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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시리즈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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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의 배신

18살. 기상호의 고3 수능 날. 수능을 보고 나오는 상호를 맞이한 것은 바쁜 부모님이 아니라 그날 시간이 난다며 내려온 박병찬이었다. 박병찬이 미리 내려간다며 기별을 주었기 때문에 마지막 과목이 끝난 기상호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감독 선생님의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시계만 내려보던 감독 선생님은 이내 가도 좋다 허락했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상호는 이미 품에 챙겨 들었던 가방을 꾹 끌어안고 쏜살같이 달려갔더란다. 뛰쳐나오는 학생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운동장에 나온 기상호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박병찬을 찾아 익숙지 않은 교문 쪽을 눈으로 훑었고 기다리는 사람 중에서도 머리 하나가 나와 있는 이와 눈이 마주쳤을 땐 저도 모르게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병찬햄!!! 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가장 먼저 뛰쳐나온 학생이 맹렬하게 달려오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병찬햄…? 하는 소리가 나온다. 얌전히 나오는 기상호를 반겨줄 생각만 했지, 저렇게 모든 시선을 다 끌면서 나올 줄 몰랐던 박병찬은 열이 오르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기다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상호는 헐레벌떡 뛰어와 그의 앞에 섰고, 박병찬은 제 앞에 선 이가 미처 멈추기도 전에 손목을 잡고 냅다 달렸다. 어, 어? 햄? 상호야 조용히 해…. 다들 쳐다보잖아…. 그런 이야기를 하며 바람처럼 뛰어가는 이들에게 시선이 꽂히다가 흩어진다.

 

좋아하는 형이 부산에, 그것도 저를 보러 내려왔다는 사실에 기상호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말에 해산물 맛집도 다 알아보았고 수능을 핑계로 부모님에게 아양을 떨어 용돈도 넉넉히 받아두었다. 대학생은 돈이 없다는데 이번엔 내가 사드려야지. 기상호는 그런 꿈에 부풀어있었다. 물론 어림도 없었다. 노련한 사회초년생 박병찬은 연하에게 단 한 번의 결제 기회도 주지 않았고 끝내 기상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영수증이 아니라 방금 들른 편의점에서 박병찬이 손에 쥐여 준 월드콘이 전부였다.

몇 번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잉잉거렸으나 돌아온 것은 박병찬의 부드러운 미소뿐이었다. 부드럽기만 했지, 그 미소에 담긴 뜻이 단호해 기상호는 입도 뻥긋 못했다. 결국 얌전히 병찬햄이 사준 콘을 우물거리며 마지막으로 부산 바다를 천천히 걷고 있으려니 기상호는 오늘 제가 마음먹은 것 중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 맛있는 거 사드리면서 어깨 좀 으쓱이려고 했더니 다 햄이 사고. 오락실에 가서 잘하는 게임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병찬햄이 몇 번 해 보더니 나만큼 잘해서 자랑도 못했다. 카페라도 사려고 했는데 그것도 못 했지. 노래방에 갔더니 햄이 더 잘 부르고. 우째 이런 사람이 있는지…. 기상호는 결국 입술을 삐죽거리고 말았다. 그것을 또 들켜 박병찬이 기상호의 안색을 살핀다. 뻔히 이유를 알고 있으니 심각한 낯이 아닌 게 묘하게 억울했다. 내는 아마 평생 병찬햄은 못 이기겠구나…. 이겨 먹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아직 마음먹은 게 하나 있으니까…. 기상호는 박병찬을 마주 보며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을 다시 조심스럽게 정돈한다. 귀엽게는 보여도 멍청하게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천천히….

 

"병찬햄."

"응? 왜 그래."

"저 이제 좀 있으면 성인이잖아요."

"상호 빠른 이잖아."

"...엇. 엣. 어?"

"빠른 아니야?"

"마, 맞는데…. 아니, 그래도 대학…. 가잖아요…."

"근데 성인은 아니지. 너 대학가도 나이 때문에 술 못 마셔."

"이잉…."

 

아씨…. 성인이 되면 사귀어 달라고 할라캤는데…. 기상호는 자기도 모르게 몰려오는 속상함에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럼 1년 뒤에 해야 하나? 근데 지금도 2년이나 기다렸는데…. 고민은 짧았다. 거절하면 거절하는 거지. 나는 오늘 말하기로 했어. 지금 말하나 1년 뒤에 말하나 어차피 나는 애로 보일 텐데…. 어린 마음은 결국 치기 어린 고백을 내뱉게 만든다.

 

"그…. 병찬햄. 저 햄 진짜 좋아해요. 햄이 저 귀여워만 하는 거 아는데 전 다른 의미로 좋아해요."

"...그래?"

"네. 저….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저 어른이 되었을 때 사귀어주실 수 있을까요?"

 

와…. 말했다. 말 안 더듬고…. 조금 절긴 했지만, 이 정도면 멀쩡했다! 다은햄의 코치로 몇 번이고 연습했던 단어를 실수 없이 내뱉은 것에 뿌듯해진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씩 웃었으나 이어 진지한 얼굴로 저를 마주하는 박병찬을 보자 멈칫했다. 그냥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혹시 기분이 나빴나…? 상호가 눈치를 보듯 흘끔 기색을 살피자 박병찬은 얼굴을 풀고 작게 웃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에 얹힌다. 쓰다듬는 손길엔 다정함이 담겨있다. 병찬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서, 기상호는 멋대로 기대하고 만다. 혹시 어쩌면, 병찬햄도….

 

"모르겠네. 지금 나한테 상호는 그냥 귀여운 동생이라서. 내가 잘 대해줘서 그런 거야?"

 

그럼 그렇지…. 기상호는 박병찬 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햄이 제일 다정하기도 하고…. 그냥 햄이 제일 좋아요. 햄이 내게 다정할 때가 너무 좋아요. 농구를 하는 모습이 멋있고, 그냥…. 보는 걸로도 좋아요. 계속 옆에 있고 싶어요."

"상호야. 너 어른 되려면 1년이나 남았어. 대학 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 보는데. 아마 마음이 바뀔 거야."

"...그래도요."

"나는 굳이 여지를 줘서 너 기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번 고백은 거절할게. 어른이 되고서도 여전하면, 그건 그때 얘기하자."

 

거절당하면 어쩌지, 걱정을 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다정한 거절에 기상호는 눈물이 나진 않았다. 병찬햄은 여전히 어른스럽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눈을 마주했을 뿐이다. 어두운 눈동자에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기상호는 그 눈을 마주하며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여전히 친구로는 지낼 수 있겠지. 기상호는 그냥 말갛게 웃었다.

 


상호는 준향대와 다른 대학교에 들어갔다. 준향대에서는 주전이 되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었고 그 대학교에서 상호가 지원한다면 반드시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보여준 덕에 결정된 일이라고 알려줬다. 병찬은 그것이 묘하게 아쉬웠다. 어쩐지 저를 따라 준향대에 지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상호 정도면 괜찮은데…. 아쉬워하는 제가 퍽 임을 기다리는 꼴인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갑자기 웃자 옆에서 같이 레포트를 적던 성준수가 제 기색을 살핀다. 아니, 웃긴 거 생각나서. 그리 말하는 병찬에게 어이없는 시선을 준 성준수는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꽂았다. 음음. 아쉽더라고 해도 만약 상호가 병찬이나 준수를 생각해서 준향대를 지원했다고 했다간 둘 다 상호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 옳은 선택이긴 했다. 준향대보다 상위 대학이었는 걸.

상호는 그 후에도 적응하느라 바쁜지, 종종 주고받던 연락이 많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저 훈련 끝났어요. 저 깼어요. 밥 뭐 먹고 있어요. 등의 안부만 겨우 보냈고 훈련이 끝난 뒤 이어지는 톡은 보통 상호가 곯아떨어지며 끊겼다. 다음 날 아침 저 잤어요…. 하는 문자 몇 번. 이제 병찬은 상호에게서 답이 안 오면 자는구나 싶었다. 하긴, 대학교의 훈련은 고등학교보다 빡세다. 듣기론 거기 대학교 군기가 좀 있다던데, 기합 당하는 건 아니겠지? 병찬은 그게 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가끔 상호가 시간이 나는 날에는 병찬과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이야! 병찬이 반기면 상호는 병찬햄~~ 하면서 제게 다가와 눈을 반짝였다. 그런 상호를 꾸욱 안아주고 아직 나 좋아하는 거 맞지? 라고 생각하며 눈을 마주하면 여전히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저를 쳐다보는 꼴이 마냥 예쁘기만 했다. 여전히 저를 좋아하는 것 같은 기상호. 그 얼굴을 마주하면 병찬은 속절없이 웃음이 났다. 얘 어른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병찬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대학교 2학년이 된 상호의 생일이 다가오는 날. 병찬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상호…. 아직 약속 안 잊어버렸으려나…. 사실 약속이라기에도 애매하다. 마음이 그대로라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한 게 전부니까. 혹시나 어른이 되고 나니 마음이 식었는데 그때 사귀자는 말을 해버려서 후회할까 봐 최대한 담백하게 말했는데. 실상 병찬 또한 그때 상호를 좋아하고 있었다. 제게 호의를 가지고 힘껏 다가오는 사람을 싫어하기는 어렵다.

물론 고백을 받기 전까지 그 감정은 친하고 착하며 귀여운 후배에게 보내는 감정일 뿐이었지만, 고백받는 순간 병찬은 상호와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른이면 어른답게 굴어야지. 라는 마음으로 선을 그었으나 상호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계속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도 날 좋아해 주려나. 나는 혹시나 해서 계속 고백도 거절하면서 너 기다렸는데. 이렇게 기대하다가 아니면 어쩌지….

사실 병찬은 상호의 사랑이 식었을까 진심으로 걱정한 적은 없었다. 이 걱정은 다 배부른 고민이다. 뻔히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괜스레 의심하는 척하며 두근거리기나 하는. 그야, 여전히 저를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는 꼴이 모두 보였으니까. 이번에 고백하면 받아줘야지. 부끄러워하면 내가 고백해야지. 병찬은 상호의 생일에 맞추어 고백할 준비를 끝마쳤다.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찔러는 봐야지. 그러고도 부끄러워하면, 응. 병찬은 제 고백받을 귀여운 얼굴을 상상하다가 제 얼굴을 꾹꾹 눌렀다. 병찬은 다가오는 상호의 생일이 너무 기대되어서 종종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상호의 생일날 자고 일어난 병찬을 맞이한 것은 상호의 카톡 프로필에 적힌 ♥D+1♥ 이었다. 어라…. 나 아직 상호랑 만나지도 않았는데…. 병찬은 혹시 어제 저와 상호가 만났나 생각했으나 상호는 어제 자정에 맞추어 운동부의 사람들과 술을 먹기로 했었다. 게다가 병찬은 오늘 약속을 위해 10시에 잤다. 그럼…. 누가 봐도 커플 디데이인 것 같은 이건 뭔데…. 병찬은 아직 자신이 잠이 덜 깼나 싶었다….

병찬은 카톡을 켜 물어보려다가 내려놓았다. 이걸 보고 냅다 물으면 너무 티가 나잖아…. 별거 아닐 수도 있어. 어른스럽게 행동하자…. 병찬은 급하게 씻고, 오늘 약속을 위해 코디해놓은 옷을 챙겨입은 다음 준비한 향수까지 뿌린 뒤 멋있게 머리까지 넘겼다. 그다음 조금 급한 발걸음을 억지로 늦추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마음이 급한 탓에 억지로 늦춰도 여전히 빠른 걸음이었다. 그렇게 반쯤 뛰듯이 걸으면 저 멀리서부터 누가 봐도 어제 먹은 술에 해롱거리는 꼴의 기상호가 보였다. 아이고.

 

"상호야~"

"해앰…."

"상태가 이게 뭐야~ 오늘 나랑 놀 수 있어?"

"당연하죠. 햄…. 제가 오늘 죽어도 햄이랑은 놀죠…. …우욱."

"아이고. 숙취해소제는 먹었어?"

"아뇨…."

 

결국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 한 병 사 와서 먹이고 상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앉아있을 겸 근처 카페를 하나 골라 들어갔다. 상호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고개를 뒤로 꺾은 상태로 뻗었다. 나 오늘 너 데리고 멋진 레스토랑이나 가려고 했는데. 병찬은 몰래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가 다시 어른답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상호야~ 어제 그렇게 많이 마셨어?"

"말도 마세요…. 자정이 되자마자 어른이라고 선배들이 술을 말아주는데…. 다른 과 누나들까지 줘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거다. 병찬은 슬쩍 자기 손을 모아 잡으면서 저도 모르게 스트레칭을 하듯 제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누나들?"

"네…. 옆에서 간호과? 회식이 있었나 봐요. 거긴 이미 사람이 슬슬 빠질 때라 선배 중 한 분이 같이 앉겠냐고 해서…."

"그렇구나. 갑자기 소개팅 같은 거네?"

"네…. 아 맞다. 그중 한 분이 제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사귀기로 했어요."

 

음. 어. 그래. 물론 저 부분을 물어보려고 한 건 맞는데, 갑작스럽게 스트레이트로 꽂힌 3점 슛에 병찬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상호한테 대학교 오면 사람 많이 만날 텐데 마음 바뀔 거라고 한 건 병찬이니까. 진짜 변할 것으로 생각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실제로 일어난 일에 병찬은 입을 다물었다.

어른 되면 사귀어달라며…. 물론 내가 먼저 선 그은 건 맞는데 그렇다고 1년이나 더 애기일 애한테 도장 찍어두는 것도 그렇잖아…. 난 그냥 양심을 좀 지켰을 뿐인데. 왜….

병찬은 아직도 고개가 꺾여있는 상호를 보다가 손을 올려 조용히 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그냥 눈 딱 감고 1년만 기다려달라고 할걸. 1년 전의 자신을 마주하면 그냥 받아주던지 절대 맘 못 돌리게 계속 꼬시라고 할 텐데. 지나간 시간은 잡을 길이 없다. 상호가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기에 바로 손을 내렸다.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는 병찬의 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 거짓말쟁이 녀석은 햄, 머리가 좀 삐쳤네요. 라며 머리나 정리해줬다.

병찬은 진짜 울고 싶었다….


강아지의 진실

기상호는 생각이 많다. 그 생각을 굳이 내놓는 경우라곤 농구를 할 때, 혹은 김다은과 쓸데없는 드립을 칠 때뿐이라 세간의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기상호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았다.

고백을 다정히 거절당한 상호는 그날 웃는 얼굴로 병찬을 배웅해주고선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울었다. 병찬이 거절했을 때는 그 다정함이 마냥 좋기도 했고, 어쩐지 거절당한 것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아 괜찮았는데 병찬을 배웅하며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죽죽 나왔다. 나 진짜 차였구나…. 나는 그냥 귀여운 동생이구나…. 상호는 소리 내 엉엉 울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누가 봐도 부은 눈으로 숙소에 도착하니 희찬과 다은햄이 가장 먼저 튀어나와서 달래주었고 사정을 들었던 태성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으면서도 다정하게 유자차를 타 줬다. 새로 들어온 후배들도 저를 걱정하는 것에 상호는 그런 애정들을 받아들이며 괜찮다고 그냥 울면서 웃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병찬햄이 날 위해서 그렇게나 다정하게 거절해줬는데 미련을 가지면서 구질구질하게 굴어봤자 정이나 떨어지겠지. 좋은 동생이라고 했는데 귀찮은 동생이 될 수는 없었다. 운동하는 다른 학교 후배가 고작 수능 쳤다고 부산까지 내려와 주는 걸 보면 그래도 나를 엄청나게 아껴주는 거니까 나도 햄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야지.

병찬이 들었으면 그거 아니야 상호야!!! 라며 비명을 질렀을 결심이다.

 


 

상호는 인내심이 좋은 편이었지만, 제 감정을 참을 줄은 알아도 숨기는 것은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참을 만했는데 티가 나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단 소리다. 하여 상호는 일부러 준향대를 지망하지 않았다. 쓸 수 있었지만 쓰지 않았고, 또한 저를 스카우트하겠다는 어떤 대학의 제의를 받고 감독님도 그 대학을 추천한 김에 바로 지원하기로 했다. 마침 그 대학은 준향대와도 멀어서 상호에게 딱 알맞은 곳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 상호는 의도적으로 병찬과의 메시지를 줄였다. 훈련을 핑계로 미리보기에 뜨는 톡만 확인했고, 아주 가끔 침대에 누워 병찬과 톡을 주고받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는 마치 켜놓고 잠든 것처럼 휴대폰을 밀어놓고 이불 안에서 발을 동동거렸다.

아! 병찬햄 너무 좋아. 병찬햄은 내가 사람을 많이 만나면 마음이 바뀔 거라고 했는데 턱도 없었다. 사람을 만날수록 병찬햄이 생각났다. 애초에 그저 귀엽다는 이유로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고요. 상호도 자기가 객관적으로 귀여운 사람 아닌 걸 알았다. 누가 187cm의 거구의 남성을 귀여워하겠는가? 병찬햄 같은 사람이나 상호 귀여워~ 해주는 거다. 게다가 병찬햄은 농구도 잘하잖아요. 잘생겼고, 멋지고….

상호는 답장하지 못한 휴대폰을 빤히 쳐다본다. 다시금 사랑한다고 보내고 싶었다. 이제 어른이 되기까지 반년 정도 남은 저는 아직도 당신이 미칠 듯이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직도, 어른이 되면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했던 말에 저는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마음을 보내지 않도록 참는 것은 그럭저럭 쉬웠다. 아무것도 안 하면 되니까. 상호는 결국 휴대폰을 등지고 벽을 쳐다본다. 보내지 못한 사랑이 머리를 맴돌아서 쉬이 잠들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상호와 병찬은 가끔 만났다. 상호는 병찬의 귀여운 동생으로 있고 싶은 거지 인연을 끊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병찬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너무나도 다정했고, 상냥했고, 또…. 멋있었다. 어떻게 세상에 병찬햄 같은 사람이 태어났을까. 아주 가끔 있는 만남에도 상호는 여전히 충만한 사랑을 느낀다. 만남마다 상호는 이 마음을 티 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온통 쏟아낼까 봐 낑낑거렸다. 귀여운 동생으로 있자. 계속 옆에 있고 싶어. 멀어지는 건 싫어. 그냥 가까이서 계속 보고 싶어. 그리 생각하며 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고 헤어지면, 항상 돌아오는 길에는 울었다. 서러워서는 아니다. 답답해서도 아니고. 그냥 병찬이 너무 좋은 나머지 어쩔 줄 몰랐다. 그냥 옆에 있고 싶은 건데 맘대로 깎여주지 않는 마음이 야속했다. 내 말 들어! 그러다가 결국 다 들키고 병찬햄이 멀어지면 너도 후회할 거면서 어? 상호는 괜히 제 마음을 탓하며 숙소로 향했다.

 


 

그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일임을 맹세한다. 저녁 10시부터 자리는 시끄러웠고 이미 선배들 대부분은 한 잔씩 걸친 상태였다. 술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상호는 눈치를 보니 술을 안 마시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일 병찬햄 봐야 하는데 선배들의 주도로 빠지지도 못하는 자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상호는 열심히 선배들의 술잔을 끊임없이 채우며 빨리 녹다운시키려고 들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술에 취한 사람이 한 명 일어나더니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옆 테이블에 말을 걸었다.

 

"저기, 저희가 얼추 숫자가 맞는데 같이 마실래요?"

 

그것에 돌아보니 예쁜 여성분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선배가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간호과에서 과 회식을 나왔다는 것 같은데, 이미 갈 사람들은 가고 달리는 사람만 남았다더니 금세 두 테이블을 붙여버렸다. 어라, 언제든 빠져나가려고 끝에 앉았던 기상호, 고대로 중앙에 끼었다. 와…. 이래서 어케 나가는데…. 기상호는 화장실 핑계를 댈까, 생각하며 눈을 굴리다 누군가 팔을 잡아 오는 것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했던 생각은 와, 이 누님. 병찬햄 닮았네.였다. 꼬인 끼 하나 없이 깔끔한 직모에 다듬은 앞머리, 목뒤를 덮은 단발머리. 최소한의 화장만 한 듯 단정한 얼굴이 누구를 생각나게 하기 딱 좋았다.

 

"넌 이름이 뭐야?"

"저, 저는…. 기상호요…."

"그래? 나는 박민아라고 해. 간호과 2학년이야. 너는?"

"저, 저는 체교과 2학년인데…."

"술은 못해서 안 먹는 거야?"

"아뇨, 저…. 빠른인데…. 내일 생일이라 가지고…."

"진짜? 동갑이 아니었구나~ 어쩐지 조금 귀엽더라."

 

이실직고하자면, 그 부드러운 음성 하며 다정한 어조. 제게 싱긋 웃어주는 얼굴과 부드럽게 붙어오는 몸이…. 특히나 앉아있다지만 여전히 건장한 체격의 기상호에게 귀엽다고 쉽게 말해주는 면 등이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물론 그 누군가는 남자인데다 꽤 낮은 목소리였고, 이쪽은 여자인데다 여자치고도 목소리가 높아서 빈말로도 똑같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딱 그랬다.

하지만 기상호는 착각하지 않는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저…. 그….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나 네가 좀 마음에 들었는데…."

"진짜요?"

"응. 귀엽게 생겼잖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어?"

"아뇨, 그…. 차여서…."

"그럼 임자 없네?"

"네, 네…. 저, 근데 아직…. 못 잊었고…."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차였다며?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는다잖아. 응?"

 

아, 이런 점은 병찬햄이랑 안 닮았네. 병찬햄이면 그냥 위로해주고 농구 연습이나 하자고 할 텐데. 기상호는 어쩐지 그 부분이 안심되었다. 내가 이 사람을 병찬햄의 대역으로 쓰진 않겠구나…. 하는 그런 안심.

그렇네, 나는 병찬햄에게 차였고…. 따지면 임자가 없다. 사귀는 건 모르겠지만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놀고…. 그러면 조금 잊을 수 있을까?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찔려 변명하듯 말했다.

 

"저, 그…. 못 잊으면…. 죄송하지 않을까요…. 누님한테…."

"그럼 그땐 헤어지면 되지. 못 잊을 것 같으면 헤어져 줄게. 어때?"

 

기상호는 술도 마시지 않은 멀쩡한 정신으로 기어코 제게 대시하는 한 살 연상의 누님에게 넘어갔다. 도피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병찬과 상호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물론 나름 귀여운 동생과 멋있는 형아의 사이였지만 그 사이가 연인이 생기는 것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

게다가 기상호는 구구절절 제 상황을 설명했고 그런데도 만나보고 싶다고 한 것은 저쪽이었으니까. 저쪽도 그렇게 진지한 만남을 원하는 것 같진 않았기에 기상호는 바로 번호를 교환하고, 카톡에 디데이를 적어두고, 12시가 넘은 뒤에는 선배들이 권하는 술과 함께 민아 누나가 권하는 술까지 원샷하고 그대로 꼬라박았다.

 


 

일어나니 ♥누나야♥ 라는 사람에게 [잘 잤어?] 라는 카톡이 와있었다. 와 이 하트 머고…. 이렇게 저장한 기억은 없는데 서울깍쟁이같이 보이던 사람이 누나야를 알 것 같진 않고 내가 술김에 저래 놓았나…? 기상호는 그 상황이 영 괴리감이 느껴졌으나 시간을 보니 병찬과의 약속 시간이 1시간 남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거의 굴러가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집은 멀쩡하게 들어온 듯 잃어버린 소지품이 없었다. 다 외투 주머니에 잘 들어있어서 찾는 수고는 안 해도 됐다. 20분 만에 후다닥 씻고 나온 뒤-술 냄새가 날까 봐 빡빡 닦았다- 오늘 입으려고 준비한 옷들을 입고 뛰쳐나갔다. 와! 술 먹고 뛰려니까 진짜 토할 것 같은데! 하지만 약속 시간에 늦고 싶지 않았던 상호는 그냥 전력으로 달렸다.

 

약속 시간은 1시였지만 병찬은 언제나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나왔기에 상호는 그에 맞추어 15분 일찍 나오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 병찬을 기다리게 하기 싫었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병찬햄이 먼저 저를 발견하고 이름을 불러줬거든. 뛰어온 탓에 헉헉거리며 도착한 뒤 숨을 고르고 있으면 곧 저 멀리서 병찬이 언제나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온다.

그것에 눈을 돌리면…. 와…. 진짜 잘생겼다…. 사람이 어케 이렇게 잘생겼지. 최상급 미남인 준수햄을 1년간 보고 자랐음에도 병찬의 잘생김은 질리지 않았다. 옷도 평소보다 멋 부린 게 티가 났고 가까이 오니까 뭔 냄새인지 시원하면서 달달한 향이 기분이 좋았다. 머리는 넘겼는데, 와, 마빡을 다 깠는데 뭐 절케 잘생겼노. 상호는 자기가 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넋이 나간 채 병찬을 구경하며 횡설수설하다 결국 병찬의 인도에 따라 숙취해소제를 먹고 카페까지 갔다.

 

"상호야~ 어제 그렇게 많이 마셨어?"

"말도 마세요…. 자정이 되자마자 어른이라고 선배들이 술을 말아주는데…. 다른 과 누나들까지 줘서 죽는 줄 알았어요."

"누나들?"

"네…. 옆에서 간호과? 회식이 있었나 봐요. 거긴 이미 사람이 슬슬 빠질 때라 선배 중 한 분이 같이 앉겠냐고 해서…."

"그렇구나. 갑자기 소개팅 같은 거네?"

 

소개팅. 소개팅이라기보다는 그냥 남녀 섞여서 먹고 죽자 판에 가깝긴 했지.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어 이거 기회 아냐? 병찬햄에게 제가 이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으며 영원한 귀여운 동생으로 남을 거라는 티를 낼 타이밍 아냐?? 민아 누나 미안해요! 근데 누나는 쿨하니까 이런 거 신경 안 쓰시죠? 누나가 먼저 꼬셨으니까 봐주세요! 병찬햄과 헤어지고 나면 진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좋아한다고 말했던 양념치킨 기프티콘이라도 쏴드려야겠다는 잡생각을 한 상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네…. 아 맞다. 그중 한 분이 제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사귀기로 했어요."

 

나 목소리 안 떨렸지? 좋아…. 마침 고개를 위로 젖히고 있어서 제 표정이 잘 안 보일 것 같았다. 거짓말이 아니지만 어쩐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아니,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어버린 탓에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었다. 뭐, 뭐…. 나 거짓말 안 했어. 내가 좋아해서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었잖아. 난 깨끗해. 오늘 역시 안 되겠다고 말하겠지만 어쨌든!

상호는 조용하게 심호흡을 하면서 제 양심을 사정없이 찌르는 죄책감을 어떻게든 몰아내며 천천히 병찬을 마주했다. 어라, 머리가 왜 삐쳤지. 어디 걸렸었나?

 

"햄, 머리가 좀 삐쳤네요."

 

상호는 그대로 손을 뻗어 삐친 병찬의 머리를 조심히 폈다. 왁스를 발랐는지 뻣뻣한 머리카락을 어색하지 않게 잘 다듬어본 상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병찬을 봤다.

술 마셔서 어지러운 정신으로도 병찬은 진짜 잘생기고 멋지다. 귀여운 동생의 생일이라고 이렇게 멋까지 부리고 나오다니. 귀여운 동생만큼은 저 하나면 좋겠다…. 욕심인가?

 

"근데 병찬햄, 오늘 좀 안색이 안 좋은데 병찬햄도 어제 무리하신 건 아니죠?"

"응? 아니? 전혀. 카페 에어컨 바람이 찬가…."

"지금 겨울인데…."

"...난방 온도가 낮은가…."



강아지의 진심

상호는 병찬과 만나고 몽글몽글해진 기분으로 헤어졌다. 오늘 내내 안색이 안 좋은 것이 걱정되어 기어코 병찬을 들어가게 만든 후였다. 하여튼 병찬햄. 아프면 쉬고 다음에 더 놀아주지. 너무 친절하다니까. 상호는 어쩐지 쓸쓸하게 걸어갔던 병찬을 떠올리며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카톡방에 [잘 들어가세요. 병찬햄!!]이라는 말과 함께 낑낑거리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붙여 보냈다. 병찬이 상호가 생각난다며 선물해준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은 그 후 주변 지인들이 이 개만 보면 상호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애용하는 이모티콘이었다.

상호는 작게 킁, 코를 훌쩍이며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다. 병찬을 보고 온 날에는 항상 그랬으니 이젠 익숙한 일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저를 보며 흘끔 시선을 주지만 상호는 이제 저런 시선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지나가는 길에 키 큰 남자가 울면서 가더라 정도의 작은 이야깃거리로 소비되고 말테니까. 처음이야 좀 시선을 신경 썼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기만 했다.

안색이 안 좋은 병찬을 걱정하는 것도 맞았지만, 오늘의 병찬은 너무나도 멋졌다. 솔직히 더 있었으면 못 참았을 것 같아서 억지로 보내기도 했다. 잘 참아온 마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진짜 멋있네…. 형은 그동안 연애 많이 했을까. 형은 잘생겼고 다정하고, 평소에도 멋진데 더 멋지게 꾸밀 줄도 알고. 당연히 해봤겠지? 형한테 사랑받는 사람들은 진짜 좋겠다. 제가 땅을 파고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만두는 법을 알았으면 진작에 했겠지. 상호는 기어코 소리 내 울어버렸다.


집에 도착해 씻은 상호는 바로 민아 누나에게 장문의 긴 사과 카톡을 날렸다.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누나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양심상 안 될 것 같다는 구구절절한 사과였다. 또한 오늘 그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도 고백했다. 못 할 짓이라는 자각은 진작에 있었으니까. 1은 빠르게 사라졌고,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장난스러운 이모티콘을 보냈다.

 

[네가 너무 귀엽게 굴길래 좀 놀려주고 싶은 것도 있었어. 내가 더 미안하네~]

[아녜요. 그렇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래도 친구는 해줄 거지? 애인이 아니더라도 너랑 이야기하는 거 재밌었거든.]

[네! 물론이죠. 저도 민아 누나 좋아요.]

그 카톡 이후 민아는 편한 친구로 상호를 대했다. 애초에 같은 학번이었고 마침 교양도 같이 듣는 것이 있어 점심에는 자주 만나 밥을 먹었다. 이제는 친구인 그를 보며 상호는 자주 병찬을 떠올렸다. 뭐, 애초에 착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 와닿았다는 거다. 대역은 아니었다. 그저 민아와 있으면 병찬을 좀 더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게…, 좋았다. 민아의 다정함은 병찬과 닮은 점이 꽤 있었거든. 상호는 조금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병찬이 너무 보고 싶을 때는 민아와의 약속을 일부러 만들기도 했다. 연인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고작 같이 놀 뿐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민아는 커플이 가기 좋은 데이트 장소를 많이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하나하나 소개해주며 나중에 그 사람과 운 좋게 이어진다면 가보라고 추천을 해주기도 했다. 상호는 그런 민아가 고마워 항상 자신이 밥을 사거나 했다. 객관적으로도 민아는 친구로서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동안 병찬과도 계속 연락하긴 했다. 병찬은 근래에 어쩐지 연락이 많이 늘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질문도 늘었다. 상호는 그런 연락 받으면 적당히 관심 없는 척 시간을 두면서도 꼬박꼬박 성실히 답했다. 병찬이 제게 그리 관심을 두는 것이 좋았으니까. 오늘은 친구랑 뭘 먹었어요. 오늘은 친구랑 어딜 갔어요. 오늘은 친구랑 뭘 했어요. 그런 답변을 남기면 병찬은 하나하나 다정하게 반응해주었다.

 

[우리 상호, 대학 가더니 친구가 많이 늘었나 보네~]

[아녜요. 별로 안 늘었어요. 다 친구 한 명이랑 한 거예요.]

[그래? 누구랑 친해졌어?]

[전에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 동기요.]

 

1이 사라졌는데 병찬의 답이 한참이나 오지 않아 상호는 바쁜가 보네…. 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런 소소한 침묵에도 서운해하는 버릇은 고쳐야 할 텐데. 괜스레 카톡방을 미련스럽게 쳐다보다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제 카톡을 기다려준 민아에게 밝게 웃어 보이며 상호는 다음에 뭘 하고 놀 것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도 괜히 검은 화면을 계속 내려다봤다.

 


 

연락이 늘었다고 기뻐한 것이 무색하게, 요즘 병찬의 연락이 많이 줄어들었다. 제가 먼저 줄였으면서 병찬이 줄었다고 슬퍼하는 꼴이란. 상호는 제 꼴이 좀 웃긴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슬픔은 어쩔 수 없다. 병찬은 전보다 늦게 답했고, 가끔은 대답하기 애매한 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상호가 좀 더 대화할 건덕지를 던져주면 대답했으나 예전보다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긴, 형은 이제 슬슬 얼리도 다가올 거고…. 거기 나간다드만. 바쁠지도 모르겠다. 상호는 미련 넘치는 눈으로 카톡방을 한참 내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병찬과 했던 카톡을 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면 나, 대학교 들어와서는 병찬햄한테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이 없네. 괜히 티가 날까 봐 가만히 있다가 병찬이 이때 시간 괜찮냐고 물어오는 것에 고개 끄덕이는 게 버릇되었나. 예전엔 만나고 싶어도 참았고 요즘엔 만나고 싶으면 민아와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못 만난 지 얼마나 되었더라? 상호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날짜를 세다가 병찬에게 카톡을 보냈다. 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병찬햄. 저 이번 주 주말에 쉬는데 혹시 시간 되세요?]

 

사라지지 않는 1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이제 훈련 시간이다. 사열 종대로 서서 감독과 코치의 지시사항을 듣고 상호는 하던 데로 슛연습을 하러 갔다. 슛은 여전히 잘 늘지 않았으나 아예 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상호는 볼을 던진다. 병찬햄 보고 싶다. 병찬과 만나면 둘의 끝은 항상 동네 농구코트였다. 거기서 깔끔히 슛을 던지는 병찬을 구경하는 것이 상호의 낙이었는데. 아, 나 오랜만에 보면 또 못 참는 거 아냐? 괜히 말했나…. 근데 햄 요즘 바빠 보이니까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르지. 잡생각을 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볼이 안 들어갔다. 답답함에 한숨을 쉬면서도 다시 볼을 잡는다.

한참 슛연습을 하다가 다른 이들의 1:1 연습에 조금 어울리기도 하고, 그렇게 실컷 땀을 빼고 나니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씻고 밥 먹고, 그 뒤 휴식 시간. 흐르는 땀을 닦으며 휴대폰을 켜자 여러 알림 중에 병찬의 이름이 있는 것이 보인다. 미리보기에 뜬 병찬의 답이 긍정적이라 상호는 급하게 알림을 눌렀다.

 

[응 그때 마침 별일 없네]

[상호가 웬일이야~ 형한테 먼저 시간 되냐고 하고]

[(신나 하는 여우 이모티콘)]

[몇 시에 만날까?]

[형이 네 쪽으로 갈게]

 

으아- 벌써 마음 이상해…. 진짜 언제쯤 그만 좋아할 수 있는지. 상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천천히 답했다. 이번에는 1이 사라지는 것이 빨라, 샤워 순서를 기다리며 병찬과 얘기를 더 나눌 수 있었다. 적당한 근황을 주고받으면서 물을까 말까, 고민을 해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은근히 연락이 없음에 관해 물어버린다. 그러자 예상한 대로 바쁘다는 답이 오기에 상호는 조금 안심했다. 나한테 관심 떨어진 거 아니구나! 상호는 조금 헤벌쭉한 얼굴이 되었다.

 

[근데 상호야.]

[너 카톡 프로필에 디데이 갱신은 안 해?]

[네?]

[아 헉 병찬햄 만나고 바로 헤어졌는데 깜박했다]

[헤어졌었어?]

[네]

[좋은 분이시지만 역시 전 소개팅보단 서서히 알아가는 게 좋아요]

[그래?]

[그렇구나.]

[아, 형 밥 먹고 올게. 오늘 하루 잘 보내~]

[(인사하는 여우 이모티콘)]

[맛있게 드세요!]

[(아쉬워하는 강아지 이모티콘)]

 

약속 잡아버렸다…. 잡아놓고 나니 갑자기 후회가 조금 밀려왔다. 그래도 한동안 안 만나긴 했지. 후회를 덮을만한 기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소소한 것들마저 병찬에게 모두 말해버리는 것이 버릇이었는데 대화도 많이 못 했으니까, 병찬에게 말해줄 것이 매우 많았다. 듣고 싶은 이야기들도 많았다. 병찬 역시도 언제나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가끔 웃어주는 병찬의 얼굴을 보는 게 그렇게 좋았는데. 아, 이럴 때면 준향대에 넣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나. 같은 생각이 든다. 넣었다가 혹시라도 합격해버리면 안 갈 자신이 없을 것 같아서 못 했지만….

상호는 그대로 민아의 카톡에 들어갔다. 놀러 갈 때마다 민아가 여기에 갈 거라며 링크를 올려줬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데이트인데 어디를 데려가면 좋을까 고민하며 그 링크들을 살펴보고 있으려니 민아에게 뭐하냐는 카톡이 왔다. 상호는 문득,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민아에게 조언을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누나]

[응?]

[저 다음 주 주말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만나기로 했는데요...]

[데이트?]

[데이트까진 아니구…. 그냥 친구로서 만나는 건데...]

[그게 데이트지. 왜, 코스 추천해줄까?]

[네!]

 


상호는 언제나처럼 약속 장소에 15분 정도 일찍 갔는데, 항상 10분 전에 나오던 병찬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깜짝 놀라 뛰어갔다.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닌데 와 이리 예쁘게 꾸미고 왔담…. 병찬의 앞에 서서 저도 모르게 멍을 때리는 상호를 보며 병찬은 작게 웃더니 웬일로 먼저 상호의 손을 잡아 왔다. 어라, 어?

 

"오늘 너한테 맡겨두라며. 상호는 계속 그렇게 멍때릴 거야?"

"아, 아이예요. 가요!"

 

병찬햄이 먼저 잡아 왔으니까 괜찮겠지. 상호는 제 얼굴을 가리고자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며 병찬의 손을 꽉 잡았다.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변명도 했다. 병찬의 손을 잡으니 손안에 가득 찬다. 그러고 보면 내가 손이 더 컸었지. 손을 맞잡아본 것이 아주 오래전이라 간만에 생각이 났다. 아직 열 오른 얼굴이 보이지 않게 병찬이 제 옆에 설 수 없는 정도로만 유지하며 상호는 빠르게 움직였다.

민아가 추천해준 데이트 코스는 요즈음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강변 옆 산책로를 걷다가 근처의 조용하고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에 가서 쉬고, 이어 적당한 가격의 오마카세 집을 들러 저녁을 먹은 뒤 그 근처의 농구코트에 가는 것이었다. 농구코트는 상호의 고집이었기에 민아는 농구코트가 있는 곳부터 찾고 근처에서 맛집을 찾아주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는 정말 예뻐서, 그 사이를 걸어가는 걸로도 그림이 됐다. 꽤 유명한 길인지 같이 걸어가는 가족들과 커플들이 많았다. 상호는 아직도 병찬의 손을 꾹 잡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잡고 오다 보니 갑작스럽게 놓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얼떨결에 계속 잡고 있었다. 병찬햄도 그 손을 뿌리치진 않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상호는 저도 모르게 병찬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상호야."

"...네, 넵?"

"길이 너무 예쁜데 우리 사진 찍을까?"

"아, 네! 좋아요!"

 

병찬햄과의 추억을 담은 사진! 상호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어 카메라를 들었다. 어디에서 찍으면 예쁘려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꽃이 특히나 많이 핀 나무 쪽으로 병찬을 데려가 세웠다. 여기 서보세요. 그리 말하곤 병찬을 놓은 뒤 몇 발자국 떨어진다. 햇빛은 적당히 꽃잎을 머금은 채로 병찬을 비추고 있었다. 그냥 찍어도 화보 같은데, 햇빛도 꽃잎도 그 주위에 있으니 아름답다고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병찬은 어쩐지 담담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호는 그 시선이 부끄러워 화면에 병찬을 담으며 재빨리 제 얼굴을 가린다.

그때 바람이 분다.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향한 채 흩날리는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눈가를 찌푸리는 병찬의 모습을 넋 놓고 보던 상호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화면을 눌렀다. 어라, 이거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

 

"상호야!"

"네?"

"찍었어?"

"아, 아뇨…. 못 찍었어요."

"진짜? 아깝다!"

병찬이 크게 웃는다. 흩날린 꽃잎이 병찬에게 몇 개 내려앉은 상태였다.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상호는 결국 생각조차 끝맺지 못하고 멍을 때린다. 상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결국 웃음을 멈춘 병찬이 머쓱한 얼굴로 다시 한번 상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상호는 일단 동영상을 멈췄고, 재빨리 카메라로 변환했다. 동영상이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사진이었다면 그 순간을 찍지 못했을 테니까. 몽글거리는 마음을 꾹 누르고 여상한 목소리로 다시 찍을게요. 그리 말하자 병찬은 웃으며 오른손으로 브이를 해 보였다. 몇 번 자세도 바꾸고, 제 위치도 바꾸며 대략 열 장은 찍은 상호는 웃으며 병찬에게 다가갔다.

잘 찍은 사진 보내드릴게요. 그리 말하며 특히 마음에 들게 나온 사진 서너 장을 병찬의 카톡에 전송하니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병찬이 상호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어, 가까워…. 갈 곳 잃은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리다 아직 사진을 전송 중인 채팅방에 고정된다. 상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상호야."

"...네, 네…."

"나는 둘이 같이 찍고 싶었던 건데. 찍어줄 거지?"

 

이미 제 허리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그리 말씀하셔도요. 그냥 말해도 거절 못 했을 말을 이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너무 가까운데. 나 심장 소리 다 들리는 거 아니야? 열이 오르는 얼굴을 느끼면서도 병찬이 본인의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켜면 속절없이 그것을 마주 본다. 전면 카메라로 전환되니 부드러이 웃고 있는 병찬의 얼굴 옆에 멍청해 보일만치 얼이 빠진 제 얼굴이 보인다. 아, 안 되는데. 너무 티 나는데. 이러면 들키는 거 아냐? 그럼 안 되는데….

 

"찍을게~ 브이~"

 

환히 웃는 병찬의 얼굴을 보고 상호는 결국 무력하게 두 손으로 브이를 해 보인다. 꽃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싶은 탓에 최대한 쭉 뻗은 병찬의 휴대폰 속에 둘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나 너무 등신같이 웃는 거 아이가…. 하지만 병찬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였다. 제가 바보 같은 얼굴이 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다. 상호는 나오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 후로 상호는 적당히 어색하지 않을 거리를 두고 병찬의 옆을 따라 걸으며 민아가 준비해준 코스를 천천히 밟았다. 의외로 단것을 좋아하는 병찬은 맛있는 디저트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저녁으로 먹은 오마카세는 딱 좋은 가격대에 준수한 구성으로 먹는 내내 대화가 끊기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마지막으로 상호가 정해둔 농구코트에 도착한 뒤 챙겨온 농구공을 꺼내 들자 병찬이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서 들고 슛을 던진다. 깔끔히 들어가는 포물선이 아름답기만 하다. 떨어진 공은 제 쪽으로 굴러왔고, 저는 그것을 잡아 마찬가지로 슛을 던졌다. 운이 좋은 모양인지 저 또한 한 번에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 씩 웃으며 다시 제 쪽으로 굴러오는 공을 집어 들어 병찬에게 패스한다.

한참 그렇게 공을 주고받으며 슛연습을 하면서 상호는 생각한다. 아, 오늘은 진짜 돌아가면서 펑펑 울겠구나. 오늘 너무 행복했거든. 보나 마나 가는 길에 펑펑 울고 내일 눈이 잔뜩 부어버릴 게 뻔하다. 공용 냉장고에 숟가락을 넣어놔야지. 그냥 얼음 컵을 하나 사갈까. 잡생각이 섞이면 자연스레 에임이 나빠진다. 림을 맞고 튕겨 나오는 공이 제 쪽으로 날아오길래 몇 발자국 다가가 그 공을 받았다. 이어 병찬 쪽으로 던지자 병찬이 그것을 받아서 들었음에도 쏘지 않는다. 그것에 가만히 병찬을 보고 있으니 그가 문득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것을 깨달았다.

 

"상호야."

"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주변의 소음이 모두 멈추는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요. 있죠. 바로 앞에 있는데. 상호는 순간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공, 저주세요. 그리 말하면 병찬은 상호에게 패스한다. 그것을 들고 병찬을 등지며 공을 든다.

 

"있죠. 뭐…. 전 사람 다 좋아하잖아요."

"...전에 네가 나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아, 그게 몇 년 전이에요~"

"그만큼 오래전은 아니지 않아? 1년 조금 넘었는데."

"1년 하고 반이죠. 아직도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

"이젠 아이예요. 병찬햄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슛을 쐈지만, 림에 들어가지 않는다. 정답이 아니라는 듯이 튕겨 나가는 꼴이 어쩐지 서럽다. 믿어주려나. 병찬햄은 다정하니까 믿어주지 않으려나. 그냥 외면해주지 않으려나…. 상호는 급하게 굴러가는 공을 주워 든다. 아, 안 되는데. 벌써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안 되는데. 돌아가면서 실컷 울어야 하는데. 지금은 안 되는데….

상호는 눈을 질끈 감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림을 쳐다본다.

 

"이젠 날 사랑하지 않아?"

"..."

 

아. 상호는, 정말이지.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세요? 내가 너무 티를 내서,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어요? 은근슬쩍 넘기려던 말이 기어코 나오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더 이상 그런 맘은 전혀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친구로서 옆에 있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아까까진 아니라는 말이 나왔는데 지금은 나오지 않았다. 단어가 너무 무거웠다. 사랑하지 않냐니. 상호는 결국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냥, 어릴 적의 동경 같은 거죠. 햄이 다정하게 거절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입 안이 쓰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에둘러서라지만 그 마음을 부정하고 나니 얼굴에 몰렸던 열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괜찮을 것 같다. 상호는 입꼬리를 올려 한껏 웃는 얼굴을 만들어보고 그 뒤 자연스러운 웃음을 만들며 뒤를 돌았다.

병찬이 울고 있었다.


강아지의 외면

상호의 걱정을 잔뜩 받고 결국 그 걱정하는 눈을 거절할 수 없었던 병찬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에 잘 들어가라는 상호의 카톡에 답장을 보냈다. 그 뒤 허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친구들에게 연락해 급히 약속을 잡았다. 술에 환장하는 동기 놈은 마침 약속이 없었던 모양이라 부르니 바로 나온다고 했다. 병찬은 평소라면 자제했을 술을 실컷 마셨다. 원래라면 어느 정도부터는 좋게 거절했을 병찬이 사양 없이 주는 대로 들이키니 동기가 그 꼴을 보며 장난이랍시고 말을 했다.

 

"형, 웬일이에요? 몸에 안 좋다고 줘도 꺾어 마시던 사람이. 차였어요?"

 

병찬의 성격상 주변 애들이 편하게 고민 상담을 해올 때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제 상황을 말하면서 고백도 안 했는데 차였다. 따위의 말을 하는 걸 보며 병찬은 생각했더랬다. 고백 안 했으니까 차인 건 아니지. 그러기 싫었으면 진작 고백했어야지. 원래 그런 건 다 타이밍인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 새 사람을 찾으라던가 애인 없으면 고백이라도 해보라던가 따위의 적당한 말을 내뱉었던 병찬은 그 과거를 조금 저주했다.

아니 근데 결국 본심은 안 뱉었으니까 업보로 돌아오는 건 아니지 않나? 난 엄청 열심히 달래주고 들어줬는데…. 억울함에 다시 술을 들이켠다. 제가 대답도 안 하고 술만 연거푸 들이켜는 꼴을 보자 동기 놈이 드디어 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침착하게 술잔을 채웠다. 술 때문에 눈치를 강제적으로 없애서 문제였지 술자리에선 눈치가 빠른 놈다웠다. 병찬은 정말 죽어라 마셨다. 중간에 아직 정신이 있을 때 제 카드를 꺼내어 동기 놈의 손에 쥐여준 뒤 징하게 마셨다. 솔직히 먹다가 콱 죽어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 같이 자취하는 준수가 아마 다음 날 저를 눈으로 욕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아 끝까지 마셨다. 기어코 필름이 끊겼다. 끊기면서도 머릿속에는 상호 생각만 가득했다.

 

다음 날 눈을 뜨니 겉옷만 벗겨진 채로 제 침대에 자고 있었다. 숙취가 센 편은 아니었는데 얼마나 마셨는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한참을 못 일어나다가 반쯤 기어 밖으로 나오니 이미 배달을 시킨 듯 국밥을 먹고 있는 준수와 눈이 마주쳤다. 차마 연장자라 하지 못하는 욕설들이 형상화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것을 알았지만 병찬은 그걸 신경 써줄 기력이 없었기에 허우적거리며 그 맞은 편에 앉아 제 몫일 국밥의 뚜껑을 열었다. 순대국밥에 양념장과 소금을 풀고 없는 입맛에도 꾸역꾸역 한 그릇을 비우니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제야 좀 돌아온 정신으로 다 먹은 걸 치우는 준수 눈치를 흘끔 보며 사과했다. 준수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형, 상호한테 전화 걸려는 거 제가 막았어요."

"준수야진짜고맙다너는내평생의은인이다앞으로진짜잘할게미안하다형이점심살게비싼거먹어"

 

병찬은 말하면서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심장이 섬뜩해서 되는대로 말하다가도 입술을 꾹 물었다. 상호에게 고백도 못 하고 차인 뒤에 술을 처먹으며 준수한테 말해놔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병찬은 일어나고 상황 파악한 뒤 어디에 대가리를 박고 죽음을 기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병찬은 그 뒤에 멀쩡한 척 상호에게 계속 연락했다. 훈련 외에 어딘가에 놀러 갔다고 하면 누구랑 있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 너 걔랑 있어? 아니지…? 하지만 노골적으로 물을 수는 없었기에 병찬은 항상 에둘러 누구인지를 물었다. 상호는 항상 거기에 친구와 함께 왔다고 답했기에 병찬은, 솔직히 조금 답답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많이 놀러 다녀. 예전에도 자주 놀 수 없었지만, 요즈음의 상호는 더욱 바빠 보였다. 시간이 비냐고 물어도 친구와 약속을 잡아놨다고 말하며 미룬 것이 몇 번인지. 그렇게 시간 많으면서 나랑은 만날 시간이 없나? 병찬은 서운해졌다.

병찬은 제 순위가 뒤로 밀린 것 같은 기분에 어쩔 줄 몰랐다. 그동안 자신이 상호가 누구랑 놀러 다녀도 아무렇지 않게 상호 생일이나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상호가 저를 제일 좋아한다고 생각해 혼자 여유로웠던 것뿐임을 뒤늦게 알았다. 당연히 저를 위해 비워놨으리라 짐작했던 자리에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여전히 상호의 앞에선 멋지고 쿨한 형으로 보여지고 싶다는 욕망만 아니었더라면 매달리듯 걔랑 헤어지고 나랑 사귀어달라고 빌었을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 점점 뜸해지는 연락과 어쩐지 잡히지 않는 약속 사이에 병찬은 기어코 상호가 이런 쪽의 눈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후의 수단으로 빙빙 돌린 질문을 던졌다.

 

[우리 상호, 대학 가더니 친구가 많이 늘었나 보네~]

[아녜요. 별로 안 늘었어요. 다 친구 한 명이랑 한 거예요.]

[그래? 누구랑 친해졌어?]

[전에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 동기 있어요.]

 

병찬은 그날 결국 답을 주지 못하고 휴대폰을 떨궜다. 훈련을 마저 해야 했는데 제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걱정이 된 코치가 오늘은 쉬라며 등을 떠밀어주지 않았더라면 구역질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그 뻔질나게 만나는 친구가 여자친구였던 거지.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정체를 궁금해했던 상대방을 알아내자마자 병찬에게 상호의 카톡을 피하기 시작했다. 훈련하고 있다는 카톡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그땐 어차피 잘 주고받지 못했고 잘 주고받아지는 여유시간에는 혹시나 걔랑 만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미리보기에 뜬 상호의 카톡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될만한 것은 일부러 피했다. 병찬은 이런 행동이 어른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별수 없었다.

어쨌든 시간은 간다. 박병찬의 삶은 기상호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상호의 카톡은 여전히 무거운 것이었고 병찬의 마음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훈련을 하고 집에서 누워있는 시간에는 전처럼 상호에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고 싶었다. 이젠 그 마음이 너무 버겁게 느껴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향한 호감으로 가득 찬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병찬은 이제 상호가 또 '그'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거절하는 것조차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무서웠다. 차라리 네가 변했으면 마음이라도 접을 텐데 너는 여전히 나에게 호의적이고, 먼저 말을 걸고, 다정하게 평소를 묻고….

카톡의 알람이 울린다. 아무래도 좋은 심정으로 천장만 쳐다보다가 확인은 해야겠지, 싶은 마음으로 휴대폰을 켜서 보니 상호의 카톡이었다.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세요? 미리보기에 적힌 것을 보고 병찬은 튀어 오르듯이 몸을 일으켜 바로 카톡을 눌렀다. 이번 주 주말에 뭐하더라? 스케줄러를 확인하니 술 약속이 있었다. 병찬은 급하게 약속 단톡방에 들어가서 사정이 생겼다는 변명을 대충 남겨놓고 다시 상호에게 답했다.

7:48 [응 그때 마침 별일 없네]

7:49 [상호가 웬일이야~ 형한테 먼저 시간 되냐고 하고]

7:55 [(신나 하는 여우 이모티콘)]

8:10 [몇 시에 만날까?]

8:10 [형이 네 쪽으로 갈게]

 

나 너무 기대하는 티 낸 거 아니겠지. 제가 선물했던 이모티콘의 보답으로 상호가 선물해준 이모티콘 속 여우가 너무 신나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한참을 고민한 탓에 사이 여백이 조금 어색한 것 같기도 했다. 좀 진정하고 할 걸 그랬나. 병찬은 1이 언제 사라지나 안달을 내며 계속 들여다보다가 순간 상호가 카톡을 보냈을 때 바로 1이 사라지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 휴대폰을 껐다.

언제 답이 올까. 전전긍긍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며 지나가다 보았던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말하는 유튜브 쇼츠의 영상을 떠올린다. 지금 나한테 가해지는 중력은 얼마일까…. 따위까지 갔던 생각들은 다시 울리는 카톡에 바로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벌떡 일어난 병찬은 바로 카톡을 눌렀다. 상호의 카톡이다! 헷갈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알림을 따로 설정해둔지라 헷갈릴 수가 없었다.

적당히 시간을 잡고, 장소를 잡으려니 조금 생각해보겠다고 말해 병찬은 알았다고 답했다. 그러다 상호가 요즘 제 연락이 뜸한 것에 관해 묻자 괜히 뜨끔하여 이런저런 변명을 몇 번 쓰고 지우다 결국 평범하게 바쁘다는 답을 보냈다. 상호도, 예전보단 뜸해졌으면서…. 순간 괘씸함이 불쑥 튀어나온다. 상호의 카톡 프로필을 누르니 여전히 ♥D+1♥라고 적힌 글자가 보였다. 근데 이거 보통 날짜 지날 때마다 갱신하지 않나? 병찬은 그것을 굳이 물어보고 싶진 않았지만…. 한 편으론 요즘도 같이 노는지를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왜냐면…. 어쩐지 그 순간 촉이 좋았거든. 이 감은 뭔가 있을 것 같았다. 조금 고민하던 손가락이 이내 결단을 내린다.

[근데 상호야.]

[너 카톡 프로필에 디데이 갱신은 안 해?]

[네?]

[아 헉 병찬햄 만나고 바로 헤어졌는데 깜박했다]

병찬은 짧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준수가 문을 두드리며 형? 하고 불렀으나 병찬이 무서운 영상을 봤다고 둘러대니 한숨을 쉬며 갔다. 나 만나고 바로 헤어졌다고? 너 지금 그게 어떤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알고 얘기하는 거냐고. 그럼 그렇게 만나던 친구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진짜 친구였어? 온갖 질문들이 입력란을 채우다가 사라지고…. 그걸 한참 반복하던 끝에 보낸 것은 짧은 한마디였다.

[헤어졌었어?]

[네]

[좋은 분이시지만 역시 전 소개팅보단 서서히 알아가는 게 좋아요]

[그래?]

[그렇구나.]

[아, 형 밥 먹고 올게. 오늘 하루 잘 보내~]

[(인사하는 여우 이모티콘)]

[맛있게 드세요!]

[(아쉬워하는 강아지 이모티콘)]

 


 

스포츠에서 인내는 꽤 중요한 덕목으로 취급되지만, 병찬의 인생에 인내라는 것은 딱히 좋은 경험을 주진 않았다. 병찬의 인내는 보통 부상으로 끝을 맺었으니까. 심지어 가장 최근의 인내는 고백하지도 못하고 차임. 이었다. 병찬은 더 참을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마지막 인내는 좀 억울한 면도 있었다. 참을 만큼 참고 고대하던 상호의 생일날 새벽에 누군가에게 기회를 빼앗길 거라고 누가 상상한단 말인가. 하여튼 이 와중에 서서히 감정을 쌓아가겠다고 또 미적거리다간 누군가에게 또 빼앗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병찬은 더 이상 이 일로 속앓이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차인다면, 차이는 대로 그것에 순응할 것이고 성사된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상호가 병찬의 고백으로, 예전의 병찬처럼 새로운 사랑을 다시금 느낄지도 모르고.

병찬은 약속 시간보다 3시간이나 일찍 나와서 가게를 들러 모든 세팅을 다 받았다. 옷은 어제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동기에게 맛있는 밥을 사준 뒤 추천받은 코디였다. 그 동기에게 빌린 겉옷은 다행히 병찬에게 딱 맞았다. 화장도 받았는데, 최대한 예쁘고 화려하게 해달라고 할까 했다가 너무 티가 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머리까지 깔끔히 세팅하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30분이 남았다.

병찬은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멀끔히 쳐다보았다. 혼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이었고 일행이 있는 경우에는 웃음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상호는 진짜 행복하게 웃는데. 저렇게 말이야.

병찬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제게 달려오는 상호를 본다. 상호의 숙소가 어딘지를 아니 어디서 올지도 예상이 되어 그 방향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참이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찬찬히 살피는 얼굴을 보며 병찬은 웃었다. 아. 그렇구나. 어쩌면 그동안 안절부절못했던 것은 네게 애인이 있다는 착각을 했던 것도 있지만, 이 얼굴을 오랫동안 못 봐서가 아닐까. 병찬은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오늘 저는 상호의 얼굴에 가득한 이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확인할 것이다. 병찬은 상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오늘 너한테 맡겨두라며. 상호는 계속 그렇게 멍때릴 거야?"

"아, 아이예요. 가요!"

 

다시 제 앞에 서서 저를 이끄는 상호를 가만히 본다. 앞서가면서도 제 보폭을 신경 쓰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 걸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네가 손을 놓을 것 같아 얌전히 끌려가는 거리를 유지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예쁜 꽃나무 길이 나왔다. 뭔 꽃이라고 했더라…. 초록색 잎을 다 덮는 작은 하얀색 꽃들이 예쁘다. 동기가 커플들끼리 가기 좋은 곳이라며 자랑했던 곳인 게 생각이 났다. 저보다 살짝 큰 손은 아직도 병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앞만 쳐다보는 주제에 손으로는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게 간지러워 병찬은 조금 입을 우물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상호야."

"...네, 넵?"

"길이 너무 예쁜데 우리 사진 찍을까?"

"아, 네! 좋아요!"

 

같이 찍자는 소리였는데 병찬을 꽃나무 옆에 세워둔 상호는 손을 놔버리곤 멀리 떨어진다. 같이 찍기 싫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상호를 보고 있으니 당황하는 얼굴로 휴대폰을 든다. 그 탓에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아쉬워 같이 찍자 말하려던 차에 바람이 분다. 순간 눈이 감길 만큼 강한 바람인지라 눈을 찌푸리며 바람이 부는 쪽을 노려보았다. 바람 탓인지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상호가 찍었다면 꽤 멋진 장면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비싼 돈 주고 만진 머리는 다 망가진 것 같네. 병찬은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상호를 보았다.

"상호야!"

"네?"

"찍었어?"

"아, 아뇨…. 못 찍었어요."

"진짜? 아깝다!"

 

바람은 병찬이 아니라 상호 쪽으로 불었나 보다. 돌아본 상호의 머리와 어깨에 한가득 꽃잎이 묻은 꼴이 웃겨 병찬은 크게 웃었다. 그러다 대답이 없는 상호에 조금 머쓱해져선 다시 한번 상호를 부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제대로 찍겠다는 말에 브이를 해 보인다. 이후 장소도 조금 바꾸고 자세도 바꿔가며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에 맞추어 한참 제 독사진을 찍다 만족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보았다.

저도 상호를 찍고 싶다고 말해도 되겠지만, 병찬은 둘의 사진을 찍고 싶었으니까. 모른 척 다가가 혹시나 도망갈까 봐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근데 상호야."

"...네, 네…."

"나는 둘이 같이 찍고 싶었던 건데. 찍어줄 거지?"

 

이어 카메라를 켜서 전면으로 바꾸고 팔을 쭉 뻗는다. 그 안의 제 표정이, 답도 없이 행복해 보여서 웃었다. 좋아서 얼굴이 폈구나. 전이라면 굳이 티 내지 않았겠으나 병찬은 숨기지 않고 활짝 웃었다.

 

"찍을게~ 브이~"

 


 

평범한 데이트 코스가 끝나고, 언제나처럼 농구코트에 섰다. 서로 한 번씩 슛을 던지고 있을 때, 병찬은 가만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호기롭게 고백하겠다고 다짐한 것이 우습게도 지금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기세가 죽은 것도 있지만 같이 있으면서 상호도 점점 차분해졌거든. 여전히 애정은 담겨있겠지만 처음처럼 열렬하지 않은 얼굴을 보면 머뭇거리게 된다. 그냥 오랜만에 봐서 기뻐했던 게 아닐까.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 고백해야 했을까? 그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예전의 병찬과 다르게 지금의 병찬은 상호가 자신을…. 전처럼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고 확신할 근거가 조금 부족했다. 그야 짧지만 남이랑 사귀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고백할 테지만 거절이라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것이다.

병찬이 두려워하는 것은 거절 자체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상호가 자신을 불편하게 생각할까 봐. 그래서 피하고 신경 쓸 것이 두려웠다. 제 고백으로 인해 새로운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은 제멋대로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 오히려 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눈치를 보게 만들면 어쩌나. 병찬은 그게 걱정이 되었다. 네 사랑은 받고 싶지만 동정은 죽어도 받기 싫었다. 또한 네게 불편한 사람이 되어서 지금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는 것 역시 싫었다. 거절까진 괜찮은데 친구도 못 되면, 그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림에서 튕겨 나온 공을 상호가 잡는다. 그것을 제 쪽으로 던져준다. 처음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젠 별생각 없이 저를 바라보는 상호를 마주하고 있으니까, 어쩐지 고민하던 말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다.

 

"상호야."

"네."

"좋아하는 사람 있어?"

"...공, 저주세요."

 

네게 공을 패스하면, 그 패스를 받은 너는 몸을 돌려 저를 등진다. 그것이 어쩐지 거절로 다가와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공을 던질 듯 네가 손을 들어 올린다.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네가 어떤 의미로 저를 밀어내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있죠. 뭐…. 전 사람 다 좋아하잖아요."

"...전에 네가 나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아, 그게 몇 년 전이에요~"

"그만큼 오래전은 아니지 않아? 1년 조금 넘었는데."

"1년 하고 반이죠. 아직도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뭐…."

"이젠 아이예요. 병찬햄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니까…."

 

바람이 분다. 공이 던져지지만, 림에 들어가지 않았다. 병찬은 그 꼴이 제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던져지지 않은 마음이 굴러간다. 눈가가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울고 싶지 않아 고개를 쳐든다. 구름이 잔뜩 끼어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냥 그때 받아줄걸. 그 이후 몇 번이고 제가 떠올렸으나 그래선 안 됐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밀어냈던 후회가 제 속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냥 그때 받을걸. 몰래 사귈걸. 어차피 그 후에 많이 만날 수도 없었는데. 사랑한다고 할걸….

이어 나온 목소리가 지독히도 담담했다.

 

"이젠 날 사랑하지 않아?"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나온다. 병찬은 별 의미 없는 발악을 그만두고 고개를 내렸다. 상호는 여전히 뒤를 돌고 있었다. 다행인가? 알 수 없다. 방금의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누가 봐도 매달리는 꼴이다. 아니, 방금 했던 모든 말들이 그랬다. 참지 못한 미련이 뚝뚝 흘러내렸다. 병찬은 뒤늦은 후회를 이제 숨길 방도가 없어 내버려 둔다.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저 궁금했었다고, 별 이야기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냥, 어릴 적의 동경 같은 거죠. 형이 다정하게 거절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제 거절을 고맙다고 말하며 웃으며 돌아보는 상호를 마주하는 순간 병찬은 지독한 상실감에 빠진다. 제 얼굴을 보며 놀라고,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병찬은 모든 게 늦었고, 틀렸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별거 아니라고 말할까. 병찬은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다 결국 그 노력마저 내버렸다. 수습하기엔 너무 늦었다. 하다못해 뒤를 돌고 있을 걸 그랬다. 이 상황을 수습할 의지마저 상실한 탓에 정제되지 않은 마음들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상호야. 형은 상호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네가 애인이 있다고 할 때 술 먹고 쓰러지기도 하고 질투도 하고…. 그때, 네 고백을 그냥 받아버릴 걸 하고 후회도 했어. 나는 네가 계속 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나는 네가 고백한 뒤로 계속 네가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나만 좋아하는 거지…? 미안, 내가 뭐라고…. 부담 줘서 미안해…. 없던 일로 해줘."

 

병찬은 뒷걸음질 친다. 아…. 너는 항상 나를 대단한 사람을 보듯이 봐줬는데. 좋아한다고 질질 짜면서 지나간 사랑에 매달리는 자신은 얼마나 추해 보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걸 봐라. 아직도 경악한 얼굴로 얼어버린 채 자길 보는 꼴을. 마지막 남은 기대조차 사라진다. 다 내 착각이었구나. 너랑은 친구로도 있을 수 없겠구나…. 병찬은 헛웃음을 흘리고 그대로 뒤를 돌아서 달렸다. 말을 하면서도 눈물만 나왔는데, 뒤늦게서야 훌쩍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이 꼴은 안 보여서 다행이라고, 병찬은 생각했다.

그래도 없던 일로 해달라고 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모든 감정을 다 정리하면, 이젠 괜찮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뒤에 다시금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되지 않을까.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면…. 말하고 나니 다 털어내 졌다고 하면…. 병찬은 생각을 그만두고 제 자취방을 향해 전력으로 도망갔다. 그냥 목 놓아서 울고만 싶었다.



강아지의 주인

기상호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길 좋아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것을 내버릴 멍청이는 아니었다. 문제는 박병찬에게 있었다. 병찬이 울고 있고 횡설수설 저한테 고백해주고….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상황에 기상호는 뇌가 멈췄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뒤 전력으로 도망가는 박병찬을 따라갔지만, 박병찬이 누구냐? 명문 장도고의 농구부원들조차 따라잡지 못한 스피드의 사나이다. 아무리 기상호가 기를 쓰고 따라가도 잡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기어코 기상호는 박병찬을 놓쳤다.

흐억, 헉…. 소리를 내며 반쯤 죽어가던 기상호는 의미 없는 추격을 그만두고 숨을 고르다가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어 박병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 없이 짧은 정적 후 흘러나오는 [고객님께서는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이 나올 때 기상호는 미치는 줄 알았다. 이거 차단하면 나오는 소린데? 급하게 카톡을 해봤으나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당장 확인하지 않는 것뿐일 수도 있지만 기상호는 직감했다. 박병찬은 그새 기상호를 다 차단한 것이다. 그렇게 미친 듯이 도망가더니 대체 언제 차단을 한 건지.

아니, 이게 말이 되나? 기상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병찬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탓에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고 넋이 나가 아무런 말도 못 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그 후 대답조차 듣지 않고 도망간 박병찬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고백했으면 답을 들어야 하지 않나? 제 대답은 필요 없으셨나요?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없는 일로 하자고 하다니요. 기상호는 열심히 따라가면서 몇 번이고 박병찬의 이름을 부르고 온 힘을 다해 저도 사랑한다고요!!! 라고 외쳤으나 이미 거리가 한참 벌려진 박병찬은 듣지도 못한 듯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을 뿐이다.

집 주소를 알면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을 텐데 박병찬은 성준수가 친구 데려오는 걸 안 좋아한다고 말하며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겼던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잠깐, 준수햄!!! 기상호는 급하게 성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제발 받아주세요, 준수햄. 저 진짜 급해요!!!!!! 마음이 닿았는지 연결음이 세 번 울리자 딸깍, 소리가 들렸고 이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뭐야.]

"준수햄!!! 병찬햄 지금 집이에요?"

[뭐? 몰라. 나 집 아니야.]

"아니, 저. 그. 뭐야. 병, 병찬햄이 저한테 고백하셨는데요."

[... ... ...아.]

"대답을 안 듣고 가셨거든요?"

[….]

"이런 거 정말 안 좋아하시는 거 아는데 지금…. 절 다 차단하셨거든요."

[….]

"... ...그, 그래서 그런데 나중에 말 한마디만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 ...하아…, 뭔데.]

"저도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아, 씨발.]

"죄, 죄송합니다.“

 

성준수는 몇 번 더, 아마 기상호를 향한 것은 아니고 이 염병할 놈들 사이에 끼게 된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며 욕을 중얼거리다가 알겠다는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기상호는 벌벌 떨며 휴대폰을 들어 성준수와의 카톡방에 들어갔는데, 마치 기상호의 패턴은 이미 안다는 듯이 [할 테니까 닥쳐] 라고 와있는 것에 그제서야 안심하며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준수는 기상호의 바람대로 박병찬에게 말을 잘 전해주었다. 정확히는, 집으로 가며 편의점에 들러 소주 세 병을 사 온 뒤 자기 방에서 그 세 병을 위장에 때려 부어 기절한 박병찬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가 그다음 날 아침 또 죽어가며 일어난 박병찬에게 국밥을 시켜 먹인 뒤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기상호의 말을 전해주었다. 박병찬은 성준수를 저도 모르게 미친놈 보듯 봤고 성준수는 그것에 순간 짜증이 났지만, 이 인간이 지금 좀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과 자신보다 연장자이며 평소에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었다는 점을 감안해 욕 대신 기상호에게 냅다 전화하여 박병찬에게 내미는 것으로 현실을 일깨워줬다.

박병찬은 성준수의 핸드폰 화면 중간에 띄워져 있는 지상고 기상호라고 적힌 것을 보며 경악하고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이어 성준수가 병찬햄 바꾼다. 라고 하자마자 병찬햄!!! 이라고 자신을 우렁차게 부르는 기상호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ㅇ…. 어, 상호야…."

"병찬햄!!! 병찬햄에게 처음 고백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병찬햄을 단 한 순간도 안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 저 차단 좀 풀어주세요!!! 얘기 좀 해요!!!"

성준수는 됐죠? 라는 얼굴로 전화를 끊었고 혀를 차며 훈련을 나갔다. 박병찬은 앉아서 넋을 놓은 채로 있다가 급하게 샤워하고 마찬가지로 훈련하러 나갔다. 아직 술이 덜 깬 건 아니겠지? 라는 오해는 할 수 없었다. 성준수는 두세 번 말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박병찬이 제대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해줬기 때문이다.

차단? 풀긴 풀었다. 풀었으나 박병찬은 여전히 연락하지 않았고 전전긍긍 박병찬의 연락을 기다리던 기상호는 기다리다 못해 혹시나 해 전화를 걸었다. 멀쩡히 연결음이 가기에 곧 받겠지? 라는 기대가 무안하게 '연결이 되지 않아….' 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상호는 제 머리를 붙잡았다. 카톡을 보냈지만, 여전히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답답함에 결국 또 성준수에게 카톡을 보내봐도 답은 [ㅅㅂ] [알아서 해]였다.

왜 그러시는데요 햄!!!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 게 아니었어요? 연애는 원래 이렇게 쉽게 시작할 수 없는 건가? 햄도 내가 좋고 나도 햄이 좋은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 기상호는 머리를 잡고 고민하다 그동안 병찬햄에게 신경 쓰다 보니 들어가지 않았던 박민아의 카톡을 울렸다.

 

[누나누나 바빠요?]

[아니? 왜?]

[저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받았어요]

[오~ 사귀어?]

[모르겠어요. 저도 사랑한다고 했는데 연락을 자꾸 안 받아요]

[무슨 일 있었어?]

[저한테 고백할 때 우셨는데 그러고 도망가셨거든요]

[따라가다가 안 되겠어서 전화했더니 절 차단하셨더라고요]

[다행히 그 사람하고 같이 사는 사람도 제가 알아서]

[저도 사랑한다고, 차단 풀어달라는 말 좀 전해달라 했더니 전해주셨어요]

[근데 그 뒤로 연락이 안 돼요]

[그거 그냥 쪽팔려서 그런 거 아니야?]

[???]

[쪽팔린다고 연락을 안 해요?]

[그런 사람 좀 있어. 좀 기다려보는 건 어때?]

[네….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쪽? 팔린가? 기상호는 알 수가 없었다. 뭐 사람이 사랑 좀 하면 울고 도망갈 수도 있지. 기상호는 박병찬이 보인 추태를 이미 수도 없이 저질렀다. 물론 그 추태를 박병찬 앞에서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어쨌든 기상호에게 박병찬은 뭘 해도 멋지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형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좀 기다리는 게 좋다는 거지…. 기상호는 제 카톡으로 가득 차버린 박병찬과의 카톡방을 아쉽게 훑어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박민아의 말이 맞았다. 박병찬은 쪽팔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멋진 어른으로 있는다면서 앞에서 쿨한 척하고 웬만한 일에 무덤덤한 척하며-대부분은 척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는데 울면서 도망까지 쳐놓고 무슨 말을 보낼지 지레 겁먹고 차단까지 박은 꼴을 실시간으로 다 보여줬다. 박병찬은 진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역시 마주치자마자 그냥 고백할걸. 제일 자신감 넘치고 각오도 막 다져서 새삥이었을 때 고백했어야 했는데. 그때 고백했으면 끝내 보였던 추한 모습은 숨길 수 있었는데. 아!!!

물론 쪽팔린다고 계속 연락을 피해 봤자 남는 것은 파국뿐임을 알고 있었으나 박병찬에겐 각오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쪽팔림을 감수하고 기상호를 마주할 수 있는 각오를 새로 다질 시간. 모르는 척, 아무 일 없는 척 연락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떠오르는 추태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박병찬은 결국 메모장에 구구절절 적어놓은, 요약하자면 '너 아직 사랑하는데 지금 너무 쪽팔려서 널 마주하기가 힘드니까 조금만 기다려줘'라고 적은 것을 기상호의 카톡으로 보내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와 방금도 진짜 쪽팔린 짓이네…. 죽을까. 하지만 정말 죽고 싶진 않았다. 그야 그렇게 원하던 기상호의 애인 자리를 드디어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와서 죽으면 개 아깝기 때문이다…. ㅋㅋ…. 이 와중에 이런 생각하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다.

 

기상호는 어쨌든 형이 자기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으니 얌전히 기다렸다. 기다리는 건 잘한다. 특히나 서로가 쌍방이면 뭐. 기다리는 건 별것도 아니었다. 너무 쪽팔린 나머지 못 만나겠으니까 없던 일로 하고 친구로만 지내자고 하지만 않으면 뭐든 좋았다. 박병찬의 고백 날 기상호는 처음으로 울지 않은 채로 숙소로 돌아갔는데 기분이 진짜 날아갈 것 같았다. 그 멋있는 병찬햄이 나한테 먼저 고백했어! 나 때문에 술도 마시고 질투도 하고 그냥 받을 걸 후회도 하고…. 울기도 했다!

박병찬의 우는 모습은 진짜 끝내줬었다. 무표정으로 저를 보면서 눈물만 흘리는데 농구코트를 간신히 비추는 가로등 불빛에 의해 은은한 역광이 드리운 그 얼굴은 처연하면서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냈다…. 처음엔 놀라서 신경도 못 썼지만,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 모습을 뜯어본 기상호는 이제 그 순간을 곱씹으며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박병찬이 추태니, 뭐니 했지만 기상호에겐 그냥 자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이제 곧 애인 될 처지에선 사랑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뭐가 쪽팔린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빨리 나랑 사귄다고 해주셨으면 좋겠다! 기상호는 오랜만에 팽팽 돌아가는 행복회로를 느꼈다.

 

박병찬은 결국 고백을 한 지 2주 만에 상호에게 언제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고 상호는 내일도 가능하다고 답했다. 내일은 안 되고,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자. 라고 말하는 것에 상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꾸미고 갈까? 상호는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입꼬리를 간수 하지 못해 결국 룸메이트에게 경멸의 눈빛을 받았다.

 


 

그렇게 둘 다 멋지게 꾸민 두 남자는 조용한 개인 카페의 한구석에서 재회한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여 기세등등한 기상호는 ㅍvㅍ. 표정으로 박병찬을 바라보았고 박병찬은 그런 표정이 밉지는 않은데 어쩐지 더 쪽팔려서 자꾸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침묵. 쪽팔림을 감내하느라 바쁜 박병찬이 먼저 말을 꺼낼 기색을 보이지 않기에 기상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병찬햄."

"어. 어…."

"그럼 저희는 병찬햄이 고백했을 때부터 1일이에요. 아니면 오늘부터 1일이에요?"

"...그, 어. 글쎄…?"

"저 병찬햄이 도망갈 때 쫓아가면서 저도 사랑한다고 소리 질렀는데 못 ㄷ…."

"그만, 그만 말하자…. 그때 일은…."

 

부끄러움 탓에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달아오른 병찬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매우 포상이었으나 굳이 그것을 계속 언급하여 미움을 사고 싶진 않았기에 상호는 입을 다물었다.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니 병찬의 모든 행동이 너무 좋았다. 그때 먼저 다가오고, 손을 잡은 것들도 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 행동들에 호감이 묻어있음을 모를 리는 없겠으나 우정이라 이름 붙인 행동에 새로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덧쓰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저는 이제 어른이다. 병찬과 사귀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병찬의 손을 잡고선, 그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어 깍지를 끼었다. 그것에 커피만 바라보고 있던 병찬의 시선이 올라와 저와 마주한다. 약간은 당황한 것 같은 표정이 즐거웠다. 좀 더 빈틈없이 꾹 쥐고선 손가락으로 손등을 문지르자 제 행동을 어찌 받아들인 건지 부끄러움은 내려가고 어쭈? 하는 얼굴이 된다. 상호는 웃었다.

 

"그럼 오늘부터 1일 해요. 사랑해요. 병찬햄. 저랑 사귀어주실 거죠?"

"고백은 내가 먼저 했잖아."

"근데 그때 일은 없던 일로 하고 싶으신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한데…."

"그럼 없던 일로 하고 제가 고백할래요. 원래 가장 첫 고백도 제가 했잖아요."

"그러니까 두 번째 고백은 내가 해야지."

"그래서 대답은 안 해주시는 거예요?"

 

병찬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인제 와서 누가 먼저냐고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 발칙한 연하는 이제 깍지 낀 손을 당겨 제 손등에 입을 맞추며 씩 웃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와중에 그 모습을 보고 두근거리는 저도 어이가 없었다.

쪽팔림이고 뭐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좋은 티를 팍팍 내며 앙큼하게 굴면 누가 안 넘어가겠나. 박병찬은 어느새 쪽팔림을 내버려 두고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이 담긴 눈을 마주 본다.

 

"그래. 오늘부터 1일 하자."

 

애초에 병찬 혼자 부끄러워했던 일이다. 상대방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물론 나중에 그때 일을 들먹이면 으름장을 놓겠지만…. 일단 지금은 결국 사귀게 되었으니 좀 기뻐해도 되지 않나? 병찬은 상호를 따라 웃으며 저도 손을 당겨 제 손을 감싸 쥔 그 커다란 손등에 쪽, 입을 맞추었다.

기쁨을 형상화한 것 같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쨌든 얘가 애긴 애야. 밀어두었던 양심이 살짝 콕콕 찔렀으나 뭐, 그걸 신경 쓰는 건 이제 귀찮은 일이다. 저도 좀 바보같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병찬은 그냥 소리까지 흘리며 웃었다.

 

"앗, 저 웃는 거 보고 웃는 거죠?"

"아냐…. 그냥…. 마음고생 한 게 바보 같아서 그래. 나도 네가 고백한 순간부터 널 좋아했거든."

"와, 진짜요? 저 그 뒤로 형 만나면 고백해버릴까 봐 연락도 줄이고 만남도 피했는데."

"진짜?"

"형만 보면 사랑한다고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나는 네가 어른 되면 다시 고백해줄 줄 알고, 네 생일만 기다렸는데. 네가 부끄러워서 못 하면 내가 하려고 했어."

"진짜요?! 아! 사귀지 말 걸…. 저는 제가 다 티 나니까 그런 감정 아니라고 하려고…."

 

이 녀석이. 알고 보니 제 마음고생은 상호의 지레짐작으로 일어난 일인 것 같아 병찬은 아프지 않게 상호의 볼을 꼬집었다. 얌전히만 있었어도 어련히 제가 고백했을 텐데. 상호는 제 죄를 아는 듯 눈치를 보면서도 실실 웃어 보였다. 눈치도 그저 장난으로 보는 것 같았다. 병찬은 그 모습이 밉지 않아 결국 볼을 놓아주었다.

 

"앞으로 우린 무슨 생각 하면 숨기지 말고 다 말하자. 알았지? 말 안 했다가 이게 뭐야…."

"병찬햄도 안 하셨잖아요."

"너 때문이잖아! 그럼 남이랑 사귄다는 애한테 고백해?"

"잉…. 앞으론 안 그럴게요."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은근슬쩍 제 옆에 앉아선 애교를 부리듯 기대오는 상호를 무시할 재간이 없었다. 병찬은 결국 져주는 척 상호를 안아주었고 상호는 언제 낑낑거렸다는 듯이 웃으며 병찬을 꾹 안았다. 그리고선 제 볼에 입을 맞추기에 병찬 또한 상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어 둘의 눈이 마주친다. 묘한 분위기에 병찬은 이 근처에 괜찮은 숙박시설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했다.

다가오는 입술은 손으로 막았다. 찡찡거리는 연하에게 여긴 시선이 많잖아. 라고 답하자 보이지 않는 꼬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려서 그런지 좀 밝히는 것 같은데, 괜찮은가? 노골적인 시선에 병찬은 그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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