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도로시 B

김성룡.

1980년 6월 15일생.

김가 집안의 독자.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는 친척은 없어 가족이라곤 이 몸뚱아리 하나, 가족같은 광숙이, 경리부 식구 뿐이었는데..

" 니가 내 형이라며. "

" 네? "

제가요?

서른 여덟이라는 적지도 않은 나이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 눈동자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누가 봐도 나 명품이야 하는 옷으로 쫙 빼입은 남자가 고급 외제차를 끌고 사무실 문을 턱 하니 막더니 심드렁한 얼굴로 작은 사무실 살필 게 뭐있다고 살짝 고개만 틀어 위아래로 훑었다.

" 저기 뭔가 오해가.. "

" 자. "

남자 손에 들린 흰 종이 하나는 딱 봐도 어려운 단어들만 적힌.. 그러니까 이게 의학 용어? 성룡은 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반가운 숫자 몇 개를 발견하고 그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는데 이 날씨에 가죽 장갑, 성룡의 손에 살짝 스친 가죽이 너무 시렸다. 꿍얼거리고 싶어 삐죽 나온 입술을 달싹이다가 종이 한 번, 남자 얼굴을 한 번, 다시 종이를 한 번 그리고 그 위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에 적힌 글자를 한 번 읽었다.

아니.

남 뒷조사한 게 뭐 자랑이라고 이런 거까지 보여줘?

성룡의 생년월일부터 주소까지 작은 포스트잇에 빼곡하게 적힌 것이, 딱 봐도 철부지 도련님 같은 저 남자 필체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이 바닥에서 장부 관리하는 게 마냥 앉아서 놀고 먹는 것만은 아니라 흥신소 어느 누구한테 부탁했을지 뻔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유전자 검사 결과.

종이에 볼드체로 커다랗게 쓰인 제목이었다.

" 이, 이게, 뭐에요? "

흰 종이를 돌려 남자에게 보여주며 두꺼운 글씨를 척 손가락으로 가리킨 성룡이 어이없다는 듯 최대한 눈썹을 비뚜스름하게 구겼다. 어쩐지 요즘 칫솔이 자꾸 없어지더라. 남자는 반질반질 광이 나는 구두로 바닥에 가만히 있던 돌을 툭툭 차더니 이젠 성룡까지 돌로 보이는지 한 걸음 다가와 정강이를 툭하고 걷어찼다. 아! 하늘을 찌를 만치 높게 올라간 목소리가 남자 귀에 거슬렸는지 가죽 장갑을 벗더니 본인 귀를 꾹 눌렀다.

" 들어간다? "

몇살인지 아까부터 반말을 서슴없이 하는 게 어느 누가 떠올랐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싸가지였다. 성룡은 멋대로 사무실 문 앞은 막아놓고 또 자기 맘대로 사무실 문을 열어 들어가려는 남자의 횡포에 머리를 굴려 아까 대충 봤던 종이에 적힌 이름 중 하나를 아무나 걸려라 하고 외쳤다.

" 남규만! "

남자가, 규만이 삐딱하게 몸을 돌려 말 없이 응시하는 걸 보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성룡은 규만이 못살게 굴던 돌멩이 하나를 발로 밀어차고 성큼 다가갔다.

" 너 누군데 나한테 자꾸 반말이야, 어? 딱 봐도 어려 보이는 게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쥐새끼도 아니고 말이야, 쯧. "

속사포로 쏴댄 말에 규만의 눈썹이 까딱. 까딱. 움직이다가 옅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 한숨은 씨, 그건 내가 쉬어야지. 어휴, 어휴! 아! 속 시원하다! 어디 애먼 사람한테 이런 종이 한 장 가지고 와서 장난질이야! "

" 이런 종이 한 장? "

아. 마지막 말은 그냥 하지 말걸 그랬나.

이게 다 서씨 누구 때문에 요즘 예민해져서.

규만이 천천히 눈썹을 들썩이면서 눈을 깜빡이더니 스트레칭을 하듯 목을 돌렸다. 성룡이 불안한 듯 정신을 붙잡고 아니 저기, 하고 운을 떼는데 안 그래도 고장났던 사무실 문이 끼익 열리더니 쾅, 하고 발에 치여 큰 소리를 냈다. 헉.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킨 성룡이 눈만 빠르게 끔뻑거리며 규만이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어지르는 걸 보기만 했다. 나 이거 영화에서 봤어. 대박. 이딴 감상평 남길 때가 아닌데 현실감이 붕 떠서 눈앞에 일어나는 일이 가로19 세로6 사이즈, 매번 휴대폰으로 보다 잠들어 결말을 모르는 삼류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 야, 이런 씨, 발... 너 씨이.. "

제멋대로 때려 부수더니 분이 좀 풀렸는지 고개를 좌우로 꺾고 성룡을 돌아보는 게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애처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씩씩거리는 폼이 좀 우습긴 했지만 여기서 저 미친놈을 더 자극할 만큼 성룡이 상식 밖의 사람은 아니었다.

" 와, 누군진 몰라도 대단하시네~! "

자기 사무실 박살 난 걸 보고도 손뼉 치며 비아냥댈 정도로 또라이는 맞았다.

조심스럽게 문턱을 넘어 들어서면 책 대신 잡동사니만 쌓여있던 책장 하나가 넘어져 있고 광숙의 취향대로 귤을 굽는데 썼던 난로는 엎어져 잿가루만 연신 토해냈다. 덕분에 먼지는 먼지대로 날리고 잿가루는 잿가루대로 날리는 통에 저 남규만인지 미친인지도 콜록 기침을 했다. 지가 해놓고 지가 싫어하네. 성룡의 감상은 먹소가 가고 미소(미친 소시오패스)가 왔나. 고작 이거였는데 인상만 쓰고 나가지도 않는 게 거슬렸다.

" 남규만, 규만 씨. "

햇살이 비치는 곳마다 먼지가 어디서 어디로 날아가는지 너무 잘 보일 지경이라 손을 휘휘 저으면서 규만 앞에 섰다.

" 난리 치느라 손 다 까졌네~ "

애써 분위기를 풀려는 말투가 다 들통났는지 규만은 애쓰는 사람을 괜히 밀쳐내려 하진 않았다. 넘어진 책장에 있던 구급통이 이 난리에서도 굳게 닫혀있다. 우리 사무실에서 제일 튼튼한 게 혹시 이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고 밴드 세개를 쭉 까서 규만의 손가락에 하나, 손바닥에 하나, 반대 손목에 하나 붙였다.

" 더럽게. "

" 결벽증 있는 거 아니면 그냥 붙여요~ 이게 이 상황에서 제일 깨끗한 건데? "

말하는 뽄새가 아주, 그래.

솔직히 자꾸 떠오르는 것도 좀 열받지만 성은 서요 이름은 율, 어디 인소 남자 주인공, 꼭 그게 아니더라도 잘생겼다는 설정이 오백번 붙었을 법한 이름의 소유자.

그놈이 떠올랐다.

사소한 걸로 자꾸 엇나가고 싸우고 이상하게 예전보다 지금이 더 으르렁대는 것 같았다. 사이가 좋아졌다 싶으면 서로 귀찮아 하기나 하고 연락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닌데 틈만 나면 마주쳐서 하는 말이라곤 어색한 안부 묻기라 그게 싫은 성룡이 장난을 치면 서율은 또 인상을 팍 썼다. 하나 맞추면 둘에 어긋나고 둘 맞추면 셋은 싫다하는 그런 인간. 겁나게 까탈스런 인간. 성룡이 최근 서율에게 내린 감상은 이랬다. 눈앞의 미친놈보다야 덜 하겠다만은. 지금은 차라리 그 번호를 누르고 여기 이상한 사람 있으니 잡아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 이제 검사 아니었지. 참.

성룡이 먼 생각으로 빠져있자 규만은 만난 지 몇시간도 안 돼서 이름을 턱턱 불렀다. 성룡이 먼저 이름을 불렀으니 이번 건은 무효, 쌤쌤.

" 김성룡, 정신 안 차려? "

" 이 상황에서 정신을 어떻게 차려요. "

익숙한 성격, 익숙한 말투, 익숙한 흐름. 성룡은 저도 모르게 존대가 툭 튀어나왔다. 자존심 상할 정도로 익숙해서 순간 112 누르는 상상까지 했다. 성룡이 이 미친놈한테까지 비위를 맞춰주는 건 다름 아니고.

" 너 진짜 나 몰라? "

첫째, 세상에 사정 없는 사람 없어서.

" 우리 집에 얹혀살았다며. "

둘째, 갑자기 나타난 동생 헛소리에 호기심이 동해서.

" 대답을 안 하네. "

셋째, 생존본능.

쿵, 하고 머리가 벽에 부딪히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자꾸 깝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 너. 객사는 면해야지 않겠냐? 재수없는 목소리가 두둥실 떠올랐다. 근데 이사님, 나 객사 안 할 거거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거든! 상대한테 들리지도 않을 답을 하면서 멱살을 쥔 규만의 손을 틀어잡았다. 아까 친히도 밴드를 붙여준 그 손가락을 꽉 잡고 어허! 하면서 훈장님처럼 소리를 질렀다.

" 아까는 좋다고 밴드 붙여주더니 왜 지랄이야? "

규만이 또라이 보듯 쳐다봤다.

성룡은 또라이가 맞았다.

멍석아, 내가 널 교육시킨 경험이 빛을 발할지도 모르겠다.

명석은 TQ그룹 회의실 구석 의자에서 귓구멍이나 긁적였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너저분한 사무실에 그래도 건사한 의자 하나가 남아 성룡은 그걸 끌어다 앉았다. 사고친 건 성룡이 아닌데 온갖 먼지가 뒤섞이더니 쾨쾨한 공기에 검은 입자가 둥실 떠다니며 검댕이를 묻혀댔다. 사무실이 이렇게 엎어진 게 처음은 아닌데 뭔 어린놈이 찾아와 니가 내 형이다, 하더니 갑자기 화나서 뒤엎은 적은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긴 했다. 황당했다고 해야 하나?

" 어허, 똑바로 안 드나~ "

구석에 박혀있던 효자손 하나를 손에 쥐고 규만의 자세를 교정하듯 쳤다. 성룡이 발로 밀어 치운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팔을 들고 벌서는 모습은 꼭 고등학교 시절 처벌을 생각나게 했는데 규만은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돼.. "

아까보다 누그러진 것 같으면서 금방이라도 하악질을 할 기세인 목소리에 성룡이 의자를 밀고 쭈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이미 규만의 팔이 굽혀져 절반은 내린 상태였다.

" 규만아. 너 박명석이라고 알아 혹시? "

" 그게 뭔데. "

" 뭐긴~ 사람 이름이지. "

" 씨발.. 별것도 아닌 놈 이름 대면서 꼴값은. 아! "

" 친구를 욕하면 쓰나~ "

" 아, 모른다고! "

훤히 드러난 이마에 약하게 딱밤을 때린 성룡이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처럼 떽떽 화를 내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쁜놈처럼 보이지가 않아 코트 주머니서 삐져나온 명함 한 장을 들었다. 남규만. 일호그룹 사장. 성룡이 얼빠진 얼굴로 명함을 쳐다보다가 바로 옆에 구겨진 종이를 들어서 천천히 읽었다.

유슬혜, 김성룡.

유전자 검사 결과 99. 9% 일치.

유슬혜, 남규만

유전자 검사 결과 99. 9% 일치.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 떡하니 거기 박혀있을 줄은 몰랐다. 이유는 몰라도 괜한 장난이나 치러온 철부지인 줄 알았는데 종이에 적힌 검사 결과는 몇 번을 읽어도 똑같았다.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다가 생각 한 군데서 멈췄다.

일호그룹.

서율이 아주 못살게 굴고 싶어 안달났던 거기?

그럼 얘가 진짜 그 남규만이라고?

일호 그룹 망나니?

그리고, 그리고..

씨이.. 투정부리듯 입꼬리 한쪽을 달싹이던 규만을 보다가 명함과 종이를 고이 접어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 규만아. "

근데 솔직히.

그런 생각은 잠깐 들었다.

" 내가 형이라고 했지. "

얘, 회개할 수 있지 않을까?

" 너 나 왜 찾아왔어? "

길 잃은 어린양, 영혼의 내비게이션.

300m 앞에서 우회전.

아니. 너 정도면 유턴이다, 남규만.

" 그러게, 내가 나대지 말라고 안 했냐? "

귀에 콕콕 박히는 목소리가 아주 인상적이다.

" 아, 왜 이렇게 뭐라 그런대. "

" 니가 잘못을 했으니까! "

혹시 명석을 통해 뭐 알 수 있는 게 없을까 싶어 실례인 걸 알고도 무턱대고 찾아온 TQ 본사 건물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다. 연락이라곤 한달 전 답장도 없이 술이나 먹고 헤어진 게 다라서 어색하다면 어색하고 그래도 얼굴 보니 반갑고.

" 천하의 먹소가 이것도 해결 못 해줘? "

" 말은 똑바로 하자 성룡아. 못 해주는 게 아니라, 안! 안 해준다고! "

그래도 간만에 마주친 게 설마 이거 운명인가 싶어 진땀 빼며 설득해서 카페에 앉혀놨더니 또 성질이다. 성룡은 서율이 저렇게 화를 낼 때마다 칼로리 소모가 얼마나 되는지 좀 궁금하긴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엔 달달한 당근 케이크가 조합이 좋다며 방금 끼니 챙겼다는 사람이 저걸 또 혼자 다 처먹고 있으니 말이다.

" 갑자기 그놈의 일호그룹은 왜 들쑤시려고 난리야, 난리는. "

" 난리는 내가 아니라 그 미친놈이 먼저.. "

" 뭐? "

"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성룡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모른 척 눈썹을 들썩이자 서율이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너 그딴 표정 짓지 말라고 안 했냐? 가볍게 혀를 찬 서율은 우걱우걱 케이크를 입에 쑤셔넣고 아메리카노까지 원샷을 해버렸다. 그리곤 냅킨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을 닦고 상황을 관망하며 앉아있는 성룡을 재촉하듯 쳐다봤다. 거기엔 또 눈치가 보였는지 아니면 눈치가 빨라서인지 급하게 커피를 들이키자 뜨거운 게 식도부터 위장까지 타고 넘어가 심장이 벌렁대는 것 같았다.

" 이사님, 이사님~? "

" 왜. "

" 그래서 어디 가는데요? "

" 검찰청. "

성룡이 방긋 웃으며 그래도 역시 이사님밖에 없어요~ 하고 애교를 떨면서 팔짱을 껴오자 서율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팔을 쳐냈다. 저거, 저거.. 자기 귀 시뻘게진 것도 모르고. 성룡은 은근히 부끄럼 많다고 주장하는 저 새빨간 귀를 보고 히죽 웃었다.

서율은 모르나 본데 성룡이 눈썹을 추욱 떨어트리고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 빛내면 안 될 것도 다 들어준 적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근데 성룡도 그걸 모르는 게 둘 사이의 문제였다. 남의 일엔 눈치도 빠르고 일도 척척 해내는 놈들이 연애를 안 한 시간이 제 나이 맞춰 똑같이 흘러가니 제대로 썸이니 쌈이니는 타겠느냐고 추 부장이 중얼거린 적이 있다.

빠르게 조수석을 차지한 성룡이 운전석에서 핸들을 쥔 서율을 향해 의미없이 웃어 보이다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씨, 저놈의 윙크. 투덜대는 소리에 초록불을 가리키고 출발하라며 발랄하게 외친 성룡이 어쩔 수 없이 앞을 보는 서율의 옆모습을 보다가 또 신나서 웃었다.

" 그래서, 이번엔 어떤 놈인데. "

" 뭐가요? "

" 털고 싶은 놈이 있으니까 뭘 알려달란 거 아냐. "

성룡은 잠깐 고민했다. 그러니까, 일호 그룹 망나니 도련님이 며칠 전 사무실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갔는데 그놈 하는 말이 내가 형이래요!

" 그냥~ 이사님도 되게 털고 싶었다며. "

"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냐? "

" 내가 이사님 소원 대신 들어주는 거라 쳐요~ "

" 말은 잘하지. "

결국 말 안 했다. 성룡은 서율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알면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상상도 안 갔으며 그 미친놈 당장 감빵에 처넣어야 한다며 다시 검사라도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성룡의 궁극적 목표도 다를 바는 없었으나 그 과정에서 만큼은 분명 차이를 보일 것이 확실해 더욱 말을 아꼈다. 생각이 점점 딴 데로 튀려는데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고 성룡은 차 문을 열고 내려 높은 검찰청 건물을 올려다봤다. 거, 엄청 높네. 시시한 감상이나 남기고 있는데 작게 소리를 내며 차 창문이 내려갔다. 허리를 숙이자 성룡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돌린 서율이 있다.

" 한 검사한테 얘기 해놨으니까 들어가. 너 딴짓하다 걸리면 진짜.. "

" 죽는다고요? 네, 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얼른 가요. 점심시간 끝날라. "

서글하게 웃으며 손짓한 성룡이 검찰청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대로 들어갔다. 예전에 서율 때문에 한 번 와본 적 있는 곳인데 그때 생각이 나 몸서리치다가도 그런 게 미화되는 게 추억이라고 꼭 수학여행 장소에 온 것마냥 둘러보게 됐다. 한참을 화장실 앞에서 기웃거리니 한 검사가 급하게 나와 데려갔다.

" 아잇 과장님, 오셨으면 연락을 하시지! "

" 에이, 그냥 구경 좀 했어요~ "

화장실을? 한 검사는 그냥 어색하게 하하 웃고 사무실에 마련된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 가은 씨는요? "

" 지금 다른 사건 때문에 좀 바빠서요. 아마 자료실에 있을 거예요. "

" 내가 괜히 이럴 때 찾아왔나. "

머쓱하게 머리를 긁은 성룡에 한 검사가 과할 정도로 손을 저으며 과장님이 오셨는데 당연한 거라면서 컴퓨터를 딸깍거렸다. 성룡은 의자에 앉아 가만히 다리만 까딱거리다가 한 검사 옆으로 가 컴퓨터 속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이게.. 다.... "

" 예전에 서 선배가 조사하면서 모은 자료들이에요. "

서율 그거 끈기랑 인내심 하나는 인정해줘야 한다. 성룡 앞에서만 그 좋은 게 휘발되는 듯했지만 일호그룹이라 하면, 잡으면 풀려나고 또 잡으면 풀려나던 예전 TQ그룹 못지않게 썩은 물이 한가득 고여있는 곳이라 검사들이 애를 먹었다. 애초에 일호그룹 장자의 동생은 검사라든지 해서 검찰청 자체를 쥐고 흔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성룡이 푹 한숨을 쉬더니 손짓했다.

" 이거 출력하면 얼마나 나와요? "

" 한... 세 묶음 정도요? "

히익.. 성룡이 기겁을 했지만 한 검사는 너털 웃음을 짓더니 조금 축 처진 표정으로 말했다.

" 원래라면 다 뽑아놓는 게 맞는데, 종이로 뽑은 걸 싹 다 치워버려서요. "

" 말 안 해도 누가 그랬는지 딱 감 오네~ "

검찰이나 회사나, 윗분들 비위에 맞추는 게 사회생활이고 그거 때문에 있던 일이 없던 일 되는 건 당연한 일 취급 해대는 게 아직 한국 사회니까. 성룡은 가볍게 말했지만 규만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는 걸 알아 쉬이 가벼워질 수만은 없어서 묵직하게 내려앉은 기분을 떨치려 애썼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양볼을 찰싹 때리자 한 검사가 별난 걸 봤다는 듯 희한하게 보다가 프린트 된 종이 묶음을 건넸다.

" 이게 다예요. "

" 많은데, 적네. "

" 그쵸. 한 짓에 비하면 너무 적죠. "

" 고마워요, 그럼 가볼게요. 가은 씨한테 안부 좀 전해줘요~ "

반가운 얼굴 한 번 못 보는 게 아쉬워 괜히 뭉그적거리다가 이젠 정말 가야겠다 싶어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섰다. 다음에 또 오라는 해맑은 목소리에 다음에 또 오면.. 좋은 거야? 검찰청인데? 하는 생각을 흘려보내고 방긋 눈을 접어 웃고 손을 흔들었다. 한 검사도 은근 저래. 응.

바로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사무실은 난장판이 돼서 가기가 좀 그렇고 규만이 집까지 찾아오진 않을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자켓을 정리하는데 부스럭 소리가 거슬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꾸깃꾸깃한 명함이 하나. 유전자 검사 결과지가 하나.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한참 보다가 성룡은 휴대폰을 열어 번호를 찍었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 설마 전화할 일 생기고 막 그러진 않겠지? "

플래그를 화려하게 꽂으며 택시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검사에게 받은 자료를 살펴봤다.

집에 도착해서도 아직 반이나 남았을 정도로 자료 양이 많아서 커피를 옆에 두고 피곤한 눈을 비볐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이럴 거면 검사를 할 걸 그랬어.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데 어디서 불쑥 뾰족한 눈이 튀어나와서 검사는 뭐 꽁으로 되냐? 얄미운 말만 쏘아대고 사라졌다. 의자에 고쳐 앉아 볼펜으로 남규만의 이름이 적힌 문장을 쭉 그어나갔다. 벌써 몇십 번이나 그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쁜놈, 천하의 나쁜놈. 이런 놈이 벌을 받아야지. 성룡이 속으로 분을 삭히며 규만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랑 똑닮은 나쁜놈. 나쁜놈, 그런데 나랑 똑닮은.. 성룡의 손이 느려졌다.

" 너 나 왜 찾아왔어? "

그렇게 물었을 때.

" 보고 싶어서. "

나쁜놈인 걸 아는데, 자꾸 그 말이 귀에 맴돌아서 속이 뜨거워졌다가도 차게 식었다가 또 미지근한 게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기분.

" 내 형이라는 게 어떤 새낀지, 나가서 얼마나 거지 같이 살고 있을지. 궁금했거든. "

아, 취소. 이거 완전 뜨거워서 입에 대기도 싫은 핫커피다. 성룡이 종이에 볼펜을 죽죽 긋다가 빙빙 돌리고 쿡 진하게 찍었다. 성룡은 아직도 연기가 폴폴 나는 싸구려 커피를 힐긋거렸다. 맨날 얼음까지 씹어먹는 서율하고 다르게 입을 쭉 내밀고 호호 불어 마시며 뜨거운 커피로 몸을 데웠다. 뜨거운 걸 먹고 시원하다~ 했을 때 서율이 아저씨 같다며 기겁하던 게 생각났다.

" 내가 지금 딴 생각 할 때가 아닌데. "

성룡은 규만이 꼭, 제 잘못을 인정하고 들어가 처벌받길 원했다. 정말 네가 어머니의 아들이라면, 네가 내 동생이라면, 조금이라도 피가 섞였다면 그걸로 이유는 됐다.

내 동생이니까.

떳떳하게 살았으면.

미워도 가족이라잖아.

그때.

뚜르르르, 뚜르르.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떠 있는 두 글자가 좀 낯간지러워 잔기침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 어, 동생~ "

그게 벌써 석 달 전 일이었다.

제 머리처럼 밝은 노란색 우산을 들고 한 시간째. 비가 그쳐가길 다행이지만 우산을 내리기엔 규만에게 지금 비보다 더 무서울 저 가로등 불을 가려주고 싶었다. 규만은 자존심이 세고 무서운 것도 많아서 이런 표정이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 서율을 닮은 그 남자. 규만이랑은 무슨 사이일까? 그런 생각 잠깐, 많은 일이 있던 몇 달 전 생각 길게. 이야기가 더 길지만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 앞에 벌벌 떨고 있는 규만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다.

" 규만아. "

대답없이 올려다보는 얼굴이 어리다.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안쓰럽고 벌겋게 짓눌린 눈가가 쓰리다.

" 규만아, 집에 가자. "

성룡은 규만의 뒤로 으리으리한 저택을 한 번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집안이라니.

몇 달 전, 남일호 회장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규만은 교도소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와 떵떵거리며 살았다. 아니 떵떵거리며 살 줄 알았다. 워낙 자기 잘난 맛에, 남 깔보는 맛에 사는 애라 갔다 와서도 정신 못 차리고 또 사고나 칠 줄 알았다. 그런데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아버지란 작자가 기어코 규만을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게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는 건지 잘은 몰라도 규만의 행색이나 씀씀이를 보면 아직 자기 아들이라고는 생각하는가 싶었다. 성룡이었으면 예, 그러세요! 호쾌하게 집을 나왔을 텐데 규만은 아버지에게 복종하다시피 했으니 결국 이 꼴이었다. 그 남일호란 사람도 정상이 아니니까, 한 검사가 힘내주길 바랐다.

어쨋거나 성룡은 이게 다 규만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좀, 안쓰럽긴 해도.

니가 잘못한 게 있잖아.

그걸 어떻게 용서해.

" 너 또 좆같은 생각하지? "

불쑥 말을 건 규만에 놀라 눈을 찡긋거렸고 생각을 잘라내며 간절한 어투로 부탁했다.

" 여기 서 있지 말고 가자, 응? "

" 씨발....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가. "

성룡이 가로등 아래를 벗어난 곳으로 규만을 꺼내와 우산을 접었다. 어둠 속에 규만의 눈동자가 묻혔고 성룡의 갈색 눈동자는 생생하게 반짝였다. 풀이 잔뜩 묻은 투명 우산, 빗물이 떨어지는 노란색 우산. 한 손에 나란히 들고 다른 한 손으론 규만을 잡아끌었다. 얘를 어쩌면 좋을까. 성룡이 나이로도 정신적으로도 형이라곤 하나, 좋게 말한다고 들을 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애가 반성하긴 무슨 더러 성질을 부릴게 뻔히 보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간지럽히면 좀 웃긴 하려나. 누가봐도 장난스러운 얼굴로 손가락을 꼼질거리니 규만이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봐서 그냥 내가 대신 웃었다. 찰박, 찰박. 아직 물웅덩이가 고여있는 걸 신경도 안 쓰고 걷다보니 바지 밑단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걸 본 규만은 최대한 웅덩이를 피해 걸었다. 상황이 이런 와중에도 성룡은 호기심을 못 참았다. 호기심으로 흥한 자 호기심으로 망한다는 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 뭐 하나 물어봐도 돼? "

" ...... "

" 아까 누구야? "

" 왜. 너네 집 TQ 쪼다랑 닮아서 꼴려? "

" 넌 말을 해도 꼭.... 됐다. 됐어. "

어? 근데 규만이 너도 그 생각했구나! 진짜 닮지 않았어? 성룡이 방금 규만의 막말은 또 혼자서 넘겼는지 신난 얼굴로 방방거리자 우산 두 개가 번갈아 바닥을 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저 새끼는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님 생각이 많아서 저러는 거야? 규만이 귀찮은 듯 조용하게 만들려는 수작으로 입을 열었다.

" 이강두. "

" 응? "

이강두라고.

나한테 호구잡힌 새끼.

쉴 틈 없이 종알거리던 성룡이 입을 떡 벌리고 섰다.

너는 말을 해도 꼭...

좋아한다는 말까지 그렇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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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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