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8

노란 장미 (8)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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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나탈리아 본타테가 루치아노 보체티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시실리 본토로 떠났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으나, 그 둘이 어떻게 결혼했는지는 화제성에 비해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마피아들의 결혼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루치아노와 나탈리아의 결혼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 때, 모두 이 결혼은 분명히 정략결혼일 것이라 확신했다. 보체티는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이제 막 세력을 불리기 시작한 가문이었고, 본타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시실리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이런 일이 드문 것도 아니었기에 관심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나탈리아가 홀로 시실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럼 그렇지, 하고 만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오직 몇몇의 마피아들만이 알고 있는 그들의 연애사에 따르면, 어느 한 파티에서 루치아노는 빛나는 금발을 틀어 올린 나탈리아에게 첫눈에 반한다. 나탈리아는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봐주는 루치아노가 마음에 들었고, 수많은 정혼자를 물리고 그를 택한다.

자주 루치아노는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때처럼 모든 걸 불태웠던 적이 없었다. 그때의 그는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아내와 함께 이 모든 것을 다 들려주고 너를 응원해주겠다고 말하리라 다짐했었다.

우리는 낭만의 도시로 갈 거야.

루치아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잠시 추억에 잠겼다. 이제 그 이야기는 들려줄 수 없겠지만, 루치아노는 여전히 제 아들들도 그런 사랑을 하길 바랐다.

 

 

*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

 

*

 

치치는 혹여나 써니보이가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등을 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써니보이는 제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지만, 때로 그는 미친 짓을 하곤 했으니까. 숨을 몇 번 몰아쉬고 나자 빠르게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까 거기서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의연하게 인사나 하고 박수나 치면서 있었어야 했는데, 춤을 추는 게 아니었는데. 당황스러워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 아니.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치치는 지금 자신이 없는 파티장을 상상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늘 그랬듯이, 파티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없으니 써니보이와 플로렌스는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될 것이고, 점점 관계가 발전되어나갈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지도 모르지.”

아주 희망적이었다. 이것보다 바람직한 결말은 없었다.

그러나 플로렌스를 생각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이름이 있었다. 스테파노 로시니.

그 애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치치가 시내에 나갈 때마다 한가득 신문을 사 온다는 사실을 저택 안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치치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말도 했을 정도였다. 치치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주변의 사람들, 주변에 있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는 정말로 아는 게 없었다. 너무 안일하게 굴었다. 후계자를 포기했다고, 서재를 선물 받았다고, 파티에 나간다고, 이곳에서 비로소 숨을 쉬게 되었다고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네가 결정을 내린 이유를 생각해, 치치 보체티. 그러니까, 그 애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냥 고아 신문팔이 소년으로 남는 거지. 영원히. ……영원히.

이렇게 꼬여버린 일이 얼마나 있을까? 얼마나 생길까?

스티비는 플로렌스와의 약속 때문에 이곳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를 다시 여기 돌아오게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그 어떤 약속도 없이 그가 써니보이를 위해 여기 남아있을까?

최악의 생일이었다. 차라리 장미 알러지가 생기는 편이 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최악이라고, 이것보다 최악은 없을 거라고.

 

 

*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서로가 너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아프게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었으니까.

 

 

*

 

“도망가자 써니보이.”

“도망가자 써니보이?”

스티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치치가 꺼내 든 ‘부티 보체티’의 대사를 쓰는 내내 이런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부티… 아가씨가 이런 성격이야?”

“너 몰라?”

머리를 몇 번 긁적이며 스티비가 말했다.

“실제로 뵌 적은 없는데.”

“들어본 적 없어?”

“뭘?”

치치는 얼빠진 표정으로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티비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가 잔뜩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래서 뭔데.”

“세상에, 진짜 몰라? 너 뭐하고 사냐?”

“그냥 말해주지? 써니보이도 말한 적 없어.”

“배우잖아, 영화배우. ‘헐리웃의 떠오르는 별, 부티 보체티’.”

치치가 들고 있는 신문을 툭툭 치며 말했다. 스티비는 치치가 건네준 기사를 대충 훑었다. 기사는 부티 보체티의 스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성을 트집 잡아 교묘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찾아보면-심지어 스티비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루치아노 보체티의 딸이 아니라 조카이며,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 시실리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기사는 아무래도 ‘떠오르는 별’보다는 ‘보체티’에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써니보이가 이걸 가만히 놔뒀단 말야?” 치치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스티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뭐, 그나저나 이런 성격이실 줄은 몰랐어.”

“이런 성격이라고는 말 안 했는데?”

“뭐?”

스티비가 소리를 높였다.

“그럼 사격선수권 대회 우승도 아니란 말이야?”

“아니? 그건 맞아.”

도대체가 어쩌라는 건지. 스티비는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거야?” 이번엔 치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상관없지. 시실리나 헐리웃에서 공연할 생각이 아니면.”

“미쳤어?”

“다행이네.”

치치는 부티의 화려한 이력과 매력적인 성격을 줄줄 늘어놓으면서도, 어디서부터가 진짜이고 거짓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치치는 스티비가 받아친 대본들을 훑다가 그럭저럭 이야기를 잘 이어 나가는 것 같은지 대신 나머지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건 좀 의외네”

“뭐가?”

“써니보이가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것도 있단 말이야?”

스티비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떤 것들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기도 하는 법이다.

써니보이는 유능한 보스였으나 제 사람에게도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다. 스티비는 자신이 써니보이의 솔져들 중에서 그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으나, 차마 그와 가깝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써니보이도 스티비의 많은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서로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끔 그것이 스티비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나는 영원히 이 사람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물론 떠날 생각도 없었지만, 스티비는 영원히라는 부사를 빼놓을 수 없는 자신을 알아차릴 때마다 아득해지곤 했다. 내가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날 수 있을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약속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스테파노는 영원히 써니보이 곁에 남을 것이다. 그가 바라기만 한다면.

 

*

 

 

소년은 알고 있었다. 시작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시작에는 이유가 없어도, 끝에는 반드시 이유가 필요한 법이다.

 

 

*

 

 

롸코는 어두운 골목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숨어있는 사람은 셋, 보이는 이까지 하면 다섯. 아직까지 이곳에 있는 놈들은 끽해야 남은 끄나풀이겠지만, 가끔은 그곳에 불씨가 옮겨붙어 다시 번져버리기도 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다. 로베르토를 데리고 나온 건 잘한 일이었다. 그가 없었으면 아무리 롸코라 했어도 조금 벅찼을 것이다.

로베르토는 루치아노가 치치의 시한부 소문을 듣고 저택을 뒤엎을 때쯤 치치의 솔져가 되겠다고 자원했다. 당연히 치치는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루치아노가 흔쾌히 그러라고 했기에 그는 롸코와 함께 보체티 형제의 솔져가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온 저택에 치치가 시한부라는 소문을 냈다고 했다. 롸코는 한마디 하려다 소문이 틀려서 다행이다 말하며 안도하는 어린 솔져를 보고 그만두었다. 이 저택의 첫째 도련님은 제 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는지 알까.

반대편의 로베르토가 신호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마지막 순간도 아닌데 너무 감상에 젖어있었다. 타깃을 확인한 후 그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는 날카롭고 깔끔하다. 인기척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감비노 놈들 끈질기네요.” 주변을 경계하며 로베르토가 속삭였다. 롸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외곽 쪽에 위치해 있다고는 하나 이곳도 엄연히 감비노의 구역이었다.

모두가 긴장한 두 패밀리 간의 협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감비노는 돈이 필요했고, 보체티는 건물이 필요했다. 물론 이 건물을 순순히 넘겨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감비노가 이 건물에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는 패밀리는 없었다. 이제는 보체티의 것이 되었지만.

산타 루치아. 이곳에는 도박장이 세워질 것이다. 루치아노가, 아니, 그의 두 아들이 이곳을 합법으로 만들 것이고, 온 뉴욕의 돈을 끌어모아 거대한 제국을 세울 것이다. 여기는 그들을 위한 곳이다.

“솔직히 저희까지 나올 필요는 없었을 거 같아요.”

로베르토가 투덜댔다. 롸코는 어느 정도 동의했으나 말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번 루치아노의 명령은 조금 과한 측면이 있었다. 아마 그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빨리 가서 쉬시죠.”

“먼저 가. 근처에 다른 솔져들이 있을 거야.”

“어디 가시게요?”

“들를 곳이 있어.”

롸코는 치치가 신문들을 사기만 하고 하나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가 왜 신문팔이 소년을 찾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루치아노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분명 무언가가 있고,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롸코의 감은 가끔 무섭도록 잘 들어맞았다. 뭔진 몰라도 위험한 일에 치치가 휘말려있는 게 분명했다. 롸코는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바라보는 일이 두려웠다.

그는 운이 좋았다. 임무를 실패하거나 다친 적도 많았으나 적어도 동료를 잃어본 적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솔져로 살아온 이들이 겪어서 종래에는 무뎌지는 상실의 감정을 그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감정에 붙잡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보고 롸코는 생각했다. 그는 운이 좋지 않았다. 그가 무너지게 되는 순간은 반드시 올 것이다.

 

*

써니보이 보체티는 말이 없다는 것과 자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빼면 여전히 아주 완벽한 댄스 파트너였다. 플로렌스 역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미없는 평가겠지만 말이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써니보이는 빙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치치 보체티는 저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부터 급격히 표정이 굳어갔었다. 플로렌스도 순간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분명 그와는 초면이었는데,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써니보이가 험담을 한 걸까? 하지만 가까이서 그를 보았을 때, 플로렌스는 그 표정이 악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굳어있는 얼굴 너머 깊숙이 묻혀있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파티장을 뛰쳐나가고, 써니보이도 그 뒤를 따라갔을 때 플로렌스는 루치아노에게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읽었다. 확실히 형제끼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긴 했었다. 또 루치아노가 그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소문도. 지금 보니 딱히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았다. 그는 써니보이가 돌아오자 근처에 있던 사용인에게 약을 들고 가라고 지시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써니보이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플로렌스는 이런 써니보이의 표정을 볼 때마다 가끔 답답해졌다.

“혹시 실수한 게 있을까요?”

템포가 빨라졌다. 써니보이가 능숙하게 스텝을 밟아나갔다. 플로렌스도 어렵지 않게 따라갔다.

“아니요, 완벽하신데요.”

“그거 말고요. 그……” 플로렌스는 말을 골랐다. “형제분이요.”

아, 하고 짧게 호응한 써니보이가 말했다.

“없어요. 정말로 아픈 거였어요.”

써니보이가 다시 빙긋 웃었다. “신경 쓰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플로렌스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치치 보체티는 분명 자신에게 용서를 바라고 있었다. 그 깊은 죄책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

 

 

며칠 동안 주변에 캐묻고 다닌 결과로, 치치는 플로렌스가 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잘 알 것 같은 사람을 붙잡아도 정보는 그것뿐이었다. 그래,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모피는 이전부터 보체티 패밀리가 공을 들여온 사업이었으니.

하지만 그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치치는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외면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는 자신이 너무 감상에 젖어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무력감이 다시 치치를 덮쳐왔다. 왜 삶은 언제나 자신의 편이 아닌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결국 내려놓고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써니보이와 플로렌스는 차라리 잘된 일임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스티비도 잘 풀릴 수 있었다. 플로렌스는 이곳에 있을 것이고, 그러면 스티비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를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그는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치치가 나갈 때마다 신문을 사며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치치는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원래는 써니보이의 후계자 자리가 공고화되면, 아니면 아예 루치아노가 죽은 뒤 독립하면서 나가려고 했지만 너무 늦을 거 같았다. 어떤 일이 또 변수로 나타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무작정 서점을 낸다고 하는 건 무리일 테니, 시장 조사를 한답시고 일하고 싶다 하면 될 것이다. 아무런 의심없이 시내를 뒤져볼 수도 있을 거고.

술이 간절했다. 치치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흐린 밤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을 훔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기에, 차라리 구체적인 방안을 짜겠다고 마음먹고 창틀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책을 잡고 자세를 취했다. 어떤 미친놈이 이곳에 들어올 생각을 했나, 그것도 이 시간에. 치치가 불청객의 얼굴을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책을 내려놓았다.

“깜짝이야.”

그는 놀랐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안녕, 치치.”

써니보이였다. 치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써니보이는 문을 닫고 치치가 있는 쪽으로 걸어와, 그가 앉아있는 창틀 아래 소파에 훌쩍 올라왔다. 얼씨구. 써니보이가 무릎을 끌어안고 치치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냐?”

“잠이 안 와서.”

그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으며 답했다. 치치는 대꾸하는 대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흐린 날이라 다행이었다. 이 적은 빛 아래에서도 그의 얼굴은 너무 선명했다.

“뭐 하고 있었어?”

“책.”

“어떤 책?”

솔직히 아무거나 집어온 것이었다. 표지를 힐끔 보고 치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여름 밤의 꿈.”

“셰익스피어네.”

치치는 이것이 거의 일주일 만의 대화다운 대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치치는 입을 다물었고, 치치가 그러니 써니보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째 우리는 생일 때마다 이 모양일까?

“맞아.”

“재밌어?”

“응.”

“나도 읽을래.”

“잠이나 자.”

잠에 취한 눈을 하고서 뭘 읽겠다는 건지. 치치는 책을 꽂으려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써니보이가 옷깃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깨어있어야 한단 말이야.” 재빠르게 제 옷깃을 잡은 것 치고, 써니보이가 책을 집어 드는 동작은 느릿했다. 치치는 스티비가 해줬던 보스 써니보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티비의 말만 들었을 때 그는 몸에 피 대신 얼음이 흐르는 사람이었다. 아, 그래. 이전 생의 써니보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때는 치치에게 이런 서재가 없었으니까. 그러면 지금은, 지금의 너도 그렇게 될까? 치치는 자신을 붙잡은 채 울던 써니보이를 떠올렸다.

“나도 자러 갈 거야. 너도 자.”

“노래를 들어야 하는데.”

“노래?”

치치는 정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응. 자려면…… 노래 들어야 하는데.”

“노래는 못 불러주는데.”

말해놓고 치치는 아차 싶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는 농담하는 법을 배웠다. 그건 정말로 치치의 적성에 맞았다. 진심을 거짓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모든 걸 편리하게 만들어줬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그랬다.

써니보이는 한참 치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실수였다. 자장가를 불러줘야겠지. 자장가라고? 그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써니보이가 고저 없는 투로 말했다.

“내가 잠들길 바래?”

내가 죽길 바래? 써니보이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는데도, 치치는 한 박자 늦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응.”

“왜?”

그는 조금 더듬거리다 말했다.

“……그래야 내가 조용히 책을 읽지.”

“시끄럽게 읽을 순 없는 거야?”

“그러면 네가 못 잘 거 아냐.”

“난 그래도 잘 자.”

대화가 빙빙 돌았다. 치치가 결국 조금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책 읽으면 잠 깬다며.”

써니보이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말했다. “네가 읽어주는 건 괜찮아.” 그리고 그는 다시 치치에게 책을 건넸다. 치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너는 내가 방금까지 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까. 그는 어떤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치치는 왜 자신이 이것을 그리워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 이건 꿈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모두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였다. 이걸 꿈이라 부르는 건 읽는 자의 몫일 것이다.

 

*

 

참다운 연인들이 언제나 좌절을 겪는다면

그것은 운명의 포고령 같은 거네.

그럼 우리 시련에게 참을성을 가르치자

왜냐하면 그것은 상념과 꿈, 한숨, 소망,

그리고 눈물이 가련한 연정을 따르듯이

사랑에겐 으레 있는 좌절인 셈이니까.

 

-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中

 

*

 

 

친애하는 롸코에게.

 

라스베이거스엔 잘 도착했나요?

이미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패밀리에서 쫓겨났를 나오게 됐어요.

지금은 아폴로니아에 있어요. 아시죠? 산타 루치아 맞은 편이요.

제가 그곳을 샀어요.

아무튼, 소식이 없어서 먼저 편지합니다. 말했다시피 이제 따로 연락받을 곳도 없어서요.

편지 보시면 바로 연락해주세요. 아폴로니아 전화번호를 남깁니다.

 

스테파노 로시니.

 

p.s. 그가 당신이 패밀리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듣고 기뻐했어요. 대놓고 그러진 않았지만, 잘 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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