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less (1)
복사이크 / 미친 대부호의 수집품이 된 복스(와 아이크)
트위터에서 풀었던 썰에서 조금 더 이은 버전
언제 잇게 될지 몰라서+전개도 진짜 대충 생각해놔서 펜슬에 썰 정리용으로 업뎃했습니다
풀버전으로 쓰고 싶어지면 포타로 옮길 예정입니다:D
어떤 부호가 있었다.
젊음을 불태워 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상급의 부를 손에 넣은 그는 인생의 말년에 불태워버린 젊음을 해소하려는 듯 다분히 비정상적인 일을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호의 처음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물건을 모으는 단순한 수집 활동이었다. 심지어는 어떤 작품이든 제 눈에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면 되었기에 미술사에서 아직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예술가의 작품이나, 길거리에서 싼 값으로 판매하는 조악한 공예품이라도 서슴없이 큰 돈을 주고 사들였다. 그가 지불한 돈으로 빈궁한 처지에서 벗어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된 예술가도 제법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부호의 수집 활동을 마냥 비판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욕심이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발전한 것에서부터 문제는 커지기 시작했다.
제 취향의 예술 작품을 건물 하나를 꽉 채울 만큼 모은 뒤 그는 그 어떤 예술 작품만큼이나 가치있는 것, 즉 생명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부터 수십 그루의 희귀 식물, 수십 개의 희귀 생물이 부호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만들어 놓은 인공숲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쯤부터 그는 자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제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인공 생태계를 유리벽 너머에서 관찰하면서 오직 자연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생물들을 보며 즐기는 것이 그의 취미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그것을 관리하던 자의 목이 날아갔다(그야말로 물리적으로!).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아랫사람의 생명을 거침없이 날려버리는 잔혹함을 동시에 즐기며 그 부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 이것 가지고는 나의 욕심을 다 채울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부호의 수집품은 이제 인간으로 그 범위를 넓혔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부호의 사육장으로 들어갔다. 부호는 그들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저 감상하기도 하고, 희롱하기도 하고, 강제로 교배를 시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서로 죽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역대 우승자의 목은 하나도 빠짐없이 방부 처리되어 부호의 수집 상자 안에 담겼다.
이 남자는 그런 잔혹하고 역겨운 행위로 젊은 시절 자신이 불태워버린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게 분명하다. 이미 잊혀진 인공 생태계 속 희귀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하루에도 수천 명이 새로이 태어나므로 이 부호에게는 영원히 마르지 않을 수집품으로 보였을 테니까.
인간이 타고나는 젊음과 외모를 마음껏 소비한 부호의 다음 수집품은 인간의 재능이었다. 각종 재능 있는 인재들이 지원을 바라고 찾아왔다가 부호의 장식장 안에 갇혀 살게 되었다. 여전히 부호가 수집품을 고르는 기준은 제 멋대로였기에 세계인의 절대 다수가 보기에 별 재능이 없다 판단될 이들도 부호의 마음에만 든다면 수집품이 될 수 있었다. 부호는 제 눈에 든 이들에게 찬사를 내리기도 하고 쓸 곳도 없을 돈을 뿌리기도 하면서 도망칠 길이 없는 그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며 제 영혼에 뿌리 깊게 박힌 사디즘을 마음껏 채웠다.
부호가 수집하는 재능 중에는 신비한 힘을 가진 인간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초능력자 같은 존재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사용해 부호의 낙원을 망가뜨리려 해도 부호에게는 그들을 억누를 만한 돈과 권력이 있었기에 그들은 부호의 좀 더 레어한 수집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마치 자연을 뛰어다니는 야생동물들이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하듯 이 부호는 수집품들 사이에서 자신을, 인간을 거리낌없이 공격할 수 있는 성정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선수를 쳐서 제거해 버렸기에 누구 하나 그의 낙원을 침범할 수 없었다.
아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부호의 수집욕은 이제 전설적인 존재에까지 도달했다. 뜬구름 잡듯 어디서 이러한 신비를 경험했다는 체험담을 들으면 사람을 보내 그 정체를 조사하고, 자신이 보기에 수집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들은 무조건 가져오게 시켰다. 마치 RPG 게임에서나 등장할 아이템과 신비한 종족들이 부호의 낙원의 일원이 된 것은 물론이다.
차라리 제 취향을 짬뽕해 놓은 게임이나 만들었더라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넘어갔을 것을.
어리석고 욕심만 많은 부호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을 제 낙원에 맞이하게 된다.
부호가 가진 것들 중 가장 가치 있고 그 누구도 손에 넣어본 적 없는 새로운 ‘수집품’ 은 악마였다.
영국의 산속에서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악마는 자신에 대한 소식을 들은 부호가 보낸 토벌단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들에게는 악마의 힘을 제어할 비장의 수가 있었다. 대체 무슨 수단을 썼는지 알 길 없는 악마는 허무하게 붙잡혔고 수치스럽게도 부호의 저택으로 끌려왔다.
하지만 악마가 저항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방심하다 뒤통수를 맞았을 뿐 악마는 제 고유의 능력을 변함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그 능력을 사용하면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부호와 그의 자경단을 따돌리고 저택에서 도망치는 것쯤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욕심으로 바른 남자의 욕망을 있는 힘껏 자극해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서 부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넣고 그 저택을 자신의 새로운 왕국으로 만드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악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악마는 부호의 토벌단에 붙잡혀 부호의 저택에 수납된 시점에서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악마를 해치울 수 있는 힘을 타고난 성직자나 데몬 슬레이어가 아닌 이상 악마를 구속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부호가 보낸 토벌단 안에는 그런 소질을 가진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모종의 수법으로 악마와 맞설 수 있을 만한 금단의 힘을 손에 넣었음이 틀림없다는 건데, 그러한 힘은 반드시 사용하는 인간의 몸에,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저주를 새기는 법이다. 그런 힘을 휘두를 생각을 한 것도 기가 막힌데 심지어 그 동기가 고작 희귀한 생물을 손에 넣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라니 더 기가 막혔다. 인류의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악마는 그 사실에 순수하게 감탄했고 부호의 만용을 치하하며 기꺼이 그의 수집품 중 하나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일종의 변덕이자 그가 인간의 영혼을 먹고 사는 불멸의 악마이면서도 ‘더 나아진 삶을 살고자 한정된 시간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간’ 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애정을 보이는 별종이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부호는 자신이 손에 넣은 가장 귀중한 수집품에게 온갖 정성을 들였다. 한때 그가 사용했으나 이제는 기억에서 지워진 호칭인 ‘군주’ 로 그를 칭했으며, 오직 악마를 위해서만 만든 별채로 그를 안내해 아낌없는 지원을 퍼부었다. 산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잠시 여기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부호의 목숨은 길어봐야 최대 10년이 될까말까했다. 지금껏 400년을 느긋이 여기저기 떠돌며 살아왔으니 10년 정도야 뭐, 순식간에 지나가겠지. 악마는 그런 생각으로 부호가 보내는 찬양의 신호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썩 기쁘거나 뿌듯한 것은 아니었으나 심심풀이는 되겠지 싶었다.
악마의 그 생각이 뒤집힌 것은 그가 부호의 저택에 오게 된 지 한 달 정도가 지나, ‘악마’ 라는 생물의 존재 자체만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던 부호가 슬슬 ‘악마’ 의 진짜 힘을 보고 싶다고 청해 왔을 때였다. 그렇다면 저택의 주인이여, 내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면 좋은가? 그렇게 묻자 부호는 환한 얼굴을 하고 악마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부호의 안내로 향한 건물은 입구에서부터 불쾌함을 느끼게 만드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그곳은 한때 부호의 유희장이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삶을 착취당하던 곳이었다. 이후 부호의 관심이 인간의 재능으로 옮겨가면서 잊혀진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한때의 수집품들을 한데 모아 놓고 부호는 악마에게,
마음껏 취하시지요.
라고 딱 한 마디 했다. 인간의 영혼을 먹고 사는 악마에게 저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이들의 숨통을 끊고서 배를 채우는 것으로 그의 권능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악마가 갖고 있던 부호의 욕심에의 감탄은 경멸로 바뀌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악마의 양식임과 동시에 영생을 사는 그에게는 품지 못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심지어 이 악마는 별종이 아니었던가? 사랑하는 인간의 영혼을 억지로 취하고 싶지 않아 그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삶을 택하다가 부호의 눈에 띄어 이곳까지 끌려온. 악마는 오랜만에 머리 끝까지 분노했고 부호에게 자신의 손을 뻗었다. 물론 생을 거둘 생각은 없고 그저 자신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만 알려주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뻗은 손이 부호의 머리를 붙잡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전류가 악마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토벌단이 악마를 붙잡으러 왔을 때 발휘했던 것과 비슷한 성질의 힘이었다. 피를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은 악마는 부호가 무척 실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주님, 왜 이러십니까. 힘을 발휘하시는 데 필요할 것 같아서 식사를 준비해 드렸건만. 부호의 목소리는 우리에서 키우는 늑대에게 먹이를 주었는데 늑대가 그것을 거부했을 때 내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아하.
그리고 남자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고귀하신 분께 손질도 안 된 식재료를 내어 드리다니. 이래서야 드실 수 없겠지요.
잔혹함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부호는 뒤에 서 있던 이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한 악마가 그만두라고 소리질렀지만 권총에서는 어김없이 불이 뿜어져 나왔고 그 자리는 곧 아비규환이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끔찍한 짓을! 악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악마답지 않은 발언은 그 뒤 총에 맞아 죽어가는 이들의 영혼이 그의 배 안으로 한꺼번에 몰려 들어오는 바람에 허공에 흩날려 사라졌다. 악마는 머리를 붙잡고 절규했지만 악마라는 종족의 특성만큼은 그가 막고 싶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약 서른 명분의 영혼이 악마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영혼을 포식한 악마의 몸집이 점점 커지며 원래의 형태를 찾았을 때 부호는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박수를 쳤다. 자신이 보고 싶었던 권능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겸 스스로의 사디즘도 채웠을 테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반면 악마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원하지 않던 포만감에 아주 오래 칩거하지 않고서는 사그라들지 않는 본모습까지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 있는 이들을 인간이 아닌 버러지로 판단하고 모조리 찢어 발겨도 시원찮았겠지만, 악마의 공격을 구속하는 괴상한 힘은 악마가 본모습으로 돌아온 순간 더더욱 강해졌다. 덕분에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악마를 바라보며 부호는 있는 힘껏 만족한 얼굴을 하고 악마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다음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악마의 목적은 이 저택을 탈출하는 것이 되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부호를 공격하려 들었을 때 악마를 제어하던 신비한 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 힘이 있는 이상 저 욕심 많은 인간은 또다시 악마를 찾으려 할 것이고, 악마의 진짜 모습을 되찾았음에도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는 걸로 보아 그라는 악마를 철저히 연구하여 얻어낸 결과물일 것이 분명하니 무작정 도망쳐 봤자 언젠가는 붙잡히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그 힘의 원천을 찾아 봉쇄해 버리는 것이 첫 걸음이 될 터이다.
그렇게 판단한 악마는 다음날부터 부호의 저택을 돌아다니며 그 힘의 정체를 찾아 헤매었다. 악마가 자신의 거처를 떠나 저택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닌다는 것을 부호가 알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므로 악마의 수색은 주로 부호가 잠든 밤에 이루어졌다. 부호의 넓디넓은 부지에 잔뜩 널린 수집품을 보면서 악마는 혀를 내둘렀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벗어난 존재에게마저 그런 반응을 보이게 만들었으니 부호의 욕심도 어지간했다 볼 수 있겠지.
어쨌든 악마는 부호의 콜렉션을 하나하나 눈과 기억에 담으며 자신을 옭아매는 힘의 정체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을 들여도 악마의 눈에 그러한 것은 들어오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배마저 꺼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다시 견딜 수 없는 공복 상태가 되면 또다시 부호의 손에 수많은 인간이 죽어갈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저항없이 악마의 뱃속에 들어갈 판이었다. 얼마간은 악마의 능력으로 부호와 그 부하들에게 자신을 이 모습으로 보이게 조종할 수는 있겠지만 힘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악마 스스로의 이성이 버티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악마는 조금씩 초조함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악마에게 탈출의 실마리를 쥐어주는 자가 나타났다.
그 건물은 부호의 넓디넓은 사유지에서 안쪽에 있는, 이제는 잊혀져버린 인공 생태계 정원 바로 옆에 있었다. 근처에 울창한 숲이 자라 있어 직사광선이 직접 들어오는 일이 없고 자연의 순수한 공기만이 맴돌아 더욱 고즈넉하게 보이는 장소였다. 사실상 관리를 포기하다시피 한 나무에 가려져 있어 그곳에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도 몇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하마터면 악마도 그 건물의 존재를 놓칠 뻔했으므로 그 건물과 그곳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인간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악마가 그 건물을 찾아낸 것은 영혼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주 강한 의지로 뒤덮인 영혼이었다. 그러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악마는 이 저택에서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고 그것은 하필이면 그의 목줄을 쥐고 있는 그 부호였기에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곧 그 영혼의 색이 부호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명하고 아름답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죽음의 저택에서 그러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니? 때문에 악마는 순전히 호기심으로 그 영혼에게 접근했다.
그 영혼의 주인은 문제의 건물 안에 있는 듯했다. 이 저택에 이런 건물이 있었던가? 또다른 호기심이 발동해 악마는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 발자국 들어간 순간 코 끝에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냄새가 풍겼다. 낡은 종이 냄새였다. 아마 한때는 부호의 아끼는 수집품들이었을 귀중한 고서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렇군. 이곳은 도서관인가. 내가 발견한 영혼의 주인은 이 도서관 안에 있는 건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레 발을 옮긴 끝에 악마는 도서관 구석에서 그 영혼의 주인을 찾아내었다.
한 명의 청년이 램프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른 체구에, 작은 얼굴은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잡혀 앳되고 귀여운 인상을 주며, 안경을 살짝 끌어올리면서 책장을 넘기는 동작은 그저 우아했다. 노을 지는 들판의 색을 담은 눈이 천천히 움직이며 책에 적힌 글자를 숙독하는 모습에는 정적이 주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한가운데 있는 것은 모종의 의지로 불타고 있는 영혼이었다.
그 아이러니함에 완전히 넋이 나간 악마는 입을 헤 벌린 채 한참 동안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낡은 바닥이 삐걱이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밤의 정적은 아주 작은 숨소리도 크게 들리도록 만드는 법이다. 아니나다를까, 귀에 들려온 소리에 청년은 화들짝 놀라 책을 덮고 램프를 끄더니 창틀 밑의 어둠으로 숨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이 청년이 이 공간에 있는 것은 기실 이 도서관의 주인일 부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잔뜩 경계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는 수 없이 악마는 책장 너머에서 나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갔다.
“오,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
“거기 있는 건 알고 있으니 잠시 나와주지 않겠나? 이런 몰골을 하고 있으니 믿기 힘들겠지만, 난 그대를 해치러 온 게 아니야.”
악마는 ‘목소리의 악마’ 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모종의 설득력이 있었다. 이윽고 청년이 다시 어둠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창밖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녹회색 머리카락을 반짝반짝 빛나게 했다.
“그대는 누구지? 이 도서관의 사서인가?”
보는 것만으로도 경계심이 흐물어질 듯한 매력적인 미소를 얼굴에 드리우며 악마가 질문을 던지자 청년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곧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제 목을 툭툭 건드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을 못 한다는 제스처였겠지만, 글쎄. 악마가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청년은 근처에 있던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쓰더니 악마에게 보여주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뭐, 이 자리에서 던지기에는 마땅한 질문인가. 악마는 기꺼이 대답을 베풀어 주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악마이고, 이 저택의 주인이 수집한 수집품 중 하나지. 이 건물 안에 인간의 영혼이 엿보이기에 호기심에 한 번 와봤어.”
대답이라고는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들었으면 웬 미친놈이 지껄인다며 아연실색했을 소리였다. 그러나 청년은 살짝 놀라기만 했을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눈앞의 악마가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닌 몰골을 하고 있으니 나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청년은 다시 종이에 뭔가를 써서 보여주었다.
[말씀대로 저는 이곳의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 저택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군.”
[주인어른이 이곳을 찾지 않으신 지 10년이 다 되어 가니까요]
“그런데도 그대는 충실히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이건가.”
[그게 제 역할이기에]
흐음. 악마는 목을 울렸다. 그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간 흥미로운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는지 청년은 경계심이 담긴, 그렇지만 약간은 더 온화해진 웃음으로 악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몸 앞에 양손을 모으고 선 공손한 자세는 지극히 이 저택의 다른 ‘고용인’ 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용인’ 은 밤에 누군가 도서관에 들어온 걸 보고 놀라서 불을 끄고 숨지 않는다.
“그럼 혹시 내가 여기 있는 책을 좀 읽어도 괜찮을까? 저택의 주인이 나를 찾지 않은 지도 꽤 지나서 한가함을 주체 못 하고 있거든.”
물론 거짓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제 힘을 옭아매는 원천을 찾아 파괴해버려야만 하는 상황에서 밤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처지인데 책이나 읽고 있을 틈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동시에 본능적인 확신도 들었다. 눈앞의 이 청년은 뭔가를 숨기고 있다. 얌전하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고용인 행세를 하면서 아무도 찾지 않은 도서관에 틀어박힌 채, 저 얌전해 보이는 얼굴 너머에는 누가 와도 막기 힘들 만큼 강한 의지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숨기고 있는 모든 것은 악마가 이 저택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런 확신.
확신만 들 뿐 근거도 논리도 없는 도박에 악마가 몸을 던지려고 하고 있는 사이 잠시 망설이던 청년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책은 밖으로 반출하실 수 없습니다]
“오, 상관없어. 그대는 꽤 오랫동안 이 책들을 관리해 온 모양이니 그대의 눈앞에서 읽는 게 안심되겠지.”
[그러시다면 부디 자유롭게]
아직도 미심쩍은 표정을 하면서 청년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책을 펼쳤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고 그렇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이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 자리가 아닐 것이다.
악마는 피식 웃고는 책을 찾으러 갔다.
필 받으면 계속 이어집니다:Q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