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led

🐑x🔮

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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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없다.’

우키 비올레타의 지론이니 받아 적어도 좋다. 펄거는 우키 앞에서만은 플러팅 같은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게 버릇이 되어버려서 ‘넌 안 해도 예쁠 것 같다’ 비슷한 말을 한번 했다가 대단히 빈축을 샀던 적이 있다. 그 뒤로는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전세계 남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마디를 곱씹으며 백 번씩 빗질하는 우키의 등만 바라보며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꼬박 백 번이다. 우키는 잠들기 전에 꼭 커다란 브러시를 집어 들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백 번이나 정성스레 빗었다. 아무래도 몽고메리의 소설을 읽고 난 뒤에 저렇게 된 것 같은데, 전집을 괜히 선물했나……그런 생각도 한 번인가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반질반질한 가운이나 세련된 잠옷 차림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점점 길어지는 머리카락을 빗는 우키의 뒤태는 꽤 황홀한 풍경이라 곧 잊어버렸다. 아무튼 펄거는 속물이라 불려도 아무렇지 않은 단계에 와 있었기 때문에.

“우키, 머리카락 많이 길었네.”

처음 만났을 적에 비하면 괄목상대였다. 목덜미를 고스란히 드러낼 만큼 짤막하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등허리 아래로 살랑살랑 내려올 정도가 되었다. 햇볕에 오래 두어 바랜 듯 색도 조금 변한 것을 눈치챈 뒤에는 우키에게 모발의 성장을 좌우하는 초능력도 있나, 영양가 없는 호기심을 품기도 했다.

초능력 때문이든 공들여 관리한 덕이든 우키의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보드랍고 다른 모든 부위와 마찬가지로 아주 아름다웠다. 고개를 조금 기울여 돌아보는 눈동자처럼 신비롭고 오묘한 맛도 있고, 손가락을 펼쳐 감아보려고 하면 사르르 미끄러지며 금속질 표면까지 간질이는 게 꼭 그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온갖 비유와 부끄러울 만큼 장황한 묘사를 떠올리게 하는 미적 체험을 고약한 변태처럼 음미하노라면 마침내 우키가 빗을 내려놓고 이불 속에 들어온다.

“그렇지? 옛날부터 한번 길러보고 싶었거든.”

“옛날부터? 왜 못 길렀을까, 이렇게 예쁜데.”

가지런히 모아 목 옆으로 묶은 머리타래가 아주 탐스러웠다. 펄거는 품에 기대는 몸의 무게며 체온을 만끽하며 그 끄트머리를 살살 손가락으로 빗어주었다. 우키가 쓰는 빗(*이 집에 사는 다른 남자 셋은 머리빗이 어째서 그 가격이어야만 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에 비하면 형편없는 기계 손이지만 어쨌든 마음은 전해지리라 멋대로 믿으며.

우키는 안경을 벗어 침침한 눈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곧,

”머리카락이 길면 말야…….“

곁눈질로 그를 힐끔거리며 운을 뗐다.

”잡히기 좋거든.”

“허.”

“팔다리는 어떻게든 버둥거릴 수라도 있는데 머리카락은 그게 안 되잖아. 조금이라도 길면 머리채 잡혀서 끌려다니기 일쑤였거든. 면도칼 구해다가 같은 방 쓰는 애들끼리 서로 잘라주고 그러다 상처도 내고 했는데, 나만 손해였어. 난 그때도 손재주가 좋았거든.”

펄거는 그런 세상을 몰라서가 아니라 반대로 제법 잘 알아서 입만 뻐끔뻐끔,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머리채……그렇지, 잡기 좋지. 많이 잡아봤지. 아무래도 이쪽 시간대에 뚝 떨어지기 전 그의 직업이라 하면 사실상 인간(과 그 비슷한 것들) 사냥꾼에 한없이 가까웠으니 말이다. 단숨에 팔다리를 구속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마구 휘두르는 사지에 몇 대 얻어맞을 각오로 머리채라도 움켜쥐고 제압해야 하는 법이다. 뻐끔거리는 입을 본 우키가 ‘목 잡히는 것보단 낫다’라고 첨언해주었지만 전혀 도움도 위로도 되지 않았다. 아니, 위로는 이쪽이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공화국이 자랑하는 투견 경력도 여간 화려한 게 아닌 타고난 언변도 이런 순간에 펄거를 구제해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왜냐면 목도 자주 잡아봤으니까……

“잡고 싶어?”

“흐어어?”

침묵을 뭘 어떻게 해석한 건지 우키는 몸을 홱 돌려 펄거의 무릎 위로 올라오기까지 했다. 찰랑찰랑 앞으로 쏟아진 머리터럭을 쥐고 살살 흔드는 연인의 얼굴에 농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명백히 뜻이 있고 의도가 있는 웃음이었다.

“후쨩이라면 잡아도 돼. 아니, 오히려 좋을 것 같은데. 오늘 할래?”

“아니, 아니. 우키…….”

“너무 아프게만 하지 마. ‘너무’만 아니면 좀 그래도 되지만.”

따뜻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사이넷과 이어진 관절부를 더듬어 올라갔다. 긴장해 굳은 목선을 훑는 감촉에 펄거는 놀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물게 소년 같은 반응을 보아 즐거운지 킬킬 웃는 우키의 숨결이 턱을 간질이고, 평소 같으면 깃털처럼 가볍다고 해주었을 무게가 어쩐지 천근만근 등줄기에 소름을 자아내는 가운데 펄거는,

“안 돼, 우키.”

뻣뻣한 팔을 간신히 뻗어 머리끈을 끊어버렸다.

“왜?”

공들여 빗은 머리카락은 영화나 만화처럼은 아니어도 나름 극적으로 흩어졌다. 사르르 매끄럽게 펼쳐진 보라색 주렴을 한줌 쥐고 만지작거리던 펄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팔을 조금 올리자 갸웃거리던 얼굴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담겼다. 갸름하고 희고 따듯하고, 이따금 상상도 못 해본 스릴까지 안겨주는 이 조그만 머리를 어째야 하나.

“그렇게 쓰기엔 너무 예쁜 머리카락이잖아……너처럼.”

우키가 눈을 깜빡이는 일이 초가 영겁처럼 느껴졌다. 이거 너무 느끼했나?

“음. 으음. 뭐,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다행히 행운의 여신은 몰라도 우키는 늘 그의 편이었다. 가늘게 접히며 웃는 눈을 재삼 확인하고서야 펄거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한번 더 내쉴 수 있었다. 알아도 몰라도 넘어가주는 너그러움에 앞으로도 감사하며 살아가겠다고 무슨 갱년기 위기를 막 넘긴 남편 같은 다짐이나 새기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이 좋아진 우키는 다시 몸을 빙글 돌려 그의 품에 폭 안기듯 기댔다.

“그럼 이제 도로 묶어줘.”

“내가?”

“당신이 풀었잖아. 곱슬머리는 이러고 그냥 자면 아침에 전기라도 흐른 것처럼 난리가 난다고.”

펄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도 귀여울 것 같은데?”

“펄거 오비드.”

“예, 예. 분부대로 합지요.”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그의 솜씨로는 어떻게 해도 세련되게 묶이지 않았지만, 우키가 만족한 것 같아 펄거도 그 나름의 보람이란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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