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nner
상드리용
미디엄 레어, 버터와 소금으로만 구운 당근을 곁들인 티본 스테이크
식지 않도록 아주 뜨겁게 데운 콩소메
후추와 돌소금을 직접 갈아 뿌리는 야채 마리네이드
통밀로 반죽하고 무화과를 듬뿍 넣은 빵
아름답고 용맹무쌍한 왕자님은 과연 우리 모두의 자랑이시지요!
언니들은 왕자님의 우미한 용안과 당당한 풍채를 가장 흠모한다 수군거리지만, 저는 조금 달라요. 잔심부름하는 여종에게 동화 속에서 막 나온 것처럼 잘생긴 왕자가 무슨 소용이람?
우리 왕자님은 이런 천것에게도 늘 다정하신 게 진짜배기랍니다.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한 야차가 따로 없다지만, 왕성에서는 식사를 나르는 어린 종에게도 꼬박꼬박 값비싼 과자를 나누어주시는 좋은 분이시라구요.
그리고! 그리고 끼니 안 거르고 뭐든 잘 드시는 것도요. 왕비님 시집오시기 전부터 모셨다는 여종들만 해도 그분이 입맛이 없어 끼니를 거르신 날에는 매를 맞았다 해요. 끔찍해라! 전 그럴 일은 없어서 참 다행이어요.
메밀을 넣은 샐러드
뜨거운 차로 반죽하고 초콜릿을 듬뿍 올린 섬 과자
매콤한 크림과 버섯, 베이컨이 든 쌀 요리
닭고기와 함께 대파, 아티초크, 피망을 꿰어 양념을 덧발라가며 구운 꼬치
왕자님께 직접 여쭙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손발이 저릿저릿해요. 그도 그럴 것이, 핸슨 주방장님 요리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왕자님이 요즘 매 끼니 반씩이나 남겨 따로 가져다달라고 하시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가엾은 주방장님은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고서 끙끙 앓으며, 아이고 내가 가랑이 찢어가며 딸 둘 낳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가슴이 아프다니깐, 이런 하소연이나 하시지만 언니들과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왕자님께 남은 음식을 가져다드리면 말이죠, 그걸 직접 드시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몰래 들고 가신다니까요!
언니들은 지난 무도회에서 왕자님과 춤을 춘 묘령의 아가씨 때문일 거라고 이미 확신한 모양이에요. 값비싼 드레스는 살 수 있으나 권세가 미천한 집안의 아가씨가 왕자님과 눈이 맞아 왕성 어딘가에 숨어있다, 이거죠. 어머 세상에……그게 진짜라면, 왕자님, 지금 이 달콤한 과자를 저 주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강황과 후추로 풍미를 더한 가자미 구이
돼지 뼈와 야채 냄비를 번갈아 오가며 우려내 맑게 만든 수프
초콜릿과 견과로 속을 채우고 작은 하트 모양으로 빚은 파이
라드로 구운 뿌리채소와 오래 끓인 그레이비 소스
제철 과일이 든 아이스크림!
왕자님 일하시는 중에 어깨너머로 기웃거리지 말라고 혼났어요!
최근 해산물이 든 메뉴를 하나씩은 꼭 포함하라 하시는데, 역시 뭐든 잘 드신단 점이 최고랍니다!
차게 졸인 소스를 얹어낸 소 혓바닥 요리
진하게 끓여 향신채를 얹어낸 크램차우더
흰살 생선과 감자에 야채 육수를 더해 끓인 속을 넣은 커다란 파이
가볍고 폭신한 설탕 쿠키와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러 종류의 말린 과일
벌꿀을 잔뜩 넣어 데운 우유
그리고 혹시 모르니 조갯국물과 우유……?
우리는 왕자님이 그 이름 모를 아가씨를 성 지하에 숨겨두셨을 거라고 믿었는데요, 인부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또 이상하더라고요. 지하에 엄청 커다란 홀을 파고 물을 채우라고 하셨다는데요?
핸슨 주방장님만 신나셨어요. 원래 생선 요리를 좋아하신대요. 그도 그럴 것이 주방장님은 성 바로 아래서 나고 자라셨고, 거기는 바로 바다와 닿아 있으니까요. 성에서 멀지 않은 절벽도 곧장 깊은 바다와 이어져 늘 병사들이 길목을 가로막고 있지 않겠어요? 여기엔 또 여러가지 으스스한 성 괴담이……
크랜베리 소스를 얹은 연어 스테이크
톡 쏘는 치즈와 으깬 감자를 곁들인 대구와 콩 요리
민트 소스, 고등어 마리네이드, 생강채
양파, 아스파라거스, 농어 구이
숯불에 구운 몇 가지 조개(저번과 다른 종)
왕자님이 직접 지하로 들고 가신 음식은 전부 버려져요. 거의 손대지 않은 것 같다고 새벽 경비 서는 요한이 말해줬어요.
그 아가씨는 사실 먼 나라 공주님이라도 되는 걸까요? 나라면 그 맛있는 음식을 다 내다 버리진 않을 것 같은데……무지무지 맛있는 것만 드시나 봐요. 아니면 뭐, 왕자님이 요즘 가끔 중얼거리시는 것처럼, 해산물도 다 같은 해산물이 아닌가 보죠.
그래도 온 나라의 좋고 귀한 생선은 지금 핸슨 주방장님이 다 긁어 모으고 계신데……아니, 그런데요, 그러면 그 아가씨는 대체 뭘 먹고 살고 있대요?
새우 초절임
다섯 가지 치즈를 곁들인 매운 생선 수프
양파와 아티초크 통구이
허브와 함께 쪄낸 대게
고추냉이, 견과, 부추를 따로 서빙하는 훈제 연어
커피와 럼이 든 초콜릿 볼
레몬과 자두 설탕절임
세 가지 생선 살을 발라내 튀긴 요리와 호박 소스
바다 냄새를 살린 해초 샐러드
바닷소금을 조금 뿌린 숙성 치즈
야생 버섯, 굴, 생강채
날것의 생선 살(이름을 잘 못 들었어요, 죄송해요!)
찐 무를 곁들인 어묵 구이
왕자님은 여전히 고기 요리도 잘 드셔요.
국왕 폐하와 조찬 즐기실 적엔 두 접시나 비우시던걸요?
그런데 왜 그렇게 밤에 가져가는 식사에만 해산물을 고집하시는지 모르겠어요……언니들도 이젠 숨겨둔 아가씨 이야기 같은 거 안 해요.
다시 날 것으로 먹는 생선 요리
허브 소스를 곁들인 성게 알
레몬, 신선한 굴
붉은 살 생선을 으깨어 야채 수프에 넣은 것
캐러멜과 우유
생으로 버무린 해초와 조개
삭힌 청어
굴
통으로 삶아낸 대구
살짝 구운 관자와 발라낸 게살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초코 무스
디저트는 전부 제게 주셨어요.
생선
새우
해초
캐비아
왕자님, 지하에 숨겨두신 게 인간이긴 한가요?
바다에서 온 것
산 것
바다로 돌아갈 것
왕자님, 제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천것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싫으시면 저기, 울다 쓰러지신 왕비님 말씀이라도 좀 들어주세요. 국왕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어떤 정체도 근본도 모를 여자라도 정비만 아니면 다 괜찮다고, 정부든 애첩이든 총비든 원하는 대로 데리고 있으라 하시잖아요. 이웃나라 공주와 그 아버지 되시는 무서운 왕께서 화를 내시겠지만 그건 폐하께서 어떻게든 해주겠다 하셨잖어요……왕자님, 왕비님께서도 엉엉 울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오시지 않던가요. 배 아파 낳은 아들 앞에 무릎까지 꿇으며 애원하시지 않던가요. 네가 그 계집애를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숨겨둘 만큼 사랑한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총애하고 자식을 보고 같은 무덤에 묻히고 사서에 어떻게 남든 사람이기만 하면 다 데려오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왕자님은 아시잖아요, 총명하고 다정하고 사려깊은 우리 왕자님은……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요, 그게 무서워요, 왕자님, 왕자님이 사랑하시는 그 아가씨가, 사람, 사람이긴 한가요? 사람의 딸, 두 다리로 땅을 걷는 고귀한 아가씨이긴 한가요? 귀하지 않고 부유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최소한 손가락 마디가 모두 떨어져 있고 둥근 귀에도 발치에도 물갈퀴 따위는 없는 게 맞지요? 요한이 본 건 전부 환상이고 꿈이지요? 그이가 새벽 보초 서는 데 여태 익숙하지 않아 까무룩 졸다 헛것을 본 게 틀림없지 뭐예요.
노상 들려오는 날카로운 이명도 사람의 소리가 맞지요? 싸우듯 쟁쟁 울리다 물소리에 섞여 사라지는 그 소리는……그냥 조금, 조금 이상한 목소리겠지요? 고스란히 버려지는 음식이 점점 바다에서 난 것 그대로, 바다로 그냥 돌려보내도 되는 짜고 비린 것들뿐인 것도, 살아있는 것만 빈 접시에 올리라 하신 것도, 다 질나쁜 가십과 끔찍한 착각일 뿐이지요?
왕자님, 사람인지 사람 아닌지 하는 누군가를 혹시라도 커다란 수조에 가두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그 앞에서 내내 날카로운 이명을 듣고 버려질 음식을 들고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그런 게 사랑은 아니겠지요, 왕자님.
마음도 고인 물에 두면 함께 썩어갈 뿐인데, 하물며 끝없이 흐르는 바다에서 온 것은 어떻겠어요.
왕자님, 다정하고 용맹하신 우리 왕자님……
어떻게 그렇게나 행복하신가요?
공주,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 당신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인간적인데, 다들 내게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긴 하냐고 묻더군.
무슨 상관이지? ‘사람을’ 사랑하냐고 묻든지 사람을 ‘사랑하냐고’ 묻든지 내 대답은 같아. 당신은 다정하고 영리하고……용감하고 씩씩하지만, 한편으로는 겁도 많고 마음이 약해서 탈이니까.
내가 음식에 독이라도 탔을까봐 그래? 아니면 내 사랑이 식을까봐 두려운 거야? 어느 쪽이든 퍽 슬픈 이야기가 되겠어. 난 당신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게 싫은 만큼 굶어죽는 것도 보고 싶지 않은데……
이것 봐. 꼬리 비늘에도 윤기가 돌지 않잖아.
아……햇빛이 아니어도 늘 반짝거렸는걸. 당신이 등잔불만 들고 찾아왔던 밤을 기억해? 그때도 열두 시가 다 되어가던 때였고……난 깜깜한 수면에 뛰어들었다가 고개를 내민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맞아. 사람은 당신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거야.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 화를 내고 애원하고 울고 그 진주로 머리를 틀어 올려 아름다운……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뭘 먹고 몇 년을 살고 왕자를 죽여야만 하는 운명이고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
그러니 우리는 행복한 결말을 맞아야지, 공주.
잘 자. 내일 가져올 생선 중엔 입에 맞는 게 있으면 좋겠다. 요즘 결말이 머지 않았단 생각을 자주 해. 멋지지. 당신의 바다는 여전히 아주 가까운 데 있거든,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머리를 뉘여봐……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