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휴버트는 창문 밖을 보며 책을 덮었다. 한적하게 실내에서 듣는 빗소리는 좋지만, 으슬으슬하니 뒷덜미가 서늘해서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에 장작과 함께 불을 지피고, 차를 우리기 위한 물도 끓이고, 책장 쪽 작은 테이블에 두 개의 찻잔을 준비했다.
지금,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이른 오전부터 나갔다. 계속되는 비로 초코보 우리에 문제가 생겨서 도와달란 의뢰를 받아, 귀찮아하면서도 꾸역꾸역 나갔다. 막 나가려 할 때부터 비까지 내려 표정이 더 안 좋아졌지만... 때려치지 않고 책임감 있게 나간 것이 어딘가. 게테도 많이 착해졌다. 휴버트는 자신의 어린 연인이 예전보단 성격이 많이 유해졌다 생각하며, 어떤 차를 준비할지 고민했다.
그 사이 비는 조금 더 거세졌다.
이런, 휴버트는 게테를 걱정했다. 우산에 우비까지 챙겨갔으나, 이런 강수량이면 그냥 쫄딱 젖을 텐데. 바로 씻을 수 있게 따듯한 물이나 받아두어야겠다. 생각을 바로 실천으로 옮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
아, 젠장.
게테는 속으로 욕을 했다. 어차피 그는 목을 다쳐 목소리도 나오지 않으니, 알고 있는 온갖 욕을 머릿속으로 질렀다. 자주 의뢰를 부탁해 안면을 튼 사람이라, 거절하면 주 고객 중 하나를 잃을 것 같아 나왔지만, 역시 기분은 좋지 않다. 고객도 비 오는 데 미안하다며 다른 것을 더 챙겨주긴 했지만... 그래도 짜증 나는 것은 짜증 나는 것. 기껏 쉬는 날에 연인과 같이 지낼 시간이 더 줄어든 것도 속상하고,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것도 뭐 같고. 제~기랄.
와중에 갑자기 비가 점점 잦아들었다.
설마 집 앞에 도착하면 그치는 거 아냐? 그럼 더 빡칠 것 같은데. 게테는 그런 생각을 하며, 쿵쿵(길이 엉망이라 진흙만 더 튀었다) 걸어갔다. 그리고 정말, 집 대문 앞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다.
아. 이럴 수가. 열두신이시여. 이렇게 빡칠 수가!! 게테는 입을 말아 물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해까지 환히 나와 눈을 부시게 한다. 뾰족한 눈으로 하늘을 쏘아보다 게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급히 달려가 현관으로 들어갔다.
"아, 게테. 왔어?"
다정히 반겨주는 연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나갔다. 게테? 의아한 목소리지만 반항 없이 따라와 주는 손길에 마음이 풀려가는 것을 느끼며 게테는 집 밖을 나가, 바로 옆의 언덕을 같이 올랐다. 휴버트는 갑자기 운동을 시키는 그가 의아했지만 군말 하지 않고 따랐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달리기는 숨은 찼다. 무릎에 손을 기대 웅크린 채, 숨을 헐떡이다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길래..."
비가 자주 오는 그리다니아의 라벤더 지구, 비를 머금은 숲들이 존재감을 알리는 환한 빛을 받으며 고운 무지개를 받쳐주었다. 이런 무지개를 보기 위해선, 이만큼의 비가 와야 한단 조건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였다.
"이거 보여주려고 그렇게 달린 거야?"
칭찬해 달란 표정으로 끄덕이는 게테를 보며 휴버트는 웃었다. 원하는 대로 그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어주며, 휴버트는 조금 늦은 마중을 해주었다.
"고생했어, 게테. 이제 들어가서 씻을까?"
미리 물 받아놨어. 씻고 티타임이나 가지자. 차분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게테는 역시 애인의 칭찬이 최고라 생각하고, 일진이 더러웠지만 이런 무지개라도 떴으니 나쁜 하루는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이번엔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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