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풀이
상뱅
박병찬은 대학교에서도 한 번의 부상을 당했다. 오른쪽 무릎 부상이었고, 그 탓에 또 몇 개월 정도를 쉬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부신 활약들을 보여주었기에 드래프트에서 꽤 높은 순위로 지명되었다. 프로로 간 박병찬은 성공적인 무릎의 재활로 주치의는 앞으로 무리만 덜 한다면 1쿼터 정도의 경기는 괜찮을거라 말했다.
박병찬은 그런 이야기를 들은 뒤 자신을 내려다보는 코치의 눈빛에서 익숙한 의도를 읽어낸다. 어렸을 때, 아픈 것 같다 말하는 자신에게 감독이 보내던 눈빛. 이런 눈빛은 엄청 오랜만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박병찬은 다행이라는 듯 웃어보였다.
박병찬은 경기에 나올 때마다 경기장을 웅성거리게 하는 슈퍼 루키였다. 부상을 입고도 계속 돌아와 사지 멀쩡한 농구선수들을 농락하는, 짧은 시간 내에 팀의 승리를 확정 짓거나 역전하게 해주는 조커 카드. 그의 존재는 쉽게 가십거리가 되곤 했다. 농구를 좋아한다면 그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경기에 직접 출전하는 사람들 중에 최종수를 제외하고 가장 이름값이 높았다. 구단은 이 이름 높은 무기를 오랫동안 쓰길 희망했기에 굉장히 애지중지 다뤘다. 매일 무릎 상태를 체크하고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빠보이면 무리시키지 않았으며 항상 하는 질문은
"지금 무릎 괜찮아?"
였다. 박병찬은 그렇게 말을 들으면 환히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그리 대답했다. 괜찮지 않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하시게요?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박병찬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얼마나 농구를 좋아하는지를 가만히 셈했다. 예전에는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매일마다 좋아하는 정도가 달라졌다. 어느 날은 너무 좋아서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무릎을 원망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그리 좋지 않아서 이 상황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곤 했다. 어느 날은 그냥 그래서 별 생각이 들지 않았고 또 어느 날은, 너무 숨이 막히도록 절망스러워 차라리 이 무릎이 영원히 망가지길 바랐다.
차라리 산산조각 나버렸다면 희망조차 가지지 않았을텐데. 언제까지 이런 기복 속에서 발버둥을 쳐야하는거지? 아주 가끔은 농구 자체가 너무 역겹게만 느껴졌다. 이딴 게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았을텐데. 주변의 눈치를 이만큼 봐야하지도 않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자신을 재밌는 이야깃거리 정도로 소비하지 않았을텐데.
우울감에 잠겨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박병찬은 머리를 비우기 위해 슛을 던졌다. 예전엔 달렸는데. 이젠 달리는 것 조차 자제해야하는 몸으로는 슛을 던지며 머리를 비우는 게 최선이었다. 그 사실조차도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박병찬은 고집스럽게 슛을 던져 억지로나마 머리를 비웠다.
대회가 시작되었고, 우리팀은 운이 좋게 4강까지 올라왔다. 이번 경기는 코치진들의 판단으로 후반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이번엔 상대편에 새로운 신입이 들어왔다지. 뭐, 사실 구단 사람들보다 제가 제일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상호. 그는 구단에 들어가면서 제게 제일 먼저 알렸으니까.
수비의 스페셜리스트라는 별명을 그대로 가져왔다지. 만약 제가 나간다면 분명 매치업은 기상호겠구나. 기상호 또한 연락을 하며 경기에서 저와 마주칠거란 기대감을 보였다. 오랜만에 형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기대돼요. 그 연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박병찬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글쎄. 그저 나도 기대 된다는 말을 답변으로 보냈을 뿐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기상호는 주전 선수로 나왔다. 그러고보면 저 팀은 수비가 조금 모자랐지. 대신 공격력이 높았다. 그걸 상호로 메꿨구나. 그건 상호가 안 말해줬는데. 문득 오른쪽 무릎이 아파온다. 재활은 성공적이었는데. 무리를 한 적도 없는데. 왜 말을 안 해줬지. 들어가자마자 주전인 거 잖아. 엄청 기쁜 일이잖아 상호야. 왜 나한테 자랑 안 했어? 왜? 속이 울렁거린다.
박병찬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를 잡아먹는 상념을 억지로 떼어내려 했다. 쉽지가 않았다. 순간 소리를 질러버리고 싶었는데, 입술을 꾹 물고 네가 하는 것을 본다. 실력이 좀 더 늘었네. 널 따돌리려면 또 고생깨나 하겠구나. 박병찬은 그런 생각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기상호를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내가 코트에 나가서 너와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할까? 경기니까 말을 아낄까, 아니면 반가운 기색을 보일까. 박병찬은 그게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어쩐지 기대가 되었다. 너는 눈치가 참 빠르지. 친한 사람에겐 특히나 그렇잖아. 그럼 이런 것도 너는 눈치챌까? 그것도 궁금해졌다.
3쿼터 중반. 점수차는 24점차. 서서히 상대 팀이 지칠 때가 되었지만 공격이 여의치 않아 저희 팀이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4쿼터에 상대 팀이 더 지치고 박병찬이 투입되면, 수습할 수 있는 점수차인가? 감독과 코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기상호의 존재였다. 고등학교 시절 박병찬을 완전히 막아내었다는 소문의 그 신인.
박병찬은 그때도 이미 완성형에 가까웠지만 기상호는 그때부터 실력을 뽐내었으니 거의 성장한 그와 박병찬 과의 승부를 확실시 할 수 없었나보다. 코치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박병찬을 투입시켰다. 오랜만에 4강에 올라왔으니 우승이 욕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럴만도 하지. 박병찬은 시키는대로 코트에 나섰다. 오늘따라 오른발이 무거운 느낌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오늘 내내 불안했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에도 코트에 나섰고 당연하다는 듯 제 앞에 선 것은 기상호였다. 몸이 더 커 이제는 저와 비슷한 체격이었다. 볼살도 더 빠져 이제는 꽤 딱딱한 남성의 느낌이 난다. 그럼에도 저는 그런 기상호를 꽤 귀여워했었지.
마주하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했는데, 기상호는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경기니까 말을 아끼는 걸까? 말을 건네지 말아야하나. 짧은 고민 후 박병찬은 익숙하게 개구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상호~ 오랜만에 봤는데 안 반가워?"
박병찬은 먼저 말을 걸었다. 여전히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무언가 넘칠 것 같은 느낌이 계속해서 든다. 이것이 무슨 느낌인지 억지로 외면하며 웃어보인다.
"병찬햄."
기상호의 목소리가 작게 울린다. 곧 경기가 시작했고 박병찬에게 공이 들어왔다. 공을 들고 곁눈질로 애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패턴을 지시했다. 아이솔레이션. 이제 이 경기장에서 아마 우리 둘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겠지.
"오늘, 다리 안 괜찮죠?"
아, 난 이걸 기대했나? 어쩐지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박병찬은 자기도 모르게 환히 웃어보였다.
"상호야, 하던대로 해. 알았지?"
기상호는 순간 무언가의 격려를 받았다고 생각한건지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직은 못 알아들었구나. 상관없지. 박병찬은 그대로 공을 튀기며 몸을 움직였다. 끼긱, 바닥에 신발이 마찰되는 소리가 선명하게 경기장을 울린다.
계속되는 대치. 기상호에게 몇 번이나 막혔지만 박병찬이 돌파가 막히면 쓸모없는 타입인가? 그럴리가. 그리고 기상호 말고는 박병찬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기상호만 뚫으면 되는 문제였다.
박병찬은 특유의 센스로 기상호를 몇 번 따돌려냈다. 하지만 센스가지고 될 일은 아니지. 박병찬은 평소보다 좀 더 빠르고 급격하게 몸을 움직였다. 기상호를 떨쳐내려면 별 수 없는 일이다. 끼긱, 끽. 신발이 마찰하는 소리가 평소의 몇 배나 울린다. 기상호는 그렇게 도망가는 박병찬을 기어이 몇 번 따라잡았으나 결국 몇 번은 놓쳤다. 그럼에도 관중들은 환호했다.
그러는 동안 기상호의 안색은 계속해서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기상호의 얼굴에 울렁거림이 나온다. 박병찬은 그것이 뭇내 통쾌하게 느껴지면서도 그런 자신이 꽤 역겹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좋은 기상호가 무엇을 떠올렸을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하던대로 해 상호야. 너는 여전히 내 무릎이 아픈 걸 알고 있고 나는 또 컨디션이 안 좋고. 우리 팀은 또 네 팀을 이겨야하고 나는 이기기를 기대받고 있어. 진중한 경기니까 날 봐줄 생각도 없겠지. 내가 그걸 바라지 않는 것도 알고. 박병찬의 미소가 짙어져 갈수록 기상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갔다. 그게 기분 좋다니. 갈 때까지 갔구나, 박병찬.
박병찬의 활약으로 3쿼터는 3점 차이의 점수로 막을 내렸다. 그렇게 4쿼터 시작 전. 박병찬은 가만히 앉아 고민하는 듯한 감독을 쳐다본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실컷 뛰어다닌 탓도 있지만 무언가를 직감한 탓이다. 오늘따라 별로인 컨디션, 기상호를 뚫기 위해 평소보다 혹사시킨 무릎.
박병찬은 가끔 팀의 분위기를 환기 시키기 위해 이렇게 중간에 추가된 적이 있었지만 보통 그럴 때는 이 후에 출전을 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넌 쉬고 있어. 라며 교체선수를 데리고 작전을 의논해야할 감독이 고민만 하고 있었다. 고민을 끝낸 듯 감독이 판을 들고 온다.
"4쿼터도 뛰어야겠다. 병찬아."
역시.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판을 내려다보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다. 누군가의 욕심이 제 발을 타고 올라와 제 살을 깨물어먹으려드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제 컨디션이 오늘 좋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 기상호를 피하기 위해 평소보다 무리하고 있는 걸 알면서. 몰랐다면 저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은 모양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권유했겠지.
하지만 박병찬은 오늘따라 그 태도들이 별로 원망스럽거나 질리지 않았다. 뭐, 다친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럴수도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의 태도를 머리 속에서 밀어두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제 팀은 빠른 템포로 돌입해 점수를 따내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박병찬은 위협적이었고, 기상호와는 호적수라고 해도 모자를 정도로 접전을 별였지만. 박병찬은 박병찬이다. 4쿼터를 6분 남겼을 때의 점수차는 7점에 박병찬의 팀이 이기고 있었다. 저쪽 주전들이 점차 지쳐가는 덕도 있었지.
박병찬은, 글쎄. 여전히 저랑 마주하는 기상호를 마주본다. 너무 많은 감정을 담고 있어 하나를 골라내는 것도 어려운 그 눈에서, 굳이 공포를 골라내어 읽는다. 지금 제 상태는, 말이 아니였다. 가까스로 절뚝이지 않았고 무릎은 아까부터 어떻게 힘을 줘도 아팠다.
박병찬은 이제서야 자신이 뭘 바라는지 똑똑히 본다. 오늘은 지독히도 농구가 원망스러운 날이었다. 이럴거면 재능을 주지 말았어야지. 이럴 거면 부상을, 그 감독을 주지 말았어야지. 차라리 재활이 처음부터 실패했어야지. 농구부가 생기지 말았어야지.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헤집어놓는 날이었다.
그런 날에 박병찬은 계속 해서 슛을 쏘거나 차라리 잠을 자버리며 시선을 돌렸으나 지금 제 앞, 기상호를 자꾸만 마주하니까. 아... 정말이지 농구가 질렸다. 차라리 콱, 어디 차에 받혀 뒤져버리고 싶었는데 그건 또 무서워서 나는 이렇게 코트에 서서. 지금 제 앞에서 울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이를 마주하며 일부러 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이번에 다치면 재활이 성공할까? 응? 상호야. 아니면 뭐. 이래보여도 꽤 튼튼해진 무릎이 끝까지 버텨줄까? 아니면 그냥 확 부서져버릴까? 나는 오늘따라 그게 너무 궁금하더라. 상호 너도 궁금해? 그런 것 같은데. 표정이 엄청 안 좋잖아.
박병찬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볼을 튀기며 스텝을 밟았고, 기상호를 속이려 들고, 그렇게 그를 넘어가려고 하고. 그러다 어느새 비슷해진 손이 제 공으로 향하면 뒤로 피하다가 빙글, 돌아 상대를 등지고 달려나간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무릎이 아팠다. 아, 나 점프 못 하겠는데...
그럼에도 힘을 주어 몸을 굽혔고. 이내 자리에서 크게 점프하며 손을 뻗는다. 상대팀의 센터가 손을 뻗었으나 깔끔히 골을 넣고, 본능적으로 왼발로 착지한다. 오른발로 했어야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고개를 드니 기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상호야, 왜?"
"교체해달라고 해요."
작게 웃는다. 박병찬은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 백코트를 하러 갔다. 하하! 항상 다칠까봐 전전긍긍하던 날은 그렇게 X같던데 지금 이러고 있으니까 상쾌했다! 몰라, 몰라. 마지막인 것 처럼 하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맑았다. 뒤에서 저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무릎이 아팠다. 하지만 더 힘껏 달린다. 병찬형! 외치는 소리는 끽끽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마음대로 잘 안 되네. 박병찬은 비닐봉지에 얼굴을 올리고 코피를 흘리며 앉아있었다. 1~2점 차이로의 접점. 현재는 박병찬의 팀이 앞서고 있었으나 4쿼터는 아직 40초가 남았다. 우리팀 주전들도 지칠만큼 지친거지. 아직 경기를 뛰는 기상호를 쳐다본다.
중간에 기상호가 골을 넣기 위해 뛰는 것에 제가 블로킹을 했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몸을 비틀던 와중에 아직 밑에서 올라오던 저와 애매하다고 생각한건지 패스를 하려던 상호가 부딪혔다. 부딪히기만 하면 다행인데, 그대로 팔꿈치에 얼굴이 찍혔고 코피가 나는 탓에 교체 당했다.
헛웃음이 난다. 기상호는 실수라고 했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박병찬은 몸을 뒤틀 때 기상호가 똑똑히 저를 쳐다보고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거기서 대거리를 하고 싶진 않았기에 결국 교체 당해 들어와 코피를 받고 있었다. 기상호의 생각이 뻔했다. 일부로 날 쳤구나. 날 교체시키려고.
처음엔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곧 허탈해졌다. 오늘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짓을 때려치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라면 좋은 핑계가 되어줄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너는 꽤 머리가 좋았지. 내가 의도한 바를 알아차리고 무서워할 정도인데. 그렇다고 해도 얼굴을 칠 줄이야. 애초에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까지 생각하고 나면 한숨만 나왔다.
한 대 맞고나니 정신이 드는 것도 같다. 뭐라고 화도 못 내겠네. 너는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했는지 눈치챘다. 아무도 눈치 못 챘는데, 너만 눈치를 챘다. 역시 모두에게도 해도 너한테는 하지 말았어야했는데. 경기가 끝나면 사과를 해야지. 미안하다고, 오늘따라 열이났다고 말해야지. 그제서야 비워진 머리로 너를 볼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각자 짐을 챙겨 경기장을 떠날 때에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다가갔다. 상호야. 그렇게 부르면 기상호는 뒤를 돌아본다. 눈을 마주한 순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빛도 참 오랜만이었다. 아니지, 그 때엔 그저 질투와 선망이었던가. 그럼 이런 눈빛은 처음이네.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불러놓고도 말 없이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더니 기상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셨어요?"
할 말이 궁하다. 왜 그랬냐고? 구구절절 모든 것을 설명해야할까? 얘를 붙잡고? 박병찬은, 그건 꽤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다 털어놓고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다면 차라리 진작에 전화를 해서 말을 했었어야했다. 처음부터 너에게... 조금이라도 말해두었더라면. 지금에서 네게 무엇이든 말 할 염치가 있었겠지. 급작스럽게 찾아온 어느 때와 같은 우울과 컨디션 난조를 이기지 못하고 너를 핑계로 제 몸을 자해한 뒤에 할 얘기는 아니었다. 특히 저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면서는.
하지만 하지 않으려나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박병찬은 사과했다.
"미안해, 상호야."
기상호는 박병찬의 말에도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몸을 돌려가버렸다. 박병찬은 그렇게 떠나는 기상호의 뒷모습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문득 생각한다. 기상호는 오직 자해를 위한 핑계였나? 기상호의 이름 값 정도는 되어야 이렇게 저를 혹사시켜도 들키지 않을거라서? 그런 이유로 저는, 저를 걱정하는 이에게 하던대로 하라며 웃었나. 그 몇 년 전의 일을 굳이 떠올리게 만들면서?
저는 그저 그 순간 저열한 인간이 되었던 것 뿐이다. 짜증이 올라와 어쩔 수 없는 와중에 유일하게 화풀이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앞에 있어 멋대로 뱉어냈다. 기상호라면 자신의 짜증을 받고도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뒤에서 그럴 줄 알았다며 손가락질 하지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그가 제 의도를 눈치채고 보이는 감정들을 뒤적여 제가 원하는 반응을 굳이굳이 끌어내면서 멋대로 기뻐했던 거다.
그 사실을 이미 계산해두고선 멋대로 화풀이를 한거지. 제 상태를 짐작함에도 당장 이기는 것을 더 신경쓰는 감독과 코치의 모습에 예전의 누군가를 투영해둔 뒤 혼자 화가 나고, 그걸 멋대로 풀어버렸을 뿐이다.
외치고 싶었다. 고작 그 승리가 그렇게 간절해서, 나를 이리 내모냐고. 만약 내가 다친다면 그것은 분명 당신들의 잘못일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버리고 싶었던 거다. 직접 말 할 용기는 없어 이딴 식으로 겨우.
그러다 결국 그 꼴을 보다못한 기상호가 저를 말리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쓰고 나서야 열이 내렸다. 저를 말리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나서야. 감독에 따라 고의성을 제기할 수 있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저 뒷모습을 보고서야 알아차리네. 어른 맞아? 박병찬, 너 상호보다 5살 어른인데... 눈을 질끈 감는다. 상호야, 상호야. 다른 사람이 눈치채면 어쩔 뻔 했어. 너 이제 신인이야. 이런 구설수에 휘말리면...
"상호야!"
기상호는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잠깐 멈춰섰다.
"미안해. 나중에 나랑 술이나 한 잔 하자. 최대한 빨리."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박병찬은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상호, 네가 최고로 좋더라."
마른 침을 삼킨다. 이번엔 차라리 상호에게 털어놔야지. 왜 그랬는지 말을 해줘야지. 상호가 좀 더 나를 잘 말릴 수 있게. 내가 좀 더 의지할 수 있게.
박병찬은 자신의 밑바닥까지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기고서야 그래야겠다 마음을 먹은 자신이 제일 나쁜 어른으로만 보였다. 적어도, 네가 만난 어른 중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제서야 안심한 듯 물기 있는 눈으로 웃어보이는 너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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