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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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컾 로그 / 랑월 / #노비인_앤캐를_산_자캐 (from.만냥님)

노비라는 것은 그랬다. 어미 아비가 준 이름 대신 통일되지 않는 이름으로 불렸다. 랑랑은 어미도 노비였고, 아비도 노비였다. 노비에게는 몸을 낮추는 것이 사는 법이었다. 그들은 가리지 않고 무엇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했다. 본 것도 못 본 것이어야 했고, 들은 것도 못 들은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노비였다.

랑랑은 많은 곳을 떠돌았다. 태어난 첫 집에서는 가산이 바닥나기 시작하자 노비부터 팔아치웠다. 그들에게 노비의 가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과 떨어졌다. 두번째 집에서는 체구가 크고 곱상하다는 이유로 팔려갔다. 세번째 집에서는 머리가 너무 길다며 팔려갔다. 노비란 그런 것이었다. 거슬리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손쉽게 치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그렇게 랑랑은 네번째 집에 오게 되었다. 이 이상한 주인어른에게.

* * *

이번 주인 어른은 서양인이라 했다. 외국에서 상인들과 함께 와서 통역을 시작으로, 현재 무역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라 들었다. 언젠가 돌아갈 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돈이 많은 것인지 요즘 조선의 것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 역시도, 팔려가는 랑랑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세번째 주인집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화려한 남자가 제 새로운 주인어른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서양인이라 그런지 신기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새 주인어른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랑랑은 이름을 떠올리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첫 집에서 엄마가 불러줬던 내 이름. 랑랑.

"…랑랑, 이라고 합니다."

"랑랑. 이름도 예쁘구나. 가자."

예쁜 이름이라니. 지금껏 태어난 집에서도 제대로 불려본 적도 없는 이름이 예쁘다니. 이름이 불렸다는 것도 이상했고 불러준 주인어른도 이상했다. 노비에게 칭찬을 하는 주인어른이라니.

가자는 말에 랑랑은 자연스럽게 월터가 탄 말의 고삐를 잡고 말의 옆에 섰다. 그러자 월터는 랑랑을 안아들어 제 앞에 앉혔고, 고삐 역시 자신이 쥐었다.

"주, 주인어른?"

"내 이름은 월터다. 듣지 못했나보구나. 그리고 한 명이 말을 끌고 가면 어느 세월에 의주까지 갈 수 있겠느냐. 같이 말을 타고 가야 한시라도 빨리 서해 바다에 도착하지."

서해 바다라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닷가에 간다는 설렘이 랑랑의 마음에 채워졌다. 무역상이라면 당연히 바다에서 일할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 바다를 볼 수 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인어른의 말에 반항해선 안된다는 핑계로 랑랑은 얌전히 월터의 품에 안겨 안장을 꼭 잡았다. 

서양에는 노비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어른이 특이한 것일까? 품에 노비를 안고 말을 타는 양반이라니. 랑랑은 지금껏 이런 사람은 본 적 없었다.

첫날밤은 계곡 근처의 주막에서 묵게 되었다. 저녁 즈음 도착한 주막에 말을 맡기고 월터는 랑랑을 계곡으로 데려갔다.

"벗거라."

그 명령이 곤혹스러웠으나 노비는 토를 달아선 안됐다. 월터의 머리카락만큼 빨개진 얼굴로 랑랑은 옷을 벗었다. 무엇을 시키시려고 이렇게 인적 드문 계곡에서, 그것도 야밤에 옷을 벗으라 하신 걸까. 매질도 견뎠고 땡볕에서 온갖 일을 다 해본 랑랑이지만 이 상황이 무서웠다.

'이대로 범을 불러다 먹이로 주시려는 거 아닐까. 막상 사고 보니 내가 너무 마음에 안드시는 걸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덜덜 떨고 있는 랑랑을 월터는 천천히 씻겨주었다.

"전 주인집도 참 못됐구나. 사람을 새로 보내려거든 씻겨주긴 해야지. 이래선 제 얼굴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지 않느냐."

다정한 손길에 그제야 랑랑은 월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정한 눈이었다. 분명 노비를 보는 눈이 아니었지만 랑랑은 애써 외면했다. 주인이 저런 눈으로 노비를 보지 않아. 나는 지금 겁을 먹고 주인님께 매달릴 구실을 찾고 있는 거야. 그리 생각해야할 정도로 월터는 너무나 다정한 눈으로 랑랑을 보고 있었다.

"어서 마저 씻거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멱을 감겨주는게 전부구나."

씻으라니. 그동안 주인어른들 앞에서 험한 일을 하며 더워 옷을 벗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이리도 부끄러운지. 씻는 건 부끄러웠지만 월터 앞에서 계속 더럽게 있는 건 더 부끄러웠다. 더럽다는게 부끄러운줄도 모르는게 노비의 삶이었는데 이번 주인어른은 자신을 너무나 부끄럽게 했다. 랑랑이 몸을 다 씻자 어디서 준비한 것인지 월터는 새 옷을 건내주었다. 여전히 싼 옷이었지만 분명 새 옷이었다. 그리고 주막에 돌아가서는 옆에 눕히고 끌어안고 자는 탓에 랑랑은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쿵쿵 뛰는 것이 제 것인지 월터의 것인지도 모를 만큼 긴장되고, 설렜다.

둘째날은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그 날은 그 마을에서 장이 섰고, 마굿간에 말을 맡기고 월터는 랑랑과 함께 시장 구경을 했다.

"전 주인이 나에대해 일러준 것이 있느냐?"

"없, 으십니다. 그저 가서 잘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있다고 말하면 안되지. 노비는 들은 것도 듣지 못한 것이어야 했다. 버릇없게 양반의 말을 옮기면 안됐다.

"그렇구나. 나는 의주에서 무역상과 통역을 하고 있다. 너가 보기에 나는 조선인 같으냐 아니면 서양인 같으냐?"

"서양인, 같으시옵니다."

"그래. 그러니 너를 데려가는거다. 이리 조선말을 배워도 조선 사람들은 처음 보는 서양인에게는 쉽게 마음을 안열더구나. 그래. 이건 어떻느냐. 이 노리개가 네게 참 잘 어울리는구나."

노리개를 추천하는 월터의 장난에 랑랑은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고 서있자 월터는 더욱 웃었다.

"농이다. 옷을 사자꾸나. 피부처럼 흰 옷도 좋지만 좀 더 다양한 옷이 좋지 않겠느냐. 그래, 이 녹색은 어떻느냐."

월터가 고른건 딱 보아도 비싸보이는 옷이었다.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주인어른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을 위해 데려가는 것이니 랑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녹색은 좋아하는 색이었다. 푸른 들판과 넓은 하늘, 그리고 바다.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푸르렀다. 푸르던 그곳에 랑랑은 조심스레 월터를 넣었다. 푸른 것들 사이 유일하게 붉은, 내 주인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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