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 군주 x 밴드부 보컬 아이크로 복사이크 캠퍼스물 (2)
복스와 아이크의 관계는 저번 학기에 비해서는 확실히 발전했음. 첫 오리엔테이션 수업에서 재회하고 과제를 위한 영화감상 일정을 잡은 뒤 헤어졌다가, 아이크가 복스한테 [이번 학기 잘 부탁해^^] 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시작이었음. 당연히 복스도 그에 맞춰 [잘 부탁해] 라고 대답했는데 전과는 달리 대화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임.
[복스 넌 자취해? 아니면 기숙사에 살아?]
[어… 학교 근처에서 혼자 살아.]
[난 기숙사에 살거든? 어차피 우리 영화 볼 때는 빌려서 봐야 할 텐데, 너희 집이랑 기숙사 중간지대에 대여점 같은 거 있어? OTT에 있는 작품은 다른 애들도 고를 거 같으니까 되도록이면 서로 조사해서 추천하는 작품을 고르고 DVD를 빌려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아, 있어. DVD 대여랑 판매 둘 다 하는 가겐데, 주인 아저씨가 영화광이라 다양한 작품이 많아. 나도 자주 가.]
[정말? 잘됐다, 그럼 다음 주에 수업 끝나고 한 번 데려가줄래?]
거기서 한 번 덜컥했음. 사실 별 거 아닌데 왠지 모르게 아이크랑 과제 외의 용건으로(엄밀히 말하면 과제 관련한 용건이 맞음)외출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거리는 거임. 복스가 영화광인 건 과 내에 소문이 자자한 얘기지만 그동안 복스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고 또 어디서 영화를 빌려보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그랬을까. 하지만 그건 엄청 사소한 건데. 정신차려, 나.
[복스?]
[아, 미안, 응, 괜찮아.]
[혹시 그 날 다른 예정 있어? 그럼 위치만 알려줘도 되는데.]
[아, 아냐, 별 일 없어. 같이 가자.]
[그래? 그럼 다음주에 봐. 잘 부탁해~]
우와, 얼떨결에 약속을 잡아버렸어. 그 날 뒤로 복스의 머릿속은 그 별거 아닌 약속으로 가득 찼지. 그 주가 정규 수업 전의 오리엔테이션이 대부분이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수업 시간에 잠시 넋을 놓고 있어도 말려줄 친구 하나 없으니 더욱 그랬음. 집에 돌아와서 영화를 볼 때만은 그나마 제정신이었지만 왜 이번 일주일 내내 로맨스 영화만 찾아보게 됐던 걸까? 정말 이해가 안 갔음.
그렇게 가슴이 술렁술렁한 일주일을 보내고 드디어 다시 월요일.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평소보다 0.5배는 빠른 속도로 강의실로 향한 복스는 아침부터 신나게 붙어다니는 커플들을 지나쳐 강의실에서 아이크를 찾았음. 그런데, 어라? 아직 아이크는 강의실에 오지 않은 모양이었음. 저번주엔 자기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으니까 평소에도 그렇게 일찍 다니는가 싶었는데. 내가 먼저 자리 잡고 앉으면 이번엔 아이크가 옆에 앉아줄까? 괜한 걱정을 하며 저번 주에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초조하게 아이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를 몇 분, 털썩, 하고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음.
-안녕, 복스.
아이크는 서둘러서 뛰어온 건지 살짝 호흡이 거칠었고, 땀에 젖은 앞머리가 반질거렸음. 의자에 앉아서 휴우, 하고 한숨을 쉬다 복스가 뒤늦게 안녕, 하고 인사하자 다시 옆을 바라보며 응, 안녕, 하고 인사해주는 아이크는 오늘도 귀여웠음. 이 애의 웃는 얼굴은 왜 이렇게 귀엽게 보일까?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웃어주기 때문일까? 저번 주에도 매고 왔던 크로스백 안에서 예의 그 노트를 꺼낸 아이크는 전에도 본 적 있는 손수건으로 머리의 땀을 훔쳤음.
-어….
-응? 왜?
-아니, 그 손수건… 전에 나 상처 났을 때…
-아, 그 때 그거 맞아.
-저기… 그 땐 경황이 없어서, 차마 거기까진 못 챙겼는데… 그거 원래 내가 가져가서 빨아줬어야 하는 거지… 미안.
-응? 아냐, 됐어. 비싼 손수건도 아닌걸 뭐. 신경 쓰지 마.
사실 이건 아이크의 말대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음. 다친 당일이면 모를까 몇 달이나 지나서 뒤늦게 피 묻은 손수건 얘기를 해봐야 상대는 뭘 새삼… 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러나 우리의 복스 아쿠마는…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이 귀여운 친구에게 아주 약간의 실례도 끼치고 싶지 않을 만큼 호감도가 올라가 있었고…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크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한 지 얼마 안 되어 교수님이 들어온 덕에 이 이야기가 더는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이지. 복스는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음. 아이크는 괜찮다고 하지만 역시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지, 나중에 커피라도 사자… 앗, 그러고보니 그 날 나 아이크한테 커피까지 얻어마셨잖아! 이런 경우 오늘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 하나? 아이크 오늘 시간표가 어떻게 됐지? 덕분에 수업 초반부를 살짝 날려버린 복스였음.
그렇지만 복스 아쿠마는 영화광… 이 수업에서 언급할 만한 영화의 역사는 이미 다 꿰뚫고 있었고… 덕분에 수업 초반부 정신이 딴 데 가있었지만 그날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아이크와 나란히 강의실을 나왔음. 복스가 오늘 아이크의 다음 수업이 언제였는지 고민하는 사이 복스에게 그 DVD 가게 주소를 물어본 아이크는 지도를 확인해보고 있었음. 오, 생각보다 기숙사에서도 가깝네. 그 목소리가 자신이 추천한 가게를 달가워하는 것처럼 들려서 복스도 살짝 들떴음.
-무슨 영화를 볼지는 다음 주 수업 끝나면 확실히 고를 수 있을 거 같고, 오늘은 가게에 어떤 영화가 있는지 좀 보려고 하는데.
-응. 웬만한 건 다 있을 거야. 이번 수업에서 다루는 건 유성영화의 역사 한정이니까, 주인 아저씨한테 시대를 알려주고 수집품을 보여 달라고 하면 줄줄 읊으실 걸.
-와, 진짜? 그런 가게를 용케 찾았네.
-인터넷에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있는데, 거기에서 소개받았어. 지금 주인 아저씨의 아버지 대부터 운영하던 가게고 전 사장님은 은퇴하기 전까지 영화 업계에서 스태프로 일하셨대. 아들 되는 지금 사장님은 영화 관련으로 책을 몇 번 낸 평론가셨는데, 한 10년 전에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해. 아저씨랑 얘기하고 있으면 아, 은퇴하고 나서는 이렇게 살면 참 좋겠다 싶어…
-훗…
열띠게 이야기하던 복스는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흠칫했음. 내가 또 나만 아는 얘기를 실컷 했나?! 좀 그랬나?! 하지만 쿡쿡 웃는 아이크의 표정은 썩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음. 오히려, 뭐랄까. 그냥 기뻐서 웃는 것 같은.
-복스 너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어, 어? 으응….
-조금 속물적인 생각일 수 있는데, 너랑 같은 조가 되어서 다행이다. 난 영화 보는 건 좋아하지만 그쪽 지식이 폭넓은 건 아니거든. 고르는 장르도 좀 편향적이고… 이번에 네 신세 많이 지겠다.
웃으면서 아이크가 툭, 하고 복스의 어깨를 살짝 쳤음. 쳤다고는 해도 가벼운 터치 수준이었고 당연히 복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한 행동이었음. 하지만 그 가벼운 터치와 아이크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왜일까,
쿵. 쿵.
하고 심장이 술렁이기 시작했음.
어쨌든 가게 방문은 성공적이었음. 단골손님이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뿐이라 젊은 영화광과의 대화에 언제나 목말라 있던 주인 아저씨는 얼마 안 되는 젊은 단골인 복스가 다른 젊은이를 데려와서 영화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기뻤는지 평소보다 열정적으로 영화를 여러 개 추천해주었고, 아이크가 성실하게 반응해주니까 기분이 좋았는지 진짜 찐 단골한테만 보여준다는 컬렉션까지 꺼내 와서 분위기가 잔뜩 무르익었음. 유일한 문제는 그 때문에 이야기가 길어져서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임. 이후 수업이 늦은 오후에야 있는 복스는 그렇다쳐도 점심 먹고 바로 수업에 들어가야 했던 아이크는 배가 고플 상황이었을 것임. 간신히 아저씨의 말을 끊고 가게를 나오면서 복스는 계속 아이크의 눈치를 보게 됐음. 복스도 그 옆에서 신나게 떠든 장본인 1이었기 때문에…
-미안, 복스, 나 다음 수업이 있어서 빨리 들어가볼게.
-아, 응, 나야말로 미안…
-미안하다니? 왜? 나도 재밌었는걸. 아저씨가 해당 시대 영화 많이 추천해 주셨으니까 뭘 볼지는 나중에 상의하자! 안녕!
그렇게 말하며 아이크는 학교 건물 쪽으로 전력질주했음. 멀어져 가는 아이크를 바라보면서, 아, 아까부터 또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아이크는 힐을 신고 다니는구나. 저걸 신고 나랑 눈높이가 비슷했을 정도니까, 원래 키는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건가? 허공만 봐도 그려지는 아이크의 모습에서 한 뼘 키를 줄여보다가 복스는 웃어버렸음. 우와, 얘 진짜 귀엽다.
복스와 아이크의 과제 모임은, DVD 가게 주인이라는 뜻밖의 조력자 덕분에 순탄하게 풀려갔다. 다른 학생들이 찾아오는 무난한 영화에 비해 영화광 가게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볼 수 있었던 복스와 아이크 조는 영화 선정에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평소에도 영화를 보고 감상을 혼자 정리하는 게 취미였던 복스는 물론 아이크도 문학부 학생의 격을 증명하듯 평론 수준의 리포트를 써 왔다. 교양 수업이니만큼 리포트에 힘을 주지 않은 학생들이 많아 더욱 비교됐겠지만, 사심을 제하고 생각해도 아이크의 리포트는 읽기 쉽고 해당 영화에 대한 아이크 개인의 시각을 잘 알 수 있었다. 과제 제출 전 서로의 리포트를 바꿔 읽어볼 때마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했을 정도다.
“뭐, 내가 쓰고 싶은 건 소설이긴 하지만.”
어느 날 용기를 내 아이크에게 글을 정말 잘 쓴다고 칭찬했더니, 겸연쩍어하며 아이크는 그렇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려면 인풋도 중요하잖아? 그래도 내가 선택해서 읽는 책들은 어쩔 수 없이 내 취향이 섞여서, 한쪽으로 편중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이번 학기엔 내 취향이 아닌 스토리를 접해 보거나, 내 전공이 아닌 장르 쪽을 건드려볼 생각으로 수업도 전부 그런 쪽으로 짰어. 그런 건 1학년 때 해둬야 할 거 같아서.”
‘성실한 학사계획' 을 말로 길게 풀어 쓰면 이렇게 될 것 같은 말이었다. 아이크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구나. 몰랐어. 그리고 그 꿈을 위해서 정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구나. 평소 수업에 임하는 태도 같은 것을 보아 성실하다는 건 전부터 알았지만 단순한 교양 수업에도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새삼스레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냥 다양한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이 수업을 들은 건데. 그렇게 말하자, 아이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그럴 수도 있지. 복스 너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며? 난 영화감독이 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다양한 영화를 보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상(像)을 그리는 것도 중요한 거 아냐? 너한테도 꼭 필요한 수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가게 아저씨가 지금까지 추천해 준 영화 중에는 너도 못 본 영화가 많았잖아. 아직 1학년이니까 이것저것 해보면 좋지.”
게다가, 하고 아이크는 덧붙였다. 주변 친구들은 내가 이번 학기엔 이렇게 할 거라고 하니까 다들 유난이라고 하던걸. 그래서 네가 칭찬해주니까 기분 좋은데? 턱을 괸 채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는 아이크는 여전히 귀여웠지만,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 나가던 도중, 그들의 교류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언제나처럼 2주 간의 강의를 마친 후 영화를 보러 가야 하던 날, 갑자기 아이크가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을 바꾸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정말 미안해, 복스. 저번 주부터 그럴 조짐은 있었는데, 스케줄이 픽스가 안 되더라고. 결국 오늘 와서 통보하게 됐어.”
“아, 아니, 난 괜찮아. 언제든 시간은 있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야?”
“동아리 활동 때문에. 이번 주 내내, 정확히는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수업 끝나면 바로 동아리에 가봐야 해.”
“아하……. 그럼 토요일은?”
“음……. 금요일 밤 언제 돌아올지에 따라 다르긴 한데……. 혹시 저녁 시간에 봐도 괜찮아?”
“응, 괜찮아.”
“정말 미안. 내가 그 날 저녁 살게.”
“아, 아니야, 그럴 것까진…….”
“토요일에 보면 리포트 쓸 시간이 하루 정도밖에 없잖아. 다른 수업 과제도 있을 텐데. 내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변경하는 거니까 어떤 식으로든 내가 보상하는 게 맞지.”
그렇게 치면 아이크 자신도 리포트를 쓸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는 셈이다. 게다가 금요일까지 매일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 활동을 하러 가야 한다면 시간이 더 없는 건 아이크 쪽 아닌가? 그 날 나한테 저녁까지 사주겠다고 시간을 쓸 필요가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했지만 ‘밥까지 사줄 필요는 없다’ 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못했다. 보상을 해주겠다는 아이크의 의지가 너무도 확고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아이크와 함께 식사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도 못했던 것이다. 복스가 더는 거절하지 않자 아이크는 만족했는지, 그럼 토요일에 연락하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커피숍 밖으로 나가는 아이크의 표정은 복스가 지금까지 봐온 것 중에서 가장 생기 넘쳐 보였다.
그 뒤로는 아무 일 없는 며칠이 지나갔다. 원래는 수업이 끝나면 아이크와 만났어야 할 목요일, 과 사무실에 제출해야 할 서류가 있어 수업이 끝나고 과 조교를 찾아갔던 복스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복스 너 내일 뭐 예정 있냐?”
“예? 아뇨, 없는데요.”
“그럼 이거 좀 사주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며 조교가 내민 것은 웬 티켓이었다. [Friday Night] 이란 문구가 크게 적혀 있는 종이 티켓. 이게 뭐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복스를 보고 조교는 기가 막히다는 듯 몰랐어? 라고 물었다.
“얼마 전부터 교내 곳곳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잖아. 우리 학교 5대 밴드 동아리가 모여서 합동 공연 한다고.”
“밴드 동아리…… 요?”
“그래. 이게 워낙 인기라서 티켓을 돈 주고 판단 말이지. 지금 한창 꼬시는 애랑 가려고 기껏 사놨더니 걔가 밴드에 관심이 없다는 거야. 헛돈 쓰게 생긴 거지 뭐. 한 장은 어찌어찌 처리했는데 다른 한 장이 남아서. 일 없으면 너도 여기 가보지 그래?”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라고, 조교가 살짝 이쪽을 깔보는 말을 덧붙였지만 복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학교에 있는 밴드 동아리들의 합동 공연. 그렇다는 건, 축제 때 한 번 보았을 뿐 그 뒤로는 만나본 적도 이름도 모르던 그 보컬이 소속된 밴드도 공연을 한다는 뜻이다. 그럼 그 보컬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복스는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었다. 조교가 부른 티켓 값이 그 티켓의 실제 가격인지, 아니면 프리미엄이 더 붙은 가격인지는 몰라도 상관없었다. 바로 내일 밤 9시 그 보컬이 노래하는 걸 또다시 볼 수 있는 것이다! 티켓을 받아 지갑에 고이 넣고 과 사무실을 즐겁게 떠나는 복스를 조교는 퍽 이상한 눈으로 보았으리라. 신이 나서 복도로 나온 뒤에야 조교가 말한 포스터가 겨우 복스의 눈에도 들어왔다. [Friday Night] 이란 행사의 표제 밑에 출연하는 밴드의 이름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 예쁜 보컬리스트가 소속된 밴드는 어떤 밴드일까? 몇 번째 순서로 공연할까? 복스의 마음은 잔뜩 들떴다. 그대로 집에 돌아간 뒤 복스가 고른 그 날의 영화는 록 밴드를 다룬 영화였다.
다음날 밤이 되기만을 기다려 복스는 공연이 열린다는 라이브 하우스로 향했다. 그런 장소에는 처음 들어가보는 것이라 백팩을 맨 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라이브 하우스에는 사람이 잔뜩 들어차 있었고, 덕분에 9시 가까이 되어서 온 복스는 입구 근처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웨이터가 쟁반에 잔뜩 음료를 받쳐들고 와서 하나를 고르라기에 적당히 색이 예쁜 걸로 골랐다. 푸른색 스포츠 드링크를 연상시키는 색의 음료는 당연하게도 술이었지만 한 모금 마신 뒤에도 취기가 오르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라이브 하우스로 들어오기 전부터 쌓은 고양감이 술기운을 억누른 탓이었다.
그렇게 한 모금 마신 술잔을 들고 9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순간, 장내의 조명이 한번에 꺼지고 무대 쪽에 조명이 집중되더니, 그 날 오프닝 공연을 맡은 밴드가 무대에 올라왔다. 다만 무대 가운데에 선 사람이 여성 보컬이었기 때문에 잔뜩 올라갔던 복스의 기대에 찬물이 왈칵 끼얹어졌다. 실제로 물방울 몇 개 정도는 튀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그마한 체구에 요정 같은 생김새의 보컬이 “저희는 걸리시 팝 밴드 <pastel> 입니다!” 하고 자기소개를 하자 복스의 앞에 서 있던 남학생이 보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손을 치켜드는 바람에 들고 있던 맥주 잔에서 내용물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다만 거기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발랄하고 톡톡 튀는 음악이 장내를 가득 메워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아버린 탓이다. 단 한 명, 복스만이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래도 이어지는 라이브를 보다 보니 이 공연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록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 모여 각자 다른 색깔의 공연을 펼치는 구성으로, 한 공연에 여러 가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구조다. 마치 영화제 같다고 생각하며 복스도 점점 장내의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다만 오프닝 공연을 맡은 <pastel>에 이어 J.POP 전문 커버 밴드라는 <Fireflower>, 컨트리 풍 음악을 하는 <log hut>, 펑크 록 전문 밴드라는 <What’s UP?!> 까지 총 네 가지 밴드의 공연이 지나갔지만 복스가 기다리는 그 보컬은 무대에 올라오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밴드의 공연만이 남아버렸다. 그 보컬을 처음 본 축제 날 그가 하던 음악은 <pastel> <log hut>의 음악보다 묵직한 사운드였고, <fireflower>와 비슷했지만 가사는 전부 영어였고, <What’s UP?!> 멤버들과 비슷한 의상을 입고 있었던 것 같지만 세세한 디자인은 조금씩 달랐다. 그 보컬이 소속된 밴드 동아리는 5대 동아리에 속해 있지 않은 건가? 그 보컬이 오늘 무대에 서기는 하나? 살짝 불안해졌을 때 마지막 밴드가 무대에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Royal Flash>입니다!”
그 목소리에 축 처져 있던 복스의 어깨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여전히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너머로 무대 위에 선 작은 체구의 보컬이 보였다. 그 애다. 멀어서 얼굴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용기 내어 한 발자국을 내딛어 봤지만 복스와 무대 사이를 빽빽하게 메운 관객들은 요만큼도 비켜 주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여전히 보컬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거리에서 복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관객들의 환호성에 묻혀 축제 날처럼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첫 곡은 오리지널 곡인 <BLUE LIGHT> 입니다! 즐겨주세요!”
웅장한 사운드가 보컬의 목소리와 오버랩되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피커를 쩌렁쩌렁 울리는 음악은 관객들의 목소리를 삼켜버리고, 관객들의 흥분을 원동력 삼아 라이브 하우스 전체를 에워싸고, 입구 바로 앞에 서 있는 복스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스탠드 마이크를 두 손으로 붙잡고 보컬이 처절한 목소리를 뽑아내기 시작한 순간 또다시 축제 때와 비슷한 감각이 복스를 지배했다. 이 세상에 오직 저 노래하는 보컬과 그의 옆에서 연주하주는 밴드 멤버들밖에는 존재하지 않고, 자신을 포함한 관객들은 밴드를 감싼 공기 속에 녹아든 것 같은. 그러나 그들의 사운드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허공 이곳저곳을 찔러대며 ‘감동’ 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관객들의 몸에 깊이 남기는 것 같은. 곡 여기저기에 섞여 있는 브루탈 창법도 귀를 통해 들어와 온몸을 짜릿짜릿하게 울렸다. 그러다 곡의 절정에 도달해 템포가 느려지고, 밴드 사운드가 줄어들고, 보컬의 목소리가 가장 강조되는 파트로 향한 순간 복스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운명적인 싸움에 나서 제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주인공이, 힘이 다해 쓰러진 마지막 순간 하늘에서 자신을 맞으러 온 신을 향해 힘겹게 손을 뻗으며 생을 다하는 영화를 본 기분이었다.
처음 이 밴드의 공연을 봤을 때는 이런 기분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그저 즐겁게 웃으면서 노래하는 보컬이 너무 아름다워서 거기에 넋이 나갔을 뿐, 노래를 제대로 들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대단하다. 이런 음악을 하는 밴드구나. 이런 노래로 관객들을 홀리는 보컬이구나. 정말 멋있다. 첫 곡이 끝나고 든 감상은 얼마 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이야기하던 친구를 향해 품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이크도 이 공연을 봤다면 좋았을 걸. 록 음악을 좋아하는지까지는 모르지만, 나하고 같은 감상을 품었을 것 같아.
<Royal Flash>의 다음 공연도 첫 곡과 비슷한 색의 하드 록이었다. 다른 밴드 멤버들에 비해 작고 가녀린 그 보컬은 목이 쉬지 않는지 궁금할 만큼 능숙하게 목을 긁어가며 열연을 펼쳤고, 첫 곡만큼 강한 감동은 받지 못했지만(아마도 그 뒤의 곡이 오리지널이 아닌 커버 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복스는 그의 노래에 푹 빠져 공연을 즐겼다. 세 곡을 마친 <Royal Flash>가 무대에서 내려가고, 사회를 맡은 사람이 공연의 끝을 선언하고, 여운을 즐기는 관객들의 술 파티가 벌어졌을 때쯤 복스는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던 음료의 나머지를 전부 들이키고서야 라이브 하우스를 떠났다.
한 번만 더 그 보컬을 보고 싶다. 그런 생각에 충동적으로 보러 온 공연이었지만, 기승전결이 완벽한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고양감에 스텝이 점점 빨라졌다. 마지막 순간 단숨에 들이킨 술도 한몫을 했으리라. 좋은 공연이었어. 그 오리지널 곡은 특히 좋았지. 음원 같은 것도 팔고 있을까? 집에 가면 조사해 봐야겠다. 타고난 긴 다리로 겅중겅중 뛰며 집으로 돌아가는 복스의 머릿속에는 <Royal Flash>의 오리지널 곡이 빙빙 맴돌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 아이크에게서 전화가 왔음. 어제 동아리 활동 끝나고 뒤풀이까지 같이 가는 바람에 지금 일어났다는 연락이었음. 미안, 한 시간 뒤에 봐도 될까? 복스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음. 어젯밤 공연의 여운으로 잠을 설치는 바람에 자기도 늦잠을 잤기 때문임. 예의 그 비디오 가게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시간에 맞춰 나가 보니, 주말이라 그런지 아이크는 평소 보는 것보다 프리한 복장을 하고 나왔음. 연한 푸른색 후드 티셔츠에 블랙진. 진짜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차림이었고 머리 세팅도 안 했는지 자연스레 헝클어진 게, 원래는 이상해 보여야 했는지 모르지만 평소보다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음.
-동아리 활동 잘 끝냈어?
-응, 피곤하긴 하지만 나름 재미있었어.
그러고 보니 이 타이밍엔 아이크, 너 무슨 동아리야? 라고 물어봐야 하는 걸까? 이런 커뮤니케이션에 익숙치 않은 복스가 말을 꺼낼 타이밍을 못 잡은 사이 아이크가 바로 내 사정 때문에 약속 늦춰서 미안, 하고 사과하는 바람에 그 말을 할 기회는 날아가 버렸음. 아이크가 약속을 주말로 바꿔 잡은 덕분에 어제 그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게 생각났기 때문임.
-아니, 괜찮아. 나도 덕분에 좋은 공연을 보고 왔거든.
-어? 영화가 아니고?
-응. 혹시 [Friday Night] 라고 알아? 우리 학교 밴드 동아리들이 모여서 주최하는 합동공연이래. 조교 선배가 티켓을 양도해줘서 갔는데, 거기서 진짜 멋진 공연을 하는 밴드를 봤거든.
-어…? 그, 그래? 어떤 밴드였는데…?
그렇게 묻는 아이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복스는 그 떨림의 의미는커녕 아이크가 긴장했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했음.
-<Royal Flash> 라는 밴드야. 메탈 음악을 하더라고. 그전까지 자주 접하지 못한 음악이었는데도 정말 좋았어. 사실은 축제 때 우연히 한 번 보고 그 밴드의 보컬한테 감명을 받아서, 꼭 다시 한 번 공연하는 걸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볼 수 있었지 뭐야! 그 보컬, 학교 축제에서 노래할 때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그 땐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인상에 남았거든. 그리고 어제 공연에서 한 오리지널 곡은 엄청 처절한 사운드였는데, 노래를 정말 잘 하는 건 당연하고 화자의 감정을 엄청 세세하게 전달하더라고. 마지막 부분에선 나 눈물도 찔끔 났다니까. 엄청 멋있었어…
-아… 그렇구나. 좋았겠네…
-응, 엄청 좋았어. 정말 잘 만든 영화를 한 편 본 기분이었달까? 어제 집에 가서 조사해 봤는데 음원을 팔더라고. 당장 샀어. 너도 들어볼래?
-……
-…아이크?
-아, 응… 응, 그건 내가 찾아서 들어볼게. 추천 고마워… …자, 더 늦기 전에 저녁 먹고 영화 보러 가자. 뭐 먹을래?
어라? 왠지 말을 돌리는 것 같네. 밴드 음악엔 별로 관심이 없나? 어색하게 돌아서는 아이크를 따라가면서 괜한 말을 했나, 내가 너무 어린애처럼 들떴는지도 몰라, 하고 괜한 걱정에 사로잡힌 복스는 적어도 오늘 저녁 먹는 동안에는 그 공연 얘기는 다신 하지 말자, 라고 마음먹었음.
얼른 가자며 슬쩍 돌아섰을 때 아이크의 얼굴에 수줍은 기색이 떠올라 있다는 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 아, 진짜……!’
살짝 기가 죽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복스의 기척을 느끼면서, 점잖은 편인 그가 자신의 행동을 추궁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크는 평소보다 빠르게 걸었다. 일정이 급했기 때문도, 복스가 생각한 대로 관심 없는 화제에서 벗어나기 위함도 아니었다. 난처해하던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리고 그 난처함의 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저렇게 나오면 도저히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잖아……!’
방금 전 복스 아쿠마의 입에서 마치 신을 찬미하듯 흘러나오던 말들. 장황했지만 ‘얼굴이 예쁘고 노래가 멋있었다’ 로 요약할 수 있는, <Royal Flash>의 보컬을 향한 찬사. 평소 항상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영화에 대해 떠들 때 외엔 흥분하는 일이 없는 편인 복스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칭찬을 가할 정도니 괜히 해본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백 퍼센트, 눈치도 못 챘겠지.
<Royal Flash>의 보컬리스트가 다름아닌 아이크 이브랜드라는 것을.
처음 복스가 [Friday Night] 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아이크가 바로 ‘나도 어제 거기 있었어’ ‘<Royal Flash> 란 밴드의 보컬로 무대에 섰어’ ‘나 밴드 동아리 소속이거든’ 하고 말하지 않은 것은 관객의 순수한 반응이 보고 싶어서였다. 아이크가 그간 봐온 복스는 자신이 찾아서 록 밴드 공연에 올 사람은 아니었고, 아마 시간이 나 갑자기 오게 된 것일 테니 <Royal Flush>를 포함해 이 대학의 5대 밴드에 대해서도 잘 모를 터였고, 솔직한 감상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만의 하나 불호에 가까운 평가가 나온다면 물론 복스의 기분을 생각해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그 외에는 복스의 평가가 어떻던 간에 그 밴드의 보컬이 자신이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듣는 사람이 낯부끄러워질 만한 이야기를 줄줄이 하면 누가 거기 대고 사실 내가 그 보컬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냐구.
그것과는 별개로 기뻤다. 정말로. 복스 아쿠마란 친구가 ‘좋은 작품’ 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확실히 정해져 있고, 심미안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가 한 칭찬이라면 더더욱 빈말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 엄청 기뻐. 기쁘긴 한데.
‘으……. 식당 도착하기 전까지 잦아들까? 이거…….’
홧홧거리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떼기를 반복하며 아이크는 뒤에서 쫓아오는 복스가 그 긴 다리로도 쉽게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걸었다.
이게 2탄에서도 안 끝날줄은 몰랐다
여튼 투비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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