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붉은 실(3)
신분차 사랑을 시작한 루카슈의 보호자들 복사이
여기서 이어지는 썰입니다.
썸네일 출처: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나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제안을 한 남자를 보고 아이크는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음. 당신과 나의 주인. 즉 루카 카네시로와 슈 야미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뜻인 것 같은데, 사실 아이크에겐 이 남자의 제안을 받아줄 이유가 1도 없었음. 오늘 아이크가 외출한 건 앓아누운 루카의 대리로 심부름을 다녀오는 것이지 오늘로 딱 두 번째 보는 인간과 주인의 사적인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님. 게다가 그 사적인 일은 아이크 자신이 반대한 연애사정이니 바꿔 말하자면 이 일은 자신의 판단에 슈 야미노의 측근이 불만을 제기하러 찾아온 일이라고 봐도 좋았음. 아무리 야미노 재봉소가 마을에서 제일가는 노포 중 하나라고 해도 감히 카네시로 가문과 그 후계자의 장래를 위한 판단에 토를 달고 나선단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점점 일그러지는 아이크의 표정을 보며 복스는 여유 있게 웃고만 있었음. 그 히죽이는 얼굴을 보자 기분이 확 나빠져서 아이크는 안경을 끌어올렸음. 물러설 줄 알고.
“좋아요. 어디 한 번 들어볼까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 건지?”
“어이쿠, 여기서요?”
“그럼 갑자기 사람 갈 길 막는 괴한과 단둘이 술잔이라도 기울여야 할까요?”
“어허. 아무리 제가 달갑지 않으셔도 주변 시선은 신경 써야지요. 아무리 밤이어도 길거리 한복판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그럼 따라오세요.”
슈 야미노의 의견을 대변하러 온 건지, 아니면 가게 주인을 향한 측은지심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건지는 몰라도 복스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사실은 확실했음. 이 기회에 기를 팍 죽여버려야지, 생각하면서 아이크는 카네시로 가문이 뒤를 봐주는 고급 주점을 찾았음. 오늘밤은 자리가 다 찼다고 말하는 점원에게 자기가 카네시로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며 신분증을 보여주자 점장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가게 안쪽의 귀빈석으로 그들을 안내했음. 일부러 카네시로의 이름이 통하는 술집 중 가장 유명한 곳을 찾아와서 일부러 과시하는 행동을 했지만 정작 상대인 복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음. 부담스러울 만큼 고급스러운 내실로 들어왔음에도 흔들림 없이 자리에 앉는 복스의 모습에서는 높은 지위의 사람 특유의 위압감마저 느껴졌을 정도임. 이 남자, 대체 뭐지? 아이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음.
한편 복스는 아이크가 자신의 기를 죽이려고 온갖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음. 물론 ‘복스 아쿠마’ 가 고작 이런 걸로 기가 죽을 인물은 아니었고,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상대의 기를 죽이고 시작하자는 그 승부욕에 감탄한 것이었음. 아이크 이브랜드. 루카 카네시로의 최측근이자 교육 담당. 단순한 카네시로 가문의 고용인이 아니라 루카의 직속 비서 같은 위치에 있는 자니 그만한 처세술 정도는 갖췄다는 뜻이겠지. 그렇기에 호기심이 생겼음. 아이크는 어째서 그토록 완고히 루카와 슈의 교제를 막으려 했던 걸까?
물론 루카 카네시로를 둘러싼 입장은 복스도 아주 잘 알고 있었음. 카네시로 가문. 예로부터 철저한 실력주의를 앞세워 수많은 후계자 후보들에게 경쟁을 시켜 단 한 명만을 후계자로 선발하는 피의 가문이지. 루카는 그 권력다툼의 최종 승자에 가장 가까운 위치였지만 정식 후계자로 책봉되지 않은 이상 그를 둘러싼 암투는 결코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었음. 어떤 작은 구설수도 루카의 현재 위치를 위협할 수 있었으며 아주 사소한 실수로 인해 지금의 자리에서 끌려내려오거나 죽을 수도 있는 것이 현재 루카의 입지임. 그러니 루카 카네시로가 후계자로 옹립되면 그만한 지위와 부를 약속받을 입장이자, 반대로 루카가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다면 그 주인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한 아이크가 루카를 후계자로 세우지 못해 안달이 난 것까지는 이해가 감.
그렇다고는 해도 루카와 슈의 교제 자체를 아예 봉쇄해버리려고 하는 아이크의 행동에 대해서는 썩 이해가 안 갔음. 루카의 입장이 다소 곤란한 위치에 있어 남들의 눈이 두렵다면 루카가 후계자 책봉을 마친 뒤, 혹은 그의 위치가 카네시로 가문의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단단해졌을 때 다시 만나라고 설득이라도 하면 될 것을. 복스가 보아온 루카 카네시로는 그렇게 설득한다면 그것을 희망이자 동기 삼아 목표 달성에 더욱 매진할 인간으로 보였고 복스보다 더 오래 루카를 알았을 아이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임. 그러나 지금의 아이크는 명색이 주인인 루카의 일거수일투족과 그에게 들어오는 모든 연락을 감시하고, 심지어 슈 본인이 아니라 슈의 가게에서 일하는 복스와 우키가 찾아왔을 때도 루카 옆에 붙어 있으면서 루카가 제 눈치를 보게 만들 만큼 완고하게 나오고 있었음. 후계자가 될 자의 최측근으로서 어쩌면 루카보다 뛰어난 처세술을 익혀 왔을 자가 이런 행동을 할 때는 ‘그래도 괜찮다는 확신’ 과 ‘그래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있을 터였음.
그럼 그걸 한 번 토해내게 해볼까. 복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이크는 능숙하게 주문을 들어가고 있었음. 시키는 게 순 고기 요리뿐이었음. 야채를 싫어하나 보지. 의외로 귀여운 데가 있네. 생각하는데 아이크가 품에서 필첩을 꺼내서 뭔가를 써서 건네줬음. 카네시로 가문에 전해주세요. 말하는 걸 들어보니 오늘 좀 늦게 들어가겠다고 루카한테 보고하는 내용인 것 같았음. 그 도련님이라면 지금쯤 한창 슈를 만나고 있을 텐데. 사랑의 열정에 빠져서 오래 지체하다 자리를 빠져나온 걸 들키지 않으면 좋으련만. 생각하는 복스의 눈에 점장의 어색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음.
‘아니, 아니야. 저건 어색해하는 게 아니라…….’
깔보는 거다. 그리고 약간의 불만. 감히 나한테 이런 심부름을 시켜? 아이크의 전갈을 받아든 뒤 방을 나서는 점장의 표정을 요약하자면 그랬음. 하지만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 그 카네시로의, 장래 후계자가 될 이의 최측근에게. 루카 카네시로의 이름이 유명한 만큼 그 옆에 있는 아이크 이브랜드의 이름도 제법 알려졌어야 마땅함. 게다가 이 주점이 카네시로 가문에서 뒤를 봐주는 곳이라면 정작 루카가 아이크를 데리고 인사를 왔을 텐데. 어쩌면 이걸 기점으로 공략해 볼 수 있을지도. 복스는 빙그레 웃고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입에 시동을 걸었음.
“이 가게에는 처음 와 보는데, 점장님이 생각보다 용기 있는 인간인가 봅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렇지 않나요? 웬만한 사람 같으면 엄두를 못 낼 것 같은데요. 카네시로 가문에서 일하시는 분의 심부름에 아주 잠시라도 불만을 드러내다니.”
그 말에 아이크는 아, 난 또 뭐라고, 라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었음. 누군가를 향한 비웃음으로 가득 찬 미소였지만 처음 카네시로 가문을 찾아갔을 때 아이크가 지었던 예의 차리는 듯한 가짜 웃음보다는 훨씬 생생해서 복스는 생각했음. 이쪽이 더 보기 좋은데?
“별 것 아닙니다. 자주 있는 일이에요.”
“자주 있는 일이라니?”
“저는 이인(異人) 이니까요. 이 거리에서도 20년 넘게 살아왔지만 사람들은 아직 제 존재가 익숙하지 않은 듯하더군요.”
호오, 그런 이유였나. 확실히 아이크 이브랜드는 그 이름으로 봐도, 생김새로 봐도 에도 거리에 녹아들기엔 적합해 보이지 않았음. 당장 야미노 재봉소에서도 우키가 이 편견으로 고생하고 있었음. 심지어 순수 이인이 아니라 혼혈임에도 우키를 신기한 것 보듯 하는 현상이 만연했고 이 시선을 신경 쓰느라 우키는 되도록이면 밖에 나가려 들지 않을 정도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카네시로 가문의 사람이고 후계자의 최측근인데도 이런 취급을 받으신다라. 꽤 불만이 쌓일 만한 일임에도 아이크의 표정은 그런 내색 하나 하지 않았음.
그러나 복스 아쿠마의 눈에는 들여다보였음. 이 이야기를 화제 삼자마자 그동안 잠잠했던 아이크 이브랜드의 영혼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그거 흥미있는 이야기네요. 부디 듣고 싶은데요.”
“…제 이야기를요? 들어서 뭘 어쩌시려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 잡담이나 나눠보자는 취지죠.”
“하, 남의 인생 이야기를 잡담 수준으로 치부하시나요?”
“흠, 그럼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건 각자의 주인의 장래에 대해서니 그만큼 심도 깊은 이야기가 되어야 할 테죠. 대화하는 상대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말하자면 저는 지금 탐색전을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크의 표정은 당연한 말이지만 썩 좋지 않았음. 복스가 선수를 쳐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려면 이 정도는 해둬야 하지 않느냐’ 고 제안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남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은 과거 이야기를, 그것도 상대의 제안에 넘어가 하게 될 판이라 그런 건지. 어느 쪽이든 아이크 이브랜드라는 인물의 허점을 찌른 것 같아 복스는 기분이 좋았음. 아이크가 끝내 말하지 않는다 해도 털어놓게 만들 자신도 있었고.
그리고 아이크는,
“…썩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복스의 도발에 기꺼이 응함으로서 제 영혼의 강인함을 다시 한 번 빛내기 시작했음.
“제가 이 나라에 온 건 아홉 살인가 열 살쯤이었을 거예요. 당시 저는 상단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고 주인어른께서 사업을 벌이는 데 필요하다고 상단의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셨는데, 그 때 주인어른의 눈에 들어서 카네시로 가문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과연, 사람 알아보는 눈이 대단하다고 정평이 나신 분답군요. 고작 열 살짜리, 그것도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를 데려오시다니.”
“…글쎄요. 동정해 주신 게 아니었을까요? 결코 처우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당장 매를 드는 건 일반적이었고, 심지어 주인어른을 처음 뵙는 날에는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아이크가 지은 비릿한 미소에서 복스는 그 이면에 있던 현 카네시로 당주의 의도를 읽었음. 동정한 것이 아니라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상단에서 지냈던 어린애라면 세상 물정이나 셈에 빠삭할 테고 그래도 어린애, 그것도 몸담고 있는 곳에서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어린애이니 조금만 잘해줘도 충성을 다할 건 분명하고. 또한 당시의 아이크에게는 자기 가문에서 일하라는 당주의 제안이 무척 반갑고 감사한 것이었겠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크가 짓는 표정을 보면 그 역시 카네시로의 당주가 자신을 고용한 진짜 이유를 이제는 아는 것 같았음.
“그럼 그 때부터 루카 님을 모신 건가요? 거의 친형제처럼 지내셨겠군요.”
“…실례지만, 제가 지금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음? 루카 님과 동년배가 아니십니까?”
“제가 카네시로 가문에 들어갔을 때 도련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이크의 대답에 복스는 아이크를 만난 이래 가장 놀랐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이크는 루카와 열 살 차이가 난다는 거고, 루카 카네시로가 올해로 스물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삼십대 초반이라고? 이 얼굴로? 복스의 착각이 재미있었는지 풋, 하고 웃는 아이크는 도저히 슈와 동년배로밖에 보이지 않았음. 와, 이건 좀 사기지. 복스가 놀라는 와중에 드디어 한 방 먹여줬다고 생각했는지 아이크는 만족스레 웃었음.
“도련님이 태어나셨을 땐, 아마 그 때부터 이 거리에 계셨다면 아시겠지만, 가문 전체가 떠들썩했죠. 마님께서 정통 후계자가 될 장자를 낳으셨으니까요. 영광스럽게도 주인어른께선 그 귀중한 분의 교육을 제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동안의 제 일처리를 높이 사 주셨기 때문이겠죠.”
어느새 나온 술잔을 기울이면서 아이크는 뿌듯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술잔 너머로 가려진 아이크의 눈빛은 차가웠음. 루카 카네시로의 교육 담당이 된 일이 당시 스물다섯 쯔음이었던 아이크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음을 알 수 있었음. 루카가 당주의 기대대로 후계자가 된다면 아이크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만약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모조리 자신이 물게 될 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음.
“그러면 루카 님을, 감히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동생처럼 돌봐 오셨겠군요. 저도 슈… 5대가 태어날 무렵부터 야미노 가문에 식객으로 있었고, 선대가 세상을 뜨기 전 5대의 신변 관리를 부탁받았기에 그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고용인의 입장에서 감히 그런 마음을 품기는 어렵지요. 그렇지만 도련님의 성장을 지켜보며 뿌듯하다 여긴 순간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성과를 앞두고 있는 입장이고요. 그렇기에… 그만한 실례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한 마디로 지금의 루카 카네시로는 자신이 키워낸 산물이니 그의 미래를 가로막는 짓 따위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 신상 이야기에서 무척 자연스레 본론으로 들어갔군. 다른 안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고기를 한 점 입에 넣는 아이크를 보며 복스도 술잔을 찰랑였음.
안됐군. 그쪽도 그렇겠지만, 나도 슈의 행복을 위해서 그만큼의 일은 해야 하겠거든.
“저희 재봉사인 우키가 말하더군요. 높으신 분 눈에 들어 은혜를 입는 것도 자기 같은 고용인들에게나 달가운 일이지, 한 가게를 책임져야 하는 슈의 입장은 그렇지만도 않을 거라고요.”
“현명한 판단이네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입장 차이를 빼놓고 생각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고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죠?”
“당사자들의 행복이죠. 이런 일은 무작정 막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나이를 지나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막 열정이 붙은 젊은이들을 떼어놓기는 쉽지 않잖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니.”
“…호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입장 차이를 빼놓고 생각할 수 있나요? 이제 몇 주 후면 도련님은 카네시로의 정식 후계자가 되실 것이고, 성주님의 따님과 혼담이 오가게 될 테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며 저는 일을 그르치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때일지도 모를 열정에 몸을 불태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습니까?”
“어리석다뇨.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지요.”
“…아무래도 그 문제에서는 당신과 제 의견이 평행선을 달릴 것 같네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만큼 단호하게 아이크가 내뱉은 말에도 복스는 여유 있게 웃었음. 네가 뭐라고 떠들든 나는 두 사람의 교제를 당장 반대해야겠다는 의도가 풀풀 풍기는 말과 행동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였음. 이제는 그것을 토해내게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음. 복스의 눈이 불길한 분홍빛으로 빛났고,
“흥미롭군요.”
그 빛을 마주한 아이크의 어깨가 흠칫했음.
“처음에는 당신의 그 완고함이 카네시로 가문에, 루카 님에게 상당한 충성심을 갖고 있기에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몇 마디 나눠보니 그게 아닌 것 같네요. 아무래도 루카 카네시로를 카네시로 가문의 후계자로, 당주로 만드는 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욕망이 얽혀 있지 않나요?”
“…욕망?”
“오, 정색하실 것 없습니다. 인간들 중에는 욕망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더군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니겠습니까? 출세하고픈 욕망, 부를 누리고 싶은 욕망,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이 베푸는 것과 같은 애정을 받고픈 욕망,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그것이 인간을 더욱 발전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죠. 그렇기에 저는 비꼬는 것도, 당신을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영혼에 깃들어 있는 욕망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뿐이죠.”
“당신, 대체…….”
“솔직해져 보자고요. 이 자리에는 카네시로 가문 사람도, 당신이 끔찍하게 아끼는 루카 도련님도, 이 늦은 밤 주점에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몰래 엿듣는 자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건 오직 나와 당신 뿐. 그러니 얼마든지 말해도 괜찮답니다. 당신의 그 푸르게 불타오르는 영혼에는 어떤 욕망이 깃들어 있는지… 말해보겠어요? 나에게.”
턱을 괴고 아이크의 눈을 빤히 응시하면서 복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쏟아낸 유혹의 말은 단단했던 아이크의 눈동자를 크게 흔들었음. 점점 그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평범한 인간은 제대로 숨쉬기도 힘든 공기에 잠식되어 가는 것을 보며 복스는 만족스레 웃었음.
아름다운 것이 스러지는 광경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여유를 부린 순간 복스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목도했음. 점점 눈의 초점을 잃어가던 아이크가 한 번 비틀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고,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크의 눈에는 뜻밖에도 빛이 돌아와 있었음. 심지어 복스를 향한 적의와 경계심이 최대치로 오른 상태로.
“당신…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그렇게 중얼거린 아이크는 그를 단단히 붙들어 매었던 실이 끊어지기라도 한 듯 풀썩 하고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음. 그것은 명백한 거부 반응이었고 그것이 복스를 무척 놀라게 했음. 바닥으로 쓰러진 아이크를 본 순간 복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랬음.
안 통하네?
“…하!”
놀랍군. 아주 놀라워, 아이크 이브랜드.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런 인간은 대체 몇 백년 만에 만나보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 자가 처음일지도 몰라.
곤란하게도 이제는 슈의 행복을 위해 아이크를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아이크 자신에 대한 흥미가 일어버렸음. 후후 웃고 난 뒤 기절한 아이크를 앞에 두고 그 얼굴을 안주삼아 술병을 다 비운 복스는 식탁에 차려진 것들 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만 골라서 몇 점 맛을 본 다음 주인을 불렀음.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는 생각이라도 한 걸까? 불만스러웠던 주인의 표정은 방 문을 열고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복스임을 알자 반색을 했음.
“죄송합니다. 일행이 술에 취해 잠들어버려서요. 이만 나가볼까 합니다. 계산서는 야미노 재봉소 앞으로 보내 주십시오. 내일 귀가 후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준비하지요.”
“아, 그리고 하나 더. 통금 시간이 가까워졌으니 숙소를 하나 잡아 주시겠습니까? 두 사람이 묵을 수 있게요.”
빙그레 웃으면서 복스가 꺼낸 말의 진위까지는 주점 주인은 알지 못했을 것임. 그러나 동시에 결코 입이 무거워 보이지 않는 이 남자를 통해 ‘야미노 재봉소의 식구’ 인 자신과 ‘카네시로 가문의 고용인’ 인 아이크 사이에 있었던 일이 다소 천박한 상태로 퍼져나갈 것은 분명했음.
자, 아이크. 그 때도 너는 그 당당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 번 보도록 하지.
의기양양하게 쓰러진 아이크를 안아드는 복스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어려 있었음.
다음날 아침 아이크는 눈을 떴음. 이른 새벽인지 어슴푸레한 아침 해가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음. 머리가 얼얼하고 한기가 도는데다 몸 여기저기가 뻐근한 것이 감기의 전초 증상인 것 같았음. 도련님에게서 옮았나, 생각하며 한 번 뒤척이려던 아이크는 뭔가가 제 몸을 막아세운 듯한 감각을 느꼈음.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무언가에 붙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느낌이었음. 아득한 정신을 억지로 갈고 닦아 세워 어제 있었던 일을 조합해본 아이크는 자신의 기억이 끊어진 곳이 주점이었다는 것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의 얼굴을 기억해냈음.
복스 아쿠마.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남자가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고 있는 팔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크게 당황하고 놀라며 아이크는 있는 힘껏 복스의 몸을 밀쳐냈음. 졸지에 떠밀려 이부자리 밖으로 나가게 되고서야 복스가 눈을 떴음. 아야야, 하고 태평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니 꼭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아 누르고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는 칼을 찾은 아이크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음.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임.
“다…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으으… 아침부터 너무 소리 지르지 말아줘. 술기운에 머리가 아프다고…….”
“술…?”
그래, 이 남자와 술을 마시다가 어느새 정신을 잃었었지. 하지만… 내가? 아이크는 그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음. 술을 특출나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카네시로의 후계자가 될 사람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아이크는 항상 취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습관이었고, 그러기 위한 훈련도 받은 참이었음. 심지어 어제는 얼마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버렸다고?
게다가 거기 더해 이 남자와 한 이불로, 그것도 맨몸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문제였음. 게다가 온몸에 남은 묘한 격통이나 뒤늦게 자신의 몸 군데군데 보이는 울긋불긋한 자국은… 설마. 상상하기도 싫은 일을 떠올리고 아이크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모아 제 몸을 가렸지만 자신의 상상이 맞다면 이 자는 어젯밤 아이크가 상단에서 빠져나온 이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모조리 들여다보았을 것이 틀림없었음.
세상에,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추측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음. 결국 아이크가 할 수 있는 일은 굴욕을 곱씹으며 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복스에게 묻는 것뿐이었음.
“…대답하세요. 어제 내게 무슨 짓을 했죠?”
아이크가 그렇게 묻자 아직도 나가떨어지면서 부딪힌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복스는 별 괴상한 질문 다 듣는단 표정으로 아이크를 바라보았음. 그 뻔뻔한 얼굴을 보자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내달렸고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복스는 아이크에게 그런 희망을 주지 않았음.
“무슨 짓이라니.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당신이 어제 술에 취해서 잠들어버렸고 통금 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할 수 없이 방을 잡은 것뿐인데 분위기에 휩쓸려 그렇게 됐을 뿐이지.”
“분위기에 휩쓸리다니…! 누가 그런 말을 믿겠어요!”
“이거 왜 이러시나. 우리는 합의하에 밤을 보냈다고. 설마 내가 당신이 마시는 술에 약이라도 탔을까봐? 그리고 잠든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와서 범했다고? 상상력이 풍부하시군. 안타깝지만 나는 그만큼 궁하지 않아서 말이야.”
정말인지 아닌지는 내 얼굴만 봐도 알겠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복스는 어찌나 뻔뻔해 보이던지 아이크는 있는 힘껏 그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만 했음. 대신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해보려 했음. 그것이 자의였던 타의였던 이 남자와 밤을 보낸 것만은 사실인 것 같고,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는 나중에 추궁할 일이었음. 지금은 일단 시간을 확인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카네시로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했음. 복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던 무시하고 제가 입었던 옷가지를 찾으려던 아이크의 손목이 복스의 손에 붙들렸고 그걸 뿌리치기도 전에 아이크는 복스의 눈동자를 마주했음.
분홍과 노랑이 어지러이 섞인 눈동자.
“아직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조금만 이야기를 듣고 가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였어야 하는데, 왜인지 복스의 눈을 본 순간 전신이 지배당하기라도 한 듯 움직여지지가 않았음.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황망해진 아이크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보고 복스는 만족스레 웃었고 그 미소에 갑자기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음.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음. 눈앞에 있는 이 남자 외에는.
“어제 우리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 루카 님을 후계자로, 가문의 당주로 옹립하는 일에 당신이 그토록 열심인 이유. 당신 스스로는 분명히 자각하고 있을 욕망. 당신은 그게 뭔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밤을 한 번 보내 보니 알 것도 같단 말이야.”
“무… 슨.”
“카네시로 가문에 당신이 바쳐 온 시간, 노력, 고통…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겠지. 그 순진하고 해맑은 도련님은 분명 당주가 될 소질이 충분하지만, 그건 모두 당신이 키워 준 것이니까. 당신은 지금도 루카 카네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이대로 그가 당주 자리를 차지하면 그가 카네시로 가문 당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당신의 의지로 조종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렇지 않나?”
“가, 감히…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올려…?!”
“오, 안타깝지만 나는 카네시로 가문의 고용인이 아니라서 말이야. 내가 흥미있는 건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과 그 욕망이 그 인간의 인생을 좀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것뿐이거든. 그렇기에 당신에게 꼭 물어보고 싶군, 아이크 이브랜드. 과연 당신이 한몸 바쳐 만들려는 그 미래가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하나?”
“…뭐?”
“그야 짜릿하긴 하겠지. 루카 카네시로가 카네시로의 필두에 앉아 이 거리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이 그간 당신이 희생해 온 것의 보상이니까. 무척 달콤하긴 할 거야. 하지만 장담하건데, 그 기쁨이 오래가지는 못할 걸.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을 봐왔고 그들의 말로도 지켜본 내가 하는 말이니까 확실해. 아이크 이브랜드. 당신의 허무는 권력욕 따위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이 자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아이크는 눈을 깜박이지조차 못한 채 복스의 눈동자를 응시했음.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은 일단 확실했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복스 아쿠마는 아이크 이브랜드에 대해 굉장히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가 입에 올린 아이크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었음. 단 한 가지, 그 목표를 이루었을 때의 기쁨이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저주를 제외하고는. 그렇기에 아이크는 그 말을 부정해야 했지만 입이 열렸을 때 튀어나온 말은,
“…그래서, 포기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이크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복스의 손을 뿌리쳤음. 내가 수많은 이들의 아래에서 버려 온 시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해. 내 목표를 이루는 것밖에는. 그런 생각으로 아이크가 다시 푸르게 불태우는 영혼을 복스 아쿠마는 만족스레 바라보았음.
“당신이 그렇게 스스로를, 그 아름다운 영혼을 불태우지 않아도 루카 카네시로는 어차피 카네시로의 당주가 될 거야. 그 외에 후계자 자리에 앉을 만한 후보는 이미 남아 있지 않으니까. 상세하게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그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보아 후환을 남겨뒀을 리 없지. 그렇다면 이제 안심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볼 준비를 하는 게 생산적이지 않겠나? 그러니 여기서 제안을 하나 하지. 내가 당신이 잃어버린, 희생한 시간과 나날을 보상해주는 건 어때?”
“…뭐라고?”
“물론 조건은 딱히 없어. 당신에게 바라는 것도 없고. 당신의 도련님과 우리 가게 주인의 사랑 이야기는 이제 그들의 손에 맡겨졌으니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보자는 거지. 그리고… 나는 그걸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씩 웃는 복스의 얼굴은 ‘폭력적이다’ 란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매력으로 넘쳐흘렀음. 어젯밤 있었던 일로 그에게 결코 좋은 인상을 품을 수 없었던 아이크조차 한순간 그렇게 생각한 것을 보면, 이것이 과연 인간의 힘으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까지 생길 판이었음. 할 말을 잃은 아이크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올려 복스가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온몸을 지배하던 주박이 풀렸고,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아이크를 두고 복스가 이부자리 옆에 개어둔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은 뒤 아이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필첩을 꺼내 뭔가를 적었음.
“조금이라도 그럴 마음이 있다면 내가 지금 지내는 집의 약도를 그려두었으니 찾아오도록 해. 참고로 나는 술시(戌時)에서 해시(亥時) 사이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가니까 그 시간 이후라면 언제든 와도 좋아.”
“…….”
“만약 올 생각이 없거든 한 번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의 진짜 욕망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야.”
생긋 웃고 복스는 아이크를 남겨둔 채 먼저 방을 나섰음.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크가 간신히 이부자리 옆으로 손을 뻗었을 때는 펼쳐진 필첩과 그 위에 그려진 약도가 싫어도 눈에 들어왔음. 흔들리는 눈으로 복스 아쿠마의 집으로 가는 약도를 보고 있던 아이크는 입술을 꼭 다물고,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었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