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in New York

Villain in New York 17

총과 칼 (9)

Words Fail by 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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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접속시 새로고침을 한 번 해주시고 감상 부탁드립니다 (문단이 중간중간 통째로 사라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금 날씨가 따뜻해지는가 싶더라니. 이제 눈을 보려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난주에 만들어놓은 눈사람은 오늘로써 완전히 다 녹아버릴 것이다.

올해 들어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이었다. 한낮이어도 밖은 어둑어둑해 치치는 일찌감치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책상과 소파를 왔다 갔다 하다 창가에 걸터앉은 치치는 저도 모르게 써니보이를 찾았다. 이전처럼 한가롭게 눈을 맞고 있을 리 없는데도 그랬다. 로베르토는 그걸 바깥에서 놀고 싶다는 걸로 해석했는지 치치를 단단히 무장시키고 밖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솔져 몇몇이 합세했다. 다 한가하지, 아주. 하지만 치치는 즐거웠다. 서로에게 눈을 뿌리는 솔져들을 보면서 치치는 털썩 누워서 팔다리를 움직였다. 눈은 여전히 시야를 가릴 정도로 허옇게 내리고 있었다. 입김이 그 사이로 뿌옇게 흩어지는 걸 보면서 치치는 눈을 감으려고 했다.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치치.”

써니보이가 우산을 들고 그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왔냐.” “감기 걸릴 텐데.” “괜찮아.” 써니보이가 쪼그려 앉았다. 또 그 목도리다. 목도리의 끝이 치치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 했다. 우산이 닿지 않는 곳 위로 눈이 쌓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눈을 굴려 써니보이를 쳐다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잠들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

“써니보이.”

“일어나게?”

“내가 눈 속에 파묻히면 날 구하러 와줄 거야?”

“당연하지.”

써니보이가 말했다. “물속에 빠져도?” “온 바다를 뒤엎을게.” 푸학, 치치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너 아직도 소설처럼 말하는 거 알아?”

“이상해?”

“아니.”

치치가 털썩 누웠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쪼그려 앉아있던 써니보이가 뒤로 물러나다 균형을 잃고 눈 위에 주저앉았다. 치치는 킥킥거리다가 써니보이가 들고 있던 우산이 휘청거리며 쏟아낸 눈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콜록거렸다. 써니보이가 급하게 우산을 다시 씌워줬다.

“미안, 괜찮아?”

“너 일부러 이런 거지? 나 죽이려고?” 나 죽이지 마. 치치는 어느 밤 혼잣말처럼 써니보이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밤의 써니보이는 그저 치치를 보며 빙긋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대외적으로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야.

“혹시 아나.”

치치가 써니보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슬퍼 보였다. “치치, 나는……” 써니보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널 죽이려는 자들을 죽여버릴 거야.”

“역시 그렇지?”

눈을 한 번 깜빡인 치치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우리 눈사람 만들자.” “그래.”

둘은 솔져들의 도움을 받아 꽤 큰 눈사람을 만들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안 언 곳이 없었지만, 치치는 저 눈사람에 안기면 아주 따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추워 보인다.”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지만. 써니보이가 치치를 한번 힐끗 보고 제 목에 걸린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에게 둘러주었다.

“이러면 괜찮을 거야.”

치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

 

 

*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치치는 뺨에서부터 퍼져나가는 열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써니보이는 정말로 저 사람을 죽일 것이다. 치치는 열세 살의 어떤 밤을 떠올렸다. 어두운 밤, 인적 드문 골목길, 그리고 빛나던 푸른 눈…….

 

*

 

 

근데, 그 목도리를 어떻게 했더라? 어쨌든 정말 눈사람의 흔적도 남지 않게 생겼다. 거리에 사람들이라고는 옷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써니보이가 오려나. 아침부터 이랬기에 오지 말라고 말은 해둔 터였다. 게다가 써니보이는 치치랑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바람에 더욱 바빠졌다. 써니보이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치치가 로베르토를 닦달해 얻어낸 정보였다. 써니보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루치아노를 떠볼 필요가 있었다. 루치아노는 이상하리만치 치치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먼저 루치아노가 치치의 행동을 제지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야만 루치아노는 말해줄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하는지. 여전히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치치는 자신이 루치아노를 평생 이런 식으로 그리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조금 비참해졌다.

이제 치치는 써니보이를 빼 올 수 없었다. 루치아노가 저녁 시간에 치치에게 대놓고 그만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써니보이가 모든 수업을 끝내고 치치를 마중 나가는 건 허락해주었다. 물론 써니보이를 빼 올 방법은 있었다. 써니보이가 올 수 없다면 치치가 가면 된다. 사격 연습을 포함해서 모든 수업에 끼어들면 된다. 내부의 동요는 루치아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대놓고 묻지만 않을 뿐 루치아노는 치치의 행동이 적어도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는 사실 즈음은 알아챈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그는 자신을 완전히 막지 않으며, 써니보이에게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당신은 써니보이를 사랑해야 하잖아. 내가 써니보이를 사랑하지 않는 만큼 당신이 그를 사랑해야 하잖아.

믿으면 안 된다, 너의 친구는 칼뿐이다.

그건 치치의 생애를 지배했던 문장이었다. 루치아노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었다. 아무도. 거기에 본인은 포함되어있었을까? 그런데, 그렇게 치치가 말한 뒤에 스티비가 써니보이에게는 무슨 대사를 줬더라?

배신은 안 된다, 너의 근원은 패밀리다.

스티비 로시니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부티는 모르지만 목도리는 알았다. 롸코는 알면서 루치아노는 또 몰랐다. 그러나 감히 치치는 스티비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때의 써니보이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곧바로 그의 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치치와는 정반대인 삶. 모든 걸 믿지 말아야 하는 치치와 믿어야만 하는 써니보이. 왜 써니보이는 그렇게 자랐을까? 루치아노는 왜 그랬을까? 왜 써니보이를 두려워한 거예요? 그리고 써니보이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한 거야? 이제는 물어볼 스티비도 없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치치는 혹시 그곳에 스티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써니보이?”

접은 우산을 들고 써니보이와 롸코가 서점 입구에 들어섰다. 치치는 롸코를 째려봤다. 롸코는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래, 써니보이 고집은 어쩔 수 없지. 치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입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치치는 괜찮다면서 고개를 까딱했지만 거절 의사를 보인 건 써니보이였다.

“길바닥이 너무 더러워서.”

“비가 다 거기서 거기지.”

“아냐, 지금은 눈인걸.”

치치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와 눈이 섞여서 내리고 있었다. “안 와도 된다고 했잖아.” 치치가 짐을 챙겨 들고 써니보이한테 다가갔다. 롸코가 자연스럽게 가방을 받아들었다. 치치는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써니보이의 얼굴만 겨우 보였다.

“제임스네 빵이 아직 남아있을까?”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시겠다. 치치가 작게 웃었다. 제임스네 빵은 써니보이가 최근에 거의 매일 먹고 있는 빵이었다. 그 까다로운 써니보이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처럼, 퇴근할 시간쯤이 되면 떨어지는 빵도 많았다.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던데. 일찍 닫았을지도 몰라.”

“우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이제 써니보이는 농담도 잘 던졌다. 그런 표정을 짓는 써니보이에게서 루치아노를 발견한 뒤부터 치치는 묘한 심정이 되었다. 루치아노는 전혀 유쾌한 성정이 아니었으니까. "빨리 가자." 치치가 얼굴을 가리며 우산을 펴들었다.

 

*

 

 

롸코는 써니보이가 이런 날씨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써니보이의 경우는 특별히 더 그랬다. 어릴 적 그는 이런 날씨마다 특별한 병이 없는데도 앓아누웠고 자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나 정말 괜찮아, 롸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모습에서 롸코는 나탈리아를 보았다. 그는 나탈리아의 모습을 아는 이들이 보체티 저택에 얼마 없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써니보이는 점점 더 나탈리아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대부분 왔던 그대로 본타테 패밀리로 돌아가거나 교전 중 사망했다. 써니보이를 찾아낸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결과적으로 솔져들 중에서 루치아노가 남긴 건 롸코뿐이었다. 그는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치치의 정체를 알고도 아껴주는 이는 롸코가 유일하다는 사실도.

결과적으로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그는 생각했지만, 치치를 보고 나서는 가끔씩 의문이 들었다. 그런 치치를 대하는 루치아노의 행동을 보고서는 더욱 그랬다. 롸코는 왜 자신의 보스가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모든 진실을 알면 나탈리아를 닮은 써니보이가 그처럼 떠날까 봐서? 아니, 아니다. 써니보이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떠나는 건 치치가 될 것이다.

“그러면 같이 가자.”

써니보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루치아노처럼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그저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잡아야 하는 건 치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이걸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계속 의문이 피어나는 건 아마 날씨 때문이리라고, 롸코는 생각했다.

 

*

 

 

써니보이의 말대로 빵은 꽤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써니보이가 계산을 하는 것을 보고 치치는 뒤를 돌았다가 두 소년과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어?”

아오, 정말. 치치는 써니보이를 슬쩍 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써니보이를 닮은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갈색 머리 소년의 어깨를 잡고 같이 뒤로 돌았다. “왜?” 의문스러운 투였다. “조용히 좀 해.” “아, 헉!”

“치치? 무슨 일이야?”

“아냐, 가자고.”

조금 유난인가, 싶었지만 치치는 왜인지 리차드와 써니보이가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익숙한 죄책감이었다. 이것이 같은 얼굴을 가진 셋 중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브루클린 브릿지의 전설도 없겠지.

그건 다행이라고 치치는 생각했다. 치치는 뒤를 슬쩍 보았다가 리차드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젠장, 저 저 눈동자까지 왜 똑같아가지고.

*

아폴로니아 뒷문으로 향하는 그 골목에 치치가 홀로 가게 된 건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였다.

치치는 루치아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요량 중 하나로 도박장 매니지먼트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루치아노는 며칠 동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 결국 승낙했는데, 이로써 치치의 최후의 한 수까지 모두 허사가 되어버리게 되었다. 당연히 그는 도박장 일을 다시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당연히 루치아노가 거절하며 따로 자신을 불러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루치아노는 분명히 곤란했을 텐데도 며칠 간의 망설임 말고는 어떠한 반응도 더 보이지 않았다. 치치는 결국 죽을상을 하고 매주 산타 루치아로 향하기로 했다.

서점에서 산타 루치아로 가려면 무조건 대로를 하나 지나야 했다. 그런데 그날 하필 그 대로에 사고가 나 아무도 오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던 것이다. 어떤 골목으로 가든 그 대로를 지나가야 하니 돌아갈 수도 없었다. 물론 치치는 그 대로로 통하지 않은 유일한 길을 하나 알았다. 아폴로니아 뒷문으로 통하는 바로 그 길.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치치가 습관적으로 가슴께를 더듬었다. 다행히 치치에게는 총이 있었다. 물론 감비노가 그를 쫓을 때도 치치는 총이 있었고, 한낮의 거리에 있었다. 지금처럼.

하필 로베르토도 미리 산타 루치아로 보내버린 참이었다. 그는 그때처럼 완벽하게 혼자였다. 치치는 골목 안쪽을 슬쩍 보며 침을 한 번 삼켰다. 따라오는 이는 없었다. 숨어있는 자도 없는 듯했다. 그는 결연하게 숨을 한 번 내뱉고,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기억보다 골목은 훨씬 밝아 보였다. 그가 벽을 짚었다. 거친 질감이 느껴졌다. 치치는 천천히 벽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 오직 치치만이 이곳에 있었다. 여기엔 나 혼자야, 아무도 없어. 그럼에도 그는 벽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골목 저 끝에서부터 떠드는 듯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치치는 안쪽으로 손을 넣어 총의 존재를 확인했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고 새된 음색이었다. 어린애들? 긴장이 탁 풀렸다. 그는 비틀거리지 않도록 벽을 짚었다. 설마. 맞은 편 아폴로니아 바에서 공연하는 배우들. 치치는 일부러 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도록 천천히 걸었다. 애들도 치치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세 명? 기억으로는 두 명이었던 거 같은데. 아무렴 그때와는 다르겠지. 그들은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그렇듯 서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아, 역시나. 다리에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치치는 소리 내서 웃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리차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어린 시절의 써니보이 같았다. 그럼, 그 옆에 있는 애가 그 약혼자랑 데이트 갔다던 그 친구인가. 나머지 한 명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쪽이 그런가? 저 멀리서 비로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아폴로니아는 이걸로 됐다. 대놓고 엮여봤자 좋을 거 없었다. 나중에 도박이나 하러 오라지.

“어?! 그 산타 루치아에서 사는 사람 아니에요?!”

치치가 덜걱거리며 멈춰 섰다.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는 사람? 이건 정정해줘야지 싶었다. 그는 결국 몸을 돌렸다. 리차드와 그 친구가 치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녀석은 그를 등지고 있었다. “누가 어디서 살아?”

“산타 루치아! 여기 도박장!” 그 친구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오스카, 그냥 가자.” 리차드가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고개를 대충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름이 오스카였구나.

“아냐, 그 사람 맞잖아, 너랑 똑같이 생긴 그 사람이랑 맨날 저기로 들어가는 거 봤다고. 로잘린 네가 그랬잖아!”

치치는 투닥이는 두 꼬마를 두고 그냥 가려고 했다. 로잘린이라는 이름만 듣지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어디서 들었더라? 로잘린, 로잘린…….

“감비……”

그를 등지고 있던 나머지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와 치치의 정강이를 빡 소리 나게 차버린 건 바로 그때였다. “악!” 기습공격에 치치가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로잘린!” 리차드와 오스카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치치가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로잘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치치는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짧게 웃었다. 그래, 그때 테라스. 이 똑똑한 소녀는 진작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거 때문이었어?” 치치가 로잘린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따라와.” 로잘린이 치치를 지나쳐 다시 아폴로니아로 들어갔다. 오스카가 그 뒤를 허겁지겁 따라갔고, 본인의 뒤통수를 쥐어뜯듯 헤집던 리차드가 치치에게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죄송해요.”

의외로 예절이 바르네. 어쩌다 도박을 하며 술이나 퍼마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모습에서는 그런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됐어. 때린 건 쟨데.” 치치는 맞은 부분을 쓱쓱 쓸고 몸을 일으켰다. 젠장, 더럽게 아프네. 성큼성큼 아폴로니아로 걸음을 옮기는 치치의 옆으로 리차드가 따라붙었다.

“로잘린을 아세요?”

“한 번 봤어.”

“어디에서요?”

“파티.”

“파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스카가 로잘린을 붙잡고 소리치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야?!”

“있어. 내가 구해준 머저리.”

장난하나. 하지만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손님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 치치가 일부러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 말했다.

“손님?” 로잘린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손님,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니니 나가주세요.”

“수요일마다 탭댄스 공연을 한다던데.”

“어떻게 아셨어요?!” 오스카가 끼어들었다. “오스카!” 로잘린이 오스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유명하던데? 우리 솔져들도 자주 본다 그랬어.” 그건 사실이었다. 물론 대놓고 치치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로베르토도 흘리는 말로 ‘키드 쇼 스타’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자신이 이전에 놓친 것들 중 하나일 테지. 언젠가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치치는 최대한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냅다 자신을 차버린 로잘린이 곤란해하는 걸 보는 건 조금 재밌었지만, 어쨌든 그가 자신을 도와준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입술을 잘근거리는 리차드를 흘긋 본 치치가 말했다.

“그런데…… 영업시간도 아니고, 나도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산타 루치아요?”

“오스카.” 로잘린이 말했다.

“그래.”

“진짜 거기 사는 거 맞죠?”

“아니야.”

실망한 눈치인 오스카를 뒤로하고, 치치는 일부러 얻어맞은 곳을 다시 한번 털면서 로잘린 곁으로 다가갔다. 로잘린은 주춤 물러나긴 했으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파브리치오랑 전혀 안 닮았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매한가지지만, 어쨌든 그는 치치를 도왔고 그것을 갚아야 한다. 설령 이 모든 게 노린 것이라 해도.

“나는 오늘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야.”

치치가 몸을 살짝 숙여 로잘린의 귓가에 대고, 그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속삭였다.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으면……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머저리는 간다.”

“잠깐만요!”

리차드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치치는 몸을 틀어 리차드의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약간의 공포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채 어려있는 그 눈. 와중에 정말 닮긴 닮았다. 저 눈동자 색깔까지도.

“뭐?”

“저희 보러 오셨다면서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니고… 이따 저녁에 하는데 그때 다시 오세요.”

치치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로잘린 감비노라는 변수는 그렇다 치고, 리차드를 보니 다시는 이곳과 이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괴로워하던 스티비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치치는 자신이 이곳에 반드시 오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지 뭐.”

리차드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그는 결국 아폴로니아의 공연을 보고 박수를 치게 될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

 

 

써니보이 보체티는 무대 한가운데서 깨진 유리병을 들고 있다.

누가 그에게 그런 역할을 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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