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3

노란 장미 (3)

Words Fail by 백이
9
1
0

*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저택에서 자신을 두고 어떤 말이 오가는지 치치가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풀 수 있는 종류의 오해가 아니다. 설명한들 믿을 리도 없었다. 롸코에게 경고한 것처럼 그가 기억하는 몇몇 이들에게도 말을 흘리긴 했으니 그걸 들이밀며 믿으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그가 말한 것이 틀렸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그의 기억들을 써내려가면서도 끊임없이 의구심이 들었다. 생각보다도 더 자신의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차치해도 그랬다. 아침마다 피곤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치치는 계속해서 과거를 복기했다.

의문 가득한 눈길들을 피한답시고 열여섯의 자신처럼 굴기도 싫었다. 그것이 치치다울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단 정신적 나이는 그 두 배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 행동들이 모든 걸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행동이 바람직하다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도 치치는 알고 있었다. 써니보이가 제 방 앞에서 서성거리는 풍경은 꽤 볼 만했지만, 생각보다 유쾌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것만큼 급한 일은 없었다. 사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룻밤 만에 나왔다. 치치는 써니보이에게 노란 장미를 건네받은 순간 깨달았고, 결심했다. 욕심내지 않으면 된다. 이전의 일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바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주 간단했다. 그러지 않으면 된다. 나만 잘하면, 나만 욕심내지 않으면 떠나지 않아도 되고 죽지 않아도 된다. 나만 없으면.

치치가 모든 것을 가지려고 했던 이유는 응당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것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인정한 사실이었으나, 다시 제 손으로 적으려니 뭔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열여섯 살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숨을 한 번 내뱉었다. 울어서 흘려보낼 시간 같은 건 이미 다 써버렸다.

최대한 빨리 써니보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줄 것.

치치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렇게 적었다. 보체티 패밀리의 2대 보스는 써니보이가 될 것이다. 모든 해피엔딩의 출발점은 거기서부터였다. 그가 패밀리에 남기를 선택하든, 아예 이 저택을 떠나든지 간에 치치 보체티는 보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는 약하고 어리석었다. 치치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후계자가 아닌 치치 보체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도 죽지 않고, 누구도 떠나지 않고, 모두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먼저 써니보이가 그랬던 것처럼 패밀리를 나와야 할 것이다. 써니보이가 관용을 베풀어 뭐라도 맡길지 모르겠지만, 그를 위해서라면 나와주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나와서는?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다. 써니보이는 피짜리아에서 일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치치는 피자는 싫었다. 올리브 오일? 그건 그나마 괜찮았지만, 기왕이면 치치는 패밀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길을 걷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치치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삶인 것도 같았다. 이 커다랗고 따뜻한 저택에서 계속 외로웠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후, 치치는 제 속에 묵혀두었던 질문들에 어느 정도 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는 왜 자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눈길을 주게 되는지, 왜 지나친 것들을 쉽게 놓지 못하는 것인지 같은.

치치는 본인에게 솔직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막연하게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구체화하는 건 처음인 거 같았다. 꽃. 그는 이상하게 부끄러워졌으나, 막상 첫 글자를 적으니 어렵지 않았다. 써놓고 보니 민망할 정도로 별것 없었다. 책. 서점. 도서관. 패밀리. 도서관의 책들은 제 것이 아니고, 꽃집은 꽃파는 소녀가 있다. 서점이 제일 그럴듯했다. 재밌겠네. 어쩌면 책과 꽃을 같이 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시나리오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이전의 그는 이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루치아노가 죽기 전에는 보스가 되는 것이,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써니보이를 죽여버리고 보스 자리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미래였으므로.

페이지마다 빼곡히 글씨가 들어찼다.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창가의 장미가 하나둘씩 마른 꽃잎을 떨어뜨렸다. 장미를 바라볼 때면 어쩔 수 없이 딱 한 권이 비어있는 책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반드시 그 책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니, 저 공간 자체를 굳이 채워 넣을 필요도 없다. 그냥 비어있는 채로 놔둬도 괜찮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써니보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줄 것. 그는 맨 앞의 페이지를 펼쳐서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치치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공책부터 덮었다. “치치.” 짙은 안개 같은 목소리가 방 틈으로 스며들었다. 숨이 막히기 전에 치치가 문을 열었다. 써니보이의 표정은 늘 그렇듯이 짐작할 수 없었다.

“파파가 널 찾으셔.”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치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써니보이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목이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루치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치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

 

 

치치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루치아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비로소 책상 앞에 서자, 루치아노가 고개를 들어 치치를 바라보았다. 치치는 차마 그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바닥을 보고 있었다. 켕기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변명을 생각해두긴 했으나, 루치아노가 납득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치치.”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치치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어디 아픈 거냐.”

아프냐고? 치치가 순간 미간을 구겼다. 설마 생일날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루치아노는 이런 것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드러내는 이가 아니었다. 이것보다 더 심하게 아프거나 크게 다쳤을 때도 그는 의사를 불러줄지언정 괜찮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 순간 벼락처럼 치치는 루치아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왜 이전에는 그의 방식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신은 분명 루치아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루치아노는 치치에게서 직접 그 이유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저 스스로 모든 걸 털어놓길, 그래서 네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스스로 깨치기를. “아니요.” 치치가 짧게 답했다. “그래.” 루치아노가 무심한 투로 말했다. 그는 치치가 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있다는 걸 이미 알아차린 듯했다. 혹은, 일부러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더 미룰 이유는 없었다. 치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삶에 하루빨리 익숙해지고 싶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삶은 언제나 그의 먼 소망이었다.

치치 보체티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열여섯 살 생일로 돌아온 이유가 있다면 그건 단 하나였다. 오직 그만이 이 뻔하디뻔한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이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이야. “파파, 저는, 저는…….” 단어들이 입술 앞에서 자꾸만 헛돌았다. 그만 이럴 때도 되지 않았나. 루치아노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동자. 치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저는 후계자 싸움에서 빠지겠습니다. 패밀리 비즈니스는…… 써니보이가 더 잘할 거예요.”

후계자 싸움이라는 단어가 턱 걸렸으나, 그는 딱히 이 상황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싸움일 수가 없었다. 그는 애초에 싸움에 낄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치치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말을 하는 내내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치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체티 패밀리 보스의 얼빠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치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 순간 루치아노가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는 대부분 치치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약한 놈, 못난 놈, 넌 이래서 문제야……. 열여섯 살의 그는 이러한 말을 들으면 꼭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해야 했는데, 지금은 슬프다기보다는 놀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치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그것을 반항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왜 대답이 없는 거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루치아노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은 표정이었다. 치치는 당황스러웠다.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걸 물어보았기 때문이었다. 루치아노는 마지막 순간에 직접 써니보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것이 한순간의 충동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써니보이를 데려온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파파가…… 원하시는 거잖아요.”

치치는 루치아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가 여전히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다시 의자에 천천히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나가. 나가거라.”

루치아노가 이마를 짚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치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등을 돌렸다. 문 바깥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는 여전히 숨을 고르고 있는 루치아노를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복도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써니보이를 빼면.

“무슨 일… 있어?”

써니보이가 자신의 온몸, 특히 얼굴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열네 살때 루치아노가 던졌던 유리컵의 파편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이후로부터, 써니보이는 치치가 루치아노의 방에서 나올 때마다 얼굴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이후로 루치아노는 아무것도 던지지 않았지만, 치치는 구태여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버릇처럼 없어, 라고 대꾸하려다 마른침을 삼키고 답했다.

“후계자는 너야, 써니보이.”

 

 

*

 

“지금 나한테 당신 무덤 위치를 물어본 거야?”

스티비가 황당해져서 물었다. 치치는 뭘 그런 게 대수냐는 표정이었다.

“뭐, 보체티 공동묘지에 있겠지.”

그는 머뭇거리는 스티비를 보고 어색해졌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묻혀있는지는 아냐?”

“몰라. 일단 치치 보체티는 없지.”

그제야 하하, 하고 치치가 소리내 웃었다. 스티비가 덧붙였다.

“당신의 비석은 있지…… 아마도. 가본 적은 없어서.”

치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스티비는 치치를 힐끗 보고 타자기를 노려보는 척했다.

스테파노는 치치 보체티의 무덤을 알았다. 그의 무덤은 보체티 공동묘지에 있지 않았다. 정말로 비석은 있을지 몰라도, 그의 진짜 무덤은 저택 뒤편 작은 정원에 있었다. 그날 밤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그가 저택에 들어온 지 딱 일 년째 되던 날, 그래서 유난히 밤이 길게 느껴졌던 날. 그는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다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저택을 나서는 써니보이를 발견했다. 어린 소년은 자신의 보스가 위험하리라 생각했고, 몰래 그의 뒤를 밟았다.

물론 써니보이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스테파노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써니보이는 언젠가 스테파노가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테파노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길 가만히 기다렸다. 영민한 아이는 보스의 뜻을 곧바로 알아채고 곁으로 왔다. 스테파노는 장미 향이 이렇게 독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써니보이가 중얼거렸다. 답을 바라고 꺼낸 말은 아님을 스테파노는 알았다.

여기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어야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나요? 스테파노는 묻고 싶었다. 나는…… 치치를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영민한 스테파노는 그것이 혼잣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정한 후계자는 보스인 걸요. 써니보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어둠이 가리고 있었다. 스티비가 기억하는 건 단지 알싸한 장미향 뿐이었다.

다음날 스티비는 그게 모두 진실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써니보이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스티비는 자신의 보스에게서 이런 경고를 받을 것이라 상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큰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그는 고작 열네 살이었으니까.

“하긴, 폭사했는데 뭐가 묻힌 것도 웃기긴 하네.”

문득 치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곧바로 그는 다음 대사들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스티비는 그것들을 받아쳤다. 스티비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의 무덤은 보체티 저택 뒤, 써니보이의 방에서 바로 보이는 그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당신의 무덤은 온통 노란 장미로 뒤덮여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이 무덤인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