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2
노란 장미 (2)
*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치치는 장미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의자에 앉으려다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앳된 얼굴, 짙은 머리, 건강하게 살이 오른 몸, 주름이 거의 없는 매끈한 옷…….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정말 돌아왔다고? 어떻게? 치치는 습관처럼 귀를 만지작거렸다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걸 느끼고 손을 떨어뜨렸다. 어쩌면 이건 꿈일 것이다. 사후세계일 수도 있고, 죽기 직전 보는 환각의 일부일 수도 있다.
장미 꽃잎에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꽃잎을 만졌다. 손끝이 점점 젖어 들어갔다. 정말로 미친 것이 아니고 과거로 돌아온 게 맞다는 증거가 더 필요했다. 이런 감각도 전부 거짓일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꿈들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증거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처럼 기억을 바꾸면 된다. 꿈에서 치치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꿈이라는 걸 알아차렸어도 의지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설령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고 해도 그것은 치치가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꿈속에서 과거를 그대로 재연하는 배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라면? 정말로 그렇다면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오 년 안에, 루치아노가 죽기 전에 그가 망친 것들을 수습하려면 해야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써니보이, 루치아노, 스티비, 미겔레, 파울로, 플로렌스…… 그리고 파브리치오 감비노. 그는 이름들을 적었다. 플로렌스의 이름을 적을 때 그는 머뭇거렸다. 감비노의 이름을 적을 때 그는 망설였다. 사실 제일 궁금한 건 미겔레와 파울로였으나, 이들은 오 년 뒤에 알아봐도 괜찮을 것이다.
써니보이와 루치아노. 치치는 두 사람의 이름 위에 작은 원을 계속 덧그렸다. 루치아노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을까? 아니면 적어도 늦출 수는 없을까. 루치아노의 이른 죽음은 사실상 필연적이었다. 그는 루치아노가 맨 처음으로 쓰러진 날을 더듬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력감이 파도처럼 치치를 덮쳤다. 그렇다면 써니보이는, 플로렌스는? 그러니까, 스테파노 로시니는.
그는 저녁 식사를 걸렀다.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전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의 열여섯 생일날엔 그는 정말로 아팠다. 의사에게 치치는 모든 건 그 망할 노란 장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때 치치는 꼬박 삼 일을 앓았다. 하루만 푹 자면 나을 거라고 의사는 말했지만, 치치는 잠들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노란 장미를 바라보던 루치아노의 표정이 떠올랐다. 라스베이거스에서도 그는 그 꿈을 꾸었다. 모든 건 푹 자면 낫는다. 하지만 치치는 열여섯 생일 이후로 깊게 잠든 적이 없었다.
그가 기억을 더듬어 시간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써 내려가던 중 약을 건네주러 롸코가 찾아왔다. 문을 살짝 열고 무심코 그를 쳐다보았다가 치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섰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생경했다. 증거. 그는 이맘때쯤 눈 주변을 크게 다쳤다. 장미 알러지를 겨우 털고 일어난 치치가 롸코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고, 코 위쪽으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롸코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치치를 향해 먼저 몸이 괜찮냐고 물었었다. 다행히 시력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흉터가 진하게 남아 선글라스를 밤낮없이 쓰고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치치는 정말로 그날 이후 롸코의 맨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도련님?”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치치에, 롸코가 고개를 갸웃댔다. 이번에도 뭐가 달라질까? “롸코.” 그나저나 안 아픈데 먹어도 괜찮은 건가. 치치가 약을 삼키고 말했다.
“눈 조심해.”
“네?”
“눈. 조심하라고.”
치치가 제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롸코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 누가 그랬어. 요즘은 눈을 노린대. 진짜 조심해!” 롸코가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자, 치치도 답하듯 고개를 같이 끄덕여주고 문을 닫았다. 고작 이 정도로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하지만 롸코가 어디에서 다쳤는지는 치치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는 공책에 한 문장을 추가했다. 롸코 부상.
생각보다 치치가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공책을 책꽂이 깊숙한 데에 숨겨두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열여섯 살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 넓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침대는 몸을 옹송그려야만 온전히 그 안에 속할 수 있었다. 그는 이불을 덮고서 몸을 한쪽으로 둥글게 말았다. 그렇게 하니 침대는 두 명이 더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남았다. 그는 한쪽 팔을 이불에서 빼내 길게 뻗었다. 침대는 여전히 그의 팔을 받쳐주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감각이 낯설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아플 수가 있나. 왜인지 열이 오르는 거 같았다. 깊게 잠들고 싶어질 때마다 치치는 바뀔 미래들을 생각했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미래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꽤 괜찮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보통의 형제들이 그러하듯, 사소한 거로 싸우고 토라지고 아무렇지 않게 화해하는 형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뒷전으로 미뤄두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
치치 보체티가 변했다.
보체티 저택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롸코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롸코는 치치에게 약을 가져다주었을 때부터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으나, 그 이후로 롸코도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좀 더 빨리 알아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롸코는 이마의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흉터가 남겠지만, 눈은 피해서 다행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치치의 말처럼 상대방은 눈을 노렸다. 상대방은 총이 아니라 칼을 들고 있었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롸코가 채 총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요즘은 눈을 노린대. 찰나의 순간이었다.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상대방의 복부를 걷어찼다. 롸코는 이마를 베였고, 대신 그의 이마에 구멍을 내주었다.
또 롸코는 팔이 부러졌다. 이마에서 흐른 피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서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탓이었다. 생각보다 깊은 이마의 상처도 치료할 겸 그가 병상에 있었던 동안 많은 말들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생일 직후 일주일 동안 앓았던 치치 보체티가 이제는 더 이상 솔져들을 괜히 붙잡지 않으며, 급격하게 말수가 줄었고, 짜증도 부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예언가마냥 몇몇 솔져나 사용인들에게 경고를 하고 다니기도 했으며 그들에게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고, 정해진 일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방에만 있는다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롸코는 퇴원하자마자 치치를 찾아갔다. 치치는 마침 복도에 나와 있었다. 그는 롸코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롸코? 이제 괜찮은 거야?” 그는 이미 소식을 들은 듯했다. 치치가 빠르게 얼굴 쪽을 훑는 게 느껴졌다. 롸코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괜히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치치는 이미 머리칼 사이의 드레싱 된 상처를 본 것 같았다.
“덕분에 이마만 다쳤습니다.”
롸코는 선수를 쳤다.
“그래 보이네.”
치치가 뚱하게 말했다. “팔은?” “몇 달 걸린답니다.” “그래, 쉬어.” 치치가 롸코를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롸코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치치가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려 롸코를 바라보았다. 치치는 그의 다친 팔을 힐끗 보더니, 롸코와 꽤 오랫동안 시선을 맞추다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야, 롸코.”
치치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롸코는 무언가 놓쳐버린 기분이 들어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롸코는 한동안 임무에 나가는 대신 써니보이의 곁에 있게 되었다. 덕분에 롸코는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치치의 일과를 살필 수 있었다. 두 사람, 특히 치치의 하루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 나이대 소년들은 규칙적인 하루를 가질 수밖에 없고, 써니보이나 치치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치치 보체티는 달라졌다. 어떤 솔져의 말처럼 치치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소를 보였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나기 일쑤였고, 사격 연습 후 과녁을 루치아노에게 보여준답시고 들고 가지도 않았다. 열정적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실력은 급작스럽게 발전해있었고-치치는 무려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총을 쐈다!- 책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 말을 한 솔져는 평소에 치치에게 그렇다할 관심을 보인 이가 아니었으나, 롸코는 어투에서 미묘한 걱정을 읽어냈다.
표정이 풍부하던 열여섯 소년이 한순간에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의 공허한 얼굴을 가질 수는 없었다. 누구는 치치가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아 좋다고도 말했으나, 그들 역시 그것을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누구는 사춘기라고 했고 누구는 병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써니보이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써니보이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저택의 작은 도련님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에 능했고, 이번에도 어느정도 성공한 거 같았다. 하지만 항상 그의 곁에 있는 롸코는 써니보이의 불안을 알아차렸다. 치치는 더 이상 시답잖은 걸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이 형제 간의 대화는 대부분 그 시답잖은 시비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비는 오로지 써니보이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심을 끌기 위한 시도는 오히려 지금이 더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롸코는 써니보이가 겨누고 있는 과녁을 바라보았다. 구멍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치치는 이미 제 몫을 다 하고 방에 올라가 버린 후였다.
요 며칠 사격 연습은 내내 이런 모양이었다. 치치는 총을 잡으면 탄창을 갈아 넣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모두 쏴버리고는 간다, 한마디만 남기고 올라갔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 쏘는 것도 아니었다. 총을 못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대체 언제 연습을 하신 거지? 정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아닐까? 터무니없다고 넘겨버린 주장이 이제는 그럴듯해 보였다.
결국 써니보이가 팔을 내렸다. 롸코는 조심스럽게 곁에 다가갔다. 써니보이가 비어있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롸코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써니보이 역시 대답해주지 못할 것이다. 써니보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뭘 놓친 걸까.”
치치가 아무리 써니보이에게 시비를 걸어도 써니보이는 맞붙지 않았다. 치치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써니보이가 부탁을 하면 치치는 내켜하지 않더라도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치치가 그를 피하는 모양새였다. 뭘 놓친 걸까. 롸코는 생각했다. 마피아의 예민한 직감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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