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21

총과 칼 (13)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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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은 내 사랑이 내 파멸이었다, 이거네.


- 셰익스피어 소네트 80 中

 

*

 

“상처, 써니보이가 그런 거냐?”

역시 아폴로니아에서의 일을 들은 모양이었다. 왜 첫마디에서 하필 써니보이 이름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롸코나 로베트토가 이 일로 루치아노에게 얼마나 깨졌을지 알 수 있었다. 치치는 천천히 아폴로니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리차드와 오스카, 그리고 로잘린은 쏙 빼버리고, 취객의 위협과 써니보이가 그걸 막아서면서 있었던 일은 과장과 축소를 적절히 섞었다.

루치아노는 미동도 대꾸도 없이 있다가 치치의 말이 끝나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써니보이가 일부러 그런 거 같냐고 묻고 있는 거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치치는 저도 모르게 구긴 얼굴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루치아노의 반응을 살폈다.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루치아노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나? 목이 꽉 막혔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래. 이제 그만 두거라. 네 투정은 잘 들었다.”

투정? 치치가 되묻기도 전에 루치아노가 말했다.

“그 서점 주인은 네 의사를 묻더구나. 신뢰를 쌓은 건 잘한 일이다. 너는 원래 그런 것에 서툴지 않았나.”

“그렇, 그렇죠.”

반사적으로 대답은 했으나 치치는 혼란스러웠다. 투정, 서점. 투정은 그럴듯했으나 서점이 같이 나올 이유는 뭐란 말인가. 토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점을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고. 내가. 

“……파파, 저는 제 서점이 갖고 싶은 게 아닌데요, 아니, 갖고 싶긴 한데, 당장은 아니고, 그……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앞에 서면 말이란 걸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루치아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뭐냐.”

“……그냥 써니보이랑 좀 놀고 싶었어요.”

허, 하고 루치아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놀고 싶었다고. 써니보이랑.” 솔직히 말도 안되는 변명이라는 건 안다. 이 시점에, 이 중요한 시점에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나 하고 괜히 산타 루치아를 건드리고 아폴로니아에서 사고나 치고……. 하지만 파파, 걔가 밤마다 내 방 앞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아요? 걔가 내 책을 빌려 가놓고 기억도 못 하고 있었던 건 아시냐고요. 걔는 모든 걸 기억하는데, 맨날 내가 지 방에 데려다준 건 기억도 못 했다고요…….

“그냥, 그냥 좀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요. 산타 루치아는… 죄송합니다. 써니보이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전 여전히 싸움 같은 거 할 생각 없고요, 그냥 좀…… 힘들어 보이길래. 그래 보여서…….”

“넌 써니보이에게 너무 물러.”

루치아노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써니보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셈이냐?”

알고 있었구나. 롸코가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직접 들으니 손끝부터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써니보이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그가 맨발로 복도를 돌아다닌다는 것, 그가 치치에게 말을 걸면 치치가 정말로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것. 여기까지는 롸코가, 루치아노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알고 있을까. 그 똑똑한 새끼가 그 밤들은 절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 밤들은 오로지 치치만이 끌어안고 있다는 이야기는.

써니보이에게 무르다고? 치치는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본래의 루치아노라면 치치가 이러고 있는 꼴을 당연히 지금까지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감정적으로 구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 ……왜 저한테 산타 루치아를 주신 겁니까?”

거기를 당신이 아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나한테 그 서재를 줬으면서, 내가 산타 루치아를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써니보이가 그렇게 행동하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걔랑 친하게 지내려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 행동을 묵인하는 건 패밀리 모두에게 이득이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었을 텐데. 당신만은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내가 써니보이를 위협하는 걸 보고만 있었던 건가요? 아, 설마.

"설마 제가 써니보이를 죽일까 봐……."

루치아노의 눈이 그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후계자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그날, 루치아노가 보였던 표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게 아니야. 북소리. 그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지. 치치 보체티, 넌 알고 있잖아. 루치아노의 방식을 알고 있잖아. 저 표정을 봐. 이건 그의 답이 아니야. 벼랑 끝까지 자식을 밀어놓고 어떻게 하나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을 넌 봤잖아.

그러니까, 그 목도리. 매달리기 딱 좋은 길이의 그 부드러운 목도리.

그걸 보자마자 치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나 떠올렸었다. 써니보이가 날 죽이고 싶어하나? 그건 오랫동안 치치가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생각들은 대부분 근거가 빈약한 억측에 가깝다. 게다가 루치아노가 저걸 줬다는 건 그가 써니보이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일 테고,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써니보이에게 경고하기 위해……. 거기까지 미치자 치치는 문장 위에 몇 번이나 줄을 덧그려 지워버렸다. 아폴로니아의 일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조차 잊어먹고 있을 정도였다. 

루치아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치치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걔가 왜…….”

치치 보체티는 돌아온 직후부터 루치아노에게 자신이 모든 걸 알고있다라는 말을 하는 상상을 수백 번이나 했다. 루치아노는 수백 가지의 반응을 보였지만, 그 끝에서 결국 치치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말하지 않는 게 낫다. 언젠가 루치아노는 써니보이에게만 진실을 밝힐 것이고, 써니보이는 그것을 끝까지 숨길 것이다. 치치는 두 부자의 알량한 죄책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그가 보체티를 온전히 떠나고 싶어 할 때 그 사실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말하지 않는 게 낫다. 치치는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그것이 그가 세운 계획에 더 도움이 되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치치는 멈출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다. 죽지 않고, 불행하지 않고……. 누군가가 반드시 불행해야 한다면 그건 치치 보체티 자신이어야 했다.

“써니보이가 왜 절 죽이겠어요. 걔가…….”

기어이 한 명 더 불행해야한다면,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파파의 친아들이잖아요.”

 

*

 

치치는 허겁지겁 루치아노의 코트를 팔에 꿰었다. 다시는 보체티 저택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치치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서류와 책더미를 전부 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그곳에는 총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치치는 이제 서랍을 뒤어냈다. 꽤 깊은 곳에 총이 한 자루 있었다. 치치는 그걸 안주머니에 넣고 바로 방을 빠져나오려다가 총 아래에 있던 것이 액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평소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괜히 그걸 들여다보고 가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액자에 있는 건 누구일까, 아마 써니보이일지도 모른다. 높은 확률로 루치아노 본인이겠지만, 혹시나 치치 자신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뜻밖에도 액자 속의 인물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였다. 써니보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써니보이가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을 리가 없다.

치치는 곧바로 그게 누군지 알아채고 불에 덴 듯 손을 털어냈다. 책상과 액자가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의 어머니. 치치와 비슷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써니보이를 닮은 그의 어머니.

치치는 책상 위를 흐트러뜨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루치아노가 써니보이를 데려온 이유가 이거였구나. 치치는 그 얼굴을 잊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미아 파밀리아> 초고에서 삭제된 부분을 읽을 때 치치는 곧바로 액자 속 여자를 떠올렸다. 써니보이는 알고 있었을까? 그도 액자를 보았을 것이다. 치치는 그 액자를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 나왔으므로, 써니보이가 루치아노의 서재를 들어갔다면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루치아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더라도, 그 사진을 보았다면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믿지 않을 수 없었겠지. 치치 보체티가 이 말도 안 되는 연극 대본을 보자마자 울부짖기 시작한 것처럼.

 

 

 

방이 통째로 물에 잠겨버린 거 같다. 몸이 무거워지고 귀가 먹먹해진다. 이스트강에 빠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정말로 물에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흐리다. 덕분에 치치는 루치아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인채 책상 위에 올린 두 주먹을 꽉 쥐면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그딴소리를 지껄였지.”

루치아노가 낮게 말했다. 치치는 오른뺨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기어이 상처가 터진 걸까. 턱 부근을 닦아내니 묻어나는 것은 맑고 투명했다. 치치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숨을 진정시키는 것 같은 루치아노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서재를 뒤지다가 어머니…… 사진을 봤어요.”

이 이야기를 루치아노가 믿을까? 그래도 미래에서 왔다는 것보다야 이쪽이 믿기가 쉬울 것이다. 루치아노는 어머니, 라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있었다. 루치아노의 눈에도 물기가 어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움, 두려움, 불안, 외로움, 그리고 미안함……. 

이제 왼쪽 뺨에도 상처가 난 거 같았다.

“아무도 몰라요. 써니보이도 몰라요. 혹시나, 혹시나 싶어서.”

턱에서 물방울이 툭 툭 계속 떨어졌다. 치치는 계속 그것들을 훔치면서 자신이 여전히 막연하고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이제 그 기대가 이루어질 일은 꿈에도 없음을 깨달았다. 하다못해 먼 친척일 수도 있다는… 아주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같은 피가 흐른다면……. 

역겨운 그놈의 피.

사랑하는 파파, 이번에는 이게 나의 복수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가 우리가 혈육이기 때문이었으면 좋았을걸. 당신이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차라리 그놈의 피 때문이었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당신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써니보이가 절 죽일 거라 생각하세요?”

루치아노는 주먹을 좀 더 세게 쥐었다. 더 이상 쥘 힘도 없어 보였는데.

“그래. 내가 그랬듯이.”

치치는 루치아노의 형제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아니, 루치아노를 제외한 다른 보체티 가문 사람들을 아무도 몰랐다. 루치아노는 보체티라는 이름에 집착하면서도 왜 그가 이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건 패밀리에 속해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체티가 왜 보체티가 되었는지는 누구도 알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한때 그는 그것들이 모두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치치는 눈물이 그냥 떨어지게 놔두었다. 바닥에서는 불규칙적으로 소리가 올라왔다. 루치아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치치는 이제 루치아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지 못할 것임을, 보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옛날처럼, 그는 루치아노의 옆모습이나 뒷모습만 겨우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치치.”

그를 불러놓고 나서 루치아노는 한참 뜸을 들였다. 지옥 같은 침묵 후 루치아노가 입을 열었다. 갈라져 있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

“그럼 넌 대체 뭘 원하는 거냐.”

수많은 이름들이 바로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너무 벅찼다. 그는 빨리 뭍에 올라오고 싶었다. 온전히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싶었다. 

“저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다행히도, 모든 것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

 

치치 보체티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는 완성된 <미아 파밀리아> 대본을 한 번 후루룩 훑어보고 책상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리곤 뒤돌아 문 쪽으로 휘적휘적 향하기 시작했다. “난 간다.” 당연히 공연을 보고 가리라 생각했던 스티비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어딜?!”

“라스베이거스.”

돌아간다고, 이렇게 쉽게. 물론 스티비는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스티비. 품속에서 들었던 써니보이의 목소리. 그 한마디에 스티비는 갖고있던 모든 분노를 삶의 이유로 만들었다. 

“뉴욕보다 훨씬 좋아.”

“꽃도 많고?”

치치가 웃었다.  

“죽인다.”

스티비는 순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서 그렇게 웃어주는 건 오랜만이었다.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써니보이를 닮은 거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플로렌스, 그것도 아니라면……. 스티비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치치는 붉은색 코트를 손에 대충 들고 다시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걸 놓아버린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손에 쥔 사람과 비슷해 보일 수 있는가? 그는 그 모습에서 써니보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면,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밤새 서 있던 써니보이의 뒷모습을.

스티비는 자신이 떠올린 걸 치치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얕은 죄책감이 스티비를 붙잡았다. 이제 아무런 미련 없이, 아마 뉴욕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결심을 한 그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기회가 있어야 했다. 선택할 기회. 써니보이가 그를 지키기 위해 뺏어간 기회를.

“치치!”

그가 멈춰서서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더 말할 게 남아있냐는 표정이었다.

물론 스티비는 여전히 치치 보체티의 무덤에 대해선 말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오로지 희미한 기억들이 전부니까.

“개구멍.”

치치 보체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택 뒤편……. 장미정원 근처에 개구멍이 하나 있어.”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들어가면 바로 눈에 띌 거야. 장미가 유달리 흐드러진 곳.”

그곳에 써니보이가 있을걸.

스티비는 뒷말을 삼켰다. 치치는 아무 말 없이, 예의 그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스티비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담백한 어투였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티비가 있는 창문도 올려다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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