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도로시 C

차곡차곡 잘 다려진 흰 셔츠 위로 딱 조여 맞는 베스트가 쌓였다. 현관문에 노란색 우산 하나가 잘 걸려있다 툭 투명 우산을 치며 넘어졌다. 성룡이 아이코, 놀라서 현관문을 봤다가 불쾌한 표정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는 규만의 옷차림을 훑었다. 꽤 볼만 한 차림이었다.

" 풉. "

" 쪼개지 마. "

" 미안~ 어휴, 근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 노란 맨투맨에 현란한 무늬가 그려진 수면 바지 차림을 한 규만이 제 나이보다 어려 보여 꼭 막냇동생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눈썹도 가리지 못하지만 저도 앞머리라고 힘내서 이마를 가린 머리가 귀엽기도 했다. 계속 웃음을 참으며 모른 척 옷을 개던 성룡이 턱짓으로 우산을 가리켰다.

" 우산. 돌려주러 갈 거지? "

" 뭐? "

규만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노란 우산 아래에 쓰러져있는 더러운 투명 우산에 시선을 뒀다. 저걸 뭐 하러 돌려줘. 딱 봐도 싸구려 우산인데. 또, 또 못된 말. 규만을 째려보며 마저 옷을 갠 성룡이 읏차, 효과음을 내며 일어서서 옷장 옆 한 구석에 규만의 옷을 고이 두었다.

" 강두라고 했나. 되게 친절하게, "

친절하게는 아니었지.

" ..생각해서, "

딱히 뭘 생각해서 줬던 건 아닌 것 같고.

" 그, 아무튼! 주인 있는 건데 돌려 줘야지! "

성룡은 그렇게 생긴 얼굴 관상에 뭐가 있나. 생각하다가 날 선 강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규만을 밀치고 본인이 더 상처받은 것 같은 그 눈빛이 잠깐 둘 사이에 다가가길 망설이게 했다. 성룡은 분명 그런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삶의 의지로 가득 찬 눈.

" 니가 알아서 하든가. 그지 새끼처럼 저런 걸 주워 쓰냐? "

규만이 심드렁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스프링이 어쩌네 브랜드가 저쩌네 떠들어댔다. 성룡은 그 꼴을 보고 웃으면서 그래봤자 넌 지금 노란 맨투맨 입은 병아리일 뿐이란다. 생각하고 헛소리들을 삐약거리는 소리로 치부하고 넘겼다. 방금까진 덜덜 떨던 애가 지금은 저렇게 자기 좋은 말만 하는 거 보니 예전보단 나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규만의 말을 빌려 그 호구 덕분인지. 성룡이 교도소에서의 규만을 떠올리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괜히 안 좋은 생각하지 말자. 그리곤 금방 뇌리를 번뜩인 아이디어에 규만의 휴대폰을 스리슬쩍 가져와 장난스런 눈빛을 띄웠다. 성룡의 집 문에 걸린 전구 하나가 반짝였다. 규만의 휴대폰 화면을 밀어 넘긴 성룡은 비밀번호 키워드에 0511을 입력하자 속 시원하게 열린 화면에 음흉하게 웃었다. 저렇게 까다로운 놈이 휴대폰 비밀번호는 참 단순하다 단순해. 단조로운 배경화면을 지나쳐 연락처 위젯을 누르자 호산그룹, 동하그룹, 어디 그룹 저런 그룹. 박 변호사, 지 변호사, 천 변호사. 딱딱한 이름들 사이로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쪼다.

성룡이 애 같은 비속어에 못 참고 풉, 웃음을 흘리자 규만이 또 저런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하려 몸을 일으키는데 이번엔 성룡이 선수를 쳤다.

" 나 화장실~ "

" 야, 그거 내 휴대폰, "

규만이 말을 끝내기 전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온 성룡은 주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를 손으로 막고 몰래 접선하듯 속닥거릴 준비가 돼 있었다. 휴대폰 너머로 연결음이 한참 흘렀다. 아, 문. 문 잠가야지.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연결음이 끊기더니 처음 듣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전화를 받았다.

" 저, 혹시 이강두 씨? "

전화를 받은 상대는 살짝 당황한 듯 자신을 규만의 비서라고 소개했다. 성룡이 황당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비서시라고요? 만 연신 물어댔다. 규만아, 비서를 쪼다라고 저장하는 상사가 어딨어. 성룡은 말을 흐리다가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대체 뭐야? 이마를 짚으며 변기에 앉은 성룡의 모습이 꼭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우스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하고 연락처 스크롤을 한 번 더 내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슥슥 내려봤자 보이는 건 쪼다랑 온갖 그룹, 변호사, 검사. 아버지. 여동생. 그리고....

이건 뭐지?

성룡이 만화 효과음이 날 것 같이 눈을 깜빡거렸다. 휴대폰은 특수기호가 앞에 붙은 문자를 가장 맨 위에 표시했는데 어릴 때 진짜 친하다 하는 아이들은 연락처를 저장할 때 바로 위에 보이도록 이름 앞에 온점을 하나 붙이기도 했다. 규만이 이렇게 깜찍한 짓을 했다곤 믿기지가 않는데.

.

온점 하나만 찍힌 번호를 누르고 천천히 흐르는 연결음이 들리자 성룡은 본인도 모르게 허리를 쭉 펴고 긴장했다. 뚝, 연결음이 끊기자 성룡이 입을 떼기도 전에 건너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귀를 찔러서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떼고 귀를 막았다. 규만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혹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는지 화장실 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휴대폰을 귀에 슬쩍 가져다 대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 대답 좀 하지? 왜 자꾸 거슬리게 하는데. "

왐마야.

성룡이 벙찐 상태로 쉽게 휴대폰을 뺏겼다.

규만이 화면의 빨간 버튼을 연타하더니 네 번째에서야 제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성룡은 아직도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던 모습 그대로 멈춰 서있다.

" 뭔데 전화를 하고 지랄이야. "

" 형제끼리는 얼굴 취향도 닮는가 보다, 규만아. "

" 아, 뭔 개소릴... 씨.... "

" 좀 재수 없어도 먹소가 잘생기긴 해. 어. "

" 뭔 개소리냐고. "

성룡은 쯧쯧, 혀를 차고 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이쯤에서 슬슬 빠져줄 필요도 있지. 극성 부모도 아니고, 규만도 나이를 먹을 만치 먹은 어른이었는데 호기심에 괜히 더 자극했다가는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근데.

내가 왜 여기에.

" 어, 그때 그 전화.. "

네, 접니다. 제가 그때 그 전화 범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에.

사건의 전말은 대충 이랬다.

어제 통화 기록을 한참 노려보던 규만은 갑자기 옷을 챙겨입고 노란 우산 하나만 들고 집을 나갔다. 문자로는 카페24. 투명 우산. 달랑 두 단어만 남겨놓고. 어디 호텔이라도 간 건지, 아니면 집을 들어간 건지 그거라도 알려주지 이게 뭐야. 성룡은 어제 문자를 받고 들었던 생각 그대로 여기 앉아있다.

이게 뭐야...

강두는 규만에게서 성룡과 같은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더불어 전화는 김성룡이 한 거니까 이번 일로 지랄하지 말라는 문자도 받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김성룡이 누군데. 규만의 말도 안 되는 대화 수준에 강두가 벽에 머리를 쿵, 쿵 박았다. 옆방에서 쾅, 하고 조용히 하라는 타박을 받고서야 가만히 머리를 붙이고 그 짧은 문자를 밤새 읽었다.

근데 한 눈에 알아봤다. 짧아서 삐죽 솟은 노란 머리, 밝은 갈색 눈동자, 장난기가 잡아올린 입꼬리. 무엇하나 규만과 비슷한 점 없지만 똑닮은 얼굴. 저 사람이 김성룡이구나. 그랬다. 그날, 데리러 왔던 사람. 규만을 챙겨주는 사람. 어색하게 맞은 편에 앉은 강두는 작게 목을 가다듬고 입을 뗐다.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네~

너무 멀리 와버렸다네~

뭐, 뭐야 이 노래.

강두가 머쓱하게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성룡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급하게 전화를 받자마자 가시를 잔뜩 세운 목소리가 꽂혔다. 뭐지. 나 어제도 이랬던 것 같은데 기분탓인가. 입 뗄 틈도 안 주고 혼자서 뭐라고 주절주절. 바람이니 뭐니, 진짜 뒤지고 싶냐느니. 연인 사이에서 나오기 어려운 단어들만 쏙쏙 골라 뱉는 것도 재능이었다. 강두가 곤란한 표정의 성룡을 보다가 무던한 얼굴로 보이스피싱? 줘봐요. 하고 손을 뻗었다. 괜찮다며 손을 저은 성룡의 귓가에 웅웅 울려대는 전화 너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겹쳤다.

" 엉? "

" 너 뭐하냐? "

그건 내가 묻고싶은 말인데.

성룡의 휴대폰을 향해 뻗었던 강두의 손이 돌아오길 늦어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서율은 휘적휘적 그 손을 밀어내고 성룡에게 버럭 일침을 날렸다.

" 야이씨, 너는 무슨 애가 전화는 안 받지, 문자도 씹고, 찾아갔더니 없고! 장난 하냐? "

얼마나 열변을 토하는지. 손가락까지 하나하나 접어가며 화를 꾹 눌러담아 말했다. 그러니까 서율의 말을 정리하자면 내가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고. 집에도 없고. 이사님 의부증이야? 큰소리에 잔뜩 놀란 표정을 짓는 성룡에 강두가 상황을 살피다가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자고로 이강두란 인간은 가뜩이나 팍팍한 인생에서 사랑놀음까지 하는 취미는 두지 않은 데다가 썸이니 뭐니 했던 여자와도 이젠 친구 사이로 지낸 지가 벌써 몇 년이었다. 짧게 말하면 이게 사랑 싸움이란 걸 눈치 못 챘다는 뜻이다. 만약 강두가 변명한다면 누가 봐도 커플 안 같은 니네 탓. 이라고 할 테다. 제 3자가 보기로서니 저건 커플보단 웬수에 가까웠던 것 같다.

" 아, 그만 좀 하지? 전 남친인지 뭔지 여기서 이러는 거 안 구질거려? 나만 구려 보이나, 이 상황이? "

" 자, 잠깐. 무슨 오해를 하는 거예요?! "

주먹을 꽉 쥔 강두를 성룡이 진정시켰고 서율은.. 말을 아끼겠다. 대충 오해스러운 상황은 잘 알겠다. 근데 거기서 강두까지 아주 쿵짝을 맞췄으니 서율에겐 더없이 화나는 상황이고 성룡 입장에선 크게 당황스러웠다. 하필이면 주변에 소개팅 하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이건 뭐, 아주 오해하라고 판을 깔아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서율 하나로도 싸가지는 충분한데 남규만 플러스 이강두. 무슨 원 플러스 원처럼 싸가지 하나 챙겼더니 한 개 더. 사장님 인심이 너무 후해요. 성룡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줄줄이 해명을 시작했다. 사람들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이쪽은 이강두 씨.

제 동생.. 친구? 고요.

이쪽은 서율.

제 전 직장 상사에요.

" 애인. "

" 응, 사실 애인이에요. "

성룡의 더딘 정리가 탐탁치 않았는지 서율이 즉각 반응했다. 성룡은 화끈하게 한 단어로 사이를 정리한 서율을 보다가 마지못해 웃었다. 어려서 그런가 거침이 없네. 서율의 그 한 단어가 얼마나 단호했냐면. '전 직장 상사' 에 빨간 줄로 엑스자 찍찍 긋고 형광펜으로 '애인' 이라는 단어에 별표 세 개 수준이었다. 누가 예전에 학교에서 문과 1등 먹은 놈 아니랄까 봐 요약을 정~말 잘하시네요.

" 하하, 하... 이런 거에 편견 없죠? "

" 예, 뭐. 애인? "

" 그렇죠, 네. 뭐... "

" 좋겠네. "

" 아직 몇 달 되지도 않았어요~ "

" ...더 좋네. "

성룡이 아무말이나 하는 자신을 국자로 내리치는 상상을 했다. 입이 자유분방하구나 성룡아. 그런데 옆에서 어쩐지 뿌듯한 표정의 서율을 보자마자 뒷목이 확 당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성룡이 힘주어 흰 운동화를 콱 밟았다.

" 아!! 이게, 씨... "

"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요, 나가! "

허. 뭐야. 연애하면 다 저래?

강두가 가만히 앉아 턱을 괬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콩트 같은 싸움을 구경하다가 시선을 떨궜다.

규만과 똑닮은 얼굴.

우스꽝스럽게 눈썹을 들썩이고, 눈을 크게 뜨고. 웃고, 화내고, 당황하고. 그런 얼굴에서 강두는 규만의 짜증스럽게 모은 눈썹, 생기 없는 눈동자, 애처럼 화난 표정 같은 걸 떠올렸다. 걔도 저런 표정 지을 줄 알려나 모르겠네. 가끔은 막, 윙크도 하던데.

궁금해. 웃는 얼굴.

한숨을 내쉰 강두가 카페에서 카페 밖 길거리까지 이어진 커플 염장 싸움을 지켜보다가 테이블에 고스란히 놓인 성룡의 휴대폰을 눈치채고 일어섰다. 가져다 줄 생각으로 뻗은 손이 진동 소리를 내며 켜진 화면에 멈칫했다.

강두는 테이블 옆에 놓인 투명 우산을 챙겼다.

카페 문이 딸랑. 방울 소리를 내며 열렸고 둘은 아직도.. 강두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다가갔다.

" 저기요. "

그 말에 성룡의 동그란 눈이 한 번, 옆에 선 서율의 매서운 눈초리가 한 번. 강두를 빤히 쳐다봤다.

" 남규만 어디 갔는지 혹시 알아요? "

" 아마 호텔.. "

" 넌 싸우는 와중에도 대답이 나오냐? 짜치게.. "

" 먹소 가만 있어 봐. "

또 둘이서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강두가 흐린 눈을 했다.

" 모르면 말고. "

" 그리고 그쪽. 카페 테이블에 휴대폰 챙겨요. "

강두의 말을 듣고 뒤통수에 대고 고마워요~ 하고 인사하던 성룡이 잔뜩 심통난 서율의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왜. 몇 달 사귀고 보니 어린 놈이 당기든? "

" 미쳤어요? 어린 놈이 뭔, 나이 타령은. "

" 야, 애 취급 좀 그만, 읍. "

" 조용히 좀 해요! "

성룡이 손바닥을 서율의 입술 위로 겹쳤다. 서율이 말랑하고 따듯한 감촉에 눈을 찡그리고 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본인보다 한참 작은 손을 살포시 잡아 떼고는.

" 우리도 호텔이나 가자, 성룡아. "

" 네? "

" 내가 내연남, 불륜남 다 해줄게. 바람피우지 마. "

" 이사님. 일 때문에 못 쉬더니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

아오씨. 다리 저려.

강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연락을 하면 받지 않을 게 뻔해서 규만을 찾으려 호텔 수십 개쯤은 돌아다닌 것 같다. 그러게 왜 아까 호텔 이름만 딱 안 보여서는. 테이블 위에서 알림 때문에 환하게 켜지던 성룡의 휴대폰. 동생이라 적힌 이름 아래로 호실 숫자가 적힌 문자 내용이 보였다. 하필이면 다 보기도 전에 다른 알림이 떠서. 강두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헝클였다. 온갖 호텔의 701호에서 겪은 고난과 버스에 수십 번 찍힌 카드, 여기까지 급하게 오느라 탄 택시비까지 생각하면 남규만 앞으로 청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적당히 주워 입은 옷이 민망할 정도로 화려한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여 멈춰서서 어? 감탄사를 뱉었다.

" 강두?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

" 누나야말로. 설마 이런 호텔까지 출장, 뭐 그런거? "

" 얘도 참. 알면서 묻는구나? "

" 어? "

" 응? "

" 아니? 모른다니까. "

마리가 부드럽게 웃고 말을 이어갔다.

" 남녀 한 쌍이 호텔에 와서 뭐하겠니? "

뭐, 뭣. 뭘 하는데.

" 그럼 넌? 뭐 하러 왔어? "

" 나야, 뭐. 돈 벌러 왔지. 알잖아. 나 돈 되는 건 다 하는 거. "

틀린 말은 아니다. 택시비 청구할 거니까.

" 흠~ 내가 봤을 땐 돈 벌러 온 눈이 아닌데? 나 알지. 눈만 봐도 딱, 아는 거. "

" 누나가 뭔 독심술사야? 알긴 뭘 알어. 우리 누나도 이제 한물가셨네. "

" 누나 아직 팔팔하다? "

" 어련하시겠어. 아, 빨리 가기나 해. 손님 기다리겠네. "

마리가 의심을 거두지 않고 흥미롭게 웃으며 강두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시간을 보더니 붉은 네일이 된 손톱으로 휴대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 강두 너도 사람 너무 기다리게는 하지 마. "

" 기다려도 찾는 사람이 기다리지. 어디 가버린 사람이 뭘 기다려. "

" 잘 모르는구나. "

마리가 방긋 웃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고 자리를 떠났다. 무식해서 한자도 못 읽고, 넥타이 매는 법도 모르는데 그렇게 복잡한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아냐. 말을 해줘야 알지. 사람 마음이란 게 평생을 내 것도 모르고 검색을 해볼 수도 없는 건데. 툭하면 화내고 욕하고 나쁜 짓만 골라하는 단순한 놈 마음까지도 모르는 게 좀 억울했다. 지 팔자 지가 꼬는 놈이 왜 남의 팔자까지 꼬는 건데.

그나저나 1701호면 17층인가? 존나 높기도 하지.

강두는 17층 바로 앞 계단을 앞두고 잠시 망설였다. 가봤자 문 안 열어주면 퇴짜 맞는 거고. 여기가 아닐 수도 있는 건데. 그리고 내가 뭣하러 그 새끼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똥을 치워? 뒷바라지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왜? 한참을 한 칸 올라갔다 두 칸 내려왔다, 또 세 칸 올라가고. 그래. 가서 딱 한 번만 두들겨 보고 안 나오면 가는 거야. 강두는 불편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아까부터 기름칠 좀 해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솔직히 지금은 이게 좀 나았다. 정신차릴 만큼 아파야 제정신으로 7층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중에 할멈한테 뜸이나 들여달라고 하지, 뭐. 찌릿찌릿. 정전기가 통하는 거처럼 따끔거리다가 쑤시고. 죽겠다, 진짜.

17층 복도에 들어서자 쭉 늘어선 단조로운 문들이 보였다.

1701호.

가장 맨 끝에 있는 방이다.

하필이면 이런 데는 또 복도가 길어서 생각이 계속 복잡하게 엉켰다. 남규만. 남규만. 남규만. 형량 다 채우지도 않고 나왔을 때 뭐라 그랬더라. 인생이 원래 이래 이 새끼야? 아니지. 내가 그럼 너처럼 거지같이 살까 봐? 아니다. 다 했던 말은 맞는데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욕을 퍼부었던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던가. 더 엿 같은 말이었는데.

넌 내가 그렇게 싫냐?

순간 떠오른 장면에 강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다 아님 싫다인데.

당연히 싫지.

진짜 지밖에 모르는 오만한 새끼.

강두는 그 오만함이 언젠가 숨통을 조일 거라고. 반드시 스스로 만든 칼에 찔려 죽을 때가 올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애꿎은 1701호 문패를 노려봤다. 별나다 별나. 이런 걸 고급지게 만들어서 얻다 쓰냐. 괜히 그런 생각이나 하고 문 앞에서 그때처럼 손만 쥐락펴락했다. 노크하는 법 몰라? 누군가 머릿속에서 그렇게 외쳤지만 몇 분을 또 꼼지락거리다가. 카트를 끌고 지나가는 벨보이가 대신 불러드릴까요, 하고 친절을 베푸는 바람에 단호하게 거절하고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일부러 작게 두드리는 건 성미에 맞질 않아서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조용한 모양새에 강두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생각해보면 찾겠다고 나선 것도 본인이고 여기가 서울의 마지막 호텔인 것도 아닌데 지금 와서 뭐하나 싶었다. 몸을 돌려 다시 계단으로 향하려는데.

그때 문이 열렸다.

" 왔으면 왔다고 말을.. "

" .....어. 왔어. "

" 씨발, 뭐야. "

너나 나나 참.

타이밍 한 번 더럽게 안 맞아, 그치?

- epilog -

" 헉. "

" 왜. "

" 규만이한테 연락 왔었는데 이제 봤어요.. "

" 잘됐네. "

" 뭐가 잘돼? "

" 어디 잡혀 들어갔대? "

" 아뇨. 옷 가져다 달라고. "

" 그 새끼, 아니 걔가 알아서 잘 하겠지. 다 큰 어른인데. "

" 진작 봤으면 아까 알려주는 건데! 이게 다 이사님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너때매!! "

" 아. 성룡아. "

" 왜요! 뭐요! "

" 너 이거, 목에 자국 일주일은 가겠다. "

" 도움이 안돼 진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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