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1

노란 장미 (1)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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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마침내 그는 추락하는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 속에 있었다. 마지막에서야 치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려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솔직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수라장 속에서 치치 보체티는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죽음을 생각했다. <미아 파밀리아> 속 악마 치치 보체티의 결말과, 뉴욕의 영웅이 될 제 형제를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드디어 써니보이 보체티는 저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써니보이 보체티의 솔져는 그의 삶의 목적이 자신이라고 말했다.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을 사람이라고. 그 말을 듣고 치치는 그가 놓쳐버린 기회들을 생각했다. 열셋, 열여섯, 스물하나, 그리고 몇 시간 전. 치치 보체티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답을 내릴 수 없는 가정들이 떠돌아다녔다.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

 

 

그리고 치치는 딱딱한 벤치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또 그런 꿈이다. 아니, 이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기억이지. 드디어 치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미쳤구나. 요 며칠 사이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꿈의 형태로 나타났으나, 지금처럼 빙의라도 한 것처럼 풍경이 갑자기 바뀌어버릴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예지몽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지금의 치치 보체티와 꿈속의 치치 보체티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 있었으며, 동시에 보체티 저택에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이 서른 언저리의 치치 보체티인지, 혹은 몇 살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십 대 시절의 치치 보체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예언가가 된 것일까, 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것일까? 그래도 치치는 방금 본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인 것이다. 허무하고, 악당다운 최후였다. 치치 보체티는 정말로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게 될까? 기억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전부는 아니었으며, 명확하지도 않았다. 시간대가 섞여서 무엇이 언제 일어나는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당장에 자신이 직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치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쨌든 허공이나 비행기가 추락한 바다나 땅은 아니었다. 집, 아니, 보체티 저택. 저택 뒤편,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머무르던 정원의 벤치였다. 치치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나가다 손에 무엇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겉표지가 닳아있는 셰익스피어. 그가 어렸을 때나 읽었던 책이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셰익스피어를 거의 읽지 않았다. 비극은 싫었다. 물론 그는 희극도 많이 썼지만 표지가 닳아있는 책은 전부 비극이었다. 무엇보다도 치치는 소네트가 싫었다. 아니, 난 소네트도 좋은데. 그는 책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 소설 같은 건 미친 사람들이나 쓰고 읽는다는 루치아노의 말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미친 게 분명했다.

“치치.”

혹은 죽었거나. 치치는 반사적으로 책을 등 뒤로 숨기고 벌떡 일어났다.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어린 써니보이가 치치와 똑같은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의문점이 설명되고 있었다. 치치 보체티는 이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이건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들 중 하나였으므로. 오직 그런 일들만 명확하게 기억한다는 건 이게 주마등이라는 뜻일 테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필 지금 이 순간일 리가 없었다.

“축하해 생일, 열여섯 살.”

써니보이가 등 뒤에서 노란 장미 다발을 치치에게 내밀었다. 장미 알러지, 라는 말을 꺼내려다가 치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아직 장미 알러지가 없었다. 알러지는 열여섯 살 생일, 치치가 장미를 받는 그 순간부터 생겨났으니까. 그게 알러지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믿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것들의 증거이므로, 치치는 저택 뒤편 작은 장미정원에 몰래몰래 가면서도 알러지가 있다 믿었다.

치치는 그 정원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작았던 그곳을 문득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써니보이는 그것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모든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얕게 깨물고 있는 입술과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올곧게 뻗어있는 손과 그 위의 노란 장미들. 치치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할 말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일종의 꿈이니까. 죽기 직전에는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그 그림 중 하나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몸을 맡기고 있는 것뿐이다. 근데 왜 하필 이 기억일까. 왜 하필.

“이게 뭐야.”

“장미…….”

써니보이는 조금 웃다가, 치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장미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것을 보고 다시 얼굴을 굳히고 입을 꾹 다물었다. 치치 보체티는 다음에 이어질 대사를 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말해야 했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므로. 그렇지만 치치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입이 열릴까 봐 입술을 씹었다. 계속, 계속 치치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치치.” 써니보이가 장미를 들지 않은 손으로 치치의 입술을 쓸었다. 치치는 눈을 크게 뜨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미친 게 아닐지도 몰라.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써니보이가 그런 치치와 눈이 마주치고 황급하게 손을 떼어냈다. 그는 노란장미가 등 뒤로 사라지는 걸 보고, 다시 눈을 굴려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려고 했으나 써니보이는 이미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치는 말하지 않았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의지로 말하지 않았고, 써니보이는 그의 기억에 없는 행동을 했다. 치치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는지, 써니보이는 고개를 들어 치치의 눈치를 슬쩍 보고 다시 두 손을 치치의 앞으로 가져왔다. 이슬이 맺혀있는 노란 장미. 치치는 써니보이의 손을 덥석 잡아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게 아니라, 정말로 그가 과거로 돌아왔다면.

 

 

*

 

 

“결말을 꼭 이렇게 내야겠어?”

타자기를 두드리던 스티비가 문득 멈추더니 말했다. 치치는 산타 루치아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가 스티비는 쳐다보지도 않고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왜?”

“써니보이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걸.”

써니보이라는 말에 그가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곧 스티비 쪽으로 설렁거리며 다가갔다. 사실 스티비는 그런 그의 걸음걸이가 꽤 마음에 들었다. <미아 파밀리아> 속 치치에 이런 느긋함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

“애초에 그런 결말을 쓴 사람이 누구였더라?”

“캐릭터가 달라졌잖아.”

"뭐가 달라져?"

스티비가 치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대답했다.

“차라리 구하는 건 어때? 악당도 기꺼이 구해주는 뉴욕의 영웅!”

치치의 표정이 구겨졌다.

“됐어, 그대로 가. 오히려 그게 더 애매해.”

스티비가 미간을 찌푸리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치가 다시 본인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찰나였다. “그래도.” 그가 중얼거렸다. “뭐?” 치치가 되물었다.

“그래도 대사 하나만 말해줘.”

“뭘?”

“돌아간다면, 뭐라고 할 거야?”

스티비는 꼭 치치가 후회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투였다. 치치는 그 질문에 어느 쪽이든 기꺼이 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치치가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한 소리 너머로 스티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살아 돌아간다면?”

소리가 멈췄다. 치치가 씨익 웃었다. 스티비는 어쨌든 따라 미소를 지었으나 영 찜찜한 표정이었다.

“고맙다고 해야지.”

‘치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대사였다. 뭐야 그게. 스티비는 김이 팍 샌 표정으로 의자 위에 널브러졌다. 치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뒤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치치는 코너를 돌자마자 멈춰 섰다. 벤치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졸지에 같이 뛰게 된 써니보이가 반동에 휘청거리며 숨을 고르는 게 느껴졌다. 치치 역시 작게 숨을 내뱉으면서,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한껏 돌려 벤치를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치아노가 나타났다. 이게 뭐냐. 루치아노 보체티는 노란 장미를 들고 있는 치치를 보고 그렇게 말했었다. 장미……. 숨소리를 죽여야 했는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루치아노는 그들이 있는 쪽을 등지고 있었다.

루치아노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셰익스피어.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치치는 심장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분명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책을 내려다보다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치치는 그제야 써니보이의 손을 놓고 주저 앉아 몇 번 마른세수를 했다. 양손이 속절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꼴사나웠다. 다행인지 뭔지 써니보이는 아무말도 않고 있었다.

어느새 써니보이는 치치처럼 쪼그려 앉아있었다. 치치의 눈에 벌겋게 자국이 남은 써니보이의 손목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장미 다발로 시선이 옮겨갔다. 넌 왜 이걸 나한테 줬을까. “치치.” 써니보이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느껴졌다. 치치는 써니보이를 바라보았다. 써니보이가 다시 장미를 내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생일 축하라니. 어이가 없어진 치치가 저도 모르게 웃자, 써니보이는 치치의 품에 노란 장미를 던지듯 안겨주었다. 그의 심장과 장미가 부딪혀 퍽 소리가 났다. 아, 어쩌면 이것은 정말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과거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웃기게도, 써니보이가 자신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열여섯 살 생일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왜 하필 장미야.”

치치는 다시 대본대로 극을 이어가 보기로 했다. 써니보이가 털썩 완전히 앉았다. 치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내린 건 써니보이였다. “꽃 파는 소녀가.” 그는 치치의 품에 안겨있는 장미 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장미 꽃말이…… 우정이라던데.”

끝으로 갈수록 그가 어물거렸다. 치치는 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야, 노란 장미는 꽃말이 네 개야, 네 개.”

웃음소리와 함께 써니보이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하지만 치치의 시선은 장미를 향해 있었다.

“네 개씩이나?”

치치는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정말로 꼴사나웠다. “응, 네 개.” 선명한 기억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써니보이의 손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푸른 눈을 보면서 방긋 웃었다.

“고마워.”

써니보이는 뻗었던 손을 채 뒤로 물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굳는 게 보였지만, 당장은 알 바가 아니었다. 돌아왔다. 치치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뛰듯이 정원을 빠져나갔다. 써니보이의 얼빠진 표정이 뒤를 쫓아오는 것 같아, 그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다시 심장에 제 왼손을 올리고 주저앉았다. 그 박동이 온 방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변했다. 모든 게 변했다.

치치 보체티는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억을 뒤집어엎었다. 루치아노는 치치가 장미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치치는 써니보이에게 노란 장미를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아, 젠장.

그는 아마도 과거로 돌아왔다. 망할 열여섯 살 생일, 루치아노가 죽기 오 년 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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