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오예에서 오해까지

상뱅 교류전 :: 상뱅학개론 계절학기 앤솔로지 <리매치 클리셰> 제출 원고

가비지타임 by 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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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 저 없다고 끼니 대충 때우지 마시고. 수업도 빼먹지 마시고요.”

 “니가 무슨 내 애인이야? 잔소리하지 말고 늦기 전에 얼른 가.”

 “넵!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병찬이 애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은근슬쩍 상호를 떠봤으나, 해맑은 표정에는 눈꼽 만큼의 타격도 없어 보였다. 나만 신경 쓰이고 나만 서운하지. 사회적 기준으로는 친한 동생, 유성애적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아무 사이도 아닌 동거인의 4박 5일짜리 합숙 훈련을 배웅한 뒤, 병찬은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끼니 대충 때우지 말랬으니까 아침은 그냥 굶어버려야지 하는, 스스로에게만 손해인 심술을 부리면서.

  정의하기 어려운 이 관계의 시작은 바야흐로 2년 전이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면식이 있고 조금 깊은 얘기를 나눴던 정도의, 나를 동경하는 동생이었을 뿐인데. 같은 학교도 아니었으니 후배라고 할 사이도 아니었고 정말 아는 동생. 심지어 유급에 유급을 거듭한 병찬과 빠른 연생인 상호를 생각해 보면 무려 5살이나 차이 나는, 다소 까마득한 어린 애. 그런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잦은 카톡이나 때로는 뜬금없이 걸려 오는 전화 같은 것들이, 생소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내가 이렇게까지 멋지고 좋은 사람일 수 있구나 싶어 병찬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상호의 그런 행동에 스며들어 갔었다. 졸업식 전까지는 말이다.

 “햄, 좋아해요. 동경이나 존경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좋아해요.”

 추위 때문인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빨개진 코와 뺨을 감추지 못하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던 고백. 그 뒤에는 뭐라고 했더라. 햄한테는 수많은 어린애 중 하나겠지만 그냥 지금이 아니면 말 못할 거 같아서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다고 했던가. 수많은 어린애라니. 내 졸업 축하한다고 부산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온 놈은 너 하나밖에 없어 상호야. 아무튼 뭐, 스무 살을 훌쩍 넘다 못해 이제 곧 대학생이기까지 할 병찬이 고작 열일곱의 고딩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마음은 고맙지만... 으로 시작하는 상투적인 거절의 말을 뱉을 수밖에. 사실 병찬은 그 고백을 받으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 애시당초 놀랍지 않은 고백이었다. 동성 간이기 때문에 긴가민가했던 거지, 몇 번이나 이거 ‘썸’ 아닌가 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여하튼 그 고백으로 인해 차오르는 뿌듯함에 '내가 남자한테도 먹히네'라는 다소 저질스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건 그거였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를 이만큼이나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 벅차오르지 않을 수 있을 리가.

 결론적으로, 병찬이 훌쩍이는 상호에게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갈 때쯤에도 여전히 나를 좋아하면, 그럼 그때 다시 얘기하자.”라는, 지금 생각하면 다소 오그라드는 말을 덧붙였던 이유는 그저 미안해서라거나 어린애를 적당히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거다. 병찬은 상호의 고백을 고스란히 받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만, 졸업식 이후에 조금 바빴을 뿐이다. 체대 특성상 단체생활을 빠질 수도 없는 분위기였고, 또 빠지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계절학기를 들어야 할 정도로 신입생의 즐거움을 만끽했다는 소리다. 자연스럽게 상호의 고백은 잠시 뒷전이 됐다. 그래도 거의 매일 연락은 했다. 항상 상호가 먼저 연락을 하고, 병찬은 그에 답장을 주는 거였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술을 마시고, 여행을 가고... 그런 일상을 보고할 사람이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상호야 하루하루가 똑같은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다 보니, 대회가 있을 때 경기 소식 정도를 제외하고는 병찬의 신입생 생활을 그저 들어주는 쪽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상호는 자신의 얘기를 하기보다 병찬의 말을 들어주는 편이긴 했지만, 대학생과 고등학생으로 입장이 갈린 후로는 더더욱 그 차이가 극명하게 벌어졌다.

 “저도 빨리 대학 가고 싶어요. 햄, 그때 얘기하셨던 거 안 까먹으셨죠?”

 병찬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연락을 받는 날이면, 상호는 한 번씩 유예된 본인의 고백 얘기를 꺼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병찬은 호쾌하게 웃으며 형아 기억력 아직 안 죽었다고 받아쳤으나,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얘 아직도 나 좋아하는구나 하고.

 언제부터였을까? 뜨문뜨문해지던 연락이 결국 거의 안부 인사 수준이 된 것은. 사실 본인한테 고백한 걸 일시적으로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인 말을 뱉어놓고 그렇게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는 건 좀 웃긴 처사라고 생각하긴 했기에 병찬은 점점 길어지는 상호의 카톡 주기를 눈치챘음에도 굳이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상호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이자 가장 불쌍한 시기라고 취급되는 고3이 되었을 때쯤에는 아예 연락 두절 상태가 됐지만, 새로 본 애니가 마음에 들었을 때마다 바뀌는 카톡 상태 메시지가 그해에는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병찬은 그저 많이 바빠서 그렇겠구나 했다. 본인도 가장 바쁘고 힘들었던 시기였으니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고3인데 어쩌겠는가. 가끔 먼저 연락을 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괜히 심란하게 만드는 꼴이 될까 봐 어른으로서 꾹 참아보기로 했다.

 상호가 준수에게는 꽤 자주 연락해서 칭얼댄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형은 무섭다고 할 땐 언제고. 병찬은 잠깐 그런 유치한 생각을 했다가 며칠간 이불을 발로 찼다. 같이 먹고자고훈련하고... 함께 우승 서사를 써 내려간 준수가 훨씬 편하고 특히 입시 관련해서 얘기하기엔 부담 없을 게 당연한 건데. 와 진짜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박병찬. 하염없이 이불의 먼지를 털어내던 밤이 몇 번 지나고, 타이밍 좋게 수능이 백일 앞으로 다가왔다. 크게 의미 없는 수능인 걸 알면서도 그 구실로 초콜릿 기프티콘을 하나 슬쩍 날리자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고, 여전히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몇 시간을 내리 통화하고 나서야 병찬은 안심이 됐다. 상호는 여전히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거짓말 같이 또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정말 입시 다 끝나고 연락하려나? 1학년 때 우승 실적에, 그 이후로도 성적 꽤 괜찮지 않나 그 정도면. 무슨 절간 들어간 사람처럼 이렇게까지 연락을 다 끊고 그럴 일이냐고. 시간이 갈수록 병찬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금 의외였지만 꽤 기뻤고 그 마음에 보답해주고 싶었던 정도의 고백은, 간직하는 쪽이 혼자라고 느낄수록 조금씩 추잡하게 변질됐다. 설마, 나 먹버당한 건가? (먹힌 적도 없다.)

 상호의 대학 합격 소식을 준수를 통해 들었을 때, 병찬은 상호의 카톡을 '친구 숨김' 처리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생각으로 그리 하였으나,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점점 나잇값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애초에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얘를 많이 좋아했다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 그냥 어린 애가 동경이랑 헷갈렸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는 건데 무슨 드라마라도 찍는 것마냥 뭔 자신감이 넘쳐서 그때 다시 생각하네 마네 하는 말을 내뱉었던 건지. 병찬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왜 고백을 한 건 기상혼데 내가 고통받아야 하는 건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친구 숨김’ 처리한 지 이틀 만에 이 어린 놈은 귀신같이 또 사람 마음을 흔들어 댔다.

 “햄, 잘 지내셨어요?”

 전화 한 통에 박병찬은 ‘친구 숨김’을 해제했다. 전화는 길었고, 여전히 주고받는 대화는 즐거웠으나 뭔가 전보다 확실히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설 연휴 인사 겸 대학 합격 소식 겸 안부 인사 겸... 서교대 붙은 거 준수한테 이미 들었는데 왜 나한테는 이제 얘기하냐고 장난 반 진담 반 돌을 던지자, 머쓱한 웃음소리와 함께 정신이 없어 깜빡했다며 어물쩍 넘긴다. 깜빡? 깜빠아아악? 여기에 인내심이 뚝 끊긴 병찬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고 만다.

 “상호야. 대학도 붙었는데 나한테 할 말 없어?”

 “예? 아, 맞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쯤되니 병찬은 오기가 생겼다. 타이밍 좋게 병찬의 룸메이트가 군 휴학을 위해 방을 비운다고 하기에, 병찬은 바로 상호에게 연락을 취했다. 병찬이 사는 곳은 큰아버지 소유의 건물로 사실상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취하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조건이었다. 위치도 준향대보다는 병찬이 다니는 병원 쪽에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서교대와도 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상호야, 너 기숙사 들어갔어?”

“에, 아뇨. 고학년 선 배정이라 1학년은 들어가기 힘들다길래 그냥 자취하려구요.”

“그럼 형이랑 같이 살래?”

 저렴한 월세에 신축에 가까운 빌라, 학교와도 적당한 거리. 거기에 (지금은 아닐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형과의 동거. 거절할 리가 없지 않나? 너무나도 완벽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병찬은 상호의 입에서 저야 너무 감사하죠(그 전에 제가 그런 곳에 들어가도 되나요 월세 더 드려야 하는 거 아닌지 아니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한데 등의 전주가 있었다)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 다리를 달달 떨며 심장을 졸였다. 그리고 병찬은 모험의 결과물로 ‘어쨌든 이렇게 덥석(은 아니었다) 좋다고 하는 걸 보면 역시 상호는 나한테 아직 마음이 있는 게 맞겠지?’라는 긍정적 사고를 얻었다.

 하지만 병찬의 생각과는 다르게 둘의 동거생활은 정말 룸메이트 그 자체였다. 신입생이 원래 저렇게나 바빴던가? (본인은 더 바빴었다) 하는 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병찬의 기분탓 일 뿐이고. 상호는 신입생답게 이런저런 모임과 행사에 끌려다녔지만, 술자리를 즐기지 않아서 대체로 별일이 없으면 저녁에는 집에 와있곤 했다. 그래서 오후 수업이 많고, 훈련 때문에 상대적으로 귀가 시간이 늦는 편인 병찬은 집에 왔을 때 상호가 저녁을 차려놓고 “햄, 오셨어요?”하며 현관에서 맞이해 주는 생활에 금방 녹아들었다.

 다만, 분명 신혼부부처럼 설레야 할 일인데 어째 같이 있는 시간에도 상호는 계속 청소며 빨래며 온갖 집안일을 하는 편이었고, 그나마 일을 다 끝내고 쉴 때도 같이 애니메이션을 보며 치킨이나 먹는...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동거인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거였다. 물론 그렇게 함께 생활하며 소소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되고, 처음 보는 모습들을 서로 간에 차곡히 쌓아가고 있지만 정말 친구로서만 돈독하지는 느낌인 것이. 그리고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그렇게 하나하나 처음 보는 모습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상호가 더 좋아진다는 거였다. 아니 너는 왜 생활력까지 완벽하고 그러니. 누나와 형의 아래에서 다년간 시다바리로 굴려진 기상호의 완벽한 시중들기 스킬은 괜히 박병찬만 설레게 만들고 그랬다는 거다. 거기다가 못 본 사이에 또 왜 이렇게 커버려서. 사람 낯설어가지고 괜히 눈을 피하게 되고.

 현재로 돌아와서. 완벽한 동거인인 기상호가 집을 비우면서까지 그렇게 병찬을 챙기고 새벽같이 나선 이후, 병찬은 다시 단잠에 빠져들었다.

 “꽤애애애앵!”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병찬은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말을 해보았다.

 “왜앵. 왜앵.”

 여전히 이상한 울음소리가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세상이 온통 하얗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이 안 보인다. 뭔가 하얀 것이... 이게 내 배...? 손을 앞으로 모아 눈앞에 갖다 대자 검은 지느러미, 아니 퇴화한 날개가 보인다. 짧다. 거울은 없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봐도 상황 파악이 충분히 가능했다.

 나. 펭귄이구나.

 대부분의 꿈이 그렇듯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그냥 저절로 납득이 됐다. 나는 펭귄. 여기는 남극. 그리고 전방에서 뭔가 키위같이 생긴 갈색의 털 뭉치가 뒤뚱뒤뚱 병찬을 향해 다가왔다.

 “뺙! 뺙!”

 꿈이기 때문에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상호다. 분명 귀에는 병아리마냥 삐약삐약 거리는 소리로 들리는데 신기하게도 무슨 소리인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졸업식 때 들었던, 그 고백이었다. 그리고 갈색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펭귄인 상호의 고백에 펭귄병찬은 병찬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대답했다. 마치 시나리오가 정해진 게임처럼. 꽤애앵 애앵 하는 울음소리가 병찬의 입에서 나왔다. 본인의 입에서 나온 울음소리지만 이상하게도 이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과거의 그때처럼 거절을 했겠거니 하고 짐작만 가능했다.

 그리고, 펭귄병찬의 울음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의 아기 펭귄이 쑥쑥 성장했다. 한참 아래에 있던 눈높이가 대등해질 정도로 자라났을 뿐더러, 보들보들하던 갈색 솜털이 우수수 빠지면서 검고 반질반질한 깃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기상호가 순식간에 완벽한 어른 펭귄이 된 것이다. 연주황색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펭귄 성체의 기다랗고 가는 부리가 서서히 벌어지며 상호의 말이, 울음소리가 아닌 목소리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햄, 저 이제 털색 바뀌었어요. 근데 왜 제 눈 피해요?”

 왜냐니. 눈앞에서 갑자기 급속 성장을 하고 털색이 바뀌었는데 당황해서 피하는 거지. 하지만 아까 본인이 내지 않은 울음소리가 자동으로 나왔던 것처럼, 지금은 뭔가 말을 하려고 해도 굳어버린 듯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땐 잘해줬으면서. 다 커서 털색 바뀌면 오라고 펭귄 착각하는 말 해놓고 이러는 게 어딨어요? 사실 햄은 어린 것만 좋아하는 짐승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니 상호야. 다 오해야, 오해라고.

 “아니면, 이 정도로는 다 큰 것도 아니에요? 햄이 좋아하는 전갱이를 매일매일 줄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은 어른 사육사가 좋은 거냐고요.”

 나 전갱이 좋아하냐.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 말 좀 들어봐 상호야.

 병찬은 억울해서 팔짝 날 지경이었으나 꿈에서 쫓기는 것처럼 다리도 팔도 허우적거리는 느낌만 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 햄만큼 컸잖아요. 털갈이도 끝났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커서 오라는 거예요? 이만큼? 이만큼? 아니면... 이만크으으으음?”

 오열하며 몸을 부풀리던 펭귄상호가 점점 더 커져가며 하얗던 남극이 온통 어두워지도록 덮을 정도로 커졌을 때 쯤, 병찬은 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이게 무슨 개꿈 아니 새꿈이냐. 하지만 의미가 없는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예지몽 같은 거 아닐까. (아님) 사실 상호는 이미 2년 전에 고백을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지금은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찬은 다짐했다.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고. 응당 연상된 도리로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병찬은 냅다 본인의 연애 전선에 대해 고민을 상담할만한 친구를 물색했다. 일단 상대방의 익명 보장을 위해 같은 업계 사람은 기각. 근데 애초에 농구 일색인 병찬의 인생에서, 농구로 만난 상호와의 접점이 없는 사람을 찾자니 선택지가 전멸했다. 농구 판이 좁은 탓에 대학교 동기들이나 팀메이트들도 다 한 다리만 건너면 상호와 아는 사이였고, 준수의 존재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농구 안 하는 친구들... 중에서 이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를 한참 스크롤하고 나서야 병찬은 적합한 사람을 찾아냈다. 과거 병원 생활을 할 때 만난 동갑내기 친구. 종목은 다르지만 역시나 체육계열을 전공하는 탓에 지금도 종종 병원에서 마주치곤 했다. 병찬보다는 일찍 대학을 갔기 때문에 뭔가 사회경험적으로는 더 선배라는 느낌도 들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옛말처럼, 병찬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선호야~ 요즘 뭐 해? 내일 시간 있어? 어어 목요일도 괜찮아. 그렇게 목요일 밤의 술 약속이 즉석에서 확정 지어졌다.

***

 “어, 상호야. 나 오늘 친구랑 집에서 술 마실 건데 혹시 얘 자고 가게 되면 얘 내 방에서 재우고 내가 네 방 써도 돼?”

 - 그라믄요. 근데 친구 누구요? 준수햄?

 “준수면 안 물어보고 재웠지. 배구하는 친구 있어.”

 - 오... 혹시 여자친구?

“형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 아니다.”

 - 에이 뭐 어때요. 그럴 수도 있죠. 어차피 형 집이나 마찬가진데.

 “진짜 아냐. 얘 키가 나보다 커서 내 침대에서 같이 자기엔 견적 초과라 물어보는 거라고.”

 와, 친구 재운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친구냐고 물어보네. 전화를 끊고 병찬은 새삼 서운하다 못해 속상해졌다. 그리고 그 속상함이란 것은 알코올의 힘으로 폭발하기 마련이며...

 “지금 다섯 살 차이면 도둑놈 아니냐.”

 “실질적으론 네 살, 아니 학년으로 따지면 두 살 차이거든?”

 “그렇게 사회적 나이로 따질 거면 나한테도 형이라고 하시죠?”

 “네엡, 형님. 아무튼 내 말 좀 들어보시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걔랑 같이 사는데…”

 병찬은 술기운을 빌려 체면과 수치심을 잊고 본인이 지금 같이 사는 연하남에게 처음 고백 받은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일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펭귄 꿈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음, 근데 걔 입장에서는 나이 먹고 보니까 어릴 때처럼 앞뒤 생각 안 하고 막 그러기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또 사실 걔 딴에는 거절당한 건데 2년 넘게 계속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좀 음침해 보일 수도 있고.”

 “아니, 내가 2년 기다려 준다고 했다니까?”

 “보통은 돌려서 거절할 때도 그렇게 얘기 해.”

 “그릉가…”

 “내가 그 상황을 본 건 아니니까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니가 나도 좋아해 뭐 이런 얘기를 한 것도 아니라며. 그럼 걔 입장에서는 거절이라고 느낄만하지.”

 “헐. 나 지금 개억울해졌어.”

 “근데 뭐 아예 파토난 것도 아니고 아직 충분히 기회 있는 거 아냐? 니가 먼저 함 들이대 봐봐.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데 보통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이면 포기했다가도 나중에 다시 건수만 생겨 봐. 바로 각 잡히지. 그 나이에 졸업식 하나 보려고 혼자 부산에서 인천까지 올라오는 거 어지간한 순정으로는 쉽지 않다?”

 그럴듯한 조언에 병찬은 풀려가는 눈을 다시 부릅뜨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르치. 역시 내가 먼저 뭔가 액션을 취해야겠지? 하고 한 잔 더 마시고, 두 잔 더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초저녁부터 벌인 술판은 열시가 훌쩍 넘어서야 선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그 끝을 알렸다.

 “그냥 자고 가지.”

 “내일 할아버지 생신이라 겸사겸사 오늘 고모네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같이 큰댁 가기로 했다니까.”

 “나 어차피 내일 아침에 계절 수업 있어서 일찍 일어나니까 그때 같이 나가는 게 낫지 않아?”

 “아니. 솔직히 연애사업 고민 상담 다 들은 판에 남의 신혼집에서 자는 기분이라 별로.”

 “뭐래 미쳤나 봐 진짜.”

 안 그래도 술기운 때문에 빨개진 얼굴로 병찬이 선호의 어깨에 주먹을 꽂았다. 표정 관리나 좀 하고 싫은 척을 해야 하건만, 취한 사람에게 그럴 경황이 있을 리가. 고민 상담해준 사람을 혼자 보내기는 예의가 아닌 듯 해 바람도 좀 쐴 겸, 병찬도 함께 집을 나섰다. 문제는 귀갓길이었다. 버스정류장까지 선호를 배웅해준 뒤 돌아오는 길에 하필 핑크색의 번쩍번쩍한 가게가 병찬의 눈을 사로잡았다.

[멜팅러브샵]

 하필 성인용품점이 신장개업을 했고, 하필 전단지를 나눠주는 알바생의 강아지탈이 상호를 닮았고(박병찬 시점), 하필 병찬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관계로 이 모든 것의 시너지를 통해 박병찬의 급발진이라는 결과가 발생했다. 병찬은 인생 첫 콘돔을 그렇게 구입하게 됐다.

 “내가 형이니까 콘돔 같은 것도 내가... 씌워줘야겠지? 씌워주는 연습…”

 그리고 역시 내가 대줘야겠지 하는 마음으로 상남자의 행동력을 과하게 발휘한 병찬은 그날 밤 콘돔 3개를 쓰고 손가락 한 개 분량의 진도를 나가는데 성공하게 된다. 알코올의 힘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짓이었다.

***

 한편, 기상호의 입장은.

 열일곱 살 2월, 짝사랑하던 형한테 큰맘 먹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예상은 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 형은 거절하는 것마저도... 어떻게 안 좋아하는데요. 박병찬 유죄. 대학교 가서도 마음이 그대로면 다시 얘기하자는 박병찬의 말은 진심이었으나, 자기 객관화 잘 돼 있고 쓸데없이 현실적인 기상호란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그 상황을 재평가하게 됐다. 결정적인 계기는 고2 끝물, 준우승으로 마무리 지은 경기가 끝나고 받은 고백이었다. 그 여자애는 상호가 1학년 때 뛰었던, 우승이라는 결과를 안겨준 쌍용기 결승전을 시작으로 1년이 넘게 상호의 경기를 지켜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중학생이지만, 곧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지금이 안 되면 그때라도 다시 생각해줄 수 있냐고 당돌하게 물어봤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심지어 기상호는 빠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호에게는 그 여자애가 까마득하게 어린애처럼 보였다. 정확히 뭐라고 거절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고백에서 상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철없는 행동을 했는지 부끄러워짐과 동시에, 병찬의 대처가 정말 어른스러웠다고 느꼈다. 치기 어린 어린애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주고, 또 여전히 그 연락에 꼬박꼬박 답장을 해주다 못해 약속 까먹은 거 아니냐는 조름에도 난처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당연히 잊지 않았다고 대답해주는 그 다정함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지.

 하지만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상호는 제 마음을 접기로 다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돌려 거절하신 건데 내가 눈치 없이 2년 후에 햄 이제 저랑 만나요 하면 얼마나 곤란하시겠어. 그러니 조금씩 조금씩 정리해야지. 할 수 있다 기상호. 박병찬이 알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다짐이었다.

 그런 마음이었으니 대학에 붙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병찬에게 대학 합격 소식을 전하는 순간, 2년 전 고백에 대한 대답을 당장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채권자가 된 것 같을 테니까. 어차피 좁은 판이니 학교 다니다 보면 연습경기다 뭐다 해서 안 볼 수도 없고, 또 준수햄한테 말하면 어차피 소식 다 들으실 테니까. 굳이 합격 소식을 전하려 드는 건 긁어 부스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갓 스무 살이 된(엄연히 말하면 상호는 열아홉 살이긴 했지만) 애들은 술이 문제다. 설 명절이랍시고 일가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직 열아홉 살이라고 말해본들 술은 기회 있을 때 어른한테 배우는 거라는 소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그렇게 처음 접한 음주는 꼭꼭 접어놓았던 마음이 다시 펼쳐지게 만들었다. 막걸리 몇 잔에 알딸딸해진 상호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나가서는 이미 외워버린 번호를 꾹꾹 눌렀다.

 

 “상호야. 대학도 붙었는데 나한테 할 말 없어?”

 “예? 아, 맞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순간 아직도 접지 못한 마음이 티가 나나 싶어 심장이 덜컹했다. 친한 형동생 사이도 못 하는 건 싫은데. 다행히 병찬은 별 얘기 없이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에 전화를 끊었고, 상호는 다행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섭섭하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며칠 후 병찬이 던질 폭탄과도 같은 제안은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제가 2년 전에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이 저한테 같이 살자고 그래요. 다은햄한테 말했으면 그건 무슨 애니냐고 물어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건 기상호한테 닥친 현실이었고, 병찬을 맘껏 좋아하던 시기였으면 오만 행복회로가 팽팽 돌아가서 사심을 가득 담은 상태로 O.K를 외쳤겠지만 최대한 마음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제안을 수락하자니 고문이나 마찬가지일 게 뻔한 상황이었다. 병찬햄과의 두근두근 동거라이프? 라는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저야 감사하죠.”라는 대답을 하기까지의 고뇌란.

 Q. 그런데 왜 첫사랑의 동거 제안을 수락하셨나요 기상호군?

 솔직히 사심을 배제하고서 객관적으로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이걸 거절하면 제가 아직도 마음이 남아있나 오해하실까 봐요. 아니, 오해가 아니긴 한데. 아무튼 결혼 전에 미리 같이 살아보다가 헤어지는 사람도 수두룩하다니까 같이 살다 보면 정이 떨어지고 더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도 있어서요.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같이 살다 보면 정이 떨어지고 더 쉽게 마음을 접기는 개뿔, 같이 살수록 커져가는 마음... 커져가는 고추... 저 햄은 도대체 왜 집에서 옷을 안 입고 다니는 거지 사람 심장 벌렁벌렁하게. 그래서 기상호는 일부러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집에서 몸을 바삐 움직이고, 분위기가 좀 이상해질 거 같으면 애니메이션을 보자고 하고, 이상한 내용이 나올 수가 없는 액션명작소년만화를 틀어버리고 그랬더란다.

 방학하고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나서 좀 힘들 뻔했던 차에 다행히 합숙 훈련 스케줄이 잡혀서 냅다 새벽같이 출발. 운동 삼매경이라 좀 잡생각을 잊으려나 했더니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집에 친구를 부른다고 한다. 그것도 제가 모르는 친구를. 상호는 저도 모르게 여자친구냐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어떤 호기심은 이성을 앞선다. 농담인 것처럼 수습했지만 어쨌든 여자친구가 아니라는 대답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며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여자친구가 아닌 건 다행이지만 왜 굳이 내가 모르는 사람을? 내가 없을 때? 이런 유치하고 치졸한 생각이 자꾸 끝없이 이어져서 상호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본의 아닌 훈련머신이 되어갔다.

 4박 5일의 훈련 일정을 불태우고 돌아오니 아무도 없어야 할 집에서 벨소리가 들린다. 병찬의 방에서 울리는 소리다. 노크를 해보아도 반응이 없어 슬쩍 문을 열어보니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게 헤집어진 침구 사이에서 빛나는 휴대폰 액정이 보였다. 계절학기 오전 수업을 신청한 걸로 알고 있는데, 방의 상태를 보니 정신없이 나가다가 폰을 두고 간 듯 했다. 휴대폰 액정에 확인되는 이름... 준최쿨미 성준수. 아는 사람인지라 상호는 긴장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호니?!”

 “네, 햄.”

 “하, 다행이다. 나 핸드폰 집에 두고 왔구나.”

 “네. 저 지금 막 도착했는데, 벨소리가 들려서 들어와 보니 침대 위에 있었어요.”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정신 없이 나오다가 깜빡했나 봐. 난 또 중간에 어따 흘린 줄 알고 엄청 걱정했네. 지금 잠깐 쉬는 시간에 준수 폰 빌려서 전화한 건데 혹시 괜찮으면 나 폰 좀 갖다줄 수 있어? 피곤하면 무리 안 해도 돼.”

 “아니에요, 괜찮아요. 금방 갈게요. 도착해서 준수햄한테 전화하면 돼요?”

 “어, 나 폰 잠금 안 걸려있어서 내 폰으로 전화해도 돼. 우리 상호 전화비 아껴. 진짜 고마워 상호야. 아, 그리고 어제 친구가 집에 일찍 가서 나 그냥 내 방에서 잤어. 니 방 안 들어감!”

 “제 방 하루 이틀 들어가시는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요. 아무튼 짐만 정리하고 금방 갈게요.”

 목소리 좀 들었다고 상호의 얼굴에 금방 웃음이 핀다. 전화를 끊고 옷가지 몇 개와 널부러진 침구를 둘러보며 이걸 대충이나마 치워놓고 갈까 고민하던 상호의 눈에 뭔가 익숙하지 않은 물체가 들어왔다. 보란 듯이 열려있는 침대 옆 서랍장과 그 안에 들어있는 작고 납작한 박스. 하늘색 바탕에 눈에 띄는 커다란 빨간색 하트가 시선을 강탈했다. 설마. 설마. 그저 서랍장을 닫아주기 위한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상호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본 그 박스에 적혀있는 선명한 글자.

 durex. 10개입.

 심지어 박스 옆에는 구깃한 영수증까지 고스란히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신용카드 승인일시가 어젯밤이다. 나쁜 짓을 하는 아이처럼 기상호의 심장이 달음박질하듯 뛰었다. 상호는 저도 모르게 하늘색 박스를 열었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10개입인데.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상호는 침대 건너편에 있는 휴지통을 열어 와르르 쏟았다. 뭉쳐진 휴지와 함께 사용한 콘돔이 쏟아져 나왔다. 정확히 세 개.

 나 오늘 친구랑 집에서 술 마실 건데. 얘 내 방에서 재우고. 얘 키가 나보다 커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나 그냥 내 방에서 잤어. 병찬이 했던 말들이 하나하나 퍼즐처럼 끼워맞춰졌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퍼즐이.

 “준수야,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무슨 소리요?”

 병찬의 연애 전선이 꼬여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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