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7

노란 장미 (7)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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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익숙한 꿈이다. 목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만이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수 있는 진동을 느낀다. 과녁을 겨누고 있을 때의 고요는 이곳에 없다. 하지만 손을 타고 올라오는 반동은 무섭도록 익숙한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을 쏴본 적이 없는데, 왜?

왜냐니, 네가 나를 쐈잖아.

그는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생명을 본다. 귀까지 찢어지는 미소와 총이 낸 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웃음을 느낀다. 그림자가 발목에 엉겨온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 그림자는 천천히 몸을 타고 올라와 끝내 심장을 움켜쥔다.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익숙한 꿈이다. 대사와 지문도 모두 외우고 있는 익숙한 대본. 치치는 눈가를 닦아내며 협탁 위를 더듬었다. 세 시 삼십칠 분. 그는 상체를 일으켜 시계를 다시 올려놓았다. 등이 축축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을 깜빡일수록 모든 게 선명해졌다. 치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은 아직 그 반동을 모른다. 정말로 모를까.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고 몸을 돌려 침대에 엎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나야 했으니 차라리 밤을 새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저절로 눈이 감겼다.

결국 이날이 와버렸다. 치치는 옷을 맞추고, 머리를 다듬고, 밀린 숙제를 하고, 생각하고,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생각했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이래서 싫었던 건데. 정신이 몽롱해졌다. 파티에 감비노 패밀리가 올지도 모르겠네. 차라리 그 전에 누가 죽여버리면 좋을 텐데. 치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미쳤구나, 치치 보체티. 이곳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며. 모든 걸…… 다 써니보이에게 맡겨놓고선.

치치는 창문을 등지고 누웠다. 괜히 눈이 부신 것 같았다. 초침은 심장과 엇박으로 달리고 있었고, 귀는 아직도 덜 아문 것인지 잊을 만하면 욱신거려왔다.

하필 오늘일 필요까진 없었잖아.

그는 아무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생일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건 평생 치치가 바랬던 것인데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그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

 

 

꽃병을 가지고 오니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스티비는 장미를 병에 꽂아넣고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치치는 노란 장미를 좋아해.

“알러지가 있지만.”

치치 보체티가 돌아왔다. 정말로. 스티비는 괜히 입술을 한번 비죽이고는 밖으로 나섰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가 항상 담배를 피우는 곳에 누가 이미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다 그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치치였다. 그는 꼭 스티비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 서 있었다. 스티비는 놀랐으나 최대한 침착한 척했다. 아예 어딘가로 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건 짐작했다. 그게 이 골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멀리 안 나갔네.”

치치가 대꾸 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스티비는 그 모습을 보고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치치는 의외로 쉽게 담배 한 대를 건네주었다. 그는 뭔가 불안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 빨아들이자마자 스티비는 토할 것처럼 거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이렇게 독한 건 처음이었다. 치치는 고소하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냐, 담배도 안 펴?”

“이게 뭐야.”

“담배.”

담백한 어투로 치치가 말했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스티비는 몇 번 더 연기를 토해내고 나서야 기침을 멈출 수 있었다. 스티비는 따질 요량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가 어째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기에 의욕이 팍 꺾였다. 목을 몇 번 더 가다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딱 한 개비만 남아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없는 건지. 치치가 그런 스티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스티비는 눈만 굴려 그를 흘겨보았다. 웃음은 그친 상태였다.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써니보이의 표정이 자주 그러하듯. 그는 스티비의 시선을 한동안 피하지 않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너.”

“뭐.”

스티비는 여전히 치치를 째려보고 있었다.

“사람 죽여봤냐?”

“갑자기 무슨…… 무슨 뜻이야.”

스티비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어느 장면을 떠올렸다. 조각나 이어지지 않는 단상들. 평생 맞추지 못할 퍼즐. 치치의 말투는 덤덤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스티비는 그것이 짜증이 났다.

“말 그대로.”

치치가 스티비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몇 살 때?”

“열일곱.”

“기억하고 있네.”

동시에 치치는 머금고 있던 연기를 내뱉었다. 연기만으로도 기침이 났다. 스티비가 콜록댔다.

“듣고 싶은 대답이 뭐야?”

“아무것도.”

치치는 그 뒤로 아무 말이 없었다. 스티비는 몇 번 더 콜록대다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버리고 산타 루치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치치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

 

 

써니보이는 치치를 경호하기라도 하는 듯 그의 옆에 딱 붙어있었다. 치치는 파티의 그 어느 것보다도 그게 제일 신경 쓰였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별말이 없는 루치아노도, 손님들이 저와 써니보이를 재보는 시선도 견딜만했다. 온갖 음식 냄새와 뒤섞인 노랫말과 대화 소리들, 그럼에도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치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치치는 써니보이에게 좀 가라고 눈치를 몇 번이나 줬지만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로 못 알아들었거나-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이곳에서 겉도는 치치의 곁을 자신이 지켜줘야겠다 결심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눈치도 보고 있었다. 아마 루치아노의 초대장을 받은 그 날 이후 치치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보였기 때문이리라. 당장 미래의 보스인 써니보이에게 말 한마디라도 걸어보려는 사람이 널려있는데, 고작 자신 때문에 이러고 있다니. 치치는 써니보이가 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련히 잘 하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이 파티를 지켜보는 데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써니보이가 생일에 대해 일절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파티답게 많은 사람들이 저택을 채우고 있었다. 뉴욕의 마피아는 모두 이곳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감비노 패밀리만 빼고. 치치는 써니보이에게 그 사실을 듣고 크게 안도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는 아직 감비노를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치치는 삐딱하게 서서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루치아노를 발견했다. 그는 다른 패밀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치치와 써니보이를 각각 옆에 세우고 함께 손님을 맞았다. 들어오는 손님마다 치치를 보고는 오랜만이라며, 반갑다고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왔다. 그들 중에는 치치가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치치는 아무렴 주최자의 아들인데 안 나왔으려고, 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루치아노는 보체티 저택에서 파티를 열어도 제 아들을 데려오지 않을 사람이지만, 아무튼. 써니보이를 계속 제 옆에 세워둘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루치아노는 두 아들을 모두 파티장 한가운데에 자유롭게 풀어두었다. 파티를 즐기거라, 라고 했으니 사실상 그들의 공식적 임무는 끝난 셈이었다. 이렇게 쉽게? 치치는 루치아노와 써니보이의 태도를 곰곰히 생각하다 자신이 너무 싫다는 티를 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티가 났으면 곤란한데. 하지만 루치아노를 보아하니 괜찮은 것 같았다. 루치아노는 확실히, 이전보다 치치를 많이 다그치지 않았다. 아니, 다그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루치아노는 그 빌어먹을 소문-치치가 곧 죽을 것이라는-에 대해서도 한동안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 별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검진 결과를 분명 전해 들었을 텐데도 한동안 그는 저녁은 물론이고 아침 점심을 모두 몸에 좋다는 음식만 골라서 많이 먹어야 했다. 애초에 음식을 많이 먹던 편도 아니었던 그는 결국 배탈이 났고, 그제야 본래의 식단으로 돌아왔다. 금지당했던 에스프레소도 먹을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도 좋지만 파티엔 역시 술이지. 샴페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치치는 웨이터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써니보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재빠르게 샴페인 두 잔을 가져와 하나를 내밀었다. 써니보이가 잔을 가져가자마자 치치는 단숨에 그걸 들이켰다. 써니보이의 두 눈이 커졌다.

“즐기라고 하셨잖아.”

그러자 써니보이도 천천히, 그러나 한 번에 샴페인을 들이켰다. 그가 조금 아쉽다는 듯이 빈 잔을 바라보자, 치치는 피식 웃고는 다시 사람들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평화도 나쁘지 않았다. 이곳이 피 흘리지 않는 전쟁터라는 사실을 치치 역시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모른 척하고 싶었다. 모르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곡은 조금 더 경쾌한 박자의 왈츠로 바뀌었다. 치치가 곡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이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보던 써니보이가 불쑥 말했다.

“춤출래?”

“어?”

치치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즐기라고 하셨잖아.”

거짓말. 치치가 언짢은 기색이자 써니보이가 덧붙였다. “저기, 애들도 춤추길래.” 그가 가리킨 곳에서는 정말로, 그들 또래거나 조금 더 어린아이들이 어설픈 왈츠를 추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제 형제자매끼리 추고 있었으나, 개 중에는 이제 막 풋풋한 사랑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다 큰 남자애들끼리 무슨……. 얼굴로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미 써니보이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한 곡만 출 거야.”

치치는 써니보이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다. 빨리 끝내버리고 보내버리자. 제 형제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자리를 잡고 서자 써니보이가 치치와 맞잡지 않은 손을 치치의 어깨 위에 올렸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니가 여자 파트 추게?”

“그럼?”

그가 너무 당연하게 대답해서 치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써니보이는 언제나 여자 파트를 췄었다. 정확히 말하면, 치치가 항상 남자 파트를 춘 거였지만.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언제였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파티에 가지 않더라도 교양이랍시고 춤을 추곤 했었던 기억이 있긴 했다. 써니보이에겐 얼마 안되었을지 몰라도 치치에겐 아니었다. 망했네. 우스운 꼴은 다 보여주게 생겼다. 최대한 발을 밟지 않는 걸 목표로 하기로 하며 그는 제 형제의 날개뼈 언저리에 손을 올렸다.

몇 박자가 지나고 나자 치치는 나름대로 제 박자에 맞춰 리드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 몸은 스텝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 써니보이가 말했다.

“축하해, 생일.”

역시 써니보이도 알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써니보이는 치치가 도망갈 수 없는 순간들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내는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스텝이 꼬일 뻔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비로소 맞닿았다. 치치는 써니보이가 자신에게 노란 장미 다발을 내밀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장미들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벽에 곱게 매달려 있었다. 향은 모두 날아갔지만 색은 그대로인 노란 장미를 바라보면서 치치는 가끔 시간을 보냈다. 벌써 일 년이라니. 여전히 서툴고, 미숙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그래도 치치는 이제 써니보이에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너도.”

써니보이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다시 풀어졌다. 치치는 만족했다. 이번에는 써니보이가 바닥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치치는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제야 감각들이 살아났다. 손에서 천천히 온몸을 타고 퍼져나가는 온기가 느껴졌다. 오직 그것밖에는 남지 않았다. 손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던 거였나? 치치의 손은 언제나 차가웠다. 그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써니보이가 처음 이곳에 왔던 날, 그는 무턱대고 써니보이의 손목을 잡았다가 화들짝 떼어버렸었다. 그의 손목이 너무 뜨거웠던 탓이었다. 길에서 왔다고 그러지 않았었나. 찬 바람을 맞고 살았다기엔 아이의 몸은 너무 따뜻했다. 써니보이 역시 놀라서 제 손목을 붙잡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루치아노는 그 모습을 보고 치치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며 혼을 냈다. 써니보이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갑자기 손목을 잡혀서가 아니라 너무 차가워서였으리라. 그러니까 치치는, 그의 이름이 햇살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와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봤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써니보이가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음에 높낮이가 없었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 치치는 자신이 결국 발을 밟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미안.” 그가 재빨리 말하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아직도 이 스텝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했다. 다시 박자를 따라가기 위해 천천히 스텝을 밟던 찰나, 문득 치치는 고개를 들었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연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금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한 소녀였다. 그 소녀는 춤을 추는 내내 계속 치치와 써니보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써니보이를. 치치는 이게 써니보이를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스텝을 밟으면서 치치는 그 소녀를 등지게 되었다. 치치가 속삭였다.

“야, 너 이따 한 곡 더 춰야겠다.”

써니보이가 미소를 지었다.

“추기 싫다며.”

치치가 정색했다.

“뭐? 나 말고, 너만.”

“왈츠는 혼자서 못 추는데.” 써니보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치치가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내 뒤에 금발 여자애 보여? 분홍색 원피스.”

써니보이가 치치의 뒤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윈스턴 말하는 거야?”

“윈스턴?”

다시 치치는 소녀와 마주보게 되었다. 써니보이와 소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응. 플로렌스 윈스턴.”

날카로운 무언가가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파티였기에 총은 없었으나, 대신 손에 든 무언가를 무기처럼 쥔 사람들도 있었다. 오직 짙은 농도의 고요만이 존재했다. 공기가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현이 끊어졌습니다. 지휘자의 사과가 들려왔다. 곧이어 바이올린을 제외한 다른 현악기들의 연주가 이어졌다.

왈츠는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치치는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아, 왜 잊고 있었을까? 영국인 모피상 피츠윌리엄 윈스턴의 금지옥엽 외동딸, 플로렌스 윈스턴. 아니, 안돼, 안돼. 그는 입술을 잘근거리기 시작했다. 루치아노가 제 아들들을 부른 건 그때였다. 써니보이가 제 입술을 향해 손을 올린 그 순간.

플로렌스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잊어버렸던 몇 개의 기억이 비로소 떠올랐다. 부티의 친구, 부티 보체티의 제일 친했던 친구. 저 어린애가, 써니보이 때문에, 그러니까, 나 때문에 죽었다고.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 생에서 그는 이전 생에서 플로렌스를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났으면 잊었을 리 없다. 저렇게 써니보이를 닮았는데, 이미 그를 사랑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 둘은 정말로 맨하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어울리는 칭호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그가 움직여야 했을까? 그래, 아마 열여섯 살 이전이었겠지. 그 전에도 써니보이는 파티에서 플로렌스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알았을 리가 없다. 왠지 눈물이 나올 거 같아 볼의 안쪽 살을 계속 씹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치치는 부끄러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플로렌스였다. 이전에도 몇 번 파티 같은 데서 얼굴을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정식으로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한 건 처음이었다. 써니보이도 고개를 숙였다. 써니보이는 굳어있는 치치를 힐끔 바라보다가 그의 이름을 작게 부르며 팔을 툭툭 쳤다. 치치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치치, 보체티입니다.”

“안녕하세요.”

플로렌스가 환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치치는 플로렌스의 눈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써니보이가 루치아노와 윈스턴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들도 뭔가 치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루치아노는 묘한 표정이었고, 윈스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치는 완전히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대체 그가 무엇을 놓쳤는지, 또 어떤 걸 놓치게 될지 알아야 했다. 치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하필 플로렌스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푸른색이었다. 그는 결국 대화에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삐끗거렸다.

“죄송…… 합니다.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치치는 답도 듣기 전에 몸을 돌려 급하게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전부 네 탓이야, 네 탓이라고. 나와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치치가 두 칸씩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치치!”

그의 발목을 잡는 목소리.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써니보이의 목소리가 온 벽을 타고 울렸다. 치치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눈 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당장 토하거나 쓰러지고 싶었다. 써니보이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치치는 그것이 멈춰설 때까지도 등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치치.”

써니보이가 치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치치는 그제야 천천히 뒤로 돌았다. “괜찮아?” 그가 자신의 팔을 쓸어내리면서 물었다. 치치가 그 손을 떼어내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또 멍청한 표정. 일 년 전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써니보이가 손을 갈무리하기 전에 치치가 말했다.

“가봐. 그 여자애, 너 보고 있던데.”

치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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