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14
총과 칼 (6)
*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치치가 충격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파티는 다시 열렸다. 그는 이 망할 미국 마피아들의 사교계가 그들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19세기 영국과 뭐가 다른지 모두의 앞에서 일장 연설하는 상상을 수백만 번이나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런던처럼 이 사교의 계절도 여름 막바지면 끝이므로, 이번이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마지막 파티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소문은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치치는 약혼 파기 사태를 핑계로 루치아노와 협상을 했다. 그는 적어도 대외적으론 완전히 이 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루치아노가 말했던 것처럼 약혼은 피츠윌리엄 윈스턴 사이에서만 오고 간 이야기였으므로, 생각보다도 치치를 힐끔거리는 시선은 적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윈스턴 일가는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심 안도했으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치치는 자기 쪽으로 향하는 묘한 시선들을 느꼈다. 정확히는, 제 옆에 서 있는 써니보이를 향한 그것들을. 치치는 그런 시선들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지겹도록 평생 치치를 따라다녔던 것들, 아무렇지 않은 척할수록 들러붙는 것들을.
어렵지 않게 치치는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써니보이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대체 어디서 틀어진 거지? 치치는 써니보이의 기색을 살폈다. 정작 그는 신경도 안 쓰고 스파클링 와인으로 보이는 것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나 보네. 좋은 핑곗거리라 생각하며 치치는 자신도 한 잔을 챙겨 들었다. 시선을 느낀 건지 써니보이가 치치와 눈을 맞췄다. 그는 왜인지 표정을 갈무리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치치, 어디 아파?”
“어? 아니? 그냥, 그냥 이거 맛있나 해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써니보이는 평소랑 다를 게 없었다.
“나쁘지 않아.”
치치는 어깨를 으쓱이고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표정을 가렸다.
“그렇네.”
진짜로 한 모금을 들이켜려는 찰나, 치치의 뒤쪽에서 묵직하게 목소리가 흘러왔다. “써니보이.” 치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루치아노가 써니보이를 데려가자 주변의 공기는 금세 변했다. 하여간 짜증 나는 인간들. 써니보이는 덤덤했고, 루치아노는 그의 옆에 있으니 적어도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춤을 춰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주변을 힐끗 둘러보다가 감비노를 발견하고 곧바로 몸을 틀었다. 여전히 꿈은 종종 감비노의 마지막 목소리를 가지고 찾아왔다.
발코니에는 이미 누군가 있었다. 치치는 아주 잠깐 그것이 플로렌스일까 봐 두려웠고 아니면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열 살이나 됐을 법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치치가 벌컥 발코니를 열 때는 놀라지 않더니 치치의 얼굴을 보고서는 사색이 되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치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미안.”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순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치치 보체티.”
어, 어 그래. 치치는 조금 머쓱한 자세로 섰다. 그는 그대로 나가려고 했으나 아이는 뭔가를 바라는 눈이었다. 가령 말을 먼저 걸어줬으면 한다던가? 물론 그것이 매너일 테고,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으니까. 다만 치치는 이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이 거슬렸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간지러운 감각. 다시 살아가게 된 이후 치치는 계속 이러한 감각에 시달렸다. 기억은 섞이는 듯하면서도 완전히 따로 놀았고, 역사는 그대로 흘러가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쨌든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만난 적이 있었다는 뜻일 테다. 치치는 과거와 현재-그러니까 이전 30년과 지금의 16년-의 기억을 뒤졌으나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름을 아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제일 큰 이슈였던 치치 보체티와 써니보이 보체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뭐, 그래. 치치가 아이를 모르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파티에 아이들은 많고 치치는 아이들을 싫어하니까.
“그럼,” 더 생각할 만큼 치치는 여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피곤하다. 치치가 몸을 틀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로잘린!”
이런 제기랄, 하필이면. 치치를 발견한 파브리치오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치치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치치 보체티?” 치치는 그의 얼굴 거죽이 천천히 구겨지는 걸 보았다. 치치는 그가 소리를 지를 것이라 생각해 눈을 조금 찡그렸다. 하지만 파브리치오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질척하게 그의 발목을 붙잡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내 여동생한테….”
파브리치오가 한 걸음 다가오자 치치는 저도 모르게 물러났다. 아, 차라리 지금 건물이 무너져 내렸으면. 차라리 그냥 떨어질까? 치치가 한 발을 더 뒤로 물리려는 찰나 그의 앞으로 아이가, 로잘린이 끼어들었다.
“오빠!”
파브리치오와 치치가 동시에 흠칫거렸다. 아쉽게도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다. “내가 들어온 거야. 나가려고 했다고.” 치치는 로잘린의 헛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는 제 앞을 막아선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이전에도 치치는 로잘린 감비노의 이름을 알고 있긴 했다. 여동생, 그게 전부였다. 후계자가 굳건한 가문의 둘째, 그것도 여동생은 사실상 별 볼 일 없는 존재나 다름없다. 그가 파브리치오를 총으로 쏜 이후는, 그 이후는 더더욱.
“진짜야?” 파브리치오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치치는 슬쩍 로잘린을 보았다.
“응.”
로잘린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살짝 웃고 있었는데, 치치는 그가 이제 로잘린에게 빚이 생겼음을 알았다. 이런 젠장. “빨리 나가, 아버지가 찾지 않아?” 로잘린이 제 오빠의 등을 떠밀었다. 파브리치오는 투덜거리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치치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머저리.”
파브리치오가 침을 뱉듯 중얼거리고 떠났다. 틀린 말은 아니네. 치치는 고요해진 발코니에 한참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대쉬우드에서는 주로 손님의 집중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그러나 거리의 소음에는 묻히지 않을 정도로의 크기로 노래를 틀어놓았다. 이 서점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토니의 취향으로 이루어진 음악들이었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책장의 한 칸을 가득 채운 엘피판 중 아무거나 뽑아내어 노래를 바꿔주는 것도, 사이사이의 먼지를 한 번씩 후 불어주는 것도 치치의 일과 중 하나였다. 노래는 오늘 같은 날을 제외하면 언제나 서점과 손님들 사이로, 그리고 치치에게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곤 했다. 노랫소리가 크게 들린다는 건 서점과 거리 모두가 조용하다는 것을 뜻했고, 그러면 치치는 일부러 소리를 조금 줄였다. 그럴 때면 그는 조금 덜 외로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직 노랫소리만이 남아있는 것 같은 날에는, 치치는 아예 음악을 꺼버렸다. LP만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풍경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너덜너덜한 두꺼운 공책과 펜을 하나 들고 서점의 저 구석부터 책을 살폈다. 중간중간 손님이 올 때만 노래를 다시 틀긴 했지만, 이런 날은 원래 손님이 거의 없는 법이므로 치치는 책의 상태를 살피고 재고를 확인해 장부와 대조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재고를 확인하면 영수증들을 모아 회계장부를 정리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치치는 이 서점의 모든 책을 수백 권을 이런 식으로 다섯 번을 살폈다. 책에 쌓인 먼지는 모두 날아가 버렸고, 장부는 더욱 촘촘해졌다. 토니는 그럴 필요는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매우 고마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치치는 대쉬우드의 노랫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이 노래가 직전의 파티에서 들었던 것이라는 걸 깨닫고 결국 들고 있던 책을 덮어버렸다.
써니보이는 이제 서점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루치아노의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졌다. 이전의 삶과 비슷한 궤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루치아노는 치치에게 자기 일을 나눠주지 않았고, 지금은 써니보이가 대부분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더 오래 살 수도 있었다. 루치아노가 살아있을 때 써니보이가 상원의원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주는 것일 테다.
치치는 오른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거기에는 로베르토가 병원에서 받아온 출생 기록을 넣어둔 서랍의 열쇠가 들어있었다. 그는 자주, 어쩌면 계속 그 종이들을 생각했다. 종이에 쓰여있을 몇 자 안 될 글자들을 생각했다. 그것들이 바꿔놓을 것에 대해 생각했다. 서류를 받아오라고-빼돌리라고- 한 건 그였지만 정작 그걸 하나하나 들춰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열어보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가 떠난 후 써니보이가 어딘가에서 열쇠를 주워다 열어볼지도 모른다. 이미 그때면 써니보이가 모든 진실을 알았겠지만.
플로렌스의 일을 포함해서, 치치는 써니보이 역시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써니보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치치 보체티는 써니보이 보체티를 잘 몰랐다. 치치는 치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몰랐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던 치치는 이곳에 로베르토가 있다는 걸 깨닫고 슬쩍 눈치를 보았다.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그는 책을 읽는 데에 열중해 치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노래가 바뀌었다. 치치는 노래의 볼륨을 조금 낮추고 덮었던 책을 펴서 읽는 척 로베르토를 살폈다.
치치가 서점에 출근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로베르토는 자신이 글자는 읽을 수 있지만 책은 거의 읽은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치치는 단지 로베르토가 문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솔져들 중 문맹은 흔하다면 흔한 편이었으니까. 그러니 그가 써니보이가 사간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말했을 때 치치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토는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치치는 그가 왜 자신의 솔져를 그렇게나 하고 싶어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스티비도 이랬을까? 그도 자신이 솔져들 중에서 유일하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다 읽었기 때문에 이 일을 맡았다고 말했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치치는 로베르토를 종종 일부러 서점에 데리고 왔다. 물론 그가 오면 재고 확인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그는 사다리에 앉아있는 치치를 보면 높은 곳에 올라간 막냇동생을 보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기에 대신 치치는 로베르토에게 책 몇 권을 골라주고, 같이 그 옆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장부 정리 같은 일을 했다.
그는 추리소설이 제일 재밌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셜록 홈스가 그를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영국이네, 치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영국, 영국이라니. 그는 루치아노가 왜 그렇게 영국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나,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여름은 전부 떠나버렸고 이제 밤이 긴 겨울이 와도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트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괜찮으신 거죠?”
그는 치치의 안위를 잘 살피라는 임무를 추가로 받은 참이었다. 그가 얼마 전 또 앓았기 때문이었다. 플로렌스가 런던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당연히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생각이었던 치치는 자신의 안일함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플로렌스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을 가능성을 완전히 간과해버렸던 것이다. 욱신거리는 몸을 둥글게 말며 치치는 자신의 멍청한 머리와 예민한 몸뚱어리를 원망했다.
“괜찮아, 괜찮아.” 치치가 손을 휘휘 저으면서 노랫소리를 조금 낮췄다. 자고 일어나니 몸은 멀쩡해졌다. 머리도 훨씬 맑아졌다. 맑아진 머리로 구구절절한 변명과 진심 어린 사과가 담긴 편지를 썼다. 아직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로베르토 대신 치치가 먼저 일어났다. 차창 너머 거리는 어느새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사격 연습을 하던 써니보이의 뒤통수는 항상 저런 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언제나 햇빛을 그대로 반사했으니까.
“오늘은 빨리 집에 가자.”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이었다. 손님도 없었고, 길거리에도 사람이 몇 없었다. 로베르토는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치치는 시계를 힐끗 보았다. 써니보이는 아직 사격장에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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