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대피소 안, 검은 스포츠 머리의 남자는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는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있다. 무심한 표정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또 다른 손. 그 손에는 작은 PDA가 쥐여져 있었다. 빠르게 올라가는 부상자의 수와 사망자의 수. 그리고 따로 집계되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수를 보며 이곳 역시 전장이고 자신은 전장에 투입된 군인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30분 전, 매니저에게 받은 링크를 읽지 말았어야 했다고 도윤은 후회하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는 희망이라도 남겼지 이건, 이건 제게 무엇을 남겼는지 알 수 없었다. 매니저에게 도윤에게 준 링크는 저와 사랑하는 연인인 주원의 팬픽이었다. 문제는 그 캐해가, 전혀 달랐다는 거지만. ["이주원. 씨발. 어디 간 거야!"] "매니저 누나, 이거, 나한테 왜 보
살면서 처음으로 도윤은 사람이 예민하다는게 어떤 것인지 체감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작게 시작된 어깨 통증은 점점 커져 이젠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힘들었다. 통증은 선수에게 예민한 문제였다. 게다가 수영선수가 어깨 통증이라니. 사라지지 않고 저를 계속 괴롭히는 통증에 도윤은 처음으로 예민한 상태가 되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처음 형을 본 날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어요. 운동선수의 몸을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좋아한다는건 알고 있었어요. 선수 생활을 할 때도 몇 번이나 초대장이 왔었으니까요. 은퇴를 하면 그런 관심들은 다 사라질줄 알았는데 매번 초대장을 보내주시던 선생님께서 직접 초대장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쇼에 참석했죠. 패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또 몇 선생님
둘은 서로 적대 가문에서 태어났다. 장관을 번갈아가며 하는 두 가문을 보며 혹자는 끼리끼리 해먹는 것이 아니냐 말할 법도 한데 이 두 가문에는 그런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장관이 되면 그 전의 것들을 싹 갈아엎는 것이 첫 순서였으니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난 둘은 어떤 방향으로 노력해도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비밀로 해가며 몰래
긴 여정이었다. 사지를 몇번이나 찢기고 점점 지능이 오르는 몬스터들을 가족단위, 마을단위로 죽여가며 앞으로 전진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도윤은 멈출 수 없었다. 용사니까. 용사의 운명은 마왕을 토벌하는 것이니까. 그저 그 운명 하나만을 믿고 도윤은 너무나 험한 길을 걸어왔다. 곁을 지켜주던 동료들은 이미 모두 잃었다. 회복 물약도 예전에 바닥났다
도윤은 제게 주어진 출입카드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이주원 담당 포토그래퍼 서도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저 홈마였는데… 출입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를 탔음에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유료 팬덤에게 제공될 사진을 위해 포토그래퍼를 찾던 중, 주원이 직접 홈마인 자신을 추천했다는 이야기는 계약서를 쓸 때 들었다. 이게 무슨 꿈같은 이야기힐까. 믿기지 않으
천장의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이 밝히고 있는 수영장에 주원이 들어왔다. 보기 좋게 자리잡은 몇그루의 관상용 나무와 일렬로 늘어선 썬베드. 모든것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풍경 속 누군가 수영을 하고 있는지 수면이 일렁이고 있었다. 인어라기에는 큰, 마치 범고래같은 모습에 주원은 멍하니 수영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며 숨 한 번 안쉬고
눈을 감았다 뜨니 내가 보였다. 눈도 감지 못한채 칼에 맞아, 그가 그러했듯 나 역시 내 뒤를 잇게 하기 위해 키운 아이의 품에 안겨 나는 죽음을 맞이했다. 심장에 꽂힌 검은 아프지 않았다. 이미 죽어서 고통을 못느끼는 것일까. 살면서 늘 들고다니던 것은 혼이 되어서도 한몸처럼 지낸다는데 매일같이 당신을 그리워하며 읽던 편지가 손에 들려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교황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에서 추앙받는 직업 중 하나인 성기사. 탁월한 성력을 타고나야하며 그와 동시에 근력도 단단히 길러야하는 직업.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성검을 뽑은 도윤은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단장이 죽으면 그의 무덤 옆에 꽂혀 다음 단장이 될 사람만이 뽑을 수 있게 된다는 성검을 뽑은 어린 도윤은 빠르게 성기사의 길을 걸었고 그 외의 것은 그에
설날이라 집을 찾은 랑랑과 월터는 예전에 랑랑이 쓰던 방에 나란히 늘어졌다. 귀성길이 막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차라리 해외를 갔던 때가 나았지, 국내에서 이동하는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줄은 몰랐다. 먼지 냄새 섞인 익숙한 장소에 랑랑은 강아지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월터는 그런 랑랑을 보다가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ㅎ
캐나다의 겨울은 너무나 시렸다. 눈은 무릎까지 왔고 기온은 영하 저 아래로 떨어졌다. 여름에 왔을 때 더위에 녹았는데 겨울도 무시할 수 없는 추위를 안겨주었다. 물론 집안은 따스했고 벽난로 옆은 더없이 뜨거웠으며 언제든 자신을 안아주는 부모님과 누나가 있었지만 그 속에서 홀로 동양의, 그것도 중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류랑랑은 추웠다. 그 사람의 온기가 없
오늘 20:00 '4주년 호텔 Vlog' 최초공개 최초공개 제목에 이끌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공개까지 아직 여섯시간이나 남았는데 반응은 벌써부터 뜨거웠다. 평소에도 서로 못해줘서 안달인, 달달하다 못해 이가 썩을 거 같은 이 커플이 기념일이라니. 그것도 4주년이라는 큰 기념일이라니. 제목도 제목이었지만 썸네일도 사람들을 모으는데 한 몫했다. 스파부터 스카
노비라는 것은 그랬다. 어미 아비가 준 이름 대신 통일되지 않는 이름으로 불렸다. 랑랑은 어미도 노비였고, 아비도 노비였다. 노비에게는 몸을 낮추는 것이 사는 법이었다. 그들은 가리지 않고 무엇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했다. 본 것도 못 본 것이어야 했고, 들은 것도 못 들은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노비였다. 랑랑은
랑랑이 그토록 꿈꿔왔던 대학은 생각보다 훨씬 더 낯설고 반짝였다. 제 또래 집단에 소속된 것이 초등학교 이후 처음인 랑랑은, 3월의 그 싱그러운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OT에 참석해 같은과 동기들과 안면을 트긴 했으나 친해질 자신은 없었다. 긴 머리에 혹시 사연이 있는가 물어오는 질문들에 고개를 가로젓고 술만 마실 뿐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노을이 지고 있어요. 네모반듯한 창문 너머로 붉은 햇빛이 들어와 여관 안을 밝히고 있죠. 그 빛은 너무 강해서 앞서가는 당신의 한쪽 얼굴을 모두 가려버렸어요. 반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붉은 농르 속 당신의 머리칼이 반짝이면서 더욱 예쁘게 빛났어요. "아, 장미다." 내 발걸음이 멈추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본 당신 주변에 예쁜 장미꽃이 만개해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