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주원

호텔

자컾 로그 / 도윤주원 / 도윤이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if

천장의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이 밝히고 있는 수영장에 주원이 들어왔다. 보기 좋게 자리잡은 몇그루의 관상용 나무와 일렬로 늘어선 썬베드. 모든것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풍경 속 누군가 수영을 하고 있는지 수면이 일렁이고 있었다. 인어라기에는 큰, 마치 범고래같은 모습에 주원은 멍하니 수영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며 숨 한 번 안쉬고 반바퀴를 돈 남자는 자신이 온 것도 모르는지 다시 반바퀴를 돌고 있었다. 마치 범고래처럼, 처음부터 물 속에서 태어나 자란 것처럼 그는 유유히 물 속을 헤엄쳤다. 그렇게 두바퀴쯤 돌았을까 그제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남자는 티비에서 몇번인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국가대표 수영선수 서도윤. 수모와 수경을 동시에 벗은 남자는 척 보아도 강아지상이었다. 저와 반대되는 강아지상에 수영선수다운 넓은 어깨 그리고 저를 보고 놀란 얼굴. 저런 표정은 익숙하기에 먼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수모와 수경을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신경쓰는 눈치면 나가주려고 했는데, 잘됐다 생각한 주원은 그대로 썬베드에 기대어 앉아 수영장 전체를 감상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도윤이 먼저 물 밖으로 나와 샤워실로 향했고, 주원도 잠시 뒤 방으로 돌아갔다. 티비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뉴스에 자주 나왔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최근 기사를 훑어보니 내일 이 호텔에서 인터뷰가 있었다. 덤으로 곧 운동선수 특집으로 자신과 같은 화보에 나올 예정이란 것도 알았다. 얼굴만 봤을 때는 설마 했는데 맞았구나. 아까 봤던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주원은 눈을 감았다. 또 만날 수 있으려나.

분명 그리 생각하며 잠들긴 했지만 설마 벌써 만날줄은 몰랐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식사를 거를 수는 없어 가볍게 샐러드를 먹기 위해 호텔 식당으로 내려오자 도윤이 먼저 와서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저와 비슷하게 고르는걸 봐서는 다이어트중인 것 같은데…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자신을 발견했는지 고개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서서히 다가왔다.

"앉아도 될까요?"

놀라던 어제와 달리 퍽 태연하게 제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에 주원은 흔쾌히 제 앞에 앉으라 손짓했다. 먹기 싫다는 얼굴을 한 것치고는 크게 크게 잘 먹는 도윤의 모습을 신기하게 보며 한입씩 천천히 먹었다. 그렇게 말없이 몇분이 지났을까 슬쩍 주원의 눈치를 보던 도윤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저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주원은 퍽 놀란 눈으로 도윤을 봤다. 월클병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저를 모른다는 사람은, 그것도 유명인 중에서는 더더욱 만난적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도윤의 입장에서는 모를 수 밖에 없었다. 인터뷰하러 온 호텔에서까지 수영을 할 정도로 초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수영밖에 모르고 살았다. 고등학교는 훈련때문에 빠진 공결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대학 역시 특기생으로 들어가 경기 성적으로 학점을 대신했다. 연예계는 커녕 평소에 뉴스도 안보고 살 정도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수영만 할 수 있으면 뭐든 상관없었기에, 아무리 유명한 슈퍼모델인 주원이어도 모를 수 밖에 없었다.

"…… 이주원입니다."

"아, 저는 서도윤입니다. 수영하고 있어요."

"알고있습니다. 국가대표시잖아요."

"어.. 어어?! 아세요?! 어떻게?!"

어제 검색해서 알아낸 것들인데. 먼저 아는체 하자 놀라며 눈을 마주치는 도윤을 보며 주원은 웃음을 삼켰다. 별 말 없이 밥을 먹는 모습에 티비에서 보는 것과 달리 무뚝뚝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냥 낯을 가리는 것 뿐인가. 좀처럼 사람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않는 주원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도윤에 대한 평가는 시시각각 바뀌고 있었다. 얼마 안되는 샐러드 접시를 비워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있을 각자의 스케줄 이야기부터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여낡처 공유까지 이어졌고, 화보 촬영때문에 먼저 일어나야 했던 주원은 다음에 또 보자는 의례적인 말을 남기며 일어났다. 그런 주원을 본 도윤은 아쉬운지 고개를 푹 숙인채 물었다.

"다음,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주원의 삶에서 이렇게 흰 사람은 별로, 아니 거의 없었다. 더러운 연예계는 카메라가 돌아갈때, 돌아가지 않을 때의 모습이 크게 차이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국민 남친으로 언급되는 모 연예인은 뒷자리에서는 여자를 끼고 놀기를 좋아했고, 처연하고 잘생긴 얼굴로 유명한 연예인은 싸가지없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곳에서 어릴때부터 뒹굴면서 주원은 남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법, 표정을 숨기는 법등을 배워왔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그래. 흰 눈보다는 한마리의 강아지 같았다. 주인에게 빨리 돌아올거냐 묻는 것 같은 표정에 주원은 저도 모르게 "물론이죠. 또 만날 수 있을거에요." 하며 답했다.

그로부터 몇주가 지났을까 둘은 그동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시시콜콜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들이었지만 그 처음과 끝은 늘 각자의 일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도윤의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었다. 화보 촬영이 끝나고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주원은 메이크업이나 헤어 정리를 하지 않고 곧장 선발전이 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스포트 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지만, 도윤이 미리 준 티켓 덕분에 주원은 조용히 입장할 수 있었다. 경기가 제일 잘 보이는 앞자리. 이런 자리 표는 어떻게 구하는건지, 참가자에게는 다 한두표씩은 주는건지 궁금해할 틈은 없었다. 도윤은 저 멀리 물 속에서 제가 보지 못했던 여러 방법들로 수영하고 있었고 그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2등과 10초는 더 차이나는 실력. 때문에 매번 도핑 테스트를 하지만 매번 음성으로 나와 그저 천재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천재. 자신과 이야기할 때의 멍멍이같은 모습이 아닌, 사냥개같은 모습의 도윤을 보며 주원은 새로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동안 도윤이 제가 부르면 쪼르르 달려왔던 일이나 해맑게 웃어주며 지나가듯 한 말들은 다 해준 것들을 떠올렸다. …에이 설마. 이정도면 월클병을 넘어 도끼병이지. 주원은 고개를 가로젓고 해맑게 웃으며 관중의 환호를 받는 도윤을 뒤로한채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도윤이 자신을 봤으려나. 못 봤어도 상관없다. 또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테니까. 어째선지 자신과 도윤은 계속해서 만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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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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