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ㅎㅅㅎ 장마
연극 ㅂㅋㄹㅅ
환수현치아키
치아키 시점
"백날 웃겨봤자 뭐하냐. 맨날 울리는 놈한테 가겠지."
언젠가 택상의 집에서 틀어놓은 드라마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나는 택상에게 이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책상 앞에서 가사를 쓰고 있던 택상은 무심하게 말했다. 너랑 별로 상관없는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덩달아 무심하게 채널을 돌렸다. 한낮의 TV에서는 나완 상관없는 재미없는 말들만 흘러나왔고, 나는 이내 TV를 꺼버렸다.
가사 쓰기에 집중하는 택상을 방해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방 안의 공기는 꿉꿉했지만 딱히 우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비를 머금은 공기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압박감에서 편안함을 찾았다. 마냥 유쾌하진 않더라도 그냥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듯. 어둑한 TV 화면에 비치는 낯선 내 모습을 곁눈질하며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이나 빗속을 바라보는 나를 택상이 소리내어 불렀다. 밥먹고 가.
저녁식사를 거절하고 집을 나오면서 말했다. 다음에 또 올게.
하지만 그 후로 내가 택상의 집에 다시 가게 될 일은 없었다.
다 같이 모여서 놀고싶다. 빗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날 이후 우리가 다시 만난 적은 없다. 그때처럼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 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특히 나와 너는, 너를 보기에 나는 아직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수현을 잘 안다. 그래서 나에겐 기회가 없을것도 안다. 그런 수현의 옆에서 나는 항상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를 볼 때 수현에게서는 빗물 냄새가 난다. 차가운 비가 쏟아지는 길가에 홀로 버려진 아이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나까지 흠뻑 젖은걸 알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온 몸으로 울고있던 수현을 보았을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우산을 받쳐주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수현에게 그 이상의 관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거리에 안도하는 나를 깨달았을 때 스스로의 안일함에 화가 났다. 그래도 어때, 이렇게라도 수현이 웃는다면. 내가 가진 용기를 모두 끌어모아봤자 할 수 있는건 겁 많은 웃음뿐이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수현이었더라면 수현은 날 좋아했을까. 내가 그 애라면 용기내지 않아도 됐을텐데. 내가 그 애였다면, 이 비를 멈출수도 있었을텐데.
이렇게 생각해봤자 이수현, 이 3글자를 입안에서 되뇌는것만으로도 벅찬 용기가 필요한 나는 어차피 여기까지다. 내 사랑은 이렇게나 이기적이고 얄팍하여 한 걸음 더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빗속에 잠겨있다.
꺼진 TV 화면처럼 어두운 하늘은 이내 또 다시 굵은 빗줄기를 흘린다. 책상 위에 놓여진 사진이 잔상처럼 흐릿하다. 어디서 또 비를 맞으면서 울고있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천천히 두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수현아."
수현아.
"비 온다."
울지마.
입 밖으로 채 나오지 못한 마지막 말은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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