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Hindsight

[타브게일][발더스게이트3][커미션]

엘리시움, 신들의 공간인 그곳에서 지진같은 파동이 어디선가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악신이 태어나면 으레 그런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악신끼리는 서로의 영역을 가지고 다투고, 경쟁하며, 어떻게든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려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선신이나 중립 성향의 신에게도 종종 있는 법이었으나, 악신끼리는 확실히 더 격하게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악신이 태어나면 다른 악신들은 이 새로운 신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처음부터 적대할지, 천천히 꼬드기다 배반할지, 제 자신과 힘을 합쳐 다른 악신을 견제할지 등 여러가지 계략을 떠올리고 실행하느라 바빴다. 즉, 이런 상황 자체는 그리 놀라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야망의 신은 이런 파동이, 꿈결같은 하늘에 가끔씩 퍼져나오는 어두운 파동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망의 신이 의아해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어째서 제 연인이 악신이 되었단 말인가? 그의 반려는 신앙심도 강하고 헌신적인 헌신의 맹세를 한 팔라딘이었다. 인간이었던 그가-지금 생각해보면 나약해빠지고 하찮은 시절이어서 그는 그 당시를 반추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쨌건 연인이 왜 저렇게 변했는지 알고 싶었으므로 그는 별 수 없이 당시 상황을 떠올려야 할 수밖에 없었다-비전 허기에 시달릴때마다 연인은 꼬박꼬박 그가 위브를 섭취할 수 있게 강력한 마법이 걸린 유물을 건네주었다. 고블린 사차를 죽이려는 티플링들을 가로막을 정도로 심지가 곧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쳐 죽어가던 그가 염려되어 기스양키를 공격하여 맹세가 깨짐에도 그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 착오라 하였고,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한 다음에는 계속, 본연의 찬란한 신성한 빛이 아닌 어둠이 스멀스멀 영혼에 둘러와도, 그의 연인은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괜찮다며 비난과 비판은 그저 달게 받아들이겠다고만 했다. 상실감에 작게 손을 떨면서도 그렇게 의연하게 답하던 스칼렛이었다.

그랬던 스칼렛이 왜 악신이 되었단 것인가? 그가 치온타 강에서 왕관을 찾고 승천했다가 재회한 6개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렇게나 경천동지할 만한, 나쁜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인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 받았겠지, 대체 왜?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필멸자였던 시절에도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연인의 영역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 쪽으로 떠올라서 순간이동하였다. 발걸음이라니, 이제 땅에 닿을 일이 없는데, 예전 인간일 때나 쓰던 표현이었다.

“스칼렛.”

완전한 어둠밖에 없는 공간에 야망의 신은 두 가지 이유로 경악했다. 첫 번째, 너무나 아름답지 않았다. 섀도우펠은 모든 생명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그 나름의 공허하고 황량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여기는 그저 어둠 뿐이었다. 제 몸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저 칠흙같이 새카만 어둠뿐이었을 것이다. 샤의 영향력이 증폭된 저주받은 마을에서는 허무함과 생명에 대한 적의가 느껴졌지만 어둠에 갇힌 그곳에서 붉은 잎을 흔드는 나무와 캄캄한 하늘의 대비, 푸르게 빛나는 그림자 뿌리낭에서는 스산한 조형미가 있었다. 그런 서늘한 아름다움 역시 이 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뼛속깊은 증오와 원망으로 빽빽하게 차 있어, 공허와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두 번째, 어째서 이런 곳이 제 연인의 본성을 형상화한 것인지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필멸자 스칼렛은 지쳐 보였다. 연인은 지치고 피곤하고, 조금 허탈해 보이긴 했으나, 필멸자는 으레 그런 것 아니었는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호들갑을 떨며 목숨이 걸린 듯 집착하였다. 신은 아무거나 할 수 있고 아무거나 될 수 있는데, 어째서? 행복하지 않았단 말인가? 엘리시움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그나마 미소를 짓던 연인의 표정을 기억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연인이 나타났다.

“야망의 신.”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무엇이 말이야.”

“이…. 모든 것 말이야. 납득이 되지 않는군.”

흰 머리카락은 이전과 같았으나, 다른 모든 것이 달랐다. 어둠 속에서 한 쌍의 흰 눈과 희게 빛나는 호랑이같은 문신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검은 피부, 아니 저것을 피부라 할 수 있었나? 검은 형상에선 어둠이 역청처럼 방울져서 떠올랐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며 일렁였다.

“뭐가 또 그렇게 납득이 안 될까. 그 좋은 머리로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어?”

“네 야망이 이해되지 않는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지? 정확히 내게 보여주기만 한다면 나는 너를 도울 수 있는데, 현재는 잘 파악이-”

“도움? 도움? 네가 날 도운다고?” 방울져서 일렁이던 어둠이 멈췄다. “명확히 하지, 게일. 네가 야망의 신이 된 것은 내가 맹세에 얽메이지 않고 순수하게 너에게 헌신을 했기 때문이었어. 그게 아니었다면 너는 그저 오만한 워터딥의 위저드로 길거리에 널부러져 죽었겠지. 아, 그러면서 주변의, 뭐라고 했더라?” 명확한 조롱조로 말을 내뱉는 연인의 말투에는 짙은 혐오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 그래! 워터딥 정도 크기의 공간을 날려버리고 말이야. 하하! 누가 누구를 도왔다는 건지 모르겠네. 네가 내 야망을 알고 싶다고?”

“그렇….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사랑? 6개월 동안 나를 내버려두고, 내가 어떻게 되든 말든 네 야망을 쫓아 간 것이 사랑인가? 참 대단한 사랑이군. 나는 네게 헌신했고 승천을 하면서 너의 야망을 이해했으니, 너는 앞으로 그 전능한 힘으로 빚어낸 나의 원망과 분노를 받아들여야 할거야.”

“원망과 분노의 신인가, 그렇다면 호어나 탈로스-”

“닥쳐봐, 넌 언제나 너무 말이 많았어, 야망의 신.” 연인은 신이라는 단어, 마치 모욕적인 단어를 내뱉듯 발음하고 있었다. “내 헌신은, 너를 위한 헌신은 네가 신이 되는 순간 헌신짝처럼 버려졌지. 그래서 헌신이라 하나? 하하!” 스칼렛은 한참이나 깔깔대며 웃었다. “대체 내게 남은 게 무엇이 있었지? 언더다크에 가자마자 사람들은 나를 맹세파기자라 조롱했어. 내 가문의 사람들마저! 맹세파기자 팔라딘이 올 곳은 없다,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 롤스는 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재미도 없고 유용하지도 않거든, 하면서 나를 내 고향에서 쫓아냈어!”

“하지만 이제 네 고향은 엘리시움이야, 그러니-”

“닥치라고 했지. 내 집을 잃었어. 나는 부평초처럼, 뿌리를 내릴 곳이 없었다. 그래서 발더스 게이트로 돌아왔지. 나는 여기가 파괴되지 않게 지켜냈으니 사람들이, 나를 반기지 않을까, 나는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이니까 하면서. 재건을 도우러 갔다.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롤스 스원 드로우라며, 저주받은 붉은 눈이라고 돌을 던지더라고? 거기서 내가 뭘 해야 했나? 사람들은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이 존재한다는 줄은 알았지, 그러나 언더다크의 드로우일줄은 몰랐어. 내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고.”

“나는 네 붉은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마치 루비처럼-”

“닥쳐!” 어둠이 사납게 일렁였다. “칭찬도 동정도 받고 싶지 않아. 그런 건 애저녁에 했어야 하지 않았어? 응? 내가 혼자, 아무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갈 곳이 없었을 때 너는 뭘 하고 있었지? 아! 맞다, 엘리시움에서 즐겁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네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어. 이게 네가 말하던 책임감 있는 태도인가? 너와 정착하여 아이를 낳지 않아서 다행이군, 게일 데카리오스, 너는 그 애도, 나도 떠넘기고 네가 좋아하는 것에만 몰입했을 테니까.”

“절대 그럴일-”

“내 헌신은 쓸모가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지. 나는…. 나는 대체 뭘 위해서 그 오랜 시간동안, 명예를 지키며 남들의 귀감이 되려고 노력한 걸까? 내 연인은 나를 6개월동안 버려두고 방치했다. 나는 발더스 게이트를 구원했으나 나를 받아들이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래, ‘위더스’가 초대한 연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지쳐 있었지. 나는 너를 돌보고 싶었어. 너는 처음에는 유물 때문에 위태로워 보였고, 나는 널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쏟은 노력은 네 방치로 돌아왔다. 6개월 후에 날 기억해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연인은 한참동안 웃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고마워. 그건 고맙다, 야망의 신. 내가 쏟은 노력, 내 시간과 기력을 쏟아부은 페이룬더러 ‘따분하다’라고 했을 때 내 마음 속에 뭔가가 끊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열심히 뭐라도 해본 것의 성과는 단지 그뿐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자알 알려줬으니 말이야. 내게 남은 것은 너밖에 없었어. 네가 내 동앗줄이자 구원의 유일한 손길이었다.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너와 행복하게 엘리시움에서…. 그런데 말이야.” 일렁이는 어둠이 갑자기, 야망의 신의 코앞으로 다가와 이죽거렸다. “승천하는 그 순간 나는 무엇을 느꼈는지 알아? 쌓아있던 원망, 분노. 나를 방치하고 내 모든 삶을 부정하는 이 세상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원망과 분노였다. 내 필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하찮았는지, 남에게 열정을 퍼붓었는데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은 떠돌이 개같은 삶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할 수 있더군.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다.”

“신이 되어서 행복하지 않아?” 야망의 신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사하다니, 무슨 말인가? 모순이 있었다. “나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이야. 어째서 화가 나지?”

스칼렛은 답하지 않았다. “짧다면 짧은 삶이었으나 나는 모든 것을 바쳤다. 내 목숨, 내 열망, 내 맹세까지도….” 회한이 쌓인 목소리가 잠시 작아들었다. 야망의 신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악신이 된 지금도 늦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신들은 영역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고, 켈렘보르처럼 성향이 변화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는 제 손을 들어 연인이었던 이의 뺨을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둠은 그에게서 진저리치며 훅, 하고 뒤로 떠났다.

“뭐 하는 짓이지? 같잖은 야망? 희망이라도 주입하고 싶은가.” 서릿발같은 목소리가 둘을 둘러싼 공간에서 뿜어져나왔다.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 상태로 계속 존재할 것이야.” 악의가득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제 연인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너는 야망이 되었다, 게일 데카리오스.”

“스칼렛, 나는-”

“나는 더 이상 스칼렛이 아니다. 나는 원망과 분노야. 영원히 함께하자며 지친 내게 손을 내밀었지, 게일.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영원히 함께할 것이야.” 어린아이가 노래부르듯, 유쾌한 어조로 악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원하던 바가 아닌가? 나는 네 야망에 희생당한 헌신, 냉대받은 보살핌, 네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이 마음 편하게도 잊어버린 모든 자들의 원망과 분노가 될 테니까. 이제 네 공간으로 가버려라.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보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알겠지? 네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인을 보러 와주신다는데 내가 기다려 드려야지.”

허망한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게일은 제 몸이 훅 하고 뒤로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다시 제 영역에 있었다. 아름다운 빛이 어우러지는 공간, 저 멀리에서 어둠의 파동이 평소보다 격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그의 공간에서 야망의 신은 작게 혼잣말을 했다. “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지? 모든 건 완벽했어. 6개월을 기다리지 못한 건가? 왜 저렇게 비틀려버린 거지?” 야망이 있으면 성취하면 된다. 그게 그의 힘의 원동력이었고, 그는 연인에게 제 힘을 나눠줄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저, 제 연인이 승천하고 나서 환경이 바뀌니 적응하지 못한 임시적 상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언젠가 연인은 자신을 찾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위더스’의 연회에서 그랬듯 선뜻 손을 내밀 것이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야망의 신은 제 신전이 완성된 테이로 관심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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