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18

총과 칼 (10)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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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치치는 도박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치치는 루치아노가 자신에게 뭘 맡겼다는 사실에 그저 신이 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리 재미를 붙여보려고 여러 가지를 건드려봐도 기분이 영 나아지지 않았다. 지루했다. 지루해 죽을 것 같았다. 당연하지, 카드는 다 거기서 거기잖아? 미겔레의 별 쓰잘데기 없는 말은 대체 왜 떠오르는 건지.

"여전히 못하시네."

딜러가 말했다. 주변 솔져들이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치는 짜증 난다는 티를 내며 카드를 테이블 위에 흩뿌렸다.

"됐어. 내가 게임 볼 것도 아닌데."

"아무렴요."

딜러가 익숙하게 흩뿌려진 카드를 정리했다.

"이건 어째 형제가 똑같아요?"

"걔도 재미없대?"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써니보이는 치치가 산타 루치아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여기서 손을 뗀 상태였다. "저는 두 분 다 못한다는 뜻이었는데."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치아노는 써니보이에게 일을 맡기기 전에 그의 취향을 존중이라도 해주려는 것처럼 여러 가지를 시켜보았고, 산타 루치아도 그중 하나였다. 써니보이는 루치아노가 산타 루치아에 가진 특별한 애정을 고려해도 도박장은 별로였던 모양이었다. 물론 치치가 보기에는 정치도 영 아니었지만. 상원의원으로 일하는 모습은 그렇다 치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웃으면서 선거 유세를 다니는 써니보이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에 이겨버릴걸. 끓어오르는 짜증을 누르려고 노력하며 치치가 얼음물을 들이켰다.

산타 루치아에 어쨌든 처음 간 날, 치치는 여전히 카드의 모든 트릭을 읽어내는 자신을 느끼고 안도하는 한편 동시에 징글징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난스런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않는 솔져들과 함께한 포커 게임에서 완벽하게 졌다. 이길 거면 아예 이겨버리던지, 솔져들은 치치의 게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자 중간부터 슬쩍슬쩍 그를 봐줬다. 그걸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지느라 더 머리가 아팠다. 솔져들은 눈치를 봤고, 그는 자기가 정말로 카드 게임에 소질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결국 몇 판을 더 하게 되었다. 이어진 게임에서도 치치가 내리 지고, 그가 딱히 울 것 같은 기색이 없자 솔져들은 본격적으로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대꾸하기도 귀찮아 치치는 반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차라리 둘째 도련님처럼 피짜리아를 하시지.”

아무래도 써니보이는 대놓고 돈이 돌아다니는 도박판보단 뒤에서 은밀하게 세탁하는 게 더 맞는 모양이었다. 뭐, 우유대신 피짜리아를 택한 거 보면 피자를 더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게요. 직접 피자도 만드시던데.”

“저도 먹어봤어요.”

“뭐?”

진짜였어? 아니, 근데 왜 쟤네들은 그걸 알고 있는 거야? 치치가 갑자기 싸해진 산타 루치아를 둘러보았다. 말실수를 눈치챈 솔져들은 모두 치치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근데 난 왜 안 줘?”

“아니, 그게 아니라.”

“연습, 연습하시는 거라고 그러셨어요. 보스랑 도련님에게 드리기 전에 연습 삼아 저희한테……” 로베르토가 웅얼거렸다.

“너도 먹어봤어?!” 치치가 배신감에 휩싸여 거의 소리를 빽 질렀다.

“솔직히 맛은 별로예요!” 로베르토가 곧바로 대꾸하곤 입을 합 다물었다. 실수했다는 표정이었다. 아, 그러셔. 치치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솔져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아까보다도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렇긴 합디다.” 눈치를 보던 딜러가 조용히 말했다. 진짠가 보네.

“그럼 됐어.”

치치가 일어섰다. 배신감이 들긴 했지만 웬만하면 먹을 것에 후한 놈들도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정말로 영 아닌 모양이었다. “써니보이한테는 비밀로 해줄게.” 솔져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로베르토, 가자.”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는 로베르토를 애써 무시하려고 하며, 치치는 대쉬우드로 향했다. 산타 루치아를 들르는 날이면 꼭 서점에 들렀다 가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로베르토 역시 산타 루치아에 가면 은근히 대쉬우드를 기대하는 기색을 내비쳤으니 망설일 건 없었다. 위선 떨기는. 골목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우뚝 멈춰서서 깊은 수렁 같은 골목 안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토니는 서점 안쪽에서 책을 나르다가 그들을 반겼다. “이번에 나온 추리소설이야. 신인작가인데, 로베르토 네가 좋아할 거 같다.” 로베르토가 즐거운 기색을 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쁠 때 서점에 로베르토를 보낸 보람이 있었다. 그가 여기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면 훗날 보체티 저택을 나올 때 분명히 도움이 될 터였다.

정리는 금방 끝났다. 치치와 로베르토는 토니가 타 준 핫초콜릿을 한 잔씩 들고 항상 앉는 뒤쪽 공간에 자리 잡았다. 로베르토가 뒤쪽 책꽂이에서 책갈피가 꽂힌 책을 두 권 꺼내와 각자의 앞에 두었다. 로베르토 앞에는 토니가 추천한 책도 함께였다.

핫초콜릿 한 잔을 다 마셔갈 때쯤 토니가 들어왔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치치를 불렀다. 패밀리로부터 온 전화였다. 전화가 온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심각성을 인지한 로베르토가 머뭇거리는 치치 대신 토니를 따라갔다. 엉거주춤 치치도 빠져나왔다. 그는 달력을 보았고, 바깥의 풍경과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창백해진 얼굴-이렇게 표정을 못 숨기면 안 되는데, 와중에 치치가 생각했다-로 로베르토가 치치 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보스가 쓰러지셨답니다.”

기어코 그날이 왔다. 치치는 그날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날씨와,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까지 전부.

 

*

 

루치아노는 지난 생에서 지금처럼, 이맘때 처음 쓰러졌다. 지난 생에서 그는 하필 혼자 서재에서 일을 보던 중이었고, 저녁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모시러 간 집사가 그를 발견했다. 치치와 써니보이는 저녁 식탁에 우두커니 앉아 식어가던 음식과 함께 연사 되던 발소리와 겹치던 목소리들을 들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지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 주치의는 이것이 그가 갖고 있던 오랜 병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그의 옆에는 24시간 주치의가 함께했지만,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탓에 자주 쓰러졌다. 의자에 제대로 앉아있지 못해 침대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가 의식을 잃는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따라서 루치아노 보체티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급작스러웠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패밀리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후계자 역시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정해진 게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그는 어쩌면 더 오래 살 수도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일을 써니보이와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치치가 놓친 것들로 인해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산타 루치아는 정말로 실수였다. 굳이 철없는 아들을 연기하는 게 아니었다. 의심받더라도 그냥 지금의 치치 보체티로 살았어야 했다.

그나마 희망을 걸어야 하는 점은, 루치아노는 전보다 훨씬 빨리 발견되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저번 생에서 루치아노는 조금 늦게 발견되었고 그 때문에 상황이 좀 더 악화된 걸 수도 있었다. 쓰러지는 걸 막을 순 없더라도 늦게 발견되는 건 막을 수 있겠지. 치치는 루치아노에게 직접 말하려다 관두고, 대신 롸코에게 넌지시 말했었다. 루치아노가 신뢰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 롸코는 루치아노 근처에 솔져들은 물론 의사가 붙어있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이전에 치치가 경고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한 번 겪어서 그런지 치치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이제 예언가 취급해도 할 말이 없겠네. 저번처럼 변명 대신 입을 다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치치는 안절부절 못하는 토니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괜찮은 거니?”

“그럼요. 써니보이가 다쳤대요.”

대놓고 거짓말이긴 해도, 써니보이와 입을 맞춰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로베르토는 어느새 갈 준비를 다 끝내고 창밖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을 태우러 차가 온다고 했다. “크게 다친 건 아니래요.” 토니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지자 치치가 급하게 덧붙였다. 다행히 토니는 더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마피아라는 걸 새삼 깨달은 듯했다. 대신 그는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치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치치는 창밖을 흘끗 보고 넌지시 운을 띄웠다. 아직 차가 도착하려면 조금 시간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토니는 예의 그 놀란 표정-전에도 토니는 치치에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냐고 물었다. 물론 그건 토니의 표정이 다채로운 탓이었지만-을 짓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중에.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니야.” 토니가 빙긋 웃으면서 그들을 배웅했다. “써니보이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롸코가 그들을 데리러 왔다. 치치의 예상처럼 루치아노는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곁에 있던 의사의 빠른 조치로 얼마 되지 않아 깨어났고,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고 했다. “과로라고는 하는데, 혹시 몰라 내일 정밀 검사를 해볼 예정입니다.” 분명히 루치아노는 써니보이에게 일을 넘겼기 때문에 전보다 덜 일 하고 있을텐 데도, 쓰러진 때는 비슷했다. 혹시 덜 일하고 있는 게 아닌 건가? 치치는 창문에 얼굴을 기댔다. 만약 그렇다면,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면 그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후 일어날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던 치치는 문득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자신이 루치아노의 죽음에 초연하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징그러웠다.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우는 자신이. 하지만 루치아노는 이대로 가다간 끝까지 써니보이에 관한 것에서는 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치치.”

써니보이는 분주한 루치아노의 방 앞 대신 조금 떨어진 복도에 서 있었다. 치치는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이고 그의 옆에 섰다. 문 쪽을 바라보고 가만히 서 있는 써니보이는 침착해 보였다. 치치는 써니보이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는 롸코를 보았다. 알고 있었어? 어떤 날 새벽에 롸코는 써니보이와 함께 있었다. 그는 아무나 한 대 갈겨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물었다. 롸코는 이미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예. 그가 알고 있다면 루치아노 역시 알고 있다는 뜻일 테다.

이 지루한 줄다리기는 언제쯤 끝이 날까. 언제쯤 이 보체티가 온전한 써니보이의 것이 될까. 그렇게 하지 못한 데에는 분명 치치의 책임도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치치는 루치아노가 안정을 되찾은 후에 반드시 그에 관해 말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

 

호구 잡았다.

처음에 리차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짧은 순간 팁을 많이 주는 손님들이 갖고 있는 몇 가지 공통점을 치치에게서 보았다. 첫째, 무심한 척한다. 둘째, 그럼에도 대답은 꼬박꼬박 해준다. 셋째, 자신들을 연민하는 눈빛. 사실 세 번째는 조금 애매했다. 치치는 자신들을 내려다보고는 있었지만 무시하지는 않았다. 연민하는 이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우월감을 리차드는 잘 알고 있었다. 너 참 불쌍하구나. 네 알아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지만 실밥이 풀린 옷처럼 구멍만 남기고 형태는 무너져가는 느낌을 외면할 순 없었다. 그는 풀린 실을 가만히 두고 있는 걸 택했다. 차라리 더 풀어져 버리라지.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그 실로 풀린 부분을 다시 꿰맬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그 부분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러나 치치는 그 실밥을 끊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거 같기도 했다. 혹은, 조금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거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한 사람분이라도 더 얻을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로잘린에게 그 보체티라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지만. 대체 왜 저런 사람이 이 구석진 바에 오는 걸까, 설마 복수할 타이밍을 보고 있는 걸까? 그는 치치가 품에서 총을 꺼내 제 미간에 들이미는 상상을 했다. 리차드는 악몽까지 꿨다.

하지만 치치는 로잘린이 짜증 내고 오스카가 기대하고 리차드가 걱정했던 것처럼 아폴로니아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어쩌다 가끔, 잘 지내나-리차드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할 때쯤 귀신같이 나타나는 것 빼고는 그렇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물론 치치는 오스카나 리차드와 눈이 마주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고는 했으니 오히려 신경 쓰는 건-오스카가 치치를 보면 티 나게 호들갑을 떨어대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치치는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두 사람 앞으로 적지 않은 액수의 팁을 남기고 떠났다. 어쨌든 그에 대한 첫인상이 완전히 틀려먹지는 않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단순히 만사가 지루하고 귀찮은 도련님의 유흥, 아니면 일탈?

리차드는 치치가 입고 있던 고급스러운 옷들을 떠올렸다. 수수해 보이지만 아마 이 바에서 제일 비쌀 옷들. 무대 의상을 찾으러 갔을 때, 옷 가게 주인이 손바닥만 하게 만들어놓은 견본들에서 느꼈던 그 광택들. 리차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입지 못할 종류의 옷감이 그의 몸에 딱 맞게 재단되어 걸쳐져 있는 그 광경. 꼰 다리와 그 끝에 윤이 나는 구두. 구두와 함께 까딱거리는, 손가락에 걸린 펜.

치치는 가끔 그 펜을 입에 물고 있기도 했다. 종이에 뭘 쓸 때도 있었고, 책을 들고 올 때도 있었다. 이 시끄러운 곳에서 뭘 저렇게 쓰고 읽나. 리차드는 멀리서 그 책이 뭔지 힐끗힐끗 훔쳐보기도 했다. 그중에는 운 좋게 아폴로니아에 있는 책들도 있었다. 지금 아폴로니아에서 보드빌을 올리는 배우가 둔 것이었다. 너도 언젠가 대본을 써봐, 리차드. 넌 잘할 거야…….

푸른색의 피어싱이 반짝거렸다. 리차드는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단순한 흥밋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도련님이 뭘 알겠는가. 그는 로잘린이 그러하듯, 리차드와 오스카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게 더 나을법한 세계의 사람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과 엮이는 일은 지난 몇 주, 길어봤자 앞으로의 몇 달이 전부일 게 뻔했다. 너무 뻔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수요일이 왔다. 리차드는 최대한 문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테이블을 닦았다.

 

*

 

치치는 루치아노와 저녁을 먹기가 껄끄러운 날이면 산타 루치아에서 밤늦게까지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아폴로니아 간판에 불이 완전히 들어오고, 그 안에서 삐져나온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아마 스티비가 앉아있었을, 정확히 말하자면 앉아있을 자리에서 치치는 이따금 아무 의미 없이 타자기를 두들겼다. 그건 일기일 때도 있었고,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 관한 이야기일 때도 있었고, <미아 파밀리아>의 대본일 때도 있었다. 어차피 모두 마지막엔 벽난로로 들어가니 뭘 쓰든지 상관 없었지만.

요 며칠 루치아노는 저녁 식사에 오지 못했다. 그는 방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자연스레 써니보이도 그곳에서 저녁을 함께하는 날이 늘어났다. 그는 딱 한 번 루치아노의 방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 계속 산타 루치아에서 죽치고 있기를 택했다. 그 분위기에서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루치아노가 그렇게 된 원인에 분명히 자기도 있을 테니, 죄책감이 드는 한편 루치아노가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그래 놓고 여기에 온 건 확실히 모순적이긴 하지만.

탁, 탁, 탁, 탁. 그는 타자기의 스페이스바를 계속 눌렀다. 종이가 한 칸씩 왼쪽으로 옮겨가다가 걸렸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자판도 제대로 눌리지 않았다. 단단히 끼었는지 종이도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종이를 억지로 빼내려다 위쪽도 찢어먹었다. 되는 게 없다.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문득 치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폴로니아 간판이 평소보다도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머리를 식히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다. 시끄러운 곳에서 멍때리는 것 역시 라스베이거스 시절의 버릇이었다. 그곳은 밤에는 도박장이었고, 낮에는 미겔레와 파울로 때문에 내내 시끄러웠다. 그는 그곳에서 나름대로 머리를 비워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원래 기질인지, 아니면 이 몸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돌아온 후 조용한 시간들에 금방 적응하긴 했지만, 치치는 머릿속이 복잡하면 여전히 음악부터 틀었다. 가만히 아폴로니아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던 치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자기에 낀 종이를 아까보다 약하고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종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빠졌다. 그는 찢어지고 구겨진 종이들을 헛웃음을 흘리며 내려다보다 옆에 있던 것들과 함께 벽난로에 던져넣었다.

1층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치치가 내려오는 걸 본 로베르토가 그의 곁에 붙었다. “아폴로니아로 가시나요?” 치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따라오지 마.” 로베르토가 입을 열기 전에 치치가 왼쪽 가슴팍을 두들겼다. “갖고 왔으니까 됐어.” “그래도요.” 치치의 사격 실력을 확인했는데도, 로베르토는 여전히 그를 막냇동생 대하듯 했다. 기분이 썩 나쁜 편은 아니어서 치치는 그냥 그를 내버려두었다.

“뭔 일 있으면 쏠 테니까, 소리 들리면 바로 와.”

치치는 문을 열고 아폴로니아와 산타 루치아 사이의 대로를 마주하고 섰다. 문이 닫히자 도박장의 그 어떤 소리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정적 사이에 잠깐 서 있다가 아폴로니아로 들어갔다. 되도 않은 변장을 한 로잘린 감비노와 눈이 마주치자 오늘이 수요일인 게 기억이 났다. 잘됐네. 치치가 피식 웃었다.

*

 

리차드가 떠나자 산타 루치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고요해졌다. 스티비가 종이 뭉치를 들고서 책상에 앉았다. 흥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다시 커졌다. 치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까딱거리는 뒤통수가 보였다. 리차드는 비틀대며 길을 건너는가 싶더니, 한가운데 갑자기 멈춰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섰다. 동시에 노랫소리도 멎었다.

“뭐해?”

스티비가 물었다. 리차드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치치는 힐끗 하늘을 바라보았다. “쟤.” 달도 잘 보이지 않았다.

“자주 오냐?”

치치가 말했다. “어.” 스티비가 짜증 난다는 투로 말했다.

“한 푼도 없어 보이는데.”

“잘 아네.”

“맨날 술에 취해 있을 거고.”

리차드는 이제 노래를 부르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멜로디로 흥얼거리면서 걸음을 옮겨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그 노래는 맨날 불러?”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한껏 날이 선 목소리로 스티비가 대꾸했다. 치치는 본인의 얼굴이 비치는 창문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다가 스티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이렇게 표정을 못 숨겨서야, 연기 해달라고 부탁은 하러 갈 수 있겠나. 물론 그건 치치의 문제는 아니지만.

다만 치치는 써니보이가 그 노래를 부르는 리차드를 보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보일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써니보이를 지켜보는 스티비,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는 치치 자신의 표정까지도.

치치는 다시 뒤돌아 커튼을 쳤다.

“쟤, 얼마나 알고 있나 해서.”

“대체 뭘?”

그 세 줄짜리 스캔들. 하지만 치치는 이걸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그는 그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의 심기를 더는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당장 해가 뜨면 벌어질 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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