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아포 4

🔗x🎭

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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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녹스. 잠깐 좀 괜찮으실까요?"

짐칸이 다 너덜너덜하게 터진 트럭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윌슨은 여태 피와 점액으로 범벅이 된 신발 하나 갈아신지 못한 채였다. 상태가 좋지 않아 뵈는 리볼버를 본 알반이 마침 선반을 뒤져 찾아낸 소제용 솔과 기름을 건네주려고 했으나, 윌슨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잡아 끌고 창고 뒤로 갔다. 불을 피워둔 공터에서 떠들고 있겠거니 싶은 여자들 목소리며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다가 끊어졌다.

"무슨 일이야? 설마……"

팔을 붙잡아 끄는 남자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기도 잠시, 알반은 표정을 굳히며 그 손을 떼어냈다. 뿌리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경계 어린 태도였다.

"너 물렸어? 아니면, 누구 다른 사람이 감염되기라도 한 거야?"

한 발짝 물러서며 전신을 눈으로 훑는 태도를 보면서도 윌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일로 서운해하거나 상처받기에는 그도 알반 못지않게 노련한 베테랑 생존자인 까닭이다.

먹고 자며 살아남는 데만도 숙련도와 노하우가 요구되고 베테랑과 아마추어를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의심은 감염보다 더한 위험요소가 되고 의심하는 태도는 더없이 장려할 만한 미덕이 되었다. 말장난 같은 아이러니를 곱씹으며 그는 고개를 세게 저었지만, 어쨌든 알반이 조심스레 다가와 지저분한 옷가지 바깥으로 드러난 목이며 팔 따위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이 조금 찢어진 어깨 쪽을 들이밀며 '이건 나뭇가지에 걸려서 그런 건데 어쩌다 그렇게 됐냐면……' 하고 먼저 상세하고도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누가 물린 건 아니고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이걸.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도 헷갈리는데요."

"오케이, 나쁜 소식부터 말해 봐."

"병원에 마녀가 있었어요."

알반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일부러 빠르게 덧붙였다.

"그리고, 미스터 브리스코가 혼자 그걸 유인해가서 죽이고 돌아왔고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아니라 좋은 소식 겸 나쁜 소식. 판단은 알반의 몫이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윌슨은 이렇다할 표정도 짓지 않는 알반의 안색을 몰래 살폈다.

방파제 안에서만 살다가 최근에야 도시가 와해되어 내몰린 녀석들은 ‘베이스를 비롯한 모든 물건은 공동 소유물이며 우리는 모두 대등하다‘ 따위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평생을 방파제 밖에서 살아온 그는 좀처럼 개인의 선의에 기댈 수가 없었다. 이런 세상에 비벼볼 구석이라고는 꼭 그런 선량한 개개인의 엉성한 양심뿐이란 걸 알면서도, 때로 사람 일이란 것은 알반 같은 이의 의지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싫도록 떠올리게 되고는 했다.

“음……알려줘서 고마워.”

당장 이 상황만 해도 그렇다. 그토록 오래 동고동락했다는 사람 하나조차 알반의 뜻대로만 움직여주지는 않아서 문제이지 않은가.

윌슨이 대놓고 눈치를 보든가 말든가, 알반은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모를 애매한 반응을 끝으로 한참 생각에 잠겨있기만 했다. 이렇다 할 초점이 없는 눈이 갈라지고 부서져 잡초 싹이 비집고 나오는 중인 바닥만 헤집다가 곧 반 바퀴를 빙글 돌았다.

“어디가세요?”

“마녀 때려잡고 온 미스터 브리스코는 그래서 어디있어?”

아, 그냥 말만 하고 빨리 튈걸……

"그게 말이죠……아마 정문에 있을……걸요?미스 알루엣이 발목을 삐끗했던가, 음, 이거 미스터 녹스랑 부상 내역이 똑같네요? 아무튼. 그래서 우리 다 태워다놓고 미스 파르페와 함께 우체국에 다시 가봐야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정쩡한 물음표로 채워넣은 말을 제대로 맺기도 전에 윌슨은 다리 다친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알반의 꽁무니나 쫓게 되었다. 참 이상하다. 이성적으로는 ‘지금이라도 빨리 튀어라’라고 행동강령 하나 세워도 모자라다는 걸 자알 알겠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걸음마하고 뜀박질할 무렵부터 초식동물처럼 도망치고 숨고 싸우는 방법부터 익힌 방파제 밖 백전노장답지 않기로는 손에 꼽는 현상이었다. 군장도 못 벗고 쭐래쭐래 따라가 익숙한 머리통들을 발견할 무렵 윌슨은 일종의 자괴감을 느꼈다.

“써니, 나 좀 봐.”

나 치정극 좋아하는구나……

문제의 미스터 브리스코는 그새 옷도 갈아입고 새 방탄조끼도 꺼내 걸쳤으나 멀끔한 모습이라 할 수는 없었다. 새 기지 한가운데에는 아직도 급수가 되는 수영장이 있어 물이 부족할 일은 없었는데, 다시 나가면 어차피 더러워질 거라 생각한 탓인지 그래도 금방 들어올 계획인 건지. 뺨에 묻은 피도 대충 닦아내다 말아 입술 끄트머리부터 귀 바로 아래까지 짙게 말라가는 피칠갑이 흉흉했다. 그래도 알반의 목소리에 곧장 반응하고 돌아보는 써니의 표정만큼은 환했다.

“알반! 걱정할까봐 바로 다녀오려고 했는데…….”

어, 음. 미스터 브리스코. 좋은 멘트가 아닌 것 같네요. 미스터 녹스 얼굴에 ‘걱정할 거란 생각을 하긴 했네?‘라고 쓰여있잖아요.

”날 어두워지기 전에 밀리 좀 태워다주려고. 그쪽에서 전에 잃어버린 소방도끼를 본 것 같대. 빨리 다녀와서 내가 병원에서 찾아온 거 보여줄게, 졸려도 좀 기다려줘.“

혼자서 마녀 잡으려고 달려나가던 사람이 ’기다려줘‘ 같은 말을 해도 되는 건가……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도 같고……방파제 밖에도 정부 비슷한 게 있었으면 이거 불법으로 지정됐을 거라고요?

“너도 뭐 필요한 거 있어? 기지에 없는 거나, 아니면 따로 갖고 싶은 거라도. 최대한 찾아볼게.”

써니와 눈을 마주친 채로도 어딘가 다른 곳을 보는 것처럼 미적지근하던 시선이 겨우 총기를 되찾았다. 어깨가 뻣뻣해진 윌슨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알반은 화를 내거나 나무라는 대신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나 그거 먹고 싶어. 저번에 네가 만들어줬던 야채 수프.“

”저번에? 언제지……지난달에?“

”응, 아마도 그때쯤? 옥수수랑 콩 통조림 넣고 만든 거.”

“그럼 통조림부터 구해야겠네.”

맥락도 까닭도 없는 요구에도 써니는 뜸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를 고쳐 쓰며 차 키를 확인하는 동작도 침착하기만 했다. 옥수수 콩 통조림, 약간의 기름과 인공 조미료, 구할 수 있다면 그밖에 다른 야채나 가공된 육류도. 이젠 정말로 어렵겠지만. 리스트를 만들듯 중얼거리는 남자의 모자 챙 아래 집중한 눈이 선득하게 느껴지기도 잠시, 불편한 걸음으로 그 등을 따라잡은 알반이 옷깃을 쥐고 당겼다.

“오늘 안에 돌아와.”

“노력할게.”

“꼭. 되도록이면 어두워지기 전에. 나랑 약속해.”

아니, 약속했잖아. 낮아진 목소리에 써니는 몇 초 정도 침묵했다. 어떻게든 딴청을 피우며 지켜보던 윌슨은 그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연 뒤에야 그 정적이 써니 나름의 멋쩍음과 민망함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리 멀지 않은 데서 밀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떠나는 차 소리가 멀어지며 윌슨을 정말로 곤혹스러운 상황에다 던져놓았다.

엄밀히 말해 그가 자초한 어색함이긴 하다만, 부상 입은 에나도 진작 방에 틀어박혀버렸고 그를 간호하겠다며 페트라도 엘리라도 그 옆에 붙어있고……그나마 가장 말 많이 섞어본 써니와 밀리가 그에게는 뭐 권유 한번 하지도 않고 훌쩍 떠나버린 이 순간에 변명의 여지도 없이 알반과 단둘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씨, 이거 왜 따라왔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저도 제가 아침드라마 광팬인 줄 몰랐어요? 근데 딱히 드라마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으니 한번만 봐주세요?

“사실 난 야채 안 좋아해.”

그래서 알반이 먼저 입을 열었을 때는 아주 펄쩍 뛰어오르고야 말았다.

“……어, 네. 그럼 왜……?”

솔직히 알반이 편식왕인 거……진작 알고 있었고. 싫어하는데도 굳이 애인 붙잡고 만들어달라고 조르는 이유……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방파제 바깥의 삶은 대체로 ‘그런가 보다’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굴곡으로 점철되어 있으므로 윌슨 또한 기지의 주인과 그 애인인지 웬수인지 하는 양반이 뭘 어떻게 지지고 볶든 신경쓰지 않고 벽면 보수공사 각이나 재는 데 도가 텄단 말이다. 하지만 그 비상한 생존본능이 사회적 맥락에도 반응해 머릿속에 삐용삐용 적신호를 울리니, 가엾은 윌슨은 이제 가정사 복잡한 사장님 골프라도 쭐래쭐래 따라온 사원처럼 넙죽 알반이 원하는 질문을 가져다 바치는 수밖에 없다.

”마치릿지를 지나가기 전에도 써니가 혼자 네임드를 유인해 간 적이 있거든. 그땐 이틀이나 행방불명이었어. 다들 포기하자고 하는 분위기가 되고서야 어슬렁거리며 돌아왔는데, 쫓고 쫓기다 보니 땅밑에 파묻힌 백화점 식품관 같은 곳을 발견했다나 뭐라나……뭔 야채 통조림만 한가득 짊어지고 왔더라고.“

와! 정말 알고 싶었던 정보예요! 라고 비꼬기에는 진짜로 괜찮은 정보 같긴 했다. 마치릿지를 지나기 전 길목에 그런 곳이 있었던가? 건물 기반이 지하로 완전히 주저앉았다면 다른 자원도 꽤 묻혀있을 요량이 큰데……알반 등이 다시 가서 물자를 전부 수거했을지 안 했을지, 윌슨은 철 지나간 걱정을 하느라 사장님……이 아니라 알반이 걸음걸이를 늦춘 것도 깨닫지 못하고 남의 뒤통수에 코나 박을 뻔했다.

“아, 아아. 네. 그렇군요. 그때 드셨던 통조림은 맛있었나 봐요?”

“아니, 먹다 토할 뻔했는데?”

“…….”

하……집주인 비위 맞추기 힘드네…….

“그, 그래요? 그러면 뭐, 미스터 브리스코도 야채 싫어하시나요? 그래서 위험한 짓하고 돌아다닌 벌로 일부러 먹이려고?”

좀비떼가 창궐한 세상에 식고문이라니. 말하면서도 아귀가 맞지 않는단 생각 정도는 들었다. 알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일부러 먹이다니.”

”하. 하하.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

”그리고 써니는 편식 별로 안 해.“

”아, 네. 그거 진짜 알고 싶었던 정보네요.“

이번엔 정말 비꼬는 거 맞다. 아니 편식을 그 인간이 안 하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너나 그만하세요……따위 핀잔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지만, 알반도 얼굴에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먹을 거 가지고 장난이나 치고’ 라고 써붙인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삼켰다. 베테랑 생존자 윌슨의 본능은 사실 권력관계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밝혀져……

뒤를 한번 돌아본 알반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인지 싶은 말을 중얼거렸다. 워낙 지나가듯 한 말이라 분명치 않았지만 윌슨은 눈치 빠르게 맞장구쳤다.

”예, 미스터 녹스가 함께 나갈 때면 좀 조심하시는 것 같긴 하죠?“

알반이 더욱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써니가? 네 눈엔 그렇게 보였어? 아닌 것 같은데……”

“젠장……솔직히 제가 보기에도 그럴 사람이 아니긴 한데.”

그런 사람이 방파제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들 눈앞에서 마녀 뒤통수를 냅다 쏴갈기고 좀비떼 몰고 뛰쳐나가는 기행을 벌이겠는가? 안개 속에 우글거리던 괴물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녀의 괴성에 맞추어 일사분란 손발을 휘저으며 몰려가는 광경에 입을 틀어막고 꺽꺽거리며 경기를 일으키던 동료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알반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써니가 좀 그래’라는 말로 일축했다.

“내가 같이 간다고 써니가 더 조심하거나 몸을 사리진 않아. 가끔은 내쪽 확인한다고 더 위험한 짓도 하고……그래도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안 보는 데서 죽을 길 가고 그러면 더 속이 터지더라. 보는 데서 피칠갑하고 굴러다니고 있으면 그러고서도 좋다고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는 거 확인이나 되지.“

이쪽도 눈에 뭐가 껴서 사리분별이 안 되는 줄 알았더니만, 알반은 그나마 미친 사람 운운할 정도의 제정신은 남아있나 보다. 윌슨이 완전히 질려버린 줄도 모르고(사실 알 바도 아니긴 하고) 그는 꼬박 말을 덧댔다.

“억지로 불러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할 방법이 있었더라도 써니라면 분명 화를 낼 테니까…….”

이쯤 오면 윌슨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혹시 이게 그건가? 남 얘기는 다 들어줘도 자기 얘기는 안 하기로 정평이 난 미스터 녹스가 서툴게 하소연이란 걸 하고 있는 건가, 지금?

그렇다면 끝내주게 희귀한 순간을 포착한 셈이다. 워낙 제 이야길 삼가던 위인이라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윌슨은 다소 묘한 기분으로 무표정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거, 목숨 하나 의탁해가지고 사는 처지에 집주인 양반이 어떻게 살다 여기까지 온 인간인지는 하나도 모르는데 연애사만 듣고 앉았네 그려…….

시체가 살아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세상에 몸이 날래고 눈치가 빠른 것만큼 탁월한 적성은 달리 없었다. 알반은 잽싸고 날래며 머리 잘 돌아가고 유연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어딜 데려가든 최적의 인재고, 이런 세상에서 오래 살아남다 보니 당연히 체력도 준수했으며, 생각보다 마음이 약한 편인 것만 제외하면 베테랑 생존자라 부를 만한 자격은 다 갖추었다. 아니, 적어도 윌슨을 위시한 기지 식구들은 그가 마음이 약해서 거두어진 처지였으니 단점이라 부르기는 민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그런 알반이 부상 때문에 벌써 몇 주를 기지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슬슬 초조하고 근질거릴 만도 했다. 그토록 유능한 전력이 몇 주를 통으로 사냥이나 정찰에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스템을 만들어둔 것도 공적이라면 공적일 텐데, 생각해 보면 문득 별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기지 전체를 총괄하는 입장이 아니었더라면, 소위 말하는 집주인이 아니었더라면 알반은 다치기 전에도 좀 더 활발하게 밖으로 도는 편이 되지 않았을까. 방랑벽이 있거나 피에 미친 살육광이라서가 아니라, 억지로라도 옆에 묶어놓고 싶은 어떤 무모한 인간을 눈밖에 두기가 그토록 싫다고 괜한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댈 정도라서.

"싫어하고 화낼 만한 건 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으니까……그러니까, 대신에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거야.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고 써니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곳에 돌아와야 한다는 걸 잊어버릴 수 없게 하는 거지. 써니도 알아, 내가 야채 싫어하는 거. 편식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티격태격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그건 그냥 약속이고 목줄이야. 통조림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써니는 돌아와서 곧장 수프를 끓여줄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해야만 한다는……일종의 과제 같은 거. 아무리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고 그게 스릴 넘쳐서 즐거워도 마지막엔 무조건 사지 다 붙은 채로 나한테 돌아와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그 약속만 지켜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러면 수프는 어떻게……."

"다 먹었어."

이런 순간에 수프 얘기하는 거 좀 눈치 없어 보이나, 꺼내놓고서 멈칫했으나 알반은 곧장 말을 받아주었다. 서로 색이 다른 두 눈이 몇 번인가 빠르게 깜빡거리고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형형하게 뜨인 채 멈췄다. 누군가 눈꺼풀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동그라니 부릅뜬 눈과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어조는 듣는 이가 누구든 좌불안석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써니가 보는 앞에서, 그 자리에서 전부 먹었어. 나중에 체하긴 했지만."

"그거 좀 비극적이긴 하네요."

"이번에도 다 먹을 거야. 자기가 뭘 두고 뛰쳐나간 건지는 알아야지. 마녀도 때려잡고 탱크도 끌고 가고, 신나서 날뛰는 놈 기다리느라 속이 다 문드러져서 싫어하는 야채 맛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써니도 알긴 알아야지……."

창고와 부엌 앞을 밝히는 비상등이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리버사이드로 기지를 옮기기 전부터 써왔다는 발전기는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그건 근래 써니나 밀리 등이 탐색 범위를 배로 늘려 돌아다니는 이유 중 한 가지이기도 했다. 산 입에 풀칠하고 머리 대고 누울 자리를 마련하기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며, 빛이나 불이나 물 따위는 어느 것 하나 공짜가 없다. 알반의 녹색 눈동자가 깜빡거리는 전구에 굴러들어갈 것처럼 번득이는 것을 보며 윌슨은 그가 어두운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내가 기억력이 좋다는 게 너무 싫다……."

"생뚱맞게 자화자찬을 하고 그래, 너는."

"아뇨. 그냥 좀. 뭐라고 할까.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괜히 기억해서 옆구리가 허전해지는 게 억울하다고 할까, 그런 게 있어요."

내가 무슨 호사를 누리자고 이러고 있나, 그냥 살아있으니 기왕이면 살아보려고 했을 뿐인데 하나는 통조림이며 수프며 빛이며 다 가져다 주겠다고 지가 무슨 프로메테우스도 에디슨도 아닌 게 마녀 모가지까지 잡아 뽑으며 생 난리를 쳐대는 미친놈, 하나는 그런 미친놈 고삐 잡아보겠다고 먹다 토하겠다는 걸 꾸역꾸역 눈앞에서 목구멍에 다 쑤셔넣고 시위하는 또 다른 미친놈, 아주 그냥 천생연분 염병천병 커플 사이에 껴서……하고 입 안으로만 우물우물 고시랑거리고 있으려니, 알반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소름끼치게 차분했던 눈에 멋쩍음을 실어 웃었다.

"별로 안 궁금한 걸 너무 조잘조잘 떠들었나? 미안. 이건 써니한테는 말하지 마. 짜고 치는 포커라고 해도 좀 민망하긴 하니까."

"왜요?"

둘은 거울처럼 나란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당연히 민망하지? 좀, 협박 같은 느낌 아닌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돌아오기만 해 봐라, 같은 거."

"글쎄요. 제 생각에 미스터 브리스코는, 그쪽이 대놓고 그렇게 말하더라도……."

바로 몇 시간 전에 전기톱에 주르륵 걸려 병렬로 벽틈에 꿰인 채 허우적거리는 좀비 무리를 구경하며 으하하학 웃어대던 미스터 브리스코는 이미 윌슨의 머릿속에서 저 뒤로 밀려난 지 오래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카타나로 콘크리트 바닥을 직직 긁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좀비를 유인하고 쪼개던 이미지도 슬쩍 날아갔다. 날아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는데 이게 되네.

대신에 그 자리에는 기지나 어디 가는 차 안이나 하는 데서 숱하게 봐 온 행복한 신랑 모드의 미스터 브리스코가……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그 아름답고 해맑은 미소가 쑥 들어와 앉았다. 알반 녹스를 앞에 두고 떼도 쓰고 질투도 하고 오만 장난감이나 갖다 바치고 귀여워 죽으려고 앓아대고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태운 채 남들은 따라오든가 말든가 버리고 출발해버리기 일쑤고 목소리부터 뭉개지고 그 냉막하던 얼굴도 흐물흐물 풀어지고, 아무튼 네임드 좀비 혼자 때려잡으며 피 좀 봤다고 흥분해서 날뛰어대는 미친놈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그 뻔뻔한 모습 말이다. 어우, 염병.

"오히려 좋아 죽을라고 할 걸요? 어우, 유난은."

생각만 한다는 걸 그만 대놓고 말해버렸네. 미안합니다.

하지만 답지 않게 시뻘개져서 버벅거리다 진짜로 다리까지 꼬여 나머지 한쪽 발목까지 부러뜨려먹을 뻔한 알반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미안한 마음 따위는 요만큼도 생기지 않는 것이 또 진실이고 현실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사랑을 한다는데 그게 아무튼 나는 아니라는 거. 진짜 비극은 재앙도 좀비도 아니고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구나……하고, 윌슨은 망가진 쇠파이프나 처량맞게 쓰다듬으며 터덜터덜 그를 기다려주는 유일한 존재-침대-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초안을 처음 메모했을 적에는 아 신인 너무 써드휠링 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들의 좀보 아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현실 썬반이 더 심하게 써드휠링을 시켰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 죄책감도 들지 않는 경지에 다다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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