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커가 뒤주냐 사람을 가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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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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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할 만큼 일가친척이 세계 곳곳 흩어져 사는 브리스코들은 연휴마다 온 가족이 여기저기 비행기 타고 떠나기로 널리(동네에) 알려져 있었으나, 이번 연말 아들 브리스코만은 가족 여행을 거부하고 집에 남았다. 아버지 브리스코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얼씨고, 퍽도 '집에' 남겠다, 같은 중얼거림으로 아들의 귀를 벌겋게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과연 틀린 말도 괜한 말도 아니었던지라 반박은 한 마디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 놀리는 게 삶의 낙이 되어버린 남편의 어깨를 퍽 치며 브리스코 여사도 한 마디 얹은 바 있다.

"꿀단지 숨겨둔 데 가 있겠지, 현관 단속이나 잘했으면 좋겠네."

써니의 꿀단지는 바로 옆집에 있었다. 딱히 누가 숨겨두진 않았고 그냥 삼백육십오 일 잘만 돌아다니는 옆집 둘째 아들과 연말연시를 보내겠답시고 그집 소파에 아예 자기 베개를 갖다둔 탓에 브리스코 집은 정말로 썰렁하게 비어버렸다.

사실 브리스코 부부는 아들이 애인을 집에 데려오겠다고 할까 봐 잔뜩 긴장해서 더 무리수 농담을 던진 감도 없잖았는데(여보, 피임의 중요성 같은 걸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학교에서 다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콘돔 사용하는 방법도 가르치나 요즘은? 정신차려 여보, 남자친구래잖아...), 그것만은 죽어도 안 된다며 옆집 맏아들이 머리에 빨간 넥타이(아버지 크리스마스 선물)를 두르고 결사반대 구호를 외쳐댄 탓에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 되었지 뭔가? 네가 내 동생한테 뭔 짓을 할 줄 알고 그 꼴을 용인하겠냐,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루카 앞에서 팔짱이나 끼고 있다가 태연하게 귀마개를 빼낸 써니는 '알았다, 너도 노는 데 끼워주겠다' 하고 선심을 썼다.

루카는 끝까지 그런 거 아니라고, 부모님도 막내들도 다 어디 가버리고 알반은 너랑 놀고 나만 혼자 집에 남겨질까 봐 쓸쓸하고 심심해서 이러는 게 절대절대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성대는 정직해서 곧장 덧붙이고야 마는 것이었다... "네 보드게임이랑 스위치도 가져와!"

사귀는 두 사람 사이에 낀 처지가 되긴 했어도 루카는 사흘 정도 신나게 잘만 놀았다. 그 두 사람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연인이고 연말이고 피임이고 나발이고 따지기 전에 셋은 걸음마 하던 시절부터 함께 놀며 자란 친구인 덕이다. 자고 일어나면 게임하고 또 게임하고 밥 시켜먹고 눈 오면 나가서 종일 놀고 쓰러지고 루카가 재채기하기 시작하면 알반이 기겁하며 도망가고 붙잡힌 써니는 치근덕거리는 루카를 엎어매치는 걸로도 모자라 그를 돌돌 굴려 걸어다니는 눈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셋 다 코를 훌쩍거리며 들어가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며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연말 특선 영화나 보다 보면 하루가 후루룩 가버렸다.

그렇게 보라는 영화는 안 보고 호그와트 학생에 빙의해 딱총나무 지팡이로 트롤 코뼈를 부러뜨리는 방법 백 가지에 대해 토론하다 지겨워질 무렵, 서로를 평생 알아온 이웃사촌의 특권을 발동해 루카가 '해리포터 코스프레 하고 찍었던 중학교 졸업사진이나 보자'며 거대한 하드커버 앨범을 꺼내왔다.

"와, 알반 운다."

"그건...그건 어렸을 때잖아!"

"너 작년에도 울었잖아."

"아주 그냥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마다 다 울었지 뭐. 왜 자기만 두고 진학하냐고. 작년엔 그래도 유급하란 소린 안 했지? 아이구, 내 동생 다 컸네."

그 해 졸업식 테마에 맞춰 우스꽝스러운 사자 프린팅이 들어간 빨갛고 노란 망토를 입은 두 형 사이에 두 눈이 시뻘겋게 젖고 코도 새빨개진 알반이 오만상을 쓴 채로 서있었다. 누가 보면 영영 생이별하는 형제인 줄 알겠다, 어른들이 박장대소하며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내던 루카는 기어이 팝콘으로 얻어맞았다. 물론 타격감을 따지라면 '울어도 귀여운데 뭐 어때' 따위 멘트를 부끄럼 한 점 없이 당당한 얼굴로 내뱉는 친구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작년엔 좀 더 구체적으로 서러워하지 않았나? 이 입시 지옥에 나만 남겨두고 가지 마 어쩌고저쩌고."

흔한 수험생의 감정기복이었다. 알반은 그렇게라도 항변하고 싶었으나 친형과 옆집 형(aka 애인)이 나란히 딱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는 앞에서 입을 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알반...그건 네 업보지."

"그러게 엄마가 학원 보내준다고 할 때 같이 가지."

"시끄러워! 루카 네가 뭘 알아! 수학 잘하는 놈은 내 심정 같은 거 모른다고!"

"꼭 루카랑 같은 전공으로 갈 필요는 없는데."

라고 경찰대 가버려서 따라가지도 못하게 만든 놈이 말했다. 알반은 사랑해 마지않는 반짝반짝 잘생긴 낯짝을 노려보다가 팝콘 두 알을 던졌다. 두 배로 괘씸해진 까닭이다. 그러나 써니는 두 번째 팝콘을 입으로 받아먹는 기행을 선보여 쬐끔 솟았던 심통도 깜짝 놀라 사라지게 해버렸다.

팝콘을 물어 넘긴 입술에서는 짠맛이 났다. 옆에서 루카가 열성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들기며 '가지가지 한다...' 라고 투덜거리는 소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나, 알반은 몸을 기울여 써니의 어깨에 폭 기대면서도 예의상 친형에게 일말의 관심을 던져주었다.

"너도 맘만 먹으면 진작 애인 만들 수 있었을 거라니까? 매번 말하지만 넌 연애 안 하는 거야, 루카. 못하는 게 아니고."

잔뜩 찡찡거리는 이모티콘을 찍어 보내던 루카의 바쁜 손이 멈추고, 사뭇 무해하고 순수해 보이는(써니는 조용히 속삭였다, '멍청해 보이는 거겠지') 맹한 얼굴이 동생을 향했다.

"내가 안 하는 거라니, 무슨 말이야.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며? 나 좋다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연애를 해?"

"하...그래. 평생 그러고 디스코드나 붙잡고 살아라. 그러다가 축의금 낼 때 깨닫고 징징거리고 싶어져서 술 한 잔 하자고 불러내도 난 안 나갈 거다."

"써니 너 술 뒤지게 못 마시잖아. 누가 술 마시자고 널 부르냐?"

"그런데 이 자식이?"

소파 아래로 발길질을 시작한 두 형을 내버려둔 채 알반은 무릎을 좀 더 당겨 앉았다. 루카가 크게 움직이는 바람에 앨범이 한꺼번에 세 장쯤 넘어갔다. 고교 시절 체육대회에서 장거리인지 단거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달리기 우승컵(하드보드지로 만들어서 사흘 만에 망가졌음)을 번쩍 들어 올리고 포효하는 루카. 그때는 머리카락이 짧았어서 훨씬 더 개구진 인상이었다. 어머니가 이 사진을 찍겠다고 아주 몸을 날리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킬킬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보니까 루카 사진 진짜 많고 다 화려하다. 너 정말 하이틴 주인공 같았어."

"요즘 하이틴 주인공은 교장 가발 보관함에 개구리 숨겨뒀다가 걸려서 벌청소 한 달 하는 캐릭터로 나오나 보다?"

얼얼한 발바닥을 카펫에 문지르던 써니가 투덜거렸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동작으로 꿈지럭거리던 루카는 억울해 죽겠다는 듯 외쳤다.

"야! 너랑 렌도 같이 했잖아!"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단 변명을 먼저 생각 못한 네가 잘못한 거지, 그건. 민첩한 하루 되세요."

"이 배신자 자식! 평생 용서 못해! 장난은 맨날 같이 쳤는데 왜 너만 모범생 취급이었던 거야?"

"알반이 방금 그랬잖아, 네가 너무 하이틴 주인공처럼 살았다고."

"그래, 루카. 해리포터도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징계란 징계는 다 받아봤잖아. 너도 딱 그런 타입이라니까?"

체육대회 사진들 너머 반대쪽 모서리에 끼워넣은 크리스마스 파티 사진을 가리키며 알반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요츠하의 옷이 배송 일정 오류로 도착하지 않은 탓에 알반은 여동생에게 자기 코스튬을 양보하고 어머니의 녹색 목도리를 온몸에 돌돌 감은 채 "나는 전나무야" 따위나 지껄이며 구석에 가만히 서있었다. 루카가 손을 힘껏 뻗어도 꼭대기에 닿지 않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대신 가족들은 그런 알반에게 주렁주렁 장식을 달아줬는데, 파티가 끝날 무렵에는 전구며 과자며 구슬이며 하는 것들이 너무 무거워서 걷다가 그대로 우당탕 넘어졌던 걸 과연 추억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크리스마스 당일에 응급실 실려갈 뻔한 게 좋은 기억이 맞긴 한지...

"난 그런 주인공의 존재감 없는 너드 동생 캐릭터고."

"너 그렇게 존재감 없진 않거든?"

"괜찮아, 너드여도 귀여우니까."

루카는 즉시 반박했고 거의 동시에 '귀여우니까' 어쩌고 염병을 떨어대는 친구의 작태에 헛구역질했다. 알반이 너드라면 그런 대로 희소가치가 있는 거라고 희한한 개소리나 지껄여대면서도 써니는 앞머리를 홀랑 넘겨 드러난 이마에 쪽 소리나게 입맞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냥 연말연시 혼자 보내는 게 더 즐겁지 않았을라나? 도로 휴대폰을 쥔 루카의 손가락이 더욱 빠르고 현란하게 탭댄스를 추었지만 답장은 그 누구에게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배신자 친구놈은 소파 옆옆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제는 '알반은 너드인가 아닌가'로 넘어갔다. 따지자면 셋 다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해서 갖다 붙이면 다 귀걸이고 코걸이인 엉망진창 토론이 되었다. 수험생은 바빠서 애니 하나 제대로 볼 시간도 없으니 너드 실격이란 주장에 이게 편을 들어주는 건지 아닌지 싱숭생숭한 기분이 된 알반은 복잡한 표정으로 웃으며,

"날 라커에 처넣지 않은 사람은 루카밖에 없었다니까?"

그리고 루카는 어떤 놈들이 감히 내 동생을 괴롭혔냐고 벌컥 화를 내려다가 동생의 두 눈에 가득한 장난기를 겨우 발견해서,

"그러게 누가 요런 머리나 하고 다니래?"

똑같이 장난스러운 손길로 알반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손이 닿은 뒤에야 방금 어떤 미친놈이 뽀뽀를 갈긴 부위란 사실을 깨닫고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긴 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가 없어서...

"하나 더 있잖아."

"응?"

"나도 있잖아, 나도."

애인의 관심이 딴 데 돌아가는 꼴을 죽어도 못 참는 유치한 브리스코가 끼어들었다. 알반은 손이 아프도록 꽉 움켜쥐는 남자친구의 응석에 또 낄낄거리며 농담에 농담을 얹었다.

"아닌데? 써니는 나 라커에 가둔 적 있잖아."

그런데 농담이란 게 쌓다 보면 아이스크림처럼 위태로와지기 마련이라 두 형은 동시에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자식이 널 뭐?! 라커에?! 뭐가 어째?!"

"내가 언제?!"

어떻게 잘만 하면 연말 특선 영화보다야 훨씬 흥미진진한 격투기 라이브라도 한판 눈앞에 벌어질 것 같다는 기대감인지 위기감인지를 삼키며 알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 안 나? 작년에, 네가 나 라커에 가두고 막 괴롭혔던 거."

"작녀어어어언?! 야! 너희 재작년부터 사귀었잖아! 이, 이거 그 뭐야, DV? 그거야!"

"아직 결혼 안 했어!"

"아직? 아지이이이익?! 내 동생 괴롭히는 놈이랑 희희낙락 결혼하게 둘 것 같냐?!"

"그런 적 없다니까! 미치겠네 진짜, 알반 내가 언제!"

형광등보다 더 밝게 빛나는 머리털을 쥐어뜯으려던 써니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건가?"

"기억 났어?"

알반은 그가 멈춰달라고 해야 할지 다른 농담으로 받아쳐야 할지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청소도구 넣는다고 시켜서 창고에서 썩어가던 라커에 나 집어넣고..."

"아니, 그거는."

"같이 들어왔던 거."

친구가 귀끝부터 시작해 목 아래까지 시뻘겋게 물드는 꼴을 직관한 루카는 실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같이 들어가? 뭔 소리야?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어쩐지 불쾌하고 기가 막히고 경악스러운 이 기분...뭐지?

"아아아아우반...그거, 그때는..."

"내 발로 걸어 나가지도 못하게 엄청! 괴롭혔잖아, 그랬지?"

"그거느은..."

머리털이나 쥐어뜯으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 엉성하게 얼굴을 가린 써니가 답지 않게 칭얼거리다가 루카를 잠깐 흘겼다.

"듣는 사람도 있는데에..."

이쯤 되니 아무리 루카라고 해도 모를 수가 없어서, 대충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물음표들은 한순간에 허리를 곧게 편 느낌표로 변해 온몸에 벼락을 떨어뜨렸다.

"야! 너, 너, 너...너!"

안타깝게도 루카의 절친한 벗과 친동생은 평생을 함께 자라 온 가까운 사이가 다 그렇듯이 그의 정신적 대미지나 문화 충격...뭐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총각 턱 떨어지게 해놓고 뭐가 그리들 뿌듯한지 알콩달콩 자기야 갑자기 그런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면 어떡해 몰라몰라 허허허 자기야 사람 허리를 반으로 접어서 뒤지게 해대던 놈은 자기잖아 뭔 얼어죽을 부끄러운 척을 하는 거야 부둥켜안고 얼러대고 을러대는 꼬락서니에 루카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혈압이 치솟고 세상이 거꾸로 돌기 시작해 피를 토하듯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야이씨 미친 놈들아, 어떤 존재감 없는 너드가 신성한 학교에서 그딴 짓을 해!"

때마침 묵묵부답 조용하기만 했던 루카의 휴대폰이 띵 하고 알림음을 부르짖었다. 도착한 메시지는 '미안미안 :3c 나 지금 가족들이랑 해돋이 보러 출발할 거라 답장 못할듯ㅋㅋ 미리 해피뉴이어~다음달에 보자~' 정도 내용으로 연말연시 매일같이 놀던 친구(진짭니다) 얼굴도 못 보고 쓸쓸하게 혼자 게임이나 하는 게 더 나았으리라 확신하게 된 루카의 서러움에 부채질을 할 예정이지만, 아무튼 당장은 저 한쌍의 잡놈들을 쫓아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커서 디스코드를 확인하는 대신 벌떡 일어나 써니와 아옹다옹 멱살잡이를 시작해야만 했다. 그가 미처 확인 못한 메시지는 소파에 완전히 몸을 파묻고 죽어라 웃던 알반이 먼저 발견해버렸다.

"...형 좀 그만 놀려야지."

가까운 가족과 친구와 함께하는 최고의(최악의) 연말연시가 그렇게 능구렁이처럼 어물쩍 달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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