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x🖋

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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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수염 어쩌고 모티프

*복스 로어 데몬헝거 업뎃 버전까지 다 알고 보시길 추천

가끔 스무 살 적 꿈을 꾼다.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젊은 시절 이야기는 내가 생각해도 아주 기괴한 것이라,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서 일어나면 이 기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내 머리가 형편 좋을 대로 왜곡하고 지어낸 전개 같기도 하지만 또 선득해진 마음 한구석에는 이 모든 게 엊그제 일 같다고 고개를 드는 울음소리가 있다.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주말마다 일주일 치 신문을 가져다주러 오는 올리뿐이다. 흰머리를 뽑아주겠다고 덤비는 소녀 뒤로 이 절벽에서부터 뻗어나간 길쭉한 구릉과 폭풍우 실린 떼구름이 보였다. 나는 충동적으로 올리를 붙잡아 앉혀놓고 몇 개 남지 않은 초에 불을 붙였다. 대접할 거라곤 아침에 짠 산양유와 저녁으로 먹으려고 남겨둔 빵조각뿐이었다. 올리는 빵을 씹어보더니 곧장 뱉어버렸다.

“이거 지금 드시지 말고 좀 기다려 보세요. 곰팡이만 피면 딱 쇠가죽에 털 붙은 괴물 모피인 줄 알고 행상인이 사가겠네.”

잇자국만 좀 남은 쪼가리가 황망하게 굴러다녔다. 올리는 발라먹을 치즈도 뭣도 없다는 내 말에 대단히 실망하여 더욱 투덜거렸다. 영감님 젊을 적엔 이 근방에서 금이 제일로 많은 부자였다면서요, 그 많은 재산은 다 뭐하다 날려먹고 이러고 살아요? 젊은이들은 다 떠나고 순 노인네들과 그 노인네들이 죽지 못해 떠맡은 손주들과 곧 떠날 생각만 가득한 그 아이들 삶을 어정쩡하게 채우는 병풍 같은 인생들뿐인 쇠락한 마을, 등대가 있던 자리에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 남았고 그 안에는 늙어 거울도 보지 않는 내가 남았는데 올리는 발을 대롱대롱 흔들며 잘도 그런 말로 사람을 후벼팠다. 가볍고 날랜 몸짓과 낡아빠진 면바지 아래 깡마른 발목을 볼 때마다 남에게 퍼줄 몫 남지 않은 연민으로 가슴이 아렸다. 굽은 뼈마디에 쪼그라든 가죽만 붙은 손을 우울하게 쳐다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금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거든, 아가야……

당연히 내게도 어리고 팔팔한 시절이 있었다. 올리처럼 나도 부모도 형제도 없이 이곳저곳 거두어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살았다. 발목은 불콰하게 취해 치근덕거리는 어부들이 엄지와 검지만으로 감쌀 수 있을 만큼 얇았고 정강이와 허벅지에 차이랄 것도 없을 만큼 모든 뼈마디가 앙상했다. 그래도 쌩쌩했다. 아주 날래고 뭐든 잘 견뎠다. 여름이면 가무잡잡해졌다 겨울에 허여멀건하게 돌아오길 반복한 피부는 개울에 비추어 볼 때마다 물빛이고 장밋빛이었다. 선술집 뒤뜰에서 함께 감자를 깎던 메리는 짓무른 흉뿐인 손으로 내 뺨을 아프게 쥐고서 몇 번이고 말하곤 했다, 네 눈은 올리브 빛이야, 나는 올리브가 좋더라, 이 근방에선 자라지 않지만 난 본 적 있어, 고모네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주말마다 신선한 올리브와 치즈를 먹었어, 세상에, 아이크, 상상도 못 할 호사지 않니? 어마어마한 부자들이나 그렇게 하고 살 거야. 올리브색 눈은 신문에 나오는 왕녀나 꾸며낸 이야기 속 공녀만 가진 거라고 생각했어.

넌 정말 예뻐, 아이크. 자꾸만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아름다움. 분명 풍족하고 호화롭게 살 수 있을 거야. 커다란 집과 넓은 정원을 가진 사람이 와서 널 데려갈 거야. 엄마가 죽었을 때는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고모도 늘 저금통을 열어둔 채 브랜디를 병째 마셨지만 그래도 빵이 없어서 굶진 않았어. 난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거야. 앞으로 얼마나 더 살든 빨간 망토와 새틴 리본을 선물로 받았던 그때의 나보다 더 부자가 될 일은 없겠지.

메리를 달래거나 북돋아주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 애가 다 갈라진 손톱이 파고들 만큼 내 얼굴을 세게 쥐어뜯었기 때문인지 그냥 말문이 막혔기 때문인지는 긴긴 세월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그 애가 옳다는 걸 직감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넘어가고 열여섯 살 생일을 맞기 직전에 ‘큰 집’과 교회에서 사람이 와 나를 데려갔다. 메리가 선술집 주방에서 목을 맨 지 열흘도 되지 않았었는데.

이게 올리의 투덜거림-궁금하긴 한 건지 아니면 아무 관심 없지만 말라 비틀어진 빵조각도 음식이라고 먹는 동안은 듣는 척해주기로 한 건지-에 답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다. 큰 집은 이 근방에 높은 등대가 있고 시끄러운 항구가 있고 하루하루 사람 사는 집이 늘어가던 시절 교회 바로 옆을 떡하니 차지하고 버티던 저택이었는데, 교회와 그 집 중 어느 것이 먼저 비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역의 흥망성쇠를 바로 눈치챌 수 있는 지표가 되기로는 매한가지였던 두 건물의 차이점이라고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큰 집에는 악마가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번성한 마을에 악마가 침입한 게 아니라 그 악마가 사람을 부려 집을 짓고 요리사와 마부를 고용하고 배를 띄우고 화가를 불러들였기 때문에 인구가 늘고 막대한 부가 창출된 거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금과 은을 불러들이는 존재라면 신이든 악마든 다들 개의치 않고 잘 지냈던 것 같다. 악마는 마을에 헌신했고 공동체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사제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건 아마 막대한 기부금 덕분이었을 텐데, 그래서인가? 늙은 신부는 직접 악마의 신부를 찾아주기까지 했다. 내가 교회로 불려갔을 때 신부는 반쯤 귀가 먹어 소리를 질러도 잘 듣지 못하는 노인이었다. 눈도 침침해 성서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그는 내 부르튼 손등을 기분 나쁘게 더듬다가 갑자기 악귀처럼 킬킬거렸다. 올리는 특히 이 대목에서 질색팔색을 했는데.

난 너처럼 예쁜 애들을 잘 알아. 이번이 다섯 번째란 말이다, 그 악마 자식에게 예쁘고 어린 신부를 데려다준 게……맨 처음엔 이 교회 건물이 존재하지도 않았어. 나도 아무것도 아니었지. 그 자식은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이 금과 은을 어디서 퍼오는 것처럼 펑펑 쓰고 다니고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맸다네, 감히 제 둥지 옆에 십자가를 올린 시건방진 괴물 새끼가……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로 신부를 찾아주며 얼마나 저주를 퍼부었는지 몰라! 신이시여, 저 사악하고 건방진 악마 자식을 왜 그냥 두십니까? 오갈 데 없고 어여쁘기만 한 것들이 저 커다란 저택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당신만은 다 보셨을 게 아닙니까? 당신이 정말 거기 계신다면……나의 아버지……신이시여……저 간악한 것, 저 부러운 것을 단매에……어떻게든……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노인은 말을 뚝 그치고는 고장난 시계의 초침처럼 바르르 바르르 간헐적으로 떨어대며 나를 큰 집으로 데려갔다.

말라 비틀어진 손아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몸을 비틀었으나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거기 쏟고 있는 양 억세게 내 손을 붙들고 버텼다. 마침내 아름다운 계단과 목이 아프도록 높은 천장과 그 위로 탁 트인 하늘을 그대로 담은 으리으리한 유리창 따위가 별세계를 만드는 저택에 들어섰을 때, 주름 하나 없이 뻣뻣하게 다린 제복 차림의 사용인들이 제단처럼 나란히 도열한 가운데 악마가 나타나 내 손을 넘겨받았다.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느라 신부가 허겁지겁 금화 주머니에 코를 박고 뒷걸음질쳐 돌아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태어나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남자가 욕심 많은 노인만큼이나 볼품없는 내 상처투성이 손을 너무도 조심스레 잡아서, 부모 얼굴도 본 적 없는 나의 지참금인지 화대인지 하는 것이 교회로 즉 신의 집으로 쏠랑 들어가버린 아이러니를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그가 내 신랑이었단다, 올리. 그리고 나는 그 시절 인근에서 예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신부였지. 지금은 다 늙은 영감이 돼버렸지만 말이야. 그래, 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구나, 되바라진 녀석 같으니라고.

누군가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꿈이나 생각만으로는 어쩔 수 없이 모자란 부분을 입을 열어 채우게 되었다. 올리는 계속해서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얼굴과 자세를 고수했고 나는 점점 더 내 기억 속으로 침잠해 갔다. 갑자기 열여섯 살이 된 것 같고 스무 살이 된 것 같았다. 어리고 아름답고 날래고, 어려운 말은 하나도 모르고 셈도 어수룩하게만 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정말 어려운 건 산다는 일 자체란 사실을 뼛속에 새겨 올리브와 같은 눈빛이 영영 찬란할 수는 없었던 시절.

신랑이 내어준 내 방에서는 밤마다 등대가 먼 바다를 비추는 걸 볼 수 있었다. 만을 따라 자욱한 안개가 쏟아지는 날이면 항구는 장례식이 끝난 묘지처럼 쓸쓸해졌다. 향기가 나는 장작을 태우고 값비싼 유향에 불을 붙이며 한껏 게으름을 피워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나는 신부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만 생각했다. 악마 신랑에게서 나는 지극한 사랑밖에는 받은 게 없었다. 금과 은, 넓은 저택과 사철 꽃이 가득한 온실, 먹고 싶은 것만 먹을 수 있는 식탁, 보석을 박은 듯 번쩍이는 벽지와 커튼, 일이 년 사이에 배로 늘어난 장서, 회화부터 승마까지 모든 것을 다 해볼 수 있는 기회 따위로 생생하게 구현된 그런 사랑. 내 삶에 대가 없는 음식과 잘 곳이 존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그에게 물었던 적도 있는데……

“그러면 도대체 제게 뭘 바라세요?”

“절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층 끝방 문을 열지 않는 것, 이렇게 두 가지뿐이야.”

왕녀도 공녀도 아닌 오갈 데 없는 사내아이를 거두며 고작 그런 요구나 하고 마는 이상하고 실없는 남자. 열여섯 살의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사람을 홀려 영혼을 먹어치우는 악마 따위를 사랑할 일이 있겠는가. 어쩌면 악마가 바랐다던 진정한 사랑이란 받지 않고 주기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창을 열지 않아도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에 걸맞은 그런 마음을 신이 가지든 악마가 가지든 내게는 다를 것이 없었다. 호화로운 저택이 나의 교회고 온 동네에 금을 뿌리는 악마가 나의 사제였다.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쉬워 보였다. 나는 꼭 올리처럼 어렸다. 그랬던 시절로 하염없이 기억을 더듬어 헤엄쳐 가노라. 절벽 끝에 아직 당신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스무 살의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어, 여기 이층 끝방 문앞에 서서 비바람이 세상을 다 두들기며 발버둥치는 소리로 자정에 가까운 시간을 하염없이 죽이는 중이지 않은가.

나는 정말로 그의 요구를,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고, 그 이상으로 살고 싶었다.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싶기도 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혼까지 줘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악마에게 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이제는 한 가지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자정이 되었겠다 싶은 순간 먼지 쌓인 문고리를 돌렸다.

가능한 한 호기심을 억누르고 살아왔지만 이따금 방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악마라는 그가 여태 먹어치운 인간의 두개골이 쌓여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야기 속 사악한 용처럼 금은보화를 숨겨두었을 수도 있고, 의외로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불온하고 불경하며 끔찍하고 짜릿한 생각을 수도 없이 해 왔다. 맨발이 차갑고 말끔한 바닥을 딛었다.

“아이크?”

그는 자정이면 반드시 집에 돌아온다.

“아이크!”

사랑은 불가항력이었다.

나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오는 저 커다란 남자가 팔꿈치를 깨먹고 우는 내 앞에 무릎 꿇었던 날을 잊을 수 없기에. 사람의 영혼을 먹어야 산다는 악마가 바로 그 사람의 대단치도 않은 고통 때문에 눈살 찌푸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봐 버렸기에. 오래 굶주려 뾰족한 송곳니 아래 침이 고이고 두 눈이 거뭇해지는 중에도 한사코 버티는 꼴, 사람을 사랑해서 비참해지는 모습…….

자주 꽃과 술을 선물하고 들떠 노래를 청하는 남자이기에, 날이 좋으면 나를 마차에 태워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데려가 주었기에, 긴긴 밤을 함께 지새운 뒤에 내가 충동적으로 찢은 종이를 벽난로 속에 던져넣으려고 하면 온몸으로 막아섰기에, 두 손이 온통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과분한 꿈을 구해냈기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 과연 악마는 악마라 할 수 있겠다. 절대로 사랑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돌려주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흠뻑 사랑에 빠진 눈으로 바라보면 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이크…….”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적에는 모든 게 쉬웠다. 이층 끝방에 대해서는 아주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의 금으로 그의 저택에서 호사를 누리고 아름다운 흰 갈기 암말을 선물받고 난생 처음 소설을 써 보고 하는 모든 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날부터 계속해서 복도 끝을 바라보게 된 것을 가장 우스운 이야기로 여겨도 좋겠다. 실제로 나는 쇠락한 마을을 폭풍만은 잊지 않고 방문할 때마다 그날을 떠올리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종일 웃다가 목이 다 갈라지고 곧 죽을 사람처럼 기침하더라도 기억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우스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해 웃고 쉼없이 떠들고 내가 웃을 때까지 손짓발짓을 다 동원하던 악마를 꿈결처럼 바라보다가, 그런 마음을 숨길 수 없다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금기를 생각했다. 무엇이 들어있을지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불안과 기대를, 못 견딜 사랑을 마주하는 날까지 나는 아주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도 가구도 금고도 시체도. 괴물에게 쫓겨 도망쳐 온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음박질쳐 들어갔을 때, 등잔불 닿지 않는 바닥에 도사리다가 내 맨발바닥에 무참히 짓밟힌 시든 꽃 한 송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 온실에 잔뜩 피어 한 송이쯤 꺾어가도 아무도 모를 그 꽃은 그의 사랑이었고 나의 사랑이었다. 손도 발도 꽁꽁 얼어붙고 등잔불은 진작에 꺼져 선득한 어둠만이 어리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끝나버린 이야기로 포장해가던 자정, 그가 나를 찾아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기까지 나는 내가 밟아버린 사랑을 곱씹었다.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악마는 사람의 영혼을 먹어치워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속설을, 그래서 사람을 홀려 사랑하고 경외하고 헌신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두려운 속삭임을, 나보다 먼저 그의 신부가 되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의 아름다움은 몇 해나 갔을지 사랑은 얼마나 잦고 허망한 일이었을지를.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그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울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올리의 푸석푸석한 귀엣머리를 헝클어뜨리는 폭풍의 첫걸음처럼, 부쩍 가까워진 먹구름과 오래 묵은 비 냄새처럼.

그러니까, 악마가 영원을 찾아 헤맸다는 진실한 사랑이란 결국 그 어떤 약속으로도 금기로도 증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사람을 홀리는 악마라서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면, 뭐든 다 들어주고 싶게 되었던 거라면, 그러면 그의 초라한 요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절대로 그를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죽어도 이층 끝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두 가지를 모두 무시했다. 그를 사랑하는 게 무슨 대단한 잘못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으로 기어이 열쇠를 찾아내고 텅 빈 방을 발견했다. 나를 부둥켜안은 팔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묻고 또 물었다. 당신은 진실한 사랑을 그렇게나 바랐던 거냐고,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함이 사실은 당신의 진짜 바람이었던 거 아니냐고, 어떻게 해도 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억울하다고 토로하다가 날이 밝기 직전에야 울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야?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냐고, 이 멍청아. 내가 네 말을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홀려서 이렇게 된 건지 꿋꿋하게 버틴 건지는 결국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잖아. 이 방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도 널 사랑하지 말라는 것도 다 진심이 아니었던 거지?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던 거지? 누군가 널 위해 이 방을 열어버렸으면 했던 거지? 그래서 매일 꽃을 가져다 둔 거잖아. 그래서 나도 너도 별 관심도 없는 온실에 그렇게 돈을 쓰고 기다리고……날 사랑하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날 품에 안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어깨와 등을 큰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속삭였다. 사랑한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말을. 도무지 한 세상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말을, 내가 오 년도 채 버티지 못한 환상 같은 삶의 실체를. 메리가 옳았다. 얼마나 더 살아도 그 시절보다 더 부유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올리브색 눈동자의 고아, 인근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 악마의 다섯 번째 연인……다시는 받아보지 못할 사랑을 무참히 밟고 가도 좋다고 나를 위로하던 남자에게 나도 해줄 말 정도는 있었다.

“나도. 나도 그래, 당신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아.”

그것만은 누가 준 것도 아니고 일해서 받은 것도 아니고 훔친 것도 아닌 내 것이기에.

그래, 올리. 악마는 새벽빛에 산산조각나 죽지 않았단다. 그는 날이 밝은 뒤에 제 발로 평범하게 떠났어. 내가 젊은 시절 이 근방에서 금과 은이 가장 많은 부자가 되었던 건 그가 내게 모든 것을 남겼기 때문이지. 물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악마의 친척을 자처하는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와 가구와 부동산을 한입씩 물어뜯을 때도, 금과 은을 탐낸 강도가 들이닥쳐 내 어깨를 찌르고 발목을 부러뜨렸을 때도. 교회가 문을 닫고 등대가 무너지고 항구가 폐쇄되는 내내 나는 그냥 여기에 있었단다.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거든. 검은 빵을 먹고 양젖을 짜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어. 말했잖니, 그의 신부가 되기 전까지 나는 꼭 너처럼 살았다고.

가장 불운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식으로 부자가 되기 마련인가 보다. 한때는 메리도 주말마다 올리브와 치즈를 먹었던 것처럼. 그래서 내 눈동자가 올리브 색이라고, 귀하고 값비싼 빛깔이니 왕녀나 공녀처럼 호사를 누릴 거라고 점쳐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악마가 아니어도 사람을 홀리기는 충분했을 만큼 아름다웠던 남자와 커다란 저택과 텅 빈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한 송이 시든 꽃이 내게는 메리의 빨간 망토나 새틴 리본과도 같았던 거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직감마저도 똑같았다. 목을 맨 메리와 여태 살아 늙어버린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잠 못 이루고 식은땀에 젖어 깨어난 수 없는 밤마다 고민해 봐도 알 수 없었다.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악마와 악마의 저택과 악마의 신부들에 대해 이런저런 괴담을 만들어 퍼뜨렸다는 건 나도 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다섯 번째 시체였다. 실제로는 나보다 먼저 그의 신부가 되었던 사람들의 시신도 행방도 발견된 적이 없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악마도 마찬가지로, 나는 금과 은과 부와 풍요와 사람과 배가 모두 떠난 절벽 끝에 남아 나만 아는 줄거리를 곱씹으며 살아왔다. 등대의 불빛이 사라져버린 날부터 기억도 깜깜해져 실제로는 왜곡이 심할지도 모른다. 올리는 한참이나 닳아빠진 신코만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뭐예요? 젊음도 아름다움도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는 거? 전 어리기만 한걸요. 예쁘지도 않고 사랑하는 남자도 없어요. 신부 삼아주겠단 부자는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구요. 다 들어도 모르겠네요, 영감님은 대체 왜 그 방에 들어간 거예요? 영감님보다 먼저 시집갔던 사람들도 다 그랬대요? 그 악마는 또 뭐래요? 악마면 악마답게 팔자 필 일 없는 사람 영혼 날름날름 먹고 꺼져버리지, 뭐가 그렇게 좋았다구. 사랑해달라고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게 차라리 나았겠네. 난 하나도 모르겠어요. 사람은 왜 그냥 살던 대로 살질 못해요?”

갑자기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늙어 쪼그라든 영혼이 또 한 번의 폭풍을 견딜 수 없어 비명을 지르는 것도 같았다.

“이제 가렴, 올리. 혹시나 다음 주말에 왔을 때 내가 여기 없으면, 이 집과 양과 내 자전거는 모두 너 가져도 된다. 너는 부지런하고 날래니까 치즈도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거야.”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재수 옴 붙게.”

매년 돌아오는 폭풍우가 언제고 나를 바다 건너로 데려가주길 바랐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올리가 폴짝폴짝 뛰어 언덕배기를 쭉 내려갔다. 발자국도 남지 않을 것처럼 가벼운 뒤꿈치가 점으로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습한 공기를 어렵게 호흡하며 인내했다. 이슬처럼 보드라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곧 내 작고 초라한 세상을 뒤흔들 커다란 소란이 될 것을 알았다.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순 거짓말이다. 나는 평생을 늙으며 많은 것이 변하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을 보았다. 기괴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거나 꿈처럼 잊히거나 하는 내내 돌아오지 않을 사랑을, 아름다운 것을, 잃어버린 나를 놓아주고 또 놓아주었으나……

어떤 것은 큰 비와 파도와 시간이 휩쓸어가도 여전히 내 것이라, 아직도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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