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19
총과 칼 (11)
*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 이번화에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장면(폭력성)이 있습니다. 감상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오스카는 리차드가 탭댄스 슈즈를 닦고 분장실을 나오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그는 흥분했지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리차드에게는 충분히 컸지만- 속삭였다.
“또 왔어!”
“나도 봤어, 오스카.”
오늘도 치치는 그가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만 오늘은 평소보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는데, 그 때문에 리차드는 시작도 전에 자신이 실수한 거 같은 착각이 들어 공연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 오늘 실수 안 한 거 맞지?”
“맞다니까. 실수… 했으면 제이미가 가만히 있었겠어?”
오스카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더 낮춰서 말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갔는지 제이미는 없었다. 리차드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치치를 찾았다. 그는 뭔가를 계속 끄적이고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은 채였다. “그냥 기분이 안 좋나 봐.” 리차드는 치치가 이쪽을 볼 것처럼 움직이자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빨리 나르기나 하자.”
무대가 끝나면 이 바에서 일하는 다른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그들도 술을 날랐다. 대개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가끔 그들이 무대 위에 서는 보드빌 키즈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들이 팁을 쥐여주거나 하다못해 머리라도 쓰다듬어주었다. 리차드는 그것이 이 바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라는 걸 알았다. 아무래도 그것보다는 술이나 한잔 더 시키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치치 보체티는 술을 시키긴 했지만 언제나 입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제일 비싼 것으로 시켰기 때문에 제이미도 마뜩잖아했지만 뭐라 하지 못했다. 남은 건 운이 좋으면 오스카가 마셨다. 어쨌든, 중요한 건 리차드나 오스카가 치치한테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이제까지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말을 건다고 해도 뭔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차드는 치치를 힐긋 바라보다가 소란스러운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취객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다니며 시비를 걸고 있었는데, 급기야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는 어느새 로잘린이 있는 테이블 근처까지 가고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로잘린은 왜인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큰일났다. 리차드가 로잘린 쪽으로 향하려는 찰나 제이미가 그를 불렀다. 그때, 리차드는 치치와 눈이 마주쳤다. 덤덤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오스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저 사람은 우릴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오스카의 눈에는 이미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리차드는 트레이를 내려두고 취객에게 향했다. 오스카가 그의 소맷귀를 잡는 게 느껴졌다. 리차드는 취객의 앞에 섰다.
“진정하세요.”
몇 대만 맞으면 금방 끝날 것이다. 아마 운이 좋으면 각각 한 대로 끝날지도 모른다. 제이미도, 리차드도 오스카도, 아니 이곳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저런 사람들은 그냥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필 여기서 제일 약한 사람이 우리 둘인 거지. 반항해 봐야 괜히 더 맞고, 나중에 제이미한테 또 맞을 뿐이다. 이 사실은 오스카가 먼저 알아차렸다. 다 죽여버리겠다고 날뛰는 리차드를 보면서 퉁퉁 부은 오스카는 말했다. 리차드, 너는 너무 사람을 싫어해. 그건 리차드가 지금까지 들은 것 중 제일 어이없는 말이었다. 너는 지금 그런 말이 나와?! 하지만 오스카, 봐봐. 사람들도 우리를 싫어해. 물론 리차드는 이 말을 하면 오스카가 크게 상처받고, 급기야 울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 오스카는 그와 다르니까. 그렇기 때문에 리차드는 계속 날뛰었다.
하지만 그가 있으면 다르다. 리차드는 그에게 자신이 날뛰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무대 위의 자신만 기억해 줬으면 했다. 무대 뒤나 무대 아래의 일들은 아무래도 궁금해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보이는 건 또 다르니까. 리차드는 이번만큼은, 오스카처럼 끈 떨어진 꼭두각시를 연기하기로 한다. 금방 무대 위에서 치워질 수 있도록. 리차드는 오스카를 뒤로 물렸다. 오스카가 버티고 섰다. 매번 그랬다. “뭐 하는 거야? 빨리 로잘린한테 가봐!” 리차드가 속삭였다. “너야말로 뭐 하는데!” 오스카도 속삭였다. 취객은 그들끼리 속삭이는 게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슬슬 때리겠구나. 리차드는 다가올 통증의 정도를 계산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온몸을 더 구긴다고 해서 덜 아프게 되는 게 아님을 진작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리차드는 눈을 슬며시 떴다.
치치 보체티. 뒷모습만 보였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몰랐는데, 그는 자기보다도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안도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의미 없는 질문들이 몰려왔다. 당신이 왜 우리 앞을 막아선 거야?
“어린애한테, 안 쪽팔리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리차드는 입을 떡 벌린 채 치치를 바라보는 오스카를 툭툭 쳤다. 오스카도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곧바로 몸을 숙이고 슬금슬금 로잘린과 함께 앞이 막혀있는 바 테이블의 뒤쪽으로 향했다. 눈만 빼꼼 내민 오스카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지만, 리차드는 고개를 저었다. 취객은 바뀐 타깃인 치치에게 비키라 소리 지르고 있었다.
“비켜!”
취객이 뺨이라도 때릴 것처럼 다시 손을 올렸다. 치치는 미동도 없이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취객이 움찔거렸다. 리차드는 치치의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치치가 피식 웃었다. 리차드는 취객의 표정이 다채롭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가 품 안에서 칼을 빼 들더니 다가왔다. 미친. 제대로 미친놈이 걸렸다. 치치 보체티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면서도 여전히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씨발 비키라니까!”
취객이 칼을 휘두른 순간 무언가가 그들 곁을 스치고 무대를 향해 날아갔다. 둔탁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술병이 무언가에 맞아 박살 나는 소리.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꺄아악! 누군가의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 사이로 누군가가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괜찮아?!” 언제왔는지 오스카가 그의 곁에 있었다.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무대 위의 누군가가 반쯤 깨진 술병을 들고 있었다. 조명이 그의 뒤에서 빛나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찡그리며 리차드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제이미? 하지만 제이미는 금발이 아닌데…… 아. “그 사람이야.” 오스카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나도 보고 있어, 오스카. 하지만 혀가 굳기라도 한 건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리차드와 오스카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애칭인지 이름인지 정확하지 않은 써니보이라는 명칭, 금발과 푸른 눈. 리차드도 갖고 있는 그것이 써니보이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비명도 멈췄다. 취객은 감히 자신을 향해 술병을 던진 이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무대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도 한참 큰 써니보이를 보고 흠칫하더니 곧 고개를 치켜올려 그를 노려보았다. “넌 뭐야?!” 써니보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에 서 있는 써니보이는 그 무엇보다도 극적으로 보였다. 리차드는 보드빌 배우가 언젠가 말했던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영웅이 저런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몰락해서 영웅인지 악인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인물. “널 닮았어.” 리차드가 써니보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듯 그는 자기 자신이 무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무대 위의 나도 저런 모습일까?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의 모습은 그런 주인공보다는 잘해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조연일 것이다. 리차드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서 오른쪽 뺨을 감싼 치치의 뒷모습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는 희극 공연을 본 적도, 제대로 읽은 적도 없지만 분명 그런 극의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
무대 위의 리차드와 오스카는 즐거워 보였다. 오스카라는 놈은 원체 생각이 다 표정에 드러났고, 리차드는 솔직한 편은 아닌듯했지만 어차피 어린애가 표정을 숨겨봤자 거기서 거기다. 때문에 치치는 그들이 웃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뭐가 저렇게 즐겁나, 어차피 보체티가 사들일 텐데. 치치는 묘한 심정이 되었다.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술잔을 바라보다 그는 품 안에서 펜을 꺼냈다.
타자기를 두들기는 것의 연장선으로, 그는 여기선 종이나 펜을 가져와 아무거나 끄적이곤 했다. 그것도 심란하다면 책을 읽었다. 물론 제대로 읽히진 않았다. 그냥 무엇이라도 들여다봐야 대충 구색이 갖춰졌다. 그렇게 조금만 기다리다 보면 공연이 시작된다. 그때는 치치도 공연을 보았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무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름 인기석이었는데, 치치가 올 때마다 제일 비싼 술을 시키니 아예 그의 지정석으로 비워놓은 듯했다. 너무 자주 온 것 같았다. 진짜 습관이 되기 전에 여기로 오는 건 그만둬야겠다, 싶었다. 아니면 로잘린 감비노처럼 뒷문으로 들어오던가. 공연이 끝났다. 리차드가 분장실에서 나오는 걸 보고 치치는 다시 의미 모를 글자들로 가득한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밴드의 음악이 잔잔히 깔렸다.
그러다 치치는 유난히 소란스러워 고개를 들었다. 취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안 왔지. 시끄러운 건 나쁘지 않지만 취객은 다르다. 나갈 생각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치치는 순간 취객을 향해 다가가는 리차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 푸른 눈.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을 게 뻔한 푸른색. 길에 있던 써니보이도 이런 일을 겪어봤을까? 치치는 리차드를 부르려고 했으나 그가 고개를 돌려버려 그럴 수 없었다. 언뜻 스친 표정은 치치도 익숙한 것이었다. 도망 다니던 시절, 유리창에 언뜻언뜻 비쳤던 자신의 얼굴과 비슷한 종류의 것. 저 소년은 치치에게서 그 어떤 기대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줬던 팁들은 전부 잊어버린 건가? 오스카가 리차드의 뒤에 붙어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취객이 손을 치켜드는 게 보였다.
치치는 거의 튀어나가듯 리차드와 오스카 앞으로 갔다. 당황한 취객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들어왔다. 내가 왜 앞을 막아선 거지? 분명 선의는 아니었다고 그는 말할 수 있었다. 이유를 고민해 보려는 찰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시비를 걸고, 루치아노의 흉내를 내며 그를 가만히 노려봤다. 취객이 칼을 꺼냈다. 치치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공포탄이니 한 발만 쏘면 되고, 그러면 뒷수습은 솔져들이 해줄 것이다. 그가 안주머니로 손을 옮기려는 순간 무언가가 뒤쪽에서 날아왔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취객이 든 칼이 오른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된 칼을 들고 다니네. 치치는 손바닥에 묻어난 피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바닥을 뺨에 눌러 지혈을 하면서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는 금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건 치치가 모른척하려야 할 수 없는 뒤통수였다. 이제는 무대 위에서 절반이 날아간 술병의 주둥이를 잡고 천천히 걸어오는 그 사람의 표정은 하필 그의 머리칼이 싸구려 조명의 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 장면만 봤다면 꼭 하늘에서 강림한 거 같은, 그들을 심판하러 온 신의 사자 같다고 말할 것이다. 마치 열세 살의 그 밤이 그랬듯이…….
치치는 언제나 그게 궁금했다. 쟤는 왜 항상 이렇게 제 앞에 나타날까.
“괜찮아, 치치?”
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건 걱정보다는 어떤 살의에 가까웠다. 바로 그의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밟아버리고 싶다는. 그래, 그는 분명히 저 남자를 죽일 것이다.
“죽이지 마.”
써니보이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치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사람 죽이지 마, 알았어?”
피가 흐르는 느낌에 뺨을 닦아냈다. 써니보이는 바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씨발, 니네 지금 뭐하는 거야?” 취객이 자신은 이제 뒷전이라는 걸 알았는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게.”
천천히 취객으로 시선을 돌린 써니보이가 말했다. 둘 사이를 휙휙 둘러보던 취객이 아무래도 가까운 치치가 좀 더 만만해 보였는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써니보이가 병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한 걸 본 치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뺨에서 손을 뗐다. 옷에 피 묻히는 건 이제 질색인데. 치치는 취객이 첫발을 채 떼기도 전에 총을 꺼내 그의 미간 사이를 정확히 겨냥했다. 바 안은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 들어.” 취객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손 들라고.” 치치가 천천히 방아쇠로 손을 옮겼다. 그제야 취객이 손을 들었다. 웃기네 이거. 치치는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걸 참았다. 죽이지 말래놓고 정작 총을 들이밀고 있는 건 자신이다.
“손님!”
다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치치는 목소리의 주인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아폴로니아의 주인이었다. 리차드와 오스카가 취객의 앞을 막아설 때는 나서지 않던. “진, 진정하시죠.” 그는 치치와 써니보이 중 어느 쪽을 바라볼지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치치는 대답 대신 써니보이를 보았다. 써니보이는 병을 등 뒤로 떨어뜨리고-덕분에 깨지는 소리가 나 몇몇 사람이 또 비명을 질렀다- 무대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치치의 곁으로 왔다. 치치는 총구를 까닥이면서 말했다.
“일단 저 사람부터 치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인이 손짓했다. 리차드와 오스카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와서 사색이 된 취객을 옆 테이블로 옮겼다. 치치가 안주머니에 총을 넣었다. 써니보이는 제 얼굴, 정확히는 그인 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치치는 뺨을 닦았다. 여전히 피가 묻어났다. “써니보이.” “응, 치치.” 눈에 담긴 살의 역시 그대로였다.
“산타 루치아에 로베르토가 있어.”
“알았어.”
써니보이는 순순히 나갔다. 치치는 산타 루치아를 언급한 이후 더욱 허둥대는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저쪽에 청구해. 시작은 저쪽이 했잖아.”
“예, 예예.”
그가 계속 고개를 끄덕이다가 치치가 턱을 까딱이자 급히 취객 쪽으로 갔다. 베인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깊게 베인듯했다. 아팠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따갑고 쓰라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로베르토에게, 아니 롸코에게, 아니, 루치아노에게 어떻게 변명해야하나 싶었다. 저절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찰나, 치치의 앞으로 불쑥 뭐가 튀어나왔다. 손수건이었다.
“깨끗해요.”
치치가 잠깐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리차드가 말했다.
“알아. 이거 무대할 때 쓰는 거 아냐?”
“헉, 어떻게 아셨어요?”
오스카가 말했다. 치치는 리차드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거 같다고 느꼈다.
“괜…… 찮으니까 그냥 쓰세요.”
“그래. 다음에 돌려줄게.”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곱게 접힌 손수건을 들어 제 뺨에 갖다 댔다. 아폴로니아는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치치는 눈만 굴려 이곳을 대충 훑다가 여전히 공포에 질려있는 로잘린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건 처음인가, 의외네. 어렸을 적 치치 보체티도 아마 저런 표정을 지었던 거 같다. 치치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써니보이에게 굳이 로잘린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친구나 챙겨.” 그가 오스카에게 말했다. 리차드와 오스카가 퍼뜩 놀라며 로잘린에게 향하는 것을 본 치치가 근처에 있는 아무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써니보이가 로베르토와 몇몇 솔져들과 함께 다시 아폴로니아로 올 때까지 치치는 로잘린을 다독이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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