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12
총과 칼 (4)
*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죠?”
치치가 문을 닫고 나가자 플로렌스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써니보이를 바라보았다. 써니보이는 느릿하게 책장을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플로렌스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렇긴 하네요.”
“혹시 우리가 싸웠나요?”
플로렌스가 속삭였다. 치치가 일부러 자리를 뜨는 것도 벌써 다섯 번째가 넘었다. 처음에는 정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고, 세 번째가 넘어가서부터는 뭔가 치치의 행동이 어색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치치가 갑자기 혼자 있기를 원하진 않을 테니, 분명 둘을 위해 자리를 피해준 것이 분명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요.”
플로렌스가 다시 속삭이고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써니보이의 표정은 오묘했다. 꼭 친구를 친구의 짝사랑 상대 앞으로 보낸 듯한 표정이었다.
“치치는 부끄럼이 많아요.”
설마, 플로렌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부끄럼이 많다면 단둘이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와 단둘이 있을 때의 치치는 오히려 스스럼없었다. 하지만 써니보이가 같이 있기만 하면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해요. 물어봐야겠어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플로렌스의 책 위로, 써니보이가 손을 짚었다. 명백한 제지의 표시였다.
“아뇨, 괜찮아요.”
“왜요?”
순간적으로 굳는 써니보이의 얼굴을 보고 플로렌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써니보이는 질문이 가득한 플로렌스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그 어떤 음절도 문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낮게 답했다.
“치치가 이러길 바라잖아요.”
플로렌스는 그의 말속에서 플로렌스 자신은 둘째치더라도, 그 어디에도 써니보이 본인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당신은요, 써니보이? 플로렌스는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써니보이가 엷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치치는 눈가에 비치는 가는 빛에 눈을 떴다. 창밖은 어두웠고, 커튼 너머 달의 형체만이 흐릿했다. 시계를 보니 겨우 자정밖에 되지 않았다. 치치는 초침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가를 닦고 상체를 일으켰다. 골목에서 나온 뒤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제 안색을 보고 당황하던 로베르토를 붙잡고 집으로 와서, 저녁을 거른 채 옷만 갈아입고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최대한 서점에서 즐거웠다는 인상을 남기려고 했는데 다 글렀다. 파파가 토니한테 뭐라고 하면 안 될 텐데, 치치는 문득 생각했다. 아침에 반드시 해명하리라 생각하며 다시 누웠지만 눈은 쉽게 감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병원 기록도 받지 못했다. 그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로베르토는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로베르토를 포함한 몇몇 솔져들이 매일 자정쯤 부엌에 모여 저택의 사용인들과 담소를 나눈다는 사실을 치치는 모르지 않았다. 저택의 소문은 무조건 그곳을 거쳐 가기 때문이었다. 치치가 죽을 것이라는 소문 역시 이들 사이에서 난 것이었다. 물을 달라고 하면서 빼내면 될 것이다. 로베르토가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는 건 위험했다. 치치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그대로 멈췄다. 문밖에 누군가 있었다.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로베르토인가. 치치는 조금 고민하다, 문밖의 사람이 아무 기척도 내지 않자 먼저 문을 열고 나가기로 했다.
“로베르토?”
“치치.”
“……써니보이?”
써니보이는 잠옷 차림이었다. 그 역시 잠에서 깬 듯 몽롱한 눈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는 또렷했다. 치치는 당황스러웠다.
“너, 너 여기서 뭐 해?”
치치는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을 보았다. 그들은 종종 같이 잠들기도 했었다. 누군가가 아플 때, 악몽을 꿨을 때,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잠이 오지 않을 때. 침대는 혼자 잠들기에는 너무 넓었다. 그래서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침대가 좋았을 때도 있었다. 적어도 그곳은 혼자 눕기에도 힘들었기에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잠이 안 와서.”
치치는 거절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써니보이를 친절히 제 방 앞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같이 있어야만 잘 수 있는 나이는 진작 지나버렸다고, 나는 혼자 쉬고 싶으니 너도 들어가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노래를 들려줄 수도 있었다. 잠이 안 올 때면 노래를 듣는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꿈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읽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치치는 그가 자신과 함께 침대에 눕기만 한다면 바로 잠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런 말 없이 몸을 틀어서 방 안으로 들이고,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떨어질 것 같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누우면, 치치는 반대편 가장자리에 몸을 누이면 된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밤은 그렇게 만들면 된다. 치치는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한번 주었다 그대로 풀었다. 생긴 틈으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써니보이가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서자, 치치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써니보이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치치는 그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치치는 가만히 걸어가 써니보이 옆에 앉았다. 써니보이는 말없이 치치만을 눈으로 좇았다. 차라리 불을 켤 걸 그랬다. 이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치치는 이 상황의 책임자였다. 그는 차마 눈까지는 마주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래서, 음, 뭐. …노래 들을래?”
써니보이는 고개만 저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말했더라, 우리가 열일곱 살에, 열여덟 살에 무엇을 말하고 지냈더라. 치치는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더라, 우리가 어떻게 지냈더라. 확실히 열여섯 살 이후로는 그다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었고, 치치는 시간의 힘을 빌려 그것들을 지우는 데 반쯤 성공했다.
아니,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면 안 된다. 그러면, 그러면 보통의 형제들은 뭘 하고 지내지?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뭘 하느냔 말이야. 치치는 이것이 보통의 상황은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일상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보통이라면, 더 끔찍한 게 있을망정 이것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러니까, 치치는 자신이 뱉을 수 있는 질문은 이것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너 괜찮아?”
써니보이는 고요한 표정이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치치가 아니었다면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난 괜찮아.”
정말로 그래 보였다. 써니보이는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
서점의 하루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다. 새로운 책은 매일매일 들어왔고, 손님들은 아주 예민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대대손손 이어온 작은 책방이어도 먹고는 살아야지, 하면서 토니는 맨 앞에 놓일 책들을 몇 번이나 바꾸었다. 흐름을 잘 이해해야 이곳에 있는 책들이 더 오래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놓는 사람 마음이지만.” 토니는 그러면서 슬쩍 전혀 생뚱맞은 책을 그 옆에 올려놓았다. 치치 역시 그의 눈치를 조금 보다가 요즘 그가 즐겨 읽는 책을 구석에서 조금 앞으로 두었다.
물론 이것만 끝나면 바쁜 일은 없었다. 책을 배치하는 일과, 달에 한 번 있는 재고 파악 정도만 제외하면 치치가 생각했던 삶과 거의 일치했다. 토니는 내내 여유로워 보였고, 손님들이 추천을 부탁하면 기꺼이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골라주었다. 손님들은 모두 만족하면서 돌아갔다. 토니는 종일 책을 정리했고, 읽었고, 추천해주었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책 이야기만 할 수 있었다. 치치는 그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 일들이 익숙해졌을 때즈음 토니는 그에게 마감 정산을 맡겼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내가 마감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종의 테스트라는 걸 치치는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돈 계산이야말로 치치에게 있어서 제일 자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그는 그것을 능숙하고 완벽하게 해냈다. 토니는 내내 그 옆에서 영수증을 빠르게 분류하고 장부에 적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놀란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하며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해댔다. 덕분에 치치는 앞으로 마감 정산까지 맡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치치는 토니가 자신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치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는 물론 제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서점 일에 적응해나갔다. 몇 주도 되지 않아 토니는 치치를 가족 다음으로 신뢰하게 된 것 같았으며, 손님들 역시 치치의 안목을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니 싶었다. 그는 이 풍경이 좋았고, 책이 풍기는 냄새가 좋았고, 무엇보다도 신간을 제일 먼저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가끔은 써니보이가 찾아오기도 했다. 방해하지 않을게, 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서점 전체가 한눈에 보이지만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온종일 말없이 책을 읽다가 치치와 함께 돌아가거나 혹은 먼저 일어났다. 토니는 그런 써니보이를 유독 어려워했다.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치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돌려서 써니보이에게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써니보이는 대쉬우드에 찾아왔다.
그 빈도가 훨씬 줄어들었으니 써니보이가 치치의 말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치치 자신도 모르던 그의 의향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곤 했었으니까. 대신 그는 올 때마다 책을 수 권씩 사 가기 시작했다. 로베르토에게 들어보니 그 책은 모두 솔져들의 몫인 모양이었다. 치치는 그들이 평소에 뭘 하고 지냈는지 생각해보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제발 불쏘시개로만 사용된 게 아니길 빌어야 했다. 그래도 오는 걸 포기할 순 없다 이거지? 치치는 써니보이의 속이 뻔히 읽히면서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냥 자신이 그러길 기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치는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제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책을 한 권 들고, 치치의 박자에 맞춰 걷고 있었다. 치치는 문득 답답해졌다.
*
써니보이와 플로렌스 사이에 그러한 기류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이후 치치는 그의 동태를 보다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다른 사랑을 찾은 걸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결론적으로 치치는 써니보이가 그런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너무 바빴다. 일정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생각해보면 전생은 물론이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치치 역시 이렇게 살았었다. 다만 그때는 써니보이와 함께였다. 써니보이 역시, 치치와 함께였다.
하지만 이제는 써니보이 혼자였다. 치치는 써니보이가 수업을 하고 있는 방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수선하게 복도를 맴돌았다. 자신이 여기에 끼어들어 그를 빼내 와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있으면 플로렌스가 온다. 그는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같이 있었으면 냅다 손이라도 잡고 달렸을 텐데, 지금에서야는 도무지 이곳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그가 초조하게 손톱을 건드리고 있는데, 계단 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플로렌스 아가씨가 오셨어요!”
동쪽 복도를 청소하는 아이였다. 아이는 달려왔는지 얼굴까지 발갛게 상기되어있었는데, 어째 굉장히 급하게 달려온 모양새라 치치는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
“뭔 일 있어?”
“아니요! 그냥, 기다리신 거 같아서…….” 치치의 얼굴이 굳자 아이의 말소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치치는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써니보이를 데려가기 위해 조금 있다 가겠다고 그가 답했다.
“아…….”
아이는 눈에 띄게 실망한 눈치였다. 치치의 표정이 이상해지는 걸 보고 아이는 급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갔다. 그게 그렇게 실망할 일인가? 어차피 플로렌스야 책을 읽고 있으면 된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온 게 아니었던가. 써니보이를 데려가면 늦은 이유도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보체티 저택에서 플로렌스는 언제나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 건조하고 무심한 집안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밝고 따뜻한 것에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치치는 얼마 전에야 깨달은 참이었다. 아이는 그런 플로렌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일전에도 치치는 사용인들과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는 플로렌스를 보고서는 살짝 놀라고 말았으나, 그가 루치아노와 두어 차례 티타임-물론 루치아노는 에스프레소를 마셨지만-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는 그 경이로움에 박수까지 쳐주었다. 루치아노는 상대방과 술을 기울일지언정 한가롭게 티타임을 가질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영국인이라면 더더욱. 치치는 내내 루치아노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에 있는 에스프레소를 그대로 다시 잔에 뱉을 뻔했다.
“부티 말처럼 상냥하시던데요?”
“……걔가 그랬다고요?”
생각해보면 루치아노는 하나뿐인 조카 부티 보체티에게는 언제나 상냥했다. 부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의 어머니인 나탈리아 본테타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닮았는지는 들은 적 없었지만. 치치는 문득 그 사실이 생각나 머릿속으로 부티의 얼굴을 더듬어보다가 포기했다. 너무 예전의 기억이었다.
치치가 기억에 빠져있던 동안 테이블에는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금방 정신을 차린 치치가 각각 차와 에스프레소를 입에 가져다 대고 있는 두 사람을 눈만 굴려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정적이 어색했고, 곧바로 플로렌스에게 말을 걸었다. 플로렌스와 치치가 그래도 틈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써니보이는 내내 한 마디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내 그런 식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