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無罪

대니테리

그가 포렴을 들고 나왔을 땐 환한 낮이었다.

여름이다. 해가 꼭대기에 뜬 무렵이므로, 마침 앞을 지나던 행상의 목소리도 애처롭게만 들렸다. 시원한 감주를 파는 수레를 끌고 있는데 이 무렵이면 웬만한 봇짐 장수도 한 수 접고 그늘 밑으로 꽁무니를 뺄 만 하다. 그러나 이 시각에 돌아다니지 않으면 몇 푼을 놓치게 되는 장사 또한 있는 법이다.

상념에 빠지려니 뒤에서 ‘에비스야’ 주인이 호통을 쳤다. 골동품을 다루는 이 노인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비해 통울림이 좋아, “거기서 문을 막으시면 안 됩니다!” 하는 외침이 길에 먼지를 일으킬 정도였다. 문가에서 찬찬히 타들어가는 모기향을 구경하던 아이 둘이 고소데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거, 또 체면 구기게 생겼다. 거기다가 상가의 일에 고민하려 들다니.

‘어머님이 아시면 이 애들처럼 웃으시겠군.’

그가 허리에 찬 검집을 어색하게 매만지고, 다소 동강거리며 서둘러 길목에 나섰다. 소낙비가 내리지 않은 지도 사흘이나 지나서 불볕더위 밑은 먼지구름이다. 변변한 간판도 없는 반 칸짜리 조림집 하녀가 나와 동이로 물을 뿌리는 것이 보였다. 물소리가 시원하다.

우츠노미야 유우타는 어엿한 ‘작은 나리’다.

아직 변변한 직업은 없고, 무사라는 한가로운 신분으로 어엿한 도신(하급 무사, 경찰 간부이자 수사)이신 아버지 밑에서 일을 도울 뿐이다. 그뿐인데도 허리에 찬 검과 짓테(관원에게만 허가된 무기)가 무겁게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더위가 심각해 가뭄이 걱정되기도 하고, 이런 날이면 사람들 짜증이 도를 넘어서서 고성을 던지는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작은 나리’라고는 해도 부교소에서 잡다한 판례작업을 도울 뿐인 그가 나와 있는 건 바로 그러한 싸움판 때문이었다. 이른 낮에 찾아온 아버지가, 요리키(중급 무사, 검찰)의 하명으로 급히 불려가면서.

- 널 이대로 둘 수는 없겠구나. 곰팡내 난다고 웃음 사기 싫다면 시중을 둘러보아라. 얼굴이라도 비쳐야지.

라고 말씀한 게 발단이었다. 실제로 검보다는 먹 묻힌 세필에 익숙했던 유우타는 덜렁 시정에 내보내졌다. 허둥지둥 가마에 올라타는 아버님의 뒤를 씁쓸히 보고 있자니, 비슷한 처지의 미나미모토 가 차남이 ‘오캇피키를 찾아가면 더위는 피할 수 있을 거다’라는 둥 게으름 떠는 소리를 해서, 흰소리 물리듯 손을 내저은 후 센소지에 다녀온 터다. 그런데 그곳 승려가 묘한 말을 했다.

- 오늘은 실내에 계시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

날이 더우니, 하고 덧붙인 말을 보아 으레 객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도 센소지의 승려에게 그만한 아양이 익숙지는 않을 터였고 유우타는 곧이곧대로 그 말을 섬겨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갈 데가 없었다. 지금 집으로 가버리면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어머님과 여동생을 방해하고 만다.

여차저차 하여 얼마 전 동생이 테마리 공을 망가뜨린 걸 기억하고 아사쿠사 대로에 들른 것이다.

관광과 연이 없는 유우타에게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비단상이 부담스러워 골동상으로 들어갔다가 팔자에도 없는 와키자시(짧은 검) 한 자루를 갖게 되었다. 명목 상 도신 훈련을 받는 ‘작은 나리’이므로 짓테와 와키자시는 썩 어울리는 조합이다. 변변한 오캇피키라면 들고 다니는 것이고 유우타는 언젠가 그런 치들을 이끌어야 할 신분이었다.

바로 그게 곤란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유우타는 사람 위에 설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무사란 세습제여서, 스스로 검을 저버리려고 한들 그럴 수도 없다. 애당초 그 또한 어린 시절부터 수련에 임해 현재는 무슨무슨 유파의 기술을 완득했다고 증명까지 받아낸 상태다.

‘칼 쓰는 일은 별로인데.’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같은 무사라는 종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나미모토의 차남처럼 거들먹거리는 일이 주되다면 더 그렇다. 어쨌거나 ‘지금의’ 아버님은 존경할 만한 도신 나리이기 때문에 따르고 있을 뿐. 그것도 그렇고 장남이란 하릴없이 아버지 뒤를 좇는 역할이다.

더위가 정수리를 쪼고 있다. 이대로라면 아침에 정돈한 머리카락이 땀범벅이 될 터다. 그는 미용사를 부르지 않고 직접 가위와 빗을 들곤 했다. 위엄 없는 짓이었으나 다른 사람이 몸을 만지는 건 벌레가 기는 듯 싫었다. 이런 행동 또한 그가 무사의 가풍을 무시하는 이유가 됐다. 거울 좀 들여다본다고 사내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다니.

세책 집에나 가볼까.

얼마 전, 집 봉당에 앉아 있는데 세책장수가 들렀다. 주로 다이묘 가에 세책을 납품하거나 집에만 있는 아녀자들에게 빌려주곤 하는, 늘 책짐을 한등 잔뜩 얹고 다니는 거구의 노인이어서 유우타도 기억했다. 등짐에는 대나무살을 쪼개 만든 깃발로, 검은 바탕에 백분을 써서 <지라호はくぎょ>라고 적은 것이 인상깊었다. 한자로 써도 됐을 텐데, 하고 무상하게 흘려보낸 기억이다.

그러고 보면 집에는 이미 고루한 서책이 잔뜩 있었다. 유우타도 어린 시절 영웅담, 고대 신화나 무가의 자손에게 일러주는 관습 따위를 읽으며 시간을 때운 적이 많았다. 개중에는 시중에 도는 기담 등이 섞여 있어서 흥미를 끌기도 했다.

이제 와서는 다 옛날 이야기지만 들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영 주춤하는 모습으로 머리에는 이글이글한 해를, 허리께에는 대충 묶은 칼집을 덜렁 인 채로 타박타박 <지라호>로 향했다.

세책집 행상이래도 에도 번주들의 본가나, 다이묘 가신들에게 빌리러 다니는 곳이다. 예상은 했지만 퀴퀴한 구석 하나 없는 번듯한 고택이 등장하자 유우타는 조금 놀랐다. 푸릇한 풋귤 냄새가 나는 생울타리는 무척 무성했고 줄기마다 굵은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러면 오히려 손님을 쫓아내지 않나 싶은데, 울타리를 낮은 키로 엮어 자라게 한 다음 나팔꽃을 그대로 둔 것이 고택과 어울려 풍아함을 자았다.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하고 대답하는 소리다. 마침맞게 가게 주인이 어린 하녀를 부른 듯하다. 모셔지는 듯 들어가는 것도 기분이 찝찝해서, 유우타는 얼른 울타리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럴듯한 대문이나 포렴은 없고 그저 낡은 반석 위를 밟기만 하면 된다.

들어서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다. 손질이 잘 된 마당에는 막 물을 부려 흙먼지가 잦아들어 있다. 구석마다 파란 여름꽃이 송이송이 피었고 무엇보다도 우물 정 모양을 딴 연못이 있다. 가서 들여다보니 대나무 대롱이 기울었다 섰다 하며 물을 뿜는다. 에도의 수도시설은 유명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못을 판 가게는 좀처럼 없다. 빤질빤질한 요정이나 하는 짓인데, 파둔 못의 모양이 워낙에 재치있으니 잉어 두어 마리 풀어 놓아도 좋을 텐데, 싶다. 동생이 금붕어를 좋아하지. 데려왔을 때 잉어가 있다면 밥을 줄 수 있을까.

아니, 아무래도 덥다. 푸우 한숨 쉬며 고개를 들자 옆에 누군가 있었다. 깜짝 놀란 유우타는 저도 모르게 짓테로 손을 가져갔다. 눈앞에 선 건 하얀 땡볕을 그대로 맞는 사내 하나.

키가 무척 크고 피부는 희다. 피부가 너무 희면 남자에게 허물이 될 법도 한데, 당당한 풍채와 뒷짐을 진 태도가 어딘지 묘연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우타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랬더니 상대가,

“코.”

“……뭡니까?”

“코에 먼지가.”

하며 돌연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불시에 닿았던 손은 부드럽고, 차갑다. 잠시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가도 금세 불쾌해지고 만다. 유우타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를 의식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탱자 울타리가 옷을 긁는 느낌이 났다. 그가 치레는 될 만큼 까딱 고개를 숙여보였다.

“우츠노미야의 유우탑니다. 일손이 부족해 보여 여기 있었습니다.”

후후,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코’ 이어서 ‘후후’ 다. 목소리는 걸걸한 데 없이 나직하고 유들유들한 김이 강하다. 꽤 곤란을 유발할 듯한 목을 가졌다.

그가 고개를 반듯이 숙여, 시선을 마주쳐왔다. 이제 보니 정수리에 가깝게 높이 묶은 머리카락은 상투를 트는 대신 중간에 한 번 둥글게 감치고 늘어뜨렸다. 거기에 빈들빈들 빛나는 검은 비단을 묶어서, 자세히 보면 그림자가 요사하게 흔들리는 듯 보인다. 눈썹이 굵고 콧대가 높고 입술이 얇으며, 무엇보다 눈물점이 있다. 유우타도 마찬가지지만 아랫뺨이 홀쭉해서 약간 헤쓱하게도 보이고, 아니 얄쌍하게 느껴진다.

‘바람둥이군.’

유우타는 부지불식간에 추측했다. 고깝게 본 건 아니다. 누가 바람을 피우든 청승을 떨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다만 ‘후후’ 웃고, 머리카락은 고지식하게 길고 키는 멀대처럼 큰데, 저고리 안쪽에 댄 깃은 어딘지 꼬질꼬질해보이는 염색이 되어 있다. 자세히 안 보았으면 헌 손수건을 댄 줄 알았겠지.

갑갑해 보이는 녹색 고소데인데, 호사스러운 조시치지미로 오글오글 주름이 잡혀 있어 시원해 보인다. 허리띠는 통이 넓어 허리를 거진 조이고 있는 황갈색이다. 옷깃과 맞춘 듯하지만 색이 좀 더 짙고, 안감과 바깥감 무늬가 다른 고급품이다. 그런데 맨발에 조리를 신고 있다.

“이곳 행수십니까.”

하고 유우타가 예절 바르게 물었다. 울타리만 다섯 간은 되는 큰 세책집의 행수라면 이러한 차림도 허용되리라. 무엇보다 에도 본저에서 예의를 차리려면. 하지만 남자는 시원스레 미소를 지었다. 이 불볕에도 서늘해 보일 만큼 이가 희었다.

그가 말했다.

“들어오시지.”

하고는 먼저 등돌려 유우타를 안내하듯 앞질렀다. 이제 생각하니, 코를 꼬집은 걸 지적하지 못했다. 게다가 곁에 선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고. 유우타는 자기 실책을 망연히 꼬라보면서 터덜터덜 뒤따라갔다.

안이 시원했다. 세책집은 대개 서가가 상하지 않게 창을 작게 내는데, 이곳은 문에서 계산대 앞쪽에 서가 몇 칸이 있을 뿐 큰 책상이 놓여 있고 그 뒤에 봉당을 뉘였다. 색 짙은 목재로 기름질한 흔적이 나는 조금 휘어진 마루다. 마루 뒤편으로 일직선의 복도가 뚫렸는데, 거기서 빛과 바람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 앞에 수로가 있지. 모기가 극성이지만.” 남자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어딘지 웃는 듯 묵직하다. 골동상 주인처럼 울림통이 좋은 건가.

그보다 눈앞에서 휙휙 흔들리는 머릿결이 신경쓰인다. 검은 비단에 가득 찍힌 진회색 물떼새 무늬가 요란하게 느껴진다.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지금보다 옛시대를 연상케 했다. 아무튼간 유행하는 머리 모양은 아니다.

안내되기는 했지만, 이곳이 낯설어 둘러보고 있으려니 부엌데기로 보이는 하녀가 뛰쳐나왔다. 오도독 하고 복도를 뛰는 소리와 함께 “도련님!” 하고 소리친다.

유우타는 자길 부르는 줄 알았다. 아니다, 저 남자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서슴없이 어린 하녀의 올린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유, 그렇게 뛰면 안 돼. 겸손해야지.”

“아. 맞다. 하지만 행수님은 잠드셨어요.”

“이런, 또 낮잠이 느셨군. 여름도 참 문제라니까.”

오싹할 만큼 상냥한 투다. 여자에게 내는 뱅어처럼 미끈미끈한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눈이 마주쳤다.

“오유. 저 유타에게 다과를 좀 내오겠니? 손님이라는구나.”

하녀가 가기를 기다렸다가 유우타가 물었다.

“유타가 아닙니다. 그리고, 행수가 아니셨습니까?”

“응. 너와 마찬가지로 손님이지.”

자네, 라고 하지도 않는구나. 어딘가의 방자한 차남 삼남이겠지. 예의범절을 모르는군.

“그런데 유타 군, 왜 그렇게 서 있나? 이리 와서 좀 앉아.”

하며 봉당을 가리킨다. 방석이 몇 개 깔려 있는데 책을 구하러 온 손님이 잠시 앉는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는 지필묵이며 먹이 마른 붓, 긴 문진으로 눌러 놓은 하얀 종이, 어디서 굴러먹다 찢어진 건지 여기저기 상한 세책이 두서없이 널려 있다.

목이 말라서 유우타는 저도모르게 손부채질을 했다. 남자가 다시 ‘후후’ 웃었다. 아무래도 곁에 앉을 마음이 들지 않아 유우타는 물었다.

“어디의 도련님이십니까?”

“질문이 많네.”

“하다못해 성함이라도 말씀해주시죠.”

“말하는 거 경박하고. 무다이(むだい)다.”

발음이 기묘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유우타는 되물었다. 등 뒤로 더운 땀이 흐르고, 터덜터덜 걷느라 발이 아프고 몸에서 열기가 뿜어진다. 끈적하니 덥다.

“무자이(むざい)이십니까?”

“하하.”

이번에는 후후, 가 아니다. 유우타는 자기가 잘못 들었단 걸 알고 정정하려고 했지만, 상대 쪽에서 느른히 턱을 괴며 이쪽으로 말했다.

“괜찮네. 무자이로 할까. 물이라도 떠 줘? 얼굴이 엄청 빨갛네.”

이제 알았는데, 남자에게서 희미한 노송향이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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