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10

총과 칼 (2)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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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치치의 태도가 바뀐 걸 눈치챈 듯, 플로렌스는 말들을 줄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한껏 흥분되어있음을 느낀 치치는 곧바로 조금 후회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길게 대화해본 적이 이전과 지금을 통틀어서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하지.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치치는 이것이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대화-물론 치치는 거의 듣기만 했지만-임을 확실할 수 있었다. 플로렌스는 내내 상기된 얼굴을 숨기지 않았고, 치치도 소리 내서 웃는 걸 몇 번이나 참을 수 없었다. 부티가 루치아노의 뺨을 양손으로 때린 걸 눈앞에서 보고 웃음을 참느라 노력했다-정말 실례지만, 그때 미스터 보체티의 표정을 봤어야 했어요.-는 플로렌스의 말을 들으면, 써니보이도 웃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이렇게 즐거운 파티는 또 오랜만에요.”

한참을 웃고 난 후 플로렌스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파티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치치가 동의의 표시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얼굴은 여름의 더운 공기 때문에 살짝 붉어져 있었다. 플로렌스는 정말 말이 많았다. 부티와 함께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써니보이 역시 부티를 꽤 아꼈었다. 그래, 그런 사람 곁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은 정말로 잘 어울렸다. 미소를 짓는 치치의 옆모습을 보면서 플로렌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다시 보니까, 써니보이랑 별로 안 닮은 거 같아요.”

왜? 치치가 입을 여는 순간, 발코니의 문이 벌컥 열렸다. 플로렌스와 치치는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을 올려다보았다.

“치치, ……플로렌스.”

써니보이였다. 아직 답을 듣지 못했는데. 써니보이는 얼빠진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 플로렌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매너는 정말 끝내주네. 치치는 써니보이가 몸을 채 돌리기도 전에 일어났다. 먼지를 툭툭 털고 난 치치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써니보이와 눈이 마주쳤다.

“왜?”

“아냐.”

아니긴 무슨. 치치가 눈을 찌푸리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파파가 찾으셔?” “아니.” 아, 내가 플로렌스랑 있는 게 싫었구나. 치치는 알 만하다며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플로렌스가 말했다.

“즐거웠어요, 치치.”

“예, 저도요.”

써니보이가 눈동자를 굴려서 저와 플로렌스를 번갈아 보는 게 느껴졌다. 치치는 제 형제를 위해 뭐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제 놀러 오세요. 서재 구경시켜줄 테니까.”

플로렌스의 눈이 커졌다. 치치는 써니보이에게서 이 정도의 감정적 동요를 본 적이 없으므로, 그와 닮은 플로렌스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곧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초대해줘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놀러 갈게요.”

플로렌스가 예의 바른 인사를 했고, 치치와 써니보이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치치는 그가 윈스턴 씨의 옆으로 갈 때까지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치치를 써니보이가 말없이 쳐다보았다. 치치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고, 눈썹을 으쓱일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왜?”

“이름 부르네.”

“이름? 뭐, 플로렌스 말하는 거야?”

써니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씨구. 치치는 기가 찼다

“너희도 부르잖아?”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조금은 맞춰줘도 괜찮을 것이다. “응.” 치치는 조금 시무룩해 보이는 써니보이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묻지도 않은 플로렌스와의 대화를 띄엄띄엄 꺼내기 시작했다. 플로렌스는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거지. 분명 이 느낌이 아니었는데, 싶었지만 어쨌든 치치는 이 소란스러운 파티의 한구석에서 제 형제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계속 말을 했다. 계속하면 괜찮아질 것이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치치는 플로렌스가 네가 내 이야기만 한다더라 하는 이야기 대신 플로렌스의 독서 취향에 대해 말했다. 내 서재에 있는 책들을 좋아할지 모르겠어, 아니면 이미 읽었을지도 몰라, 따위의 말들을 내뱉다가 치치는 문득 어느 날 밤 자신이 써니보이에게 빌려준 책을 떠올렸다. 한여름 밤의 꿈. 빌려주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 밤이 정말 꿈처럼 느껴져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몇 달이 다 되어가는데. 잊어버린 자신도 자신이지만 써니보이는 뭐란 말인가? “치치?” 그가 말을 하다가 멈춰서 그런지, 써니보이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책은 언제 돌려줄 거야?”

“책?”

써니보이가 되물었다. 치치는 그가 왜 그런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어, 책.” 써니보이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책을 말하는 거야, 치치?”

“왜 이래? 니가 빌려 갔잖아. 읽지도 않았어?”

치치가 인상을 팍 구겼다. 왜 장난을 치지? 얘가 이런 거로 장난을 칠 리가 없는데. 써니보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셰익스피어 말하는 거야?”

“그래! 니가 마음에 든다고 빌려달라며.”

순간 써니보이가 작게 입술을 깨무는 것을 치치는 보았다. 착각인가? 그의 표정은 순간 아주 짙은 어둠과 닮아있었다. 써니보이가 미소를 지었다.

“미안, 잠깐 잊었었나 봐. 금방 돌려줄게. 거의 다 읽었어.”

거짓말. 치치는 겨우 말을 삼켰다. 그러니 그 역시 말할 수 있는 건 거짓밖에 없었다.

“……아냐, 천천히 줘. 나는 이미 읽은 거니까.”

“고마워, 치치.” 써니보이가 다시 웃어 보였다. “됐어.” 치치도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

 

모든 게 끝났다.

문장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마자 그는 저택으로 향했다. 눈이 부셨다. 난리 통에 떨어뜨린 선글라스는 이미 가루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주인을 잃은 집은 텅 비어있었고, 역설적이게도 어수선했다.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들을 뒤로하고 롸코는 망설임 없이 서재로 향했다. 그곳에는 써니보이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의 자리였던 것처럼, 이 모든 풍경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인데도 그는 꼿꼿했다. 다만 계속 롸코를 등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써니보이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치가 자주 그러했듯이. “써니보이.” 롸코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보체티 패밀리의 3대 보스는 답이 없었다. 롸코는 얼굴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을 애써 잊어보려고 했다.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프지 않았다. 메말랐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죽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스를 지키지 못한 솔져.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의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하다못해 옷깃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보체티 패밀리의 2대 보스는 그렇게 죽은 것이다. 손쓸 틈도 없이, 허무하게.

“떠날 필요는 없어.”

롸코가 떨어뜨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치치도 루치아노의 솔져들을 모두 구석으로 치워버리지 않았던가. 하물며 자신은. “써니보이.” 롸코가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가 어떻게 그의 솔져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표정을 볼 수가 없으니 어떤 의중인지도 알 수 없었다. 롸코가 답이 없자 써니보이가 천천히 말했다.

“대신…… 내가 없을 때 이 아이를 좀 돌봐줘.”

그제야 롸코는 소파에 어린아이가 누워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군가요?”

“내 솔져.”

써니보이가 몸을 돌렸다. 그는 방긋 웃고 있었다. 롸코가 인상을 찌푸렸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이 아이가……. 아이가 웅얼거리면서 몸을 웅크렸다. 써니보이가 내려간 담요를 다시 끌어올려 주었다.

“멀베리 스트릿의 신문팔이 소년.”

멀베리 스트릿이면 산타 루치아가 있는 곳이었다. 롸코는 더 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롸코 역시 그렇게 이곳에 왔다. 신문팔이는 아니었지만, 혼자이긴 했었다. 써니보이는 슬퍼 보였다.

“스테파노.”

착각일 수도 있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너무 따가웠다. 롸코는 스테파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잠들었는데도, 계속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솔져로 키우실 건가요.”

롸코가 물었다. 써니보이는 여전히 미소를 띤 낯이었다.

“그럼.”

그건 되묻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제일 낫겠지. 써니보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는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롸코는 스테파노를 안아들었다. 아이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온기가 어색해서, 그는 괜히 아이를 몇 번 토닥여주었다.

“……예, 보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롸코는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

 

 

조만간 오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것인지, 내내 플로렌스는 보체티 저택을 찾았다. 치치는 그를 위해 기꺼이 서재에서 가장 책을 읽기 적당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원래는 치치의 자리였던 곳이었다. 그는 대신 써니보이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써니보이는 서재에 자주 오지도 못했다. 플로렌스가 보체티 저택에 오느라 바빴던 것처럼, 써니보이는 ‘자신의 일’을 하느라 바빴다. 플로렌스를 상대하는 건 자연스럽게 치치의 몫이 되었다.

확실히 플로렌스와 함께 있는 시간은 즐거웠다. 플로렌스 역시 책을 즐겨 읽었으며, 어느 정도 치치와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안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좋아했고 소네트를 사랑했다. “저는 비극이 좋아요.” 플로렌스가 처음 치치의 서재를 찾은 날이었다. 치치는 뻣뻣하게 서재를 구경시켜주었고, 플로렌스는 내내 얌전히 설명을 듣다가 셰익스피어를 모아둔 칸을 바라보고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거든요. 모든 일은 운명이라고 말하면 조금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치치는 플로렌스의 말을 듣고 그가 잡지 못한 시간을 체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티비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 그럴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반대로 너무 빨리 거슬러 온 시간에 대해서도 그랬다. 써니보이와 플로렌스가 이렇게 일찍 만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기억하는 삶들이 그들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결국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떤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럴 것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는 수많은 시나리오를 써놓았던 노트를 여전히 자주 펼쳐보았고, 적었고, 끊임없이 수정해나갔다. 꼭 그러면 그 일이 일어날 것처럼, 운명이라는 걸 무시할 수 있을 것처럼.

치치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운명을 믿으시나요.”

플로렌스가 책 하나를 뽑아 들었다. 써니보이가 돌려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산타 루치아 개관식이 끝나자마자 치치는 바로 책을 돌려받았지만, 써니보이의 태도에는 영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써니보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차라리 요정들의 장난이라고 믿죠.”

치치는 조금 웃었다. 차라리 장난처럼 생각하는 게 좋을까. 그가 돌아온 이유도 누군가의 놀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치치의 예상과 많은 것들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것도 놀이의 일부일지는 알 수 없었다. “희극이 더 재밌는 것 같긴 해요.” 비극을 좋아한다 해놓고 희극을 꺼내 든 것이 조금 민망했는지 그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치치를 지나쳐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쫓아가며 치치는 책 몇 권을 추천해주었다. 써니보이가 재밌다고 했어요, 라는 말을 꼭 곁들여서.

어쩌다 써니보이가 서재를 찾으면, 치치는 둘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 작은 정원을 한 번 돌고, 복도에서 조금 서성거리다가 문에 귀를 대보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그제야 들어갔다. 처음에 둘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은 듯싶었지만 그렇게 몇 번이 지나자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치치는 시간을 끌다 못해 대화 중간에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했다.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누군가를 연인으로서 사랑해본 적은 없었지만 치치는 어쨌든 연인들 간의 신호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법이다. 그는 플로렌스가 써니보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자신을 바라볼 때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써니보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봄이 지나고 비로소 여름이 될 때까지 그들 사이에서는 수상한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둘은 분명 연인이라 하지 않았나? 그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플로렌스는 브루클린 브릿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걸 잊을 리가 없다. 잊어서도 안 되고. 하지만, 하지만. 문 너머 플로렌스와 써니보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치치는 입술을 깨물었다.

 

*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아, 널 기억해라. 네가 누군지 기억해. 내가 널 왜 데려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라. 네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생각해. 계속해서 생각해라. 네가 누군지 잊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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