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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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브를 만나기 전 아스타리온이 카사도르에게 바칠 사냥감을 꼬시며 과거를 회상합니다.
'아가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아가씨의 남자 친구 아니 포주는 이미 죽었잖아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해서, 빚을 못 갚아 당신까지 팔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해서. 그 사람들이 당신을 살려준 건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라 당신 몸으로 수익을 내야 하니까 그런 거고.'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중 가장 선명한 그의 과거 직업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날의 기억만은 선명, 아니 제법 선명했다. 그는 항상 명예로운 길을 걷길 소망했다. 물론 그의 삶은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는 항상 몸을 팔아 위로 올라가는 남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실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그의 야심만만한 행보가 제법 정체되어 있었다.
그기 죽기 전 애인인 청새치 선단의 선장 때문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어지간하면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일이 없었지만 그와는 꽤 오래 사귀고 있었다. 물론 그의 돈 때문이었다. 십장 자리에도 벌벌 떨던 마르셀라와 달리 남자는 아스타리온에게 돈을 턱턱 썼다. 그가 가지고 싶다고 했던 반짝 반짝 빛나는 신발, 섬세한 자수가 놓여 있는 보라색 튜닉 그리고.
"안쿠닌씨의 발더스 게이트에 대한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자신과 똑같이 화려한 자수가 놓인 남자가 그의 손을 악수하며 웃었다. 남자는 그에게 가죽으로 장정된 문서를 전달했다. '발더스 게이트의 치안판사 아스타리온 안쿠닌씨'라고 써 있는 문서에는 그가 치안판사로서 지켜야 하는 임무와 그가 받을 수 있는 수익, 그리고 그의 명예를 칭송하는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그가 받을 수 있는 수익이 적혀 있긴 했지만 치안판사는 사실상 명예직이었다. 치안 판사는 법정까지 가기 애매한 잡범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직업으로, 보수는 잡범들이 내는 벌금의 일부분이었다. 일부분이라도 해도 수익률이 형편없었고, 이런 류의 잡범이 그렇듯 벌금을 잘 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잡범이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단, 화끈하게 몸으로 때우는 것을 더 바랬다. 그래서 치안판사의 재정상태는 항상 적자였다. 다만 이 직업을 굳이 돈까지 주고 사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이 직업을 통해 정치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발더스게이트에서 뜨내기가 소위 출세를 하려면 이 길이 최선이지. 다른 길은 학벌이라도 있던가 아니면 집안이 좋던가 해야하니까. 하지만 치안판사는 돈만 있으면 되거든"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요구를 하긴 했다. 그에게 비싼 신발을 사달라고 했고, 나도 그의 직장에 나가고 싶다고-그럴 듯한 직업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주제를 알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펫을 귀여워하지만 펫이 자신의 식탁을 침범하면 바로 몽둥이가 날아오는 법이다. 그는 되바라진 고양이였지만 경험을 통해 식탁이 어디인지는 알았다.
"그냥 선단에서 장부만 작성해서 되겠어? 사람들은 그냥 뱃사람일 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아도 그냥 사무실에 의자 하나 가져다 놓고 무슨무슨 회사라고 하기만 해도. 그 사람이 어느 집안 출신인지, 학교는 어딜 나왔는지 누구랑 결혼했는지 시시콜콜하게 따진다고."
침대에서 가슴팍을 훤히 드러내고 듣기에는 너무나 따가운 발언이었다. 아스타리온은 남자의 말에 처음으로 얼굴에 벌개졌다. 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었다. 그는 남자의 애완동물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제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데 왜 굳이 자신의 별볼일 없는 정체를 다시 끄집어 내려는 걸까? 그는 무례한 말을 한 그의 애인을 벌주려했지만 너무나 비참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등뒤를 파고드는 남자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안아주지도 못한 채 하룻 밤을 보낸 뒤 남자와 그가 함께 간 곳은 발더스 게이트의 의회였다. 그리고 오늘 그는 생각지도 않은 증서를 받았다.
"몇번 배를 깨먹었지만 그럭저럭 돈을 모아서 회사 비스무리한 걸 세울 수 있었을 때, 나도 치안판사 일을 했어. 아무리 돈을 모아도 그냥 뱃사람이여선 여기서 인정 받지 못해. 그리고 저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정말 돈 되는 일도 받을 수 없어."
아스타리온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거액을 투자한 남자는 자신과 달리 볼품없는 린넨 튜닉을 입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와 마찬가지로 머리는 벗겨져 있었고 그나마 남은 머리카락은 다 세어 있었다. 그는 키는 컸지만 자세는 엉거주춤하여 볼품이 없었다. 그는 그냥 그였다. 그가 만나왔던 수많은 사람 중에 그저 하나인 평범한 남자.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남자는 익숙하게 그의 등을 껴안아주었다.
"아스타리온 내가 죽으면."
아스타리온이 흠칫했다.
"네가 내 뒤를 이었으면 좋겠어. 너는 가벼워보이지만 생각보다 꼼꼼하고, 용감하고 모험심 있는 사람이야. 청새치 선단에 딱 맞는 인물이지. 그리고 나는 네가 따뜻한 사람이란 것도 알아. 우리 회사를 청소하는 미라씨에게 하대하지 않는건 네가 유일했지."
아스타리온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 볼품 없는 남자는 자기가 뭐라고
"너는 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야. 거기서 도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건."
스벤이 아스타리온이 받은 증서를 흔들었다.
"네 가치에 비하면 너무 작은 자리야. 너는 꼭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나는..."
남자가 갑자기 아스타리온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잠시 아스타리온의 어깨를 잡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네 발판이 되줄께. 그러니 편히 나를 딛고 올라가."
남자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아스타리온을 쳐다봤다. 그의 파란 눈이 차분한 하늘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남자는 그를 다시 껴안았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그가 진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결코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을 300골드에 팔았지만, 여자는 그가 주는 싸구려 에일에 자신을 팔았다. 그저 에일 한잔에 여자는 자신의 얘기를 술술 말했다. 아스타리온은 여자의 이름이 티니엘이고, 얼마 전에 가출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엄마는 나를 싫어했어요."
그녀는 가출하기 전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식구들의 빨래는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물가가 얼마나 멀었는지 토로했다.
"우리집은 시골이라 근처에 제대로 된 우물도 없었거든요. 1시간을 걸어야 겨우 냇가가 나왔죠."
그리곤 물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물에 젖은 빨래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등 그가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계속해서 말했다. 아스타리온은 그녀에게 에일을 권했다. 한 잔 두 잔...사냥감이 취해야 사냥이 손쉬운 법이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니까 엄마가 양말 한 짝을 잊어버렸다고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날 막 때리는 거예요. 이 쓸모 없는 녀석 당장 나가! 맨날 하는 소리였지만 그 때 나는 정말 나갔죠. 손에 땡전 한 푼 없었어요."
순간 그는 잊고 살았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기억속에서도 어머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티니엘은 부지깽이로 얻어맞았지만 자신은 맨손으로 얻어맞았다. 그 때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때린 이유가 돈을 훔쳐서 였다는 걸 생각해냈다. 그는 훔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랬다고 믿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몇 살이었지? 나도 이 여자처럼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했나?
"그래도 아담은 저를 사랑했어요. 유일하게 나를 구해준 사람이었고요.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나는 추운 발더스 게이트 길바닥에서 얼어죽었을 거예요!"
'티니엘, 발더스 게이트는 겨울에도 따뜻해서 노숙한다고 얼어죽지 않아...'
왜냐면 내가 해봤거든. 아스타리온은 언젠가 노숙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던가? 역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폰이 된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다 뿌옇고 흐릴 뿐이다. 그는 심지어 어제 있었던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은 티니엘과 사랑을 속삭이지만 내일이 되면 이것도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과 자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이 있었나? 사랑도 사람도 그저 그를 통과해 지나갈 뿐이다.
'사랑해.'
"당신은 정말 귀엽네요. 여기가 새빨개졌네. 그 사람을 위해서 울어준 거예요?"
아스타리온은 티니엘의 붉어진 눈가를 만졌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다른 말히 흘러나왔다.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이 술술 통과해나가는 그의 입에서 사랑만이 걸러져 나오지 않았다. 마치 한조각 남은 자존심처럼 말이다. 하지만 티니엘은 그가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티니엘의 눈가를 문지르는 그의 손이 축축해졌다.
"저 저는..."
티니엘의 눈이 커지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반짝였다. 주변이 어두우니 오히려 눈동자의 반짝임이 잘 보였다. 흐릿한 불빛은 오히려 반짝임을 수천의 결로 나누었다. 그는 먼 발치에서 보았던 다이아몬드를 떠올렸다. 흘러넘친 눈물이 수천의 반짝임을 깨트렸다.
"사,사실 그는 죽었어요. 어제 우린 거래처를 만났거든요."
거래처? 빚쟁이란 표현이 더 알맞지 않을까?아스타리온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물어볼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는 너무나 쉽게 술술 말해버렸다. 이런 사람은 발더스게이트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그가 아니어도 그녀는 결국 누군가의 사냥감이 되어 희생당할 것이다. 그녀의 남친 아니 전남친조차 그녀를 사냥했을 뿐이었다. 그가 아니어도 그녀는 결국 비참한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녀는 그녀는...
"우리 물건은 좋았는데 거래처는 우리 물건이 별로라고 했어요.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리고 그는...여러가지 딜을 하려고 했지만 잘 안됐어요. 그이가 이틀만 시간을 더 달라고 했는데, 자기가 큰 건을 잡았다고 하면서. 근데 그 사람들이 듣질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그이의 목을쳤어요."
티니엘은 솔직한 거짓말쟁이였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을 빚쟁이에게 팔아먹으려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친구가 이미 물고기밥이 된 이후에도 그의 명예를 지켜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솔직해서 거짓말 하는 것이 다 티가 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고, 탁자 위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능숙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달링, 걱정말아요. 그 사람들은 지금 없고 여기 내가 있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아스타리온은 입에 침도 안바르고 느끼한, 입에 발린 소리를 쏟아냈다. 그러나 그 공허한 말에도 티니엘은 몸을 떨면서 그를 꼭 껴안았다. 그는 그 때 그의 머리 숱이 많이 부족했던 연인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그가 그가 판결을 내린 잡범이 광장에서 목이 잘리는 모습을 보며 환호할 때, 그의 안전을 유일하게 걱정해줬던 남자를.
'너는 좋은 사람이야.'
'아니요.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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