무렇지 않게 제 손을 떼어내는 것에 더 이상 잡지 못했다.

감독님이 온 김에 애들 슛 폼 좀 봐달라고 하시기에 몇몇 아이들의 폼을 봐주었다. 너는 팔을 더 뻗어야겠다. 제대로 다리에 힘을 줘서 올라가. 슛 줄기가 이상하니까 이렇게 고쳐봐. 등등의 이야기를 해주며 시범을 위해 몇 번 공을 던지자 아이들의 탄성이 다시금 나온다. 더 보여달라는 요청에 맞춰 몇 번 더 던지다가 환히 웃으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상호와 눈이 마주친다. 미처 숨기지 못한 괴로움의 편린, 그대로 뒤를 도는 너를 보고 저도 급하게 뒤를 돈다. 감히 내가 너를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을지를 남에게조차 들키고 싶지 않아 공을 줍겠다는 핑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어코 훈련이 모두 끝날 때까지 앉아있다가 상호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이들 밥은 어쩌냐고 물었더니 이제 지원이 많아 저녁에도 급식이 나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 다행이네. 그리 대답한 뒤 부산에 왔을 적 변함이 없던 국밥집이 생각났다. 상호에게 오랜만에 국밥이나 먹을까, 말을 붙이니 저는 이제 너무 많이 먹어서 질렸단다. 그래? 의미 없는 답변을 한다. 그럼 너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그러곤 상호의 옆에서 천천히 걸었다.

상호의 안내로 간 곳은 일식집이었다. 일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입맛마저 바뀌었나 싶었지만, 내색 없이 먹을 것을 시켰다. 술을 팔길래 술도 두 병. 메뉴판을 내려놓으니 저를 뻔히 보는 시선에 저 또한 상호를 마주 본다.

 

"벌써 술 마실라고요?"

"사케 맛있잖아. 네 것도 한 병 시켰어."

"여기 비싼데."

"에이~ 이 정도는 놀러 온 형이 사지."

 

상호의 시선이 내려간다. 저 또한 말을 굳이 붙이지 않았기에 이어지는 것은 침묵이다. 주변 손님들 덕에 완전히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뭐. 병찬은 이참에 가만히 상호를 본다. 예전의 상호도 무표정일 때는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서른이라 그런지 볼살이 쏙 빠진 탓에 더욱 냉한 인상이 되었다. 그래도 웃으면 순한 인상이 되는데, 아이들 앞에서는 그리도 잘 웃더니 제 앞에서는 잘 웃지 않았다. 저와 눈이 마주치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으나 그뿐이다. 전처럼 밝게 이것저것 얘기를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이의 얼굴. 병찬은 너무나도 낯선 그 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과거를 끄집어낸다.

밥을 먹으면서는 간단히 이야기했다. 일식은 오랜만이라던가, 오는 길에 예전에 우리가 자주 갔던 국밥집을 갔다던가, 부산 바다는 여전하다던가 등의 이야기. 상호도 그것에 맞추어 농구부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병찬은 그 이야기에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상호의 술잔에 계속 술을 따라주었다. 저도 마시는 체를 하며 술병을 모두 비우자 상호의 얼굴에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온 것이 보였다.

적당히 계산하고 택시를 불러 상호를 태운 뒤 나오기 전 찾아두었던 주소를 부른다. 상호의 고개가 자꾸 기우뚱거리기에 제 어깨에 기대게 하자 얌전히 있다. 상호야. 작게 부르면 네…. 하며 답하는 것을 확인하며 가만히 내려다보다 저도 그 머리에 머리를 기댄다. 택시 안은 아무것도 틀지 않아 적막했다. 그런 사이에 저는 조용히 상호에게 묻는다.

 

"형 아직 좋아해?"

"모르겠어요…."

"나도 좋아해, 상호야."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니라 상호를 부축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방으로 끌고 들어가, 적당히 겉옷들을 벗겨주니 그대로 침대로 가려는 걸 달래서 양치도 시키고 손발도 씻겼다. 그 후 침대에 넣어주니 꾸물꾸물 잘 자세길래 침대에 걸터앉아 그것을 보다가 슬쩍 콕, 어깨를 찔러본다.

 

"상호야. 나, 네 옷 좀 빌려도 돼?"

"햄 옷 잇서요…."

"어디?"

"장롱 안에…. 문 열고 상자…."

 

아침에 열어본 옷장이 떠오른다. 상자가 꽤 두껍고 깊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다시 연다. 잠이 깰까 싶어 불을 켜지 않은 탓에 잘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안을 더듬으니 상자가 걸렸다. 겉을 더듬어 잡을 곳을 찾고 그것을 꺼낸다. 생각보다 묵직한데…. 옷만 꺼낼 요량으로 그것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대로 조심히 문을 닫고 거실 등을 켠 뒤 탁자 위에 상자를 올린다. 내 옷 안 버렸나? 그리 생각하며 뚜껑을 연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아마 제가 썼던 것 같은 칫솔에, 양치 컵에, 제가 편하게 입었던 옷들, 장난스럽게 선물했던 제 사인이 있는 농구공, 그 외에 상호에게 선물했었던 자잘한 선물들, 같이 입자고 했던 커플 잠옷 두 벌, 이런 게 추억이라며 같이 찍었던 사진 액자 등. 제 흔적이 모두 담긴 상자를 한참 내려다본다.

박병찬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 앉는다. 병찬이 숙소 생활을 하는 탓에 제 물건들은 상호의 집에 쌓였었다. 헤어짐을 고지받고서 저는 제 짐을 가져갈 생각을 못 했고, 상호는 가져가라 연락하지 않았다. 모두 알아서 처분했겠거니, 하다못해 어디 구석에 처박았겠거니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담겨있는 것에 병찬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물품 사이사이에 박혀있는 보습제가 특히나 그랬다. 병찬은 마른 웃음을 뱉다 제가 가장 편히 입었던 옷을 꺼내 든다. 운동을 그만두며 먹는 양도 서서히 줄인 탓에 예전보다 체격이 조금 줄어서 그런가, 원래도 헐렁하게 입던 옷은 제 감각보다 더 품이 남았다. 상자를 들여다보던 병찬은 뚜껑을 닫았다. 그것을 다시 집어넣으려다 탁자에 내버려 둔다.

다시 상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상호는 자는 건지 눈을 감고 있기에 그 옆에 조심히 누웠다. 그 순간 상호가 눈을 뜨고 저를 쳐다보기에 순간 멈칫거렸던 병찬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런 병찬을 바라보는 상호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진다. 괴로워 보이는 모습을 병찬은 가만히 눈을 마주 보며 상호의 손을 잡았다. 빠져나가고 싶은 듯 손을 당기는 것에도 놓아주지 않으니 곧 포기한 듯 상호는 긴 숨을 내뱉으며 손이 잡힌 채로 고개를 벽으로 향했다. 병찬은 그 모든 것을 보며 조심스럽게 상호를 안고, 어깨에 제 머리를 부볐다.

 

"상호야."

 

작게 부르는 소리에 움찔하는 손, 이어 상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병찬을 쳐다본다. 병찬은 여전히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내민다. 버석한 입술이 맞닿으면, 기어코 제게 잡혔던 손이 빠져나와 제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병찬은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제 연인이 저를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도록.


괴롭다고 하더라도

병찬은 눈을 뜬다. 옆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아직 졸린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장 앞에 섰다. 문을 여니 꺼내어두었던 상자가 다시 들어있었다. 봤구나. 병찬은 확인을 마치고 옷장 문을 닫는다. 느릿하게 걸어 방문을 여니 어제처럼 상호가 밥을 만드는 것 같았다.

조용히 씻으러 들어갔다 나오니 상을 차린 상호가 수저를 들어 밥을 깨작이고 있었다. 멀쩡한 낯으로 맞은 편에 앉아 수저를 든다. 제 얼굴에는 시선도 주지 않기에 제가 상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제의 열렬하던 시선은 어디로 갔는지 짙은 피로를 나타내는 눈가에는 눈그늘마저 옅게 서렸다. 그것이 예민한 인상과 섞이니 퍽 성질이 더러워 보였다. 전혀 아닌데. 병찬은 아무렇지 않게 밥을 한술 뜬다. 한쪽은 먼저 먹었지만 깨작이고 한쪽은 크게 먹으니 결국 병찬의 식사가 빨리 끝났다. 그와 동시에 상호가 수저를 내려놓기에 병찬은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호야. 내 물건 왜 안 버렸어?"

 

상호의 오른쪽 광대가 조금 올라간다. 이 질문이 불편한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금세 평온을 가장한 낯으로 제 질문을 짐작하고 싶은 듯 저를 쳐다본다. 날카로운 시선에 부드러이 웃어 보인다. 숨기는 것이 익숙해진 상호만큼이나 병찬 또한 숨기는 것을 잘하게 되었다. 반질반질한 낯에서 결국 해답을 얻지 못한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을 치운다. 그것을 앉아 집요히 쳐다보는 병찬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으면서.

평온을 가장하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진다. 병찬은 웃었다. 어차피 제가 여기 있음으로도 상호는 괴로울 것이다. 제가 이리 속을 긁어대도 괴로울 것이 똑같으니 병찬은 마음껏 긁어대기로 했다. 그리하여 병찬은 상호에게 저를 괴롭게 하기를 허락하는 것이다. 화를 낼까, 담담하게 말을 할까, 아니면 완벽한 무시를 할 수도 있겠지. 병찬은 할 말을 고르는 듯 움직이지 않는 상호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버릴 수가 없어서요."

"왜?"

"저한테 남은 형의 마지막 흔적일 거로 생각했으니까."

 

습기 섞인 한숨과 함께 네가 뒤를 돈다. 싱크대에 그릇들을 담아놓고 물을 받은 뒤 출근을 위해 움직이는 네 뒤를 시선으로 쫓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말이야. 예전의 옷을 입은 나를 보고 너도 내 과거를 떠올렸을까. 떠올렸다면 너는 어떤 나를 생각했을까? 어떤 추억을 떠올렸을까. 병찬은 그것이 궁금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지금의 너에게 물어봤자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병찬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형."

"...어?"

"오늘도 오세요?"

"글쎄…. 방해 안 돼?"

"애들도 좋아하니까 형만 괜찮으면…."

"아-…. 그래.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놀러 갈게. 어제처럼 점심시간 후에?"

"네."

 

그렇게 괴롭다는 얼굴을 해놓고도 잘도 저를 부르는구나. 이제는 제가 의중을 짐작하기 위해 그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너는 말하는 내내 등을 보이던 모습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근질근 문다. 마음껏 긁어대기로 한 주제에 상호가 저렇게 먼저 말하는 것에 마음이 쓰리다. 차라리 작작 하라고 제게 소리를 질렀으면 기꺼이 상처받았을 텐데. 들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제 속을 다 본 걸까. 마음속으로 잠깐 갈등했으나 곧 한숨을 쉬며 일어난다.

설거지를 다 끝마치고, 지상고로 가기 위해 나선 병찬은 어제와 다른 길로 걸었다. 굉장히 복잡한 골목길이었는데, 지도 앱을 최대로 확대한 병찬은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도 종종 막힌 골목길을 마주했다. 이럴까 봐 조금 일찍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중간에는 작은 시장도 있었다. 그 사이를 지나가며 병찬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상호는 이런 곳을 매우 좋아하진 않았지만 오면 또 살갑게 굴면서 이것저것 얻어내곤 했는데. 퇴근길에 이곳을 들르는 상호를 생각해낸다. 생각 없이 사는 저와 다르게 의외로 꼼꼼하게 고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냈다.

떠올려낸 상호는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라 병찬은 지금 상호의 모습을 덧입힌다. 운동을 그만두어 조금 슬림해진 몸, 20대 남자애들이 입을 법한 셔츠 카라핏의 연노랑 색 맨투맨은 내려놓고 편한 흰색 티셔츠 위에 편히 입는 지상고의 저지를 입혀준다. 다리에 딱 맞는 청바지는 헐렁한 운동복으로. 집중할 땐 자주 날카로워지는 얼굴은 좀 더 볼이 패이고 광대가 도드라진다. 그리고 눈이 조금 들어가고, 그 밑에 피곤한 기색을….

병찬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상상을 날려 보낸다. 그 얼굴이 저를 돌아보고 괴로워하는 모습까지 닿기 전에. 그제서야 아직 상호의 미움을 받을 준비가 덜 되었구나 자각했다. 그제서야.

 


 

"뱅차이 니는 얼마나 여 있다 가노?"

"아마 일주일 정도 있지 않을까요? 감독님, 저 벌써 쫓아내고 싶으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이고. 어제도 오늘도 오니까는 또 언제 오나 물어볼랬지."

"상호만 오케이하면 맨날 와도 좋은데요~"

"뭐고, 지상고 코치 자리라도 노리나?"

"그런 건 아니구요."

 

감독님 옆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아이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다가온다. 왜~? 부드럽게 물으면 곧 성인이 될 아이들이 조잘댄다. 형 돌파 한 번 보여주면 안 돼요? 누가 그리 물어오는 것에 작게 웃는다. 한번 막아보고 싶어? 그리 물으면 다들 부끄러운 듯 눈치를 보고, 그중에서 용기 있는 녀석들이 해보고 싶다고 손을 올린다. 괜찮을까요? 감독님을 쳐다보면 감독님은 호쾌하게 웃으면서 절대 봐주지 말라고 말한다.

병찬은 아이들이 건네준 공을 가볍게 튕겼다. 영원히 낯설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공의 감각이 기분 좋았다. 수많은 시선이 저에게 꽂힌다. 호기롭게 저를 막아보겠다고 말하는 아이를 마주하면서도 제게 꽂히는 하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병찬은 특별히 아이에게 간다~ 하며 언질을 주었고 긴장하며 집중하는 것까지 기다린 다음 왼쪽으로, 이어 저를 뒤늦게 따라오는 아이를 내버려 두고 오른쪽으로 꺾어 완벽히 지나친다. 얼빠진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아이를 마주하며 하하 웃다 가볍게 공을 던져 골대에 넣는다.

치사하다면서 한 번 더 하자는 아이에게 야유가 떨어지며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상호가 가라앉히고 천천히 순서를 지키자며 정리한다. 결국 농구부원의 반과 상대하고서야 더 이상 나서겠다는 아이가 없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아이, 할 수 있진 않겠지만 제 돌파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아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아이, 모두 뚫었다. 그야 아직 미숙한 아이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병찬은 느긋하게 공을 튕긴다.

 

"프로에서도 형을 막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럼~ 꽤 많지. 나라고 안 막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애들한테 질 만큼은 아니다."

"누가 막을 수 있었어요? 최종수?"

"뭐 걔도 막고…."

 

흘끔, 시선이 올라간다. 여태 저를 쳐다보던 이가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는 것을 확인한다. 제가 프로에서 가장 걱정했던 상대는 상호였다. 그걸 상호도 알았다. 언젠가는 내가 박병찬 킬러라는 별명이 생길지도 몰라요. 라며 의기양양하던 꼴이 선하다. 저도 건조한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린다. 상호는 여전히 제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이젠 스스로 괴로워지나. 그 꼴이 좀 웃겼다.

시끄러워지는 애들을 보며 웃던 병찬이 훈련 열심히 해서 나 막아봐~ 같은 말로 애들을 달래고 다시 연습시킨다. 애들은 다들 웃었고, 그 사이에서 병찬은 슛 폼을 봐준다. 종종 오는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고개를 돌렸다. 그때마다 상호는 고개를 돌렸다. 괴로우면 보지 않으면 될 텐데, 상호는 병찬이 보고 있지 않으면 쳐다보았다. 무슨 의미일까. 병찬은 잡생각을 뒤로 하고 시범을 보이기 위해 볼을 던졌다.

 

이번에도 훈련이 끝난 상호는 저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갔다. 전에는 일식집이더니 이번엔 한식집이었다. 아는 사이인 건지 사장님과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호는 웃고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만 보여주고 병찬에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미소인지라 병찬은 그것이 조금…. 적당한 친분의 타인이 받는 호의마저 병찬은 부러웠다.

이어 서로 메뉴를 시키고 나면 또다시 침묵이다. 이번엔 상호가 술을 시켰다. 소주 두 병이 먼저 자리에 왔고 상호는 그것을 따서 한 잔씩 따른다. 병찬은 이번에도 적당히 입술을 적시며 적게 마셨고 상호는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식당 밖으로 나올 땐 또다시 상호가 취한 상태다. 병찬은 익숙하게 상호를 부축했다. 이번의 식당은 집으로 가는 길에 있었고 상호가 걷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인 상태는 아니라 병찬은 그냥 걷기로 했다.

그렇게 적막 속에 걷던 병찬은 반쯤 도착했을 때 가볍게 묻는다.

 

"상호야."

"네…."

"오늘 나는 왜 불렀어?"

"...보고 싶어가…."

"뭐를?"

"...어제 애들이…. 햄…. 돌파 잘하니까 막고 싶다고…."

"응."

"내일도 오면 조른다길래…."

 

술에 취한 탓에 상호의 말이 느렸고 둘은 다리가 길어 보폭이 넓었다. 남은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무사히 상호를 집에 데려온 병찬은 어제처럼 양치시키고 손발을 씻겼다. 침대에 꾸물꾸물 들어가는 꼴을 본 뒤 옷장 문을 연다. 휴대폰 불빛으로 제 옷을 끄집어낸 병찬은 그대로 옷을 갈아입고 상호의 옆에 누웠다. 오늘은 상호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렇게나 쉬지 않고 마시더니 꽤 맛이 갔던 모양이다.

병찬은 상호를 껴안는다. 생각보다 더 괴롭네. 제가 있으면 괴롭다는 애가 가장 괴로울 장면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저를 불렀다. 병찬이 돌파하는 장면이야 SNS에 모음집으로 몇 편이나 있었는데. 진짜 네 마음을 모르겠네. 좋아할 거면 잔뜩 좋아해 줘. 싫어할 거면 소리 지르고 상처를 줘. 박병찬은 처음으로 같이 괴로워지자고 마음먹었던 다짐을 살짝 후회했다. 생각보다 더욱 목 안이 꺼끌꺼끌한 기분이었다. 그저 겪지 못해 멋대로 생각했던 치기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하지만 상호야. 나는….

 


 

병찬은 그 뒤로도 상호와 아침을 함께 하고 점심을 먹은 뒤 지상고에 들러 감독님과 시시덕거리거나 애들의 연습을 봐주었다. 상호는 점점 눈을 피하지 않았고 병찬은 그 시선에 익숙해졌다. 세 번째로 갔던 한식집은 상호가 자주 들르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상호는 거기서 항상 술을 마셨고, 병찬은 취한 상호를 부축하고 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저를 좋아하냐고 묻는 것이었고, 조금씩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가 계속 있는 거 싫어?“

"모르겠어요…."

"나 오는 거 안 불편해?“

"좀 불편해요…."

"애들이 나 좋아하더라, 그치?“

"...햄은…. 그런 사람이니까…."

"아직도 날 보면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그런 문답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다 결국 예전에 잡아놓은 스케줄 탓에 다시 서울로 가야 하는 날. 병찬은 언제나처럼 술에 취해 누워있는 상호를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열이 올라 흐린 눈이 저를 올려다보는 것을 가만히 마주하던 병찬은 부드러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 오늘 올라가."

"...왜요?"

"스케줄이 있어서."

"또 와요?"

"모르겠네. 와도 돼?"

"...모르겠어요."

"응."

 

그대로 상호의 눈을 덮고 기다리자 고른 숨이 느껴진다. 확실히 잠든 것을 확인한 병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찬의 옷을 꺼내기 편하게 옷장 옆에 내놓은 상자가 보인다. 저가 입던 옷들을 다시 개켜 넣고 그 상자를 옷장 안에 넣어두었다. 가져온 짐은 애초에 별로 없었다. 제가 쓰던 칫솔을 보다가 그것을 집어 뒤늦게 상자 안에 던져넣었다. 잠에서 깬 상호가 꿈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철없는 이유였다. 설거지하고 뒤집어놓은 그릇 한 쌍도 찬장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어쩌면 덜 놀라길 바라는 걸 수도 있지. 병찬은 그대로 상호의 집에서 나왔다.

 


 

서울로 올라온 박병찬은 기차에서 조금 선잠을 자고 집으로 가 스케줄 전까지 다시 잠을 잤다. 어쩐지 너무 피곤했다.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한 몸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적당히 넘기다 상호와 있으면서 한 번도 긴장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롭게 만들겠다고 마음먹어놓고 그것이 편할 리가 없던 탓이다. 남을 괴롭히길 좋아하는 족속들은 예전에도 이해를 못 했는데,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이해한다. 저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드니까. 농구를 할 땐 그나마 잊을 수 있었는데 농구를 그만두니 상호를 잊을 길이 없었다. 혹시나 그저 외로워서, 농구를 그만둬서 그러는 걸까. 싶어 사람을 좀 더 많이 사귀고, 이런저런 데에 얼굴을 비춰봤음에도 상호는 잊히지 않는다. 사랑해서,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라는 핑계로 외면해왔던 카톡방을 찾아본 것이다.

상호를 마주하면서 깨닫는다. 상호가 괴로울까 봐 순순히 헤어져 주던 사랑은 이제 너무나도 커져 상호가 괴로워도 제 옆에 있기를 바랐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저 자신도 괴로운 것을 아는데,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얼룩 없이 웃어주는 그 미소는 원래 제가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남김없이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혼자가 되니 자각한다. 아, 약속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내려갔을 것이다. 병찬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스케줄을 끝마친 병찬은 이번엔 호텔도 예약하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잡았다. 오는 연락은 다 적당히 쳐냈다. 내려가는 내내 멍하니 허공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번에 다시 내려온 저를 보고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너는 여전히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이번에 내려가면 더 괴로워할까, 아니면 두 번째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할까. 부산에 도착한 병찬은 이미 호텔을 잡아둔 주제에 택시 기사에게 상호의 집을 목적지로 말한다. 시간을 보니 집에 있을 것 같아 초인종을 누른다. 조금 기다리면 딸깍, 소리가 들린다.

 

"상호야. 형 재워줘."

 

이틀 만의 귀환이다. 이어 문이 열린다. 병찬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갔다. 잠을 자지 못한 듯 다크서클이 내려온 얼굴에 병찬은 가지고 온 캐리어를 세워두고 상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상호는 병찬을 살피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병찬은 웃는 얼굴로 팔을 벌려 상호를 껴안는다. 품속의 몸이 굳어가는 것을 알았으나 놓아주지 않았다. 상호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상호의 몸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상호야. 형 없으니까 어땠어?"

 

술에 취하지도 않은 이에게 질문을 했다. 상호는 조금,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병찬을 강하게 밀쳤다. 그 탓에 휘청이는 것을 보고 병찬은 상호의 팔을 꽉 잡아 고정한다. 헉, 헉…. 숨을 참았던 모양이다. 상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병찬을 노려본다.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워, 힘들어,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런데도 이것이 상호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피할 마음이 들지 않아 병찬은 받아들인다.

 

"형이 없으니까 어땠냐고요?"

"응."

"어땠을 것 같은데요?"

"글쎄, 편했어?"

 

병찬은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나와 있는 상자를 본다. 뚜껑이 열려있었고, 제가 개켜놓은 그대로 담긴 옷들이 보였다. 상호는 이를 악물더니 그대로 마저 병찬을 뿌리치고 제 침실 쪽으로 향했다. 병찬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옷을 벗고 상자 안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왔음에도 그랬다. 이후 침실로 들어가면 상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누워있었다. 그럼에도 몸이 벽 쪽에 붙어있는 것이 보인다. 병찬은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고 그대로 누워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불 속에서 다시금 상호를 껴안는다. 상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병찬은 그를 꼭 껴안고 등에 머리를 기댄다. 상호의 몸이 다시 작게 떨린다. 그만둘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병찬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기엔 늦었다.

 

"상호야."

"..."

"상호야, 대답해줘. 응?"

"...네."

"멀리서 각자 괴로워하는 것보다, 함께 힘들어하자."

 

잠들지 않은 이에게 전하는 말은 흔들림이 없다. 처음 말할 때는 제 기도였고 두 번째는 통보였다. 함께 힘들어하자. 같이 있자. 너는 어차피 나 거절 못 하잖아.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줄 거지. 그 모든 생각을 담은 말이었다. 작게 떨리던 몸이 기어코 훌쩍이는 소리를 낸다. 그것을 달래듯 조금 더 세게 껴안은 상태로 등에 기댄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이를 악문다. 네게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실감은 제 속을 저며놓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상호야, 나는 이제 네가 나 없이 행복한 것을 바라볼 바엔 나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별수 없이 계속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꺼내놓지 못하는 마음은 제 살을 불살라 태우는 화염이다. 병찬은 아주 길고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시큰거려온다.


괴로움 또한

여전히 상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준비했고, 병찬은 하품하며 밥을 같이 먹은 뒤 상호를 배웅했다. 다만 지상고에는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고 상호에게 술을 먹이지도 않았다. 잔잔한 일상이었다. 병찬은 뒤늦게 호텔 예악을 취소했다. 병찬의 캐리어는 상호의 책상 옆에 세워졌다.

상호가 올 시간이 다가오면 병찬은 느긋하게 상호를 데리러 갔다. 나오던 상호는 병찬을 보면 담담하게 다가섰고, 둘은 그대로 말없이 걸었다. 술을 먹지 않은 상호는 전처럼 솔직하지 않았기에 병찬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여전히 밤이면 병찬은 등을 돌린 상호를 껴안은 채로 잠을 청했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았다.

 

병찬은 결국 부산에 집을 샀다. 지상고에 가까웠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20층 높이의 깔끔한 신축 아파트였다. 병찬의 집은 거기서 3층이었다. 너무 높은 곳은 묘하게 무섭다는 상호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모든 이삿짐을 옮겨두고 상호가 출근한 뒤에는 꾸준히 정리를 해두었다. 모든 정리가 끝나도 병찬은 그대로 상호의 집에서 살았다. 가끔 제집에 들러 청소만 해두면서.

병찬은 다시 스케줄을 잡기 시작했다. 몇몇 예능 프로에 나갔고 가끔은 고등학교 은사님이 부르는 것에 응하기도 했다. 그 탓에 외박하거나 아주 늦게 들어갈 때마다 상호는 피곤한 낯으로 병찬을 보았다. 병찬은 자신의 스케줄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기를 반복했을 때 어느 날 상호가 말했다.

 

"형. 딱 한 달만 제 앞에 오지 말아주세요."

 

너무나도 피곤해 보였고,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기에 병찬은 선선히 한 발자국 물러섰다. 심장이 두근거렸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평생 눈앞에 보이지 말라는 것이 아님에 안심하는 제가 조금 우습기도 했다. 한 달 뒤에 다시 올게. 상호야. 그 말을 남기고 병찬은 챙겨온 제 캐리어를 들고 상호의 집을 나왔다.

 


 

한 달 뒤 상호를 만나러 간 병찬의 눈앞에는 텅 빈 집만이 남아있었다. 지상고에도 찾아가 봐도 상호가 그만두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쉬고 싶다며 본가로 내려갔다고 했다. 서로의 본가에 놀러 가본 적은 없었다.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온 병찬은 집 안을 둘러본다. 가구의 대부분이 남아있었다. 상호의 옷이나 책상, 책들은 없어졌지만, 침대는 마치 일부러라는 듯이 이불과 시트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고 옷장은 사라졌지만, 병찬의 것들을 담아둔 상자는 남아있었다. 병찬은 어쩐지 기묘한 감각을 느낀다. 그대로 집을 나가 근처 부동산에 들어가 바로 전세로 계약을 맺었다.

그 뒤 병찬은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지상고 감독님의 권유로 코치로 잠깐 일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지켜보았던 상호의 일상에 따라 움직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하고 밥을 먹고. 상호가 무슨 길을 걸었을지는 몰라 매일 출근길을 다르게 했다. 농구부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하고 밥을 먹고 연습을 봐줬다. 가끔은 감독님의 권유로 술을 같이 했는데, 둘이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서 그런가 상호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이야기 속 상호는 정말 행복한 것 같아서, 병찬은 저로 인해 깨졌을 그 평화를 곰곰이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면 온전히 혼자였는데, 병찬은 어쩐지 그게 신기했다. 여긴 상호의 집이었으니까. 상호가 있을 때보다 훨씬 허전했으나 저와 상호가 가장 많이 닿아있던 침대는 남아있어서 그런 건지, 상호가 결국 버리지 못했던 저의 상자가 남아있어서 그런 건지. 우습게도 병찬은 상호가 도망을 갔다기보단 마치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한 것만 같았다. 그게 미쳐버린 저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병찬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으니까, 병찬은 조금 더 상호를 곱씹을 수 있도록 그러기로 했다.

 

시간이 흐른다. 병찬은 가끔 부산 사투리를 썼다. 상호랑 사귈 적에는 많이 옮았는데, 상호를 보지 못하게 되자 빠르게 사라졌었다. 그때 저도 모르게 쓰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더 신기해했다. 병찬이 사투리를 쓰는 게 안 어울린다며 웃기도 했고. 저도 모르게 어조를 묘하게 말했을 때 상호도 엄청나게 신기해했었지. 햄이랑 나랑 같은 출신 같네요. 라며 웃었던 얼굴이 오랜만에 생각났다. 이 추억의 상호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었을 때라 그때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졸업식이 열렸다. 상호가 사라진 건 여름과 가을의 경계선인데 벌써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코치로서 참석한 병찬에게 졸업하는 아이들의 감사가 쏟아진다. 병찬은 웃으며 아이들을 한명 한명 모두 안아주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홀가분해 보였으며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았다. 병찬은 그 사이에서 웃으며 서 있었다. 곧이어 아이들의 작은 환호성이 들린다. 병찬은 뒤를 돌았고, 그새 많이 마른 상호가 가만히 서 있었다. 아이들이 달려가 상호에게 안긴다. 상호는 미소 지으며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그런 정다운 대화 속에서 병찬은 유리된다.

 

아이들을 만나 하나하나 인사해주고 감독님에게도 간단히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상호는 똑바로 병찬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병찬을 바라볼 땐 웃음기가 없는 얼굴이었다. 천천히 병찬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던 상호는 그대로 지나친다. 잡아야 할까. 뒤늦게 병찬이 뒤를 돌면 상호는 살짝 몸을 틀어 병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병찬은 따라가야 함을 깨닫는다. 병찬이 발걸음을 옮기면 상호도 마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절뚝이는 다리는 여전했다.

둘은 그대로 걸어서 예전의 상호, 그리고 지금 병찬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상호는 별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고 병찬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챙겨왔던 짐에서 그나마 심심한 색의 옷을 골라 꺼내두었다. 씻고 나온 상호는 별말 없이 옷을 입었고 병찬도 씻으러 들어갔다. 옷을 입고 나온 병찬은 상호가 거실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상호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병찬은 그 옆에 앉았다. 상호의 손이 느릿하게 다가온다. 병찬의 어깨를 잡고 부드러이 미는 것에 병찬은 반항하지 않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상호가 가만히 병찬을 내려다본다.

 

"나 없는 동안 어땠는데요?"

 

병찬은 작게 헛웃음을 짓는다. 너 없으니까 어땠냐고. 병찬은 여전히 자신이 잘 숨기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병찬은 손을 올렸고, 상호의 팔을 잡아당겨 제 위에 엎어지도록 했다. 상호 역시 반항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다가온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비비자 상호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전처럼 병찬의 옆에 누웠다. 병찬은 가만히 안긴 채로 있었다. 등 토닥여줘…. 작게 웅얼거리자 조금의 시간이 지나 조심스레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 병찬은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수소문해서 너를 찾아내고 싶었어. 찾아내면 도망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어. 나랑 계속 괴로워해 줬으면 했어. 나는 이제 너 없으면 살아가는 게 힘드니까. 너는 아니더라도 날 위해 옆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어."

 

가장 진솔한 고백. 병찬은 이것이 상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면서 내뱉는다. 이런 내가 징그러울까. 병찬은 상호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다 제 머리를 정리해주는 손길을 느낀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건조한 얼굴의 상호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괴로워요?"

"응."

"나랑 있으면요?"

"괴로워. 근데 없을 때보단 버틸 만해."

"이기적이네요."

"그치."

 

병찬은 작게 웃었다. 할 말이 없을 때 나오는 회피성의 웃음이다. 상호는 이런 이기적인 병찬을 알면서도 사랑해줬는데. 연애를 되돌아보면 대부분 상호가 병찬을 참아주는 꼴이었다. 병찬은 상호가 약속에 늦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기분을 풀어달라고 떼를 썼지만, 상호는 병찬의 모든 일들을 이해했다. 그저 같이 있는 걸로도 기뻐서 상관없다고. 그리 말하는 걸 보며 병찬은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습관처럼 익숙하게 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것을 느낀다.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 같다. 예전엔 네가 내 품을 파고드는 걸 좋아했는데, 이제는 내가 억지로 네 품에 파고든다는 것이 달랐다. 이런 다름을 직면할 때마다 우리의 사이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되새김질하게 된다. 병찬은 껴안은 상태로 상호의 어깨를 잡아 눌러 여전히 저를 쳐다보고 있는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맞춘다. 상호는 피하지 않았다.

상호가 몸을 일으켜 다시금 제 위에 자리를 잡는다. 다리가 불편한 탓에 그 행동들이 느렸으나 병찬은 조르는 눈을 하면서도 얌전히 기다렸다. 병찬의 옷 안으로 여전히 커다란 손이 들어온다. 상호가 입을 벌려 제 입술을 핥는 것에 웃으며 저 또한 입을 벌린다.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것이 기껍다. 병찬은 눈을 휘며 여전히 저를 노려보는 옅은 눈동자를 마주한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상호가 옆자리에 아직 있었다. 지친 얼굴의 상호를 내려다보다가 뻐근해진 허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에 가까웠다. 침대에 눕기는 일찍 누웠는데 둘 다 너무 오랜만인 탓에 전희 또한 굉장히 오래 걸렸던 탓이다. 씻고 나오니 옷을 주워 입고 막 나온 상호와 마주쳤다. 찝찝함에 빨리 씻고 싶었던 터라 옷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해 수건만 걸치고 있던 병찬을 상호가 찬찬히 살펴본다. 되는대로 씹어놓은 온갖 잇자국과 울흔을 시선으로 더듬는다. 만든 것은 상대방이고 여기엔 단둘밖에 없는데 병찬은 어쩐지 그것이 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상호가 무심히 다가와 병찬을 지나쳐 욕실로 들어간다. 부끄러움이 지나간 자리에는 묘한 서운함이 남았다.

시트를 갈고 빨래를 돌린 뒤 찬장을 뒤진다. 병찬은 요리에 큰 재능이 없어 보통 배달시켜 먹거나 라면을 먹었다. 이왕이면 배달이 나으려나. 배달앱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금세 씻고 나온 상호가 말을 건다.

 

"장 보러 가요."

"...그럴까?"

 

둘은 편하게 입고 밖을 나섰다. 전에 병찬이 봐두었던 작은 시장에 들른 상호는 오랜만이라는 인사들을 적당히 받아주며 이것저것 재료를 샀다.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상호의 손에 들린 짐이 너무 많아졌다 싶을 때 슬쩍 손을 내밀어 받아 가려 하자 상호는 그것들을 순순히 건네주었다. 병찬의 양손과 상호의 한 손에 비닐봉지가 몇 개나 달렸을 때 장보기가 끝이 났다.

집으로 들어온 상호는 말없이 사 온 것들을 정리했고 몇 가지 재료는 요리에 쓸 모양인지 주방에 대충 올려두었다. 그 모든 것을 식탁에 앉아 구경하던 병찬은….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너무 익숙했다. 이어 싱크대에 감자나 당근 같은 채소를 와르르 쏟아놓은 상호가 흘끔, 병찬을 쳐다보는 것조차. 병찬은 급히 일어나 상호의 옆에 서서 익숙한 것처럼 채소들을 씻었다. 전에도 요리를 못하는 병찬은 이런 잡일을 도맡아 했으니까. 심장이 두근거린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해치우고 둘은 다시 침묵에 빠진다. 상호는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고 병찬은 그저 그런 상호의 곁을 채우며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가끔은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상호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아 병찬은 팔짱을 끼는 것으로 대신한다. 무언가의 기대감이 가슴속을 가득 채운다. 병찬은 직감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날 저녁에도 상호는 병찬을 눕혔고 병찬은 얌전하게 상호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노골적인 욕망에 병찬의 기분이 들떴다. 드디어 저를 똑바로 마주하는 시선이 좋았다. 병찬은 참을 의지 없이 상호가 원했던 대로 제가 추하다며 보여주기 싫어했던 모습들을 내보였다. 상호의 눈이 일렁이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다음 날에도 상호는 병찬을 침대에 눕혔으나 이번에는 목을 감아오는 손길을 막았다. 대신 얌전히 그 옆에 앉아, 제 품에 파고들게 하지도 않으며 눈을 마주 보았다. 병찬은 가만히 상호를 본다. 상호가 손을 올려 병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제는 무표정이어도 보이는 입가의 주름이나 눈가 주름, 깊게 팬 아이홀, 옅게 나타나는 쌍꺼풀, 조금이 푸석해진 피부 같은 것들. 상호는 자신의 기억보다 나이 든 병찬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그 뒤에는 병찬의 몸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성애적인 손길이 아니라 관찰자의 손길이었다. 운동을 그만둔 탓에 근육이 많이 빠진, 그러나 여전히 두툼한 팔뚝을 만지작거린다. 근육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손길에 병찬이 살짝 움찔했으나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은 손은 점점 내려갔다. 처음엔 팔, 그다음은 목, 빗장뼈, 어깨, 가슴, 배. 천천히 내려가는 손길에 병찬은 마른침을 삼켰으나 그다음 이어지는 손길은 무릎에 닿았다. 집 안이라 반바지를 입은 탓에 병찬의 무릎은 드러나 있었는데, 상호는 오른 다리를 접게 만들더니 입을 크게 벌려 무릎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병찬을 빤히 쳐다봐 병찬은 조금, 당황스러웠으며….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그대로 꾹, 힘주어 이를 박자 병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것을 봐놓고도 쉬이 힘을 빼지 않았던 상호는 아주 천천히 입을 뗀다. 상호가 웃었다. 흐린 미소였으나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에 병찬은 그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은 여전히 자신이 모르는 모습이었다.

 

"형."

"응."

"형 옆에 있으면 너무 괴로운 거 알아요?"

"..."

"형이 이것저것 들으려고 술 먹인 것도 내 알아요."

"알고 있었어?"

"네. 근데 그냥 마셨어요. 형이 그러길 원하니까는."

 

웃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병찬은 제가 원해서 그랬다는 상호의 말에 여전히 양면적인 감정을 느낀다. 제가 원했다는 이유로 받아주는 상호에게 안심을, 제가 원했다는 이유로 순순히 받아들인 상호에게 미약한 원망을 느꼈다. 좋아하는 부분을 파고들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사랑하는 이가 자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력감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니까. 받아주는 것도 사랑이건만 상호의 받아들임은 체념에 가까워 사랑임을 확신할 수가 없는 탓에 괴롭기만 했다.

그 괴로움마저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래. 너에게 괴로움을 받고 싶었던 것은 네게 뭐라도 받고 싶었던 욕심의 결론이었을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을까. 병찬은 뒤늦게 제 의도를 깨닫는다.

그러는 동안 상호는 여전히 관찰자의 시선으로 병찬을 바라보았다. 병찬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형."

"...응."

"형을 버리고 멀리 떠나봤어요. 제가 어땠을 것 같아요?"

"어땠는데?"

"형이랑 있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근데 같이 있으면서도 역시 형은 반짝반짝 빛나니까…. 바라보게 되잖아요."

"응."

"그래서 보지 않으면 덜 아플까 생각하면서 멀리멀리 떠나봤는데."

 

상호가 작게 웃는다. 그다음의 말은 병찬도 너무나도 궁금했기에 다시 상호를 쳐다본다. 웃음소리가 났는데, 상호는 꼭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병찬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상호가 먼저 다가왔다. 저를 껴안아 오는 손길에 병찬은 상호를 마주 안았다. 제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형이 옆에 없어도 괜찮았는데…. 버틸 수 있었는데. 한 번 돌아온 형을 보니까…. 그걸 버리고 또다시 도망가려니까. 너무 괴로워서 돌아왔다 아닙니까."

"그랬어?"

"네, 너무…. 너무 죽을 것 같아서."

 

병찬의 심장박동 소리가 더욱 커진다. 병찬은 매달리듯 상호를 끌어안았다. 상호 또한 그런 병찬을 더욱 끌어안는다. 서로의 사이에 빈틈 하나 만들지 않겠다는 듯. 서로의 살길을 찾는 것처럼.

 

"상호야, 상호야."

"네."

"함께 괴로운 게 더 낫지."

"네."

"여전히 날 좋아하지."

"네."

"계속 날 보면서 괴로워할 거지."

"네."

"나도 그런 너를 보는 게 너무 괴로워."

"..."

"근데 네가 없는 건 더 괴로우니까, 우리 말이야."

"네. 햄."

"계속 같이 괴로워하자."

 

병찬이 웃었다. 상호도 웃었다. 눈물이 섞인다. 괴로움을 평생의 동반자로 삼은 둘은 다시 입을 맞춘다. 언젠가 그 괴로움마저 익숙해지면 맞이할 것은 낡아빠지고 너덜거리는 사랑뿐이겠으나 그들은 그런 사랑마저 갈급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서로의 존재가 고통인 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이 그랬다. 여전히 서로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한 미련한 이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그뿐이다. 그런데도, 병찬은 상호의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상호는 병찬의 괴로움을 받아들인다. 서로의 괴로움 또한 탐을 내는 것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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