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의 종소리
아스티는 굳이 왜 케이크를 꼭 집에서 손수 함께 만들자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온화한 자신의 연인은 가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 반드시 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고는 했다. 이맘때쯤 사람들이 유난을 부리는 것엔 익숙했다. 어떻게 익숙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11월이 되자마자 카페란 카페에서는 캐롤이 들려왔다. 밤에 위스키나 그가 좋아하는 데운 일본주를 아주 조금씩 마시며 밀렵꾼들의 움직임이나 흔적에 대해 상세히 적은 보고서를 읽다 머리가 지끈거려 밖을 바라보면, 도심은 겨울 밤의 어둠을 휘황찬란하고 알록달록한 빛으로 퇴치하겠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주행성인 인간에게는 당연히 어둠은 무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야행성인 동물들에게 어둠과 어둠이 있어야만 보이는 달과 별은 주요한 길잡이며 삶의 일부였다. 그것을 인간이 뺏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인에게 그러니까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해, 이렇게 야박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와스큐란은 사랑스럽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고 싶어서, 이걸 찾아봤는데 어때요?” 병원에서 근무하는 제 연인은 종종 바빴다. 며칠 전, 흔치 않은 오프날에 같이 하고 싶은 게 있다는 연락에 연인의 집에 들어선 아스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날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끽해봤자 느긋하게 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려나 싶었지만 연인이 보여준 것은 중고 물품 거래 어플에서 찾은, 재생 플라스틱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판매자와 만나서 해체된 트리가 들어있는 커다란 박스를 들고 집까지 다시 돌아와 해체된 것을 하나하나 다시 조립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아직 장식이 없어 휑한 트리였지만 시선이 갈때마다 함께 조립하느라 열과 성을 다하던 기억이 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복층 원룸인 연인의 집은 자신의 것보다 뭔가, 여러가지가 많았다. 아스티는 그의 기준에서 ‘깔끔한’ 것을 좋아했다. 소비 자체에 큰 감흥이 없었고, 멸종위기 동물들을 치료하려 온갖 오지의 생활에 익숙해지니 가구를 많이 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래서 연인의 집에 가까이 이사했을 때에도 편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연인은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세상에, 아직도 이사차량이 안 왔나요?” 라고 물었다. 이것이 전부 다라고 하자 연인은 펄쩍 뛰며 사람 사는 집이 아닌 줄 알았다고, 어서 뭐라도 있어야 덜 휑해 보일 것이라고 가구를 들여놓아 달라고 부탁하더니 이것저것 사진을 보내주었고, 결국에는 제 돈으로 사겠다며 “당신이 그 집에 외롭게 있을 것 같아서 계속 신경 쓰여요.” 라고 하였다. 그렇게 밥상과 소파 등이 생겼다. 검은색과 흰색 위주 모노톤인 집에 오랜만에 새로운 것들이 생겼다.
연인의 집은 햇빛이 잘 들어왔다. 흰색과 화이트 우드의 인테리어 위주인 연인의 집은 아기자기한 것이 많았다. 둘의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부터 책꽂이, 아이비 덩굴이 자라는 벽걸이 화분, 작은 식물과 그림, 새장 모형의 조형물과 램프, 잘 정돈된 주방을 바라보다 보면 그는 참 화려한 곳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서인지 더욱 화려해진 연인의 집을 그는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 모든 소품들에는 짝이 생겨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새장 모형의 조형물 안에는 두 마리의 새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고, 화분 옆에는 작은 숫사슴과 암사슴 장식이 서로에게 의존하듯 기대는 모양새였다. 그림도 같은 작가가 그린 같은 테마의 그림 두개씩, 화분도 짝수로 되어 있었고 램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샌가 자신이 이 공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곳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 피부로 와닿았다. 마치 새로 난 이빨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연인의 시간과 일상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아니,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울컥하면서 따스해졌다. 그는 잠시 눈을 꾹 감고 심호흡을 한 다음, 뿌얘진 시야를 닦으려는 듯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연인의 집이 다시 선명해졌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붉은 리본과 숲에서 주워 온 침엽수 가지, 포인세티아로 이곳저곳 장식이 되어 있었다.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니 찰칵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한 때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두세달 전에라면, 그 소리에 움찔하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을 남자는 지금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구식 총기의 걸쇠가 풀리는 소리와 도어락이 자동으로 열리는 소리가 비슷하단 점은 삶의 거대한 아이러니 중 하나였다. 이제 그는 도어락 소리와 걸쇠 풀리는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저벅저벅 문으로 향했다.
“아스타리온, 퇴근했어요. 많이 기다렸나요?”
“아니, 방금 왔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신발을 벗으려 낑낑대고 다른쪽 팔로는 무언가가 잔뜩 든 갈색 종이백을 낀 채 손으로 벽을 짚으려 노력하는 제 연인에게서 종이백을 받아 주방에 올려놓고, 코트를 벗기 쉽게 그녀의 소매를 잡아주었다.
“아, 고마워요. 재료를 다 사놨다고 생각했는데, 바닐라 엑스트레가 다 떨어졌지 뭐예요, 어제 파스타를 해먹고 깜빡했는데 버터도 반만 남아서요, 그리고 선물이에요.” 그녀는 긴 분홍빛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종이백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갈색 병에 담긴 바닐라 엑스트레, 비싼 유기농 버터, 유기농 딸기가 나오더니 마지막으로 흰 작약과 포인세티아, 유칼립투스로 만든 꽃다발이 나왔다. “흰색 작약과 붉은색 포인세티아를 보니 떠올라서 사버렸어요. 그리고, 저번에 제가 사드린 꽃병 있죠? 거기에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곧 크리스마스니까 분위기도 냈으면 해서요.” 그의 연인이 그를 보며 환히 미소짓고 있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제 입술에 살포시 포개졌다가, 약간의 온기와 화이트 초콜렛향을 남기고 떨어졌다.
잘 구워진 스폰지케이크가 식는 동안 아스티가 열심히 휘핑한 크림은 파이핑 백에 들어갔고, 연인이 물에 설탕과 딸기 몇 알을 으깨 졸여 만든 시럽도 베이킹용 브러쉬에 잘 묻혀져 스폰지케이크 위에 발라져 있었다. 이제 케이크 틀에 넣고 장식할 차례였다.
“아스타리온, 이것 좀 잡아줘요.” 그의 연인은 케이크 틀을 건넸다. 그가 묵묵히 케이크 틀을 잡고 있는 동안 와스큐란은 바닐라와 설탕, 약간의 버터가 들어간 크림을 단정하게 테두리를 따라 그린 후 생딸기를 하나씩 그 위에 올렸다. 집중하는 연인이 귀여워 아스티는 생딸기 중 제일 큰 것을 자신의 입에 쏙 집어넣었다. “어머, 먹어버리면 어떡해요.” 짜증이 아니라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그를 타일렀다. “나중에 딸기가 부족하면 어쩌려고요. 많이 배고팠나요?” 새콤달콤한 딸기즙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아까 전에 샌드위치 먹었으니 괜찮습니다. 사오길 잘했지?”
“네, 스폰지케이크를 굽고 쉬는데 갑자기 너무 피곤하더라고요. 당신은 역시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 이야기 처음 듣는데요.”
“세상에, 지금까지 제가 그렇게 많이 속삭였는데 다 잊어버리신 건가요?”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티는 열심히 파이핑 백을 짜고 있는, 베이지색 앞치마를 입은 연인의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았다. 긴 머리카락이 제 목을 간질여서, 오늘따라 그녀의 향수가 마음에 들어서, 그 쪽에 4등분한 딸기 좀 가져다 달라며 재잘재잘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인지 보기 드물게 환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와스큐란은 크림을 얇게 펴바르고 그 위에 딸기 조각을 열심히 뿌린 후 사이사이를 크림으로 채우고 있었다. 아스티의 검지손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크림을 제 손끝으로 푹 뜨더니 그녀의 뺨에 묻혔다. 연인의 어깨가 웃음을 참으려 노력중인지 작게 흔들렸다. “안 놀아줘서 심심한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함께 먹을 건데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의 연인은 몸을 돌리더니 뺨에 묻은 크림을 콕 찍어 아스티의 코 끝에 묻혔다. “가끔 보면 어린애같다니까요.” 쿡쿡 웃는 와스큐란의 뺨에는 흰 크림이 선명했다.
“내가 한 거니까 닦아줘야지.” 그는 보드랍고 따뜻한 뺨에 입을 맞추며 크림을 입술로 훑었다. 코끝에 묻은 크림 때문에 더 엉망이가 되었지만 그도, 그의 연인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방에서는 한참이나 웃음소리, 쪽쪽 입맞추는 소리가 나다 작게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아스티는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문을 닫은 후에야 상체를 쭉 펴면서 스트레칭하는 와스큐란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고된 하루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 이것저것 하려는 연인의 모습이 퍽 고마웠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굳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제 그 목소리는 없어지지는 않았어도 거의 안 들릴 정도로 매우 작아져 있었다. 이제 좀 소파에 앉아서 쉬자, 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그의 연인은 잠시 제 방으로 가더니 종이박스를 꺼내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할까 해서요. 이제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장식품은 제가 다 사왔어요. 재활용 유리로 만들어서 천연 염료 기반 물감으로 칠했대요. LED 전구하고요.”
마음 속의 목소리가 울부짖었다. 왜 두세달밖에 알고 지내지 않은 남자한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하는 거지? 낯설고 익숙치 않은 대우였다. 그러나 와스큐란의 손이 제 뺨에 닿자 목소리는 저 멀리에서 들리는 도시의 소음 속으로 흩어졌다. 간질거리는 따뜻함이 목소리가 울리던 공간에 들어와 찰랑거리며 패인 흠과 틈새를 온기로 가득 채웠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다. 와스큐란이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장신구를 달고 전구를 두르는 옆에서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조금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트리 장식이라, 그에게는 영원히 없을 일만 같았는데 어쩌다가 이러고 있게 되었지, 왜 나는 케이크를 만들고 이런 것을, 떨떠름하거나 싫은 건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고 나서 교통사고 후에 눈을 떴을때 처음 보인게 병동 구석에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예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면 아, 내가 아직도 살아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서, 같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싶었어요. 어서요, 맨 위에 별을 장식해야 끝나죠.” 연인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울리며 그를 현실로 데려왔다. 아스티는 바보같이 눈을 깜빡였다. 손에는 금색으로 칠한 목재 별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다 별을 올렸고, 그러자 그의 연인은 LED 전구를 콘센트에 꽂았다. “알록달록 빛나는 게 멋지지 않나요? 겨울은 춥고 해가 빨리 지는데, 어두운 가운데 작게나마 행복을 노래하는 것 같아서 늘 희망과 즐거움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참, 피스타치오와 석류알이 들어간 샐러드를 미리 만들어놨고 오늘 메인 디쉬는 감자 요리인데, 굽기만 하면 끝나니까 얼른 오븐에 넣고 올게요. 먹고 나면 아마 케이크가 냉장고에서 굳으면서 완성될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아주 멋진 크리스마스 기념 저녁을 계획해 놨거든요.”
아스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머물렀다. 주방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와 저 멀리 도심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그는 오랫동안 멍하니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 그는 평화롭고 안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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