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5

노란 장미 (5)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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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써니보이의 후계자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자연스레 루치아노와 써니보이가 함께 있는 시간도 늘어나면서, 치치는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루치아노와 치치는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저녁 시간에서 치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루치아노는 원래 치치가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써니보이는 이런 치치와 달리 잘해 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는 파파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이전에도 똑똑했던 써니보이는 이번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역시 그곳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앞으로 치치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이것보다 최선인 선택은 없을 것이다. 이게 맞았다.

그것과 별개로 치치는 여전히 불안을 느꼈다. 얼마 전 그는 책꽂이에서 공책을 꺼내다가 책상을 뒤엎었다. 누가 이곳을 건드렸다. 청소를 했다기엔 이제까지 사용인들이 책상 위를 건든 적은 없었다. 뭐가 변했지? 누가 들어왔지? 무엇을 꺼내 가려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없어진 것들을 찾았다. 누가, 누가 나를.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동이 귀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책상을 붙들었다. 서 있어야 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떨어진 것들을 주워 천천히 살폈다. 전부 있었다. 공책도 당연히 있었다. 맥이 탁 풀렸다. 너무 예민한 탓인가. 치치는 눈가를 꾹 눌렀다가 뗀 다음 그가 이름들을 써놓은 페이지를 펼쳤다.

이럴 때마다 그는 그 이름들과 옆에 쓴 과거의 행적을 되새겼다. 이 이름들 중 지금 치치가 아는 이는 몇 없었다. 써니보이와 루치아노, 파브리치오 감비노 말고는. 차라리 이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플로렌스야 써니보이와 만나지 않으면 알아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감비노 패밀리는 모종의 이유-스티비가 쓴 미아 파밀리아 초고에는 이렇게만 써 있었다-로 써니보이가 상원의원에 당선되기 몇 해 전 자멸했다. 치치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그를 쏠 것이다. 미겔레와 파울로는 어쩌면 평생을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콜롬비아 형제 역시 알아서 행복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스티비였다. 치치는 그의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다. 가난한, 고아, 신문팔이 소년. 맨하탄 길바닥에 그런 소년은 널렸다. 치치는 꽤 앳되던 스티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써니보이가 가르쳐주고 보살펴줬다고 했으니 어쩌면 생각보다 더 어릴지도 몰랐다. 신문팔이 소년에게 이름을 물은 이후로 치치는 머릿속에서 그를 지울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들기 직전에도, 심지어는 정원에 있을 때도 스티비가 떠올랐다.

아까부터 같은 페이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진짜 환장하겠네. 신경 써서 뭐 하려고? 다시 데려오기라도 할 건가? 데려오면 어쩔 건데. 글자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치치는 루치아노가 제 옆에 올 때까지, 그 발소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치치.”

그 목소리는 언제나 그를 현실로 끌어왔다. 치치가 벌떡 일어났다. 손이 등 뒤로 숨어들어 갔다. 루치아노는 덤덤한 낯이었다. 저도 모르게 책을 등 뒤로 숨겨버리긴 했지만, 치치는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루치아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를 마주하는 것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치아노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그는 치치가 뒤로 물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치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게 재밌냐.”

루치아노가 비로소 치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손에 든 책은 희극이었다. 적어도 그가 이 책을 뺏어 들어 아무 데나 펼쳐도 형제를 죽이거나 자식에게 배신당하는 장면을 볼 걱정은 안해도 된다. 치치는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여전히 그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솔직하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

제게 바라시는 게 뭔가요? 치치는 물을 수 없었다. 루치아노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루치아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장면을 마주해야 할까. 그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그래.”

언뜻 들으면 무심할 정도로 담백한 어조였다. 치치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띄운 의문을 급하게 지워냈다. 루치아노가 덧붙였다.

“늦었지만…… 2층 맨 오른쪽 두 번째 방이다.”

루치아노는 치치의 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나아갔다. 뭐가 늦었다는 걸까? 루치아노가 완전히 사라지자 치치는 그제야 저택으로 올라갔다. 그 방이면 아마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곳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저택을 떠나올 때까지 그 방이 쓰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별다른 의문을 가지진 않았다. 저택에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방은 널렸다. 대부분은 출입이 금지된 루치아노의 방들이거나, 굳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곳이었다. 이곳도 그것들 중 하나일 테지. 파파가 자신을 부른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치치를 찾아올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할 말이 있으면 그곳에서 했어도 되었을 것이다.

치치는 문 앞에 서서 조금 낡은 듯한 문을 위아래로 훑었다.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두 번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치치는 좀 더 세게 노크했다. 고요했다. “파파?” 대답이 없었다. 루치아노가 아닌가? 그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책들이 있었다. 서재? 하지만 루치아노의 서재는 이곳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책장으로 다가갔다. 대부분 소설뿐이었다. 그가 이런 걸 읽을 리 없었다. 소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라 말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치치는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방은 물론이고, 몇 개 놓여있는 책장들도 모두 빽빽하게 책이 꽂혀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책을 읽으라는 듯 배치되어있는 책상 위에는 책 한 권만이 덜렁 놓여있었다. 설마, 설마. 치치는 저 책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굳이 채워두지 않은 자리의 주인, 영원히 비어있을 그 자리의 주인, 셰익스피어. 치치는 그제야 책들을 하나하나 뽑아보았다. 치치가 읽은 것도, 읽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전부 한번 펼쳐보지도 않은 새 책임은 확실했다. 그는 아무 책이나 완전히 뽑아내어 표지만 넘겼다.

“대쉬…… 우드.”

치치가 자주 가는 서점이었다. 셰익스피어도 이 서점에서 데려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는 책장 사이를 걸어 다니다, 창가에 놓여있는 소파를 바라보다가, 서재 한가운데 놓인 책상을 괜히 만져보다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치치 보체티는 미치지 않았다. 그는 과거로 돌아왔으며, 많은 것이 바뀌었고,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기어이 마시고 만 에스프레소 때문인지, 굳이 구멍을 내버린 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본인도 모르겠는 소리를 흘리며 스르르 누워버렸다. 품에는 아마 이곳에서 제일 낡은 책일 셰익스피어를 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치치 보체티는 달라졌다. 루치아노도 물론 그걸 알고 있었다.

그는 사실 이 저택에서 치치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이었다. 벤치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책을 보자마자 루치아노는 멀지 않은 곳에 치치가 숨어있음을 눈치챘다. 뉴욕의 황제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눈빛을 잘 알았다. 그것이 자신의 아들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치치는 자신을 두려워하더라도 숨지는 않았다. 물론 그 나이대 애들은 원래 변덕이 심한 편이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굳이 찾아내서까지 혼을 내는 건 오히려 좋지 않았다. 루치아노는 책을 줍고 곧바로 돌아갔다.

치치는 뭔가 달라졌다. 아들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포함해서, 변한 건 없었다. 그의 아들은……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일주일간 아팠다가 나은 이후로 치치는 루치아노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는 치치를 오로지 저녁 식사에서만 볼 수 있었다. 본디 치치는 제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의 동선에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었는데 말이다.

저녁 식사 자리는 아주 고요했다. 루치아노는 치치의 목소리가 사실상 이 저녁의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떻게 변했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도대체 왜 자신의 아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느냐였다. 사춘기겠지, 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루치아노는 평생 자신의 직감을 믿고 살아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저택 뒤편 정원에서 주워 온 책은 내내 그의 서재 책상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책 표지 안쪽에는 그도 알고 있는 시내의 서점 이름이 쓰여 있었다. 꽤 구석에 있어서 굳이 찾아가려고 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책장을 몇 장 넘겨보았다. 손때가 잔뜩 묻어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루치아노는 책을 덮고 서류 더미들 사이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적당한 때에 돌려주면 될 것이다. 어쩌면 관심을 끄는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솔져들을 보고 꽂힌 게 있는 모양이지.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치아노가 들은 말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치치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함을 선언하자마자 루치아노는 산타 마리아 병원의 일을 떠올렸다. 알았나? 하지만 루치아노는 치치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파파가…… 원하시는 거잖아요. 치치를 내보내고,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유리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마룻바닥이 그의 걸음에 맞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리 조각의 바삭거리는 소리가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가 무엇을 놓친 걸까? 제 아들은 어디서 루치아노의 의중을 읽었으며, 언제부터 그런 결심을 한 것일까?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치치는 절대 좋은 보스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포기하는 법을 가르친 적은 없었다. 치치는 언제나 인정받길 원했고, 그 성정을 이용해 많은 것을 가르쳤다. 지금까지 후계자에 대한 공식적인 언사를 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핏줄과는 상관없이, 그럴만한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치치를 세울 것이다. 루치아노는 치치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벼랑 아래쪽에서 절벽을 오르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절벽을 오르기 위해서는 쉬어선 안 된다. 언제 디디고 있는 곳이 무너질지 모르니까, 언제 위쪽이 무너져 자신을 덮칠지 모르니까.

저택의 분위기와 다르게 치치는 의연해 보였다. 전보다 루치아노의 눈치를 더욱더 보긴 했으나 완전히 기죽은 태도는 아니었다. 그는 무려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시작했으며-심지어 아침에도 마셨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귀를 뚫은 채로 나타났다. 루치아노는 헷갈렸다. 치치는 어떻게든 파도 속에서 숨을 토해내는가 싶다가도, 완전히 심해 속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이라기에는 그는 충분히 만족스러워 보였고, 삶을 충실히 살아가기로 선택한 사람이라기에는 자주 먼 곳을 바라보았다.

롸코는 머뭇거리면서 치치가 시내에 나갈 때마다 서점에 들른다는 것, 온갖 종류의 신문을 사 모은다는 것, 매일 정원에서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거의 매일 같은 이야기였다. 루치아노는 복도로 나왔다. 복도 끝, 제일 구석에 있는 창문에서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치치가 자주 앉는 벤치도 보였다. 보체티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들의 첫째 도련님에게 일어난 변화를 내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귀를 뚫고, 자주 웃고. 치치가 행복해 보인다고 그들은 말했다. 행복이라고.

행복이 무엇이냐는 원초적인 질문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는 치치가 이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대체 왜? 루치아노는 제 안에서 단단히 뒤틀려있는 매듭 같은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랫동안 묶여있던 매듭.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지도 못하는, 차라리 덩어리에 가까운 매듭을.

그것을 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작을 찾을 수 없으니 끝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 매듭을 푸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을 잘라내 버리는 것. 긴 시간들이 사라지겠지만, 영원히 그 부분은 비어있겠지만, 다시는 이어지지 않겠지만.

그는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모든 비밀을 혼자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므로.

루치아노 보체티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치치가 영원히 모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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