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13
총과 칼 (5)
*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플로렌스는 저녁 식사 전에 돌아갔다. 늦게 들어온 루치아노는 묘하게 즐거운 표정이었다. 치치는 반대편에 있는 써니보이를 바라보았지만 언제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나마 물어볼 만한 사람은 하필 또 치치 쪽에 서 있는 바람에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치치는 루치아노가 뭔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차피 모두 써니보이에게 건네는 말일 게 분명하므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식탁은 조용했다. 치치는 셋이 있을 때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써니보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부끄럼을 타는 걸까? 그럴 수도 있었다. 여전히 낯을 가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치치를 질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치치는 써니보이와 루치아노가 이런저런 이야기-주로 써니보이가 오늘 배운 것을 요약해 보고하는 것에 가까웠지만-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자신의 눈치 없음을 탓하고 있었다.
“치치.”
치치가 파이를 포크로 찔러보고 있을 때 루치아노가 말했다. 파이지가 딱딱해서 제대로 잘리지 않았다. 그는 거의 부스러기가 된 파이지를 한 군데에 몰아놓고 혼자 무너져내린 필링만 떠먹었다. 너무 달았다. 사실 손으로 먹는 것이 제일 낫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 그가 다시금 포크를 파이에 가져다 대면서 답했다.
“윈스턴에게서 연락이 왔다.”
“플로렌스요?”
일전에 플로렌스는 보체티 저택에 초대해준 답례로, 여름이 지나기 전 현재 머무르고 있는 곳-윈스턴의 별장-에 초대해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치치는 그건가보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피츠윌리엄 윈스턴 말이다. 네 약혼을 앞두고 한번 보고 싶다고 하던데.”
포크의 옆면이 그릇과 부딪히면서 묵직하게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날, 그 바이올린의 현이 마지막 순간에 비명을 질렀던 것처럼. 치치는 그 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파이는 바닥까지 깔끔하게 잘렸다.
“누가, 누구랑요?”
잘못 들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잘못 보았을 수도 있었다. 루치아노가 ‘너’라고 말한 게 치치가 아니라 써니보이일 수도 있었다. 루치아노가 다시금 헛기침하듯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는 거의 그릇에 포크를 꽂아 넣고 있는 치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치치 너랑 윈, 플로렌스 말이다.”
“뭐라고요?!” 결국 치치가 벌떡 일어섰다.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묵직한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가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동시에 일어났지만 그 어떤 것도 치치의 목소리를 덮을 수는 없었다. 루치아노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냅킨으로 입을 쓱 닦고 일어섰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치치는 의자를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
치치는 멍한 상태로 루치아노의 말을 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누구랑 좋은 감정?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치아노는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가 변명에 가까운 무언가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치치는 따지려는 생각도 접어버렸다. 침착해, 침착해야 한다. 꼬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여기서 정신을 놓아버리면 안 된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안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었잖아. 하지만 씁쓸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플로렌스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치치는 그 좋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없었다. 그는 루치아노에게 대놓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조곤조곤 플로렌스와 좋은 친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사실 써니보이와 이어주려고 했다는 말은 쪽팔려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나이를 먹긴 먹었는데 허투루 먹은 거 같다고, 와중에 생각했다.
루치아노는 내내 진지한 태도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다행히 많은 것이 결정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치치가 말을 끝마치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 걸 보고 루치아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치치.” 치치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으냐.”
그는 치치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것이 분명했다. 파파, 저와 함께하면 아무도 행복하지 못할 거예요. 루치아노는 조금 슬퍼 보였다. 치치는 못 할 말을 한 기분이 들어 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예.”
그는 루치아노가 왜 그런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나았다.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그건 익숙하니까 말이다. 치치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문 앞에는 써니보이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써니보이가 자신의 얼굴을 눈으로 훑는 것을 치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야.”
치치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었어?”
써니보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떻게 언질도 안 줄 수가 있나. 그러면, 그러면 이제까지 그가 했던 일들은 모두 무엇이란 말인가?
“근데 왜 아무 말도 없었어?”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써니보이가 말했다.
“깜짝 선물?”
진짜 미친 새끼인가? 욕이 튀어 나가려는 입이 꾹 닫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다. 치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방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써니보이도 그의 옆을 따라갔다. 침묵이 이어졌다. 치치의 방에 거의 다 와 갈 때즈음 써니보이가 말했다.
“나는 네가 플로렌스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뭐라고?”
펑, 치치는 자신이 죽었다던 헬기도 이런 식으로 터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 그가 써니보이에게서 들었고 들을 말 중 가장 어이없는 것일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그러니까 써니보이와 플로렌스가 자신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알아채 버리고 말았다. 손이 근질거렸다. 총이라도 있었으면 쏘고 싶었다.
어째 이전만큼이나 풀리는 일이 없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바로 치치가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단 한마디로 바뀐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럼에도 괜히 낯간지러워 말할 수 없는 것이 많긴 했다. 예를 들어 써니보이가 밤에 자신의 방에 찾아오는 이유 같은 것. 그래도 이전보다 치치는 솔직해졌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치치가 우뚝 멈춰 섰다. “사실 나는 플로렌스랑 너랑…….”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로 좋아하는 줄 알았어.” 서재에서 나오기 위해 되도 않은 이유를 들먹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나름 괜찮은 이유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순 억지였다.
“그랬구나. 내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네.”
써니보이가 담백하게 답했다. 형제의 이상 행동의 이유를 알아챈 사람치고는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치치는 더 민망해졌다.
“아, 젠장.”
결국 치치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가 그대로 마구 털었다. “써니보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이곳저곳으로 솟는 게 느껴졌다.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치치가 써니보이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이를 십 대 소년의 치기 어린 말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치치에게 이건 속죄에 가까웠다.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마지막 순간에야 깨달았다. 그걸 어떻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배운 것은 상처를 주는 법밖에 없었다. 상처를 사랑이라 부르는 건 그가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 써니보이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치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의 표정 변화만은 무섭게 눈치챘다.
“정말.”
써니보이가 말했다. 그는 다시 미소 짓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잠깐 그사이에. “어.” 치치는 괜히 속이 꼬이는 거 같아 바락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써니보이는 아무것도 모르며 이것은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다. 아직 어떤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다. 북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 맥박이 가까이 붙어 선 써니보이에게 들리지 않기를 빌었다.
“정말로.”
*
깨어나면 너는 사랑 때문에 한순간도 눈 못 붙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간 뒤에 깨어나라, 난 이제 오베론께 가봐야 하니까.
-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中
*
스티비는 가끔 써니보이와 플로렌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 이름이 서로의 절망이라는 걸 알았지만, 서로가 아니면 그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그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누구도 그 이야기를 몰랐다. 아니, 누구도 그 이야기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맨하탄의 로미오와 줄리엣. 하지만 이 이야기를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러도 될까? 그들은 아무에게도 버림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곁에 남기를 택했다. 하지만 플로렌스와 써니보이는 아니었다. 단 세 줄짜리 기사도 그걸 알고 있었다.
낡은 보드빌 극장에서 올라오는 오페레타에 마피아 보스가 관심을 가질 일은 만무하지만, 스티비는 어떻게든 <브루클린 브릿지의 이야기>가 써니보이 귀에 들어가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산타 루치아의 운영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내심 안심했다. 리차드가 찾아오기 시작한 후부터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이제껏 써니보이는 산타 루치아에 들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전화로 모든 것을 지시했고, 딱 한 번 왔던 것도 리차드가 이곳에 발걸음하기 전이었다. 비가 많이 내렸었고, 다 젖은 써니보이는 드물게 취해있었다. 이렇게 취해있는 써니보이는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치치 보체티의 무덤에 갔던 바로 그날.
스티비는 플로렌스의 이름을 입에 담고 싶을 때마다 런던에 대한 소식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써니보이에게 런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구차한 방법이었다. 써니보이의 뒤쪽에서 그의 머리를 털어주며 스티비는 말했다. “비가 많이 오네요, 런던처럼.”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난 후에는 후회했지만, 스티비는 침묵하는 써니보이에게서 무언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써니보이는 소파에 목을 완전히 누이고 스티비를 거꾸로 올려다보았다. 그 파란 눈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스티비는 안심하는 동시에 그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써니보이는 그런 스티비를 가만히 보다가 먼저 고개를 바로 했다. 그가 자신과 같은 장면을 헤아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산이 날아갔어.”
남은 우산이 없을 리가 없었다. 플로렌스의 양산이 날아갔던 모습을 떠올리고 스티비는 눈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써니보이가 자신을 등지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스티비는 다시 천천히 물기를 털었다.
“제일 아끼는 우산이었는데……. 너도 본 적 있을걸. 그게 날아가더니 부러졌어.”
“그런가요.”
“롸코가 잔소리, 잔소리……. 상원의원은 비도 맞으면 안 된단다.”
스티비는 롸코가 이따금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써니보이에게 독설에 가까운 충언을 날리던 것을 떠올렸다. 써니보이는 롸코의 말이라면 대부분 다 들어주었다. 물론 롸코가 물러설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써니보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예.” 스티비는 대답했다. “예, 보스.” 그가 부러 수건으로 시야를 가리면서 뒤로 돌았다.
“대신 제가 아끼는 우산을 드리겠습니다.”
하하, 하고 써니보이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 마.” “저보다는 보스가 쓰실 일이 많을 테니까요.” 그가 부러 무심한 투로 답했다.
“아니면 제가 똑같은 거로 하나 선물해드릴게요.”
“아니, 아냐.” 써니보이가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야.”
“아니면 같이 쇼핑하러 가드릴까요.”
써니보이는 웃지 않았다. 그가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괜찮아, 그냥 오래 써서 익숙한 거였을 뿐이야. 우산은 많으니까…… 그걸 쓰면 돼.”
스티비는 수건의 물기를 짜는 척했다. “이러다 약점이 우산이라는 게 다 소문나 버리겠는 걸.” 그러고 그는 다시 소리 내 웃었지만 스티비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상원의원 출마를 선언한 이후로 신문은 써니보이 보체티를 까 내리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써니보이가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스티비.” 스티비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아끼는 것들을 만들지 마.”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람들을 꽤 아꼈다. 동시에 배신자에 대한 처리 역시 냉혹했다. 많은 것들을 지켜야 하는 보스다운 선택이었다. 덕분에 보체티 패밀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결론적으로는 정계에서도 무시 못 할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 영향력에 쐐기를 꽂을 차례였다. 모두가 날 서 있는 지금, 스티비는 써니보이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스티비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지 않는 게 중요해, 스팁. 아무도.”
써니보이는 마침내 플로렌스를 잊기로 한 것일까? 아니면 치기 어린 날의 사랑을 후회하고 있다고, 너는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의 천사는 왜 날아간 거죠? 질문을 꾹꾹 삼킨 채로 스티비는 써니보이 손에 우산을 들려 보냈다. 써니보이는 그 우산을 끝내 펼치지 않았다.
이제야 스티비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폴로니아가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쫓겨난 리차드 벨피오레는 아폴로니아 입구에 주저앉아있었다. 플로렌스를 천사라고 부른 순간부터 스테파노는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결국 날아가 버릴 것이라는 걸. 아끼는 것이 많은 스테파노는 아무도 지키지 못할 것이고, 그렇기에 더 이상 아낄 상대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문에서 오스카 단테가 나와 그를 끌고 들어갔다. 스티비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아폴로니아 바 간판의 불이 꺼졌다. 스티비는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이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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