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your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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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문제라면 천하가 다 아는 대도가 되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실제로 팬텀 시프라 불리기 전, 그러니까 적당히 입에 풀칠이나 하기 위해 훔치며 도둑질이란 적성을 찾아갈 무렵에 알반이 가장 많이 훔친 것은 적당히 잘 사는 행인들의 지갑 또는 지갑 속 현금이었다. 그 현금이 너무도 절실한, 즉 고만고만하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털어먹지 않는 건 의리보다도 실리의 문제다. 눈에 불을 켜고 원한을 가지게 해 봐야 가뜩이나 팍팍한 인생에 적이나 늘어나지. 지갑 두둑하니 지폐 몇 장 사라져도 눈치도 못 챌 쉬운 먹잇감을 두고 뭐 하러 어려운 길을 가겠는가?
세상 사람 다 알아보는 귀중품을 훔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온 도시에 현상수배 전단이 붙는 건 천하제일 괴도나 누릴 법한 사치였다. 알반이 온갖 미술품과 경매 마지막 순서를 자랑하는 보석, 어마어마한 극비 데이터 따위를 닥치는 대로 훔쳐 그런 쪽의 명성인지 악명인지를 누리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는데……이름값 제대로 보여주기도 전에 갑자기 알반 기준의 과거에 뚝 떨어져 시공간 미아가 되어버렸으니, 까마득한 미래의 일로 남겨두자고 표현해야 할까.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다. 팬텀 시프 알반 녹스는 난데없이 낯선 세계에 굴러떨어져 머리도 다치고 기억도 약간 날아가고 집도 사라지고……아니, 이건 원래 없었지만, 아무튼 배도 고팠고 다친 머리 치료할 약도 필요했다. 처음 보는 세상이 그가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은 돈에 좌우될 거라 추측했고, 천하가 다 알던 괴도는 간만에 지갑 두둑하고 마음은 여유로워 보이는 행인들 주머니를 털며 의도하지 않은 추억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정말로 얌전히 몸 사리며 상황 파악도 하고 몸도 추스르고 할 참이었다. 우리 가게 정상영업 안 합니다. 진짜로요.
주변을 파악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본 것이 어디 왕가 소유 보석 기획전시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걸린 박물관만 아니었어도 그 마음가짐이 한 달은 갔을 텐데…….
반짝이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화창하게 맑은 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걸린 태양도 번쩍거렸고 분수대에서 쏟아져나오는 물줄기가 그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도 눈부셨고 기획전시실은 화려함의 극치였으며,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박물관은 대충 보기만 해도 유명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므로 가장 빛나는 것은 그런 전시회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마련했을 삼엄한 경비를 정복했을 때 그가 얻게 될 명성이란 사실을 알반은 즉시 알아차렸다. 어쭙잖은 명예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열망이 순식간에 머리에서 심장으로, 다시 손끝과 발끝으로 퍼져나가며 전신을 달구었다.
그 열기는 정체성과 생존 본능 사이를 오가는 승부욕에 더 가까웠다. 후드를 눌러 쓴 남자가 심호흡하며 전시회장을 가득 채운 인파에 섞여들어 갔다. 색이 다른 눈을 코팅된 안경이 가려주었으나, 무언가에 홀린 듯 기묘한 안광만큼은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어렴풋이 기억해낼 만큼 형형했다.
먹고사는 문제라면 유서 깊은 왕가의 보석 따위를 훔치는 건 아주, 아주 멍청한 짓이 된다. 알반이 값비싼 조끼를 걸친 남자의 지갑과 전시회 입장권, 그리고 박물관이 애지중지 모셔 와 가장 좋은 자리에 둔 몇 백 년 된 보석 팔찌를 훔치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결심한 순간 전신을 휩쓸었던 충동은 순 거짓말이었다는 양 머리와 몸이 모두 차게 식은 채로 그는 난장판이 된 전시회장을 가로질렀다. 고함을 치고 비명을 지르는 인파, 그가 훔쳐낸 보석만큼이나 반짝이는 모든 전시품 사이를 소리 없는 걸음과 어둑한 시야로 누비는 내내 차디찬 쾌감이 차분해졌던 심장 박동을 다시 부추겼다.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이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지극한 만족은 오로지 자신을 증명하는 데서만 온다. 삶의 충동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매 순간 모순적인 선택을 촉구했다. 후드티 왼쪽 주머니에는 지극히 이성적인 결단이, 티셔츠 안쪽에 꿰매어 둔 비밀 주머니에는 아주, 아주 멍청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충동이 서로 다른 무게로 절그럭거리는 바람에 알반은 몇 번인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뜨겁고 차갑고 고양되며 냉정해지는 엉망진창의 승리에 모처럼 도취하여 걸음은 아랑곳 않고 빨라졌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예정이었다. 세상사를 그가 멋대로 다 정할 수 있다면 분명 완벽한 축배를 들게 되었을 것이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맹물이 값비싼 축하주가 되고 침묵이 더 낯설어 불길한 이방인들의 세계는 연회장이 되고, 새까만 도시 가장 높은 곳까지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 희끗한 달 아래 발을 동동 구르던 많은 날 그대로 외로운 맥박을 홀로 누렸을 것이다. 보석이 빛나기 위해서는 광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훔칠 수 없는데도 탐나는 것들의 이름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로.
그런 뻔한 미래가 가로막힌 이유는 터무니없이 단순했다. 무아지경에 가깝게 발을 놀려 박물관 주차장 뒤 분리수거장에 도착한 그가 뚜껑 덮인 커다란 쓰레기통을 딛고 올라가 담을 넘을 수 있을지 가늠하던 순간에,
"VSF다, 거기……아, 젠장. 아무튼 멈춰."
그다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괴도의 발을 붙잡는 데 성공했기에.
돌이켜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긴 했다. 알반은 한여름에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쩍은 놈팡이였고 장소는 냄새 나는 쓰레기장이었으며, 써니가 '젠장' 어쩌고 냅다 욕설부터 뇌까린 까닭은 버릇처럼 수상한 놈 뒤를 쫓긴 했으나 잘 생각해 보면 그는 더 이상 경찰도 뭣도 아니기 때문이었으니. 모아놓고 보면 한 편의 촌극이 따로 없지만 알반은 낯선 남자의 명령을 따라 고분고분 손 들고 돌아섰던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써니는 그만큼 선명하게 기억하진 못할 거라는 데 손가락 한두 개쯤은 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얼마나 화창하고 해가 밝았는지, 그래서 그림자가 어둡게 깔려야 할 주차장 뒤 골목의 쓰레기장에마저 나른한 햇살이 비쳐 들었고, 그 아래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선 써니의 금빛 머리카락이나 푸른 눈동자가 얼마나 반짝거렸는지……몇 개나 되는 대륙에서 발굴하고 약탈해 온 커다란 보석들이 웅장하게 번쩍거리던 전시관에서 막 도망쳐 나온 알반이 그날 종일 본 것을 다 합쳐도 처음 보는 남자만큼이나 빛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당사자는 아무래도 알 턱이 없을 테니까.
분명 그럴 것이다. 그때는 써니도 낯선 세상에 막 떨어져 경찰도 뭣도 아닌 부랑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보물 훔쳐 간 사람 잡으러 온 것도 아니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보니 웬 지갑 도둑맞은 남자가 비명이나 지르고 있기에 몸에 밴 버릇대로 거동이 수상해 보이는 놈들을 용의자로 찍어 살피는 중이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팬텀 시프 다 죽었네……중얼거리면 써니가 또 뭐라고 하면서 웃었더라, 너 주머니에 안 어울리는 지갑 들어있던 거 다 보여서 그랬어. 그렇게 말했던가? 알반이 기억하기에도 그랬다. 성큼성큼 다가온 경찰 조끼 차림의 남자는 바로 그의 손목을 비틀어 뒤로 돌리는 대신 후드 주머니 밖으로 삐죽 나와 있던 값비싼 장지갑을 꺼내 보란 듯이 흔들 뿐이었다.
"도둑질을 할 거면 제대로나 하지. 꼬질꼬질하게 입고 이런 거 들고 다니면 잘도 네 거라고 생각하겠다."
만약에, 그때 알반 녹스라는 이름은 알지도 못했던 써니가 그를 단순한 좀도둑으로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가끔 고민해 보았지만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낯선 세상에 떨어져 방황하던 중에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경찰 노릇이나 하려고 들던 써니가 그를 어설픈 소매치기가 아닌 정말 위험한 놈으로 분류했더라면. 어려 보이는 얼굴과 깡마른 몸, 기가 막힌 타이밍에 종일 굶은 알반에게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던 꼬르륵 소리에 홀랑 넘어와 주지 않았더라면. 무지막지하게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열심히 쳐다보는 데 놀라 한순간에 누그러지지 않았더라면.
"어……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지갑을 통째로 훔치면 안 되지. 그래, 안 그래. 아직 어린 학생인 것 같으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알겠어?"
가만, 그거 그냥 체포해 봤자 딱히 데려갈 데도 처분할 방법도 없어서 놔준 거였을지도. 써니는 나름의 직업정신은 투철했지만, 교본에 나올 법한 이상적인 경찰의 마음가짐은 딱히 없는 요상한 인간이다. 나중에 알반에게 도둑질을 직업 삼는 건 그만두라고 한 까닭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안정적인 일이 아니니까'가 되지 않았던가. 애초에 사회규범이 무너진 환경에서 자란 알반이나 우키보다 나름 엘리트 경찰로 살았던 써니의 도덕관이 더 의심스러운 건 자명한 일인데, 어쨌거나 그때는 서로 초면이었으니 눈앞의 반짝이는 남자가 불량 경찰인지 아닌지 알반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그냥,
"이만 가 봐라. 가출했으면 집에 들어가고, 또 이상한 짓 하다가 잡히지 말고."
평소 같았으면 경찰은 다 멍청한 놈이라고 속으로 잔뜩 비웃어줬을 만한 상대가 무방비하게 등을 돌려 멀어지는데도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누군가 손목에 수갑 발목에 구속구를 채우고 두 눈을 안대로 가리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멀어지는 남자의, 부대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힌 재킷에 가려진 너른 등이나 산들바람에 헝클어진 짧은 머리카락 따위가 얼마나 빛나는지를 생각하느라 심장 가까이 숨긴 커다란 보석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무언가를 갈망하게 됐을 때 사람은 비로소 그의 이름 아래 살아가게 되는 법이다. 그 순간만큼은 배도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았다. 값비싼 보석, 극비 자료, 귀중한 조각상을 훔쳐내 널리 괴도의 악명을 떨치며 존재를 증명하려던 발버둥도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모순 없는 삶의 충동이 거세게 맥동했다. 한 끼 식사와 악착같은 자존심 한 가닥,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발악했던 모든 거짓된 이름을 다 파헤쳐 보니 그 아래에는 알반 녹스의 가장 오랜 기억으로부터 이어져 온 순수한 욕심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는 늘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을 욕망했다. 밝고 환한 곳으로 가고 싶었고 빛나서 아름다운 것에 손을 뻗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사람은 본디 그러한 갈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 훔쳐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다.
여름이 끝나간다. 이 지역은 전에 살던 곳보다 가을도 춥고 겨울도 빨리 찾아오는 편이라, 올여름도 다 갔다는 밥집 사장의 넋두리는 대단히 비극적인 소식이 되었다. 적어도 알반에게는.
"음……야채 튀김 세 개만 더 살까?"
써니는 반대로 기온이 내려가고 일교차가 커지자 팔팔하게 살아났다. 여름 내내 더위 먹어 죽어가던 사람은 어디 가고 사흘 특근 뒤 겨우 퇴근하면서도 야채 튀김 고민 따위나 할 만큼 기운이 넘쳐 보였다.
그가 좁은 가게 안쪽으로 고개를 디밀고 주문을 추가하는 동안 알반은 쌀쌀한 바람에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 생각 없이 티셔츠 한 장 입고 산책 나왔다가 써니를 마중하겠답시고 VSF 본부까지 갔다 오는 바람에 몸이 차게 식었다. 오래 걷긴 했지만 해가 진 뒤에는 몸을 움직이는 것도 별 효과가 없었다. 올겨울 많이 추우려나……속으로만 투덜거리는데 써니가 고개를 돌렸다.
"알반, 튀김 안 먹을 거지. 다른 거 뭐……추워?"
"응, 조금. 근데 바로 집에 갈 거니까 괜찮아."
몸을 움츠리고 코나 훌쩍이고 있는 판에 부정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써니는, 아, 하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냉큼 재킷을 벗었다.
"이거 입고 있어."
"진짜 괜찮다니까? 써니도 안에 셔츠밖에 안 입었잖아."
"적어도 내 건 긴팔이지. 난 추위 안 타니까 괜찮아. 입어."
가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워낙에 좁았고, 다들 저녁 먹을 시간이라 만석이다. 우키가 없고 써니가 늦게 퇴근하면 나머지 셋은 그저 사 먹고 시켜 먹으며 끼니를 해결할 생각밖에 없었다. 퇴근하기도 전에 집 근처 덮밥집에서 이것저것 사 오라는 메시지를 오십 개 정도 받았다는 써니보다 마중 나왔을 뿐인 알반이 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거, 이 가게가 집에서 뭐 얼마나 멀다고 펄거도 유고도 궁둥이 딱 붙이고 꼼짝을 안 하냐. 나 안 왔으면 써니 혼자 그걸 다 들고 가야 했던 거냐고.
"너도 저번에 쇼핑센터에 짐이랑 유고 버려놓고 왔잖아?"
알반은 곧장 시치미를 뚝 뗐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깜빡, 입술까지 둥그러니 오므리며 순진한 척하는 모습에 써니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버려놓고 오다니. 난 그런 적 없어. 유고가 혼자서라도 더 보고 오겠다고 해서-"
"걔는 스피커 좀 보고 있으니 네가 사라져서 미아보호소까지 다녀왔다던데."
"뭐? 미아보호소? 내가 보호자였어, 내가!"
써니는 반박하는 대신 들고만 있던 재킷을 알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도로 가져가도 된다고 하기도 전에 가게 안에서 목청 좋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몸을 돌려 가버린 써니의 등을 쳐다보다가, 알반은 하릴없이 재킷에 팔을 꿰었다. 지금 거울을 보면 굉장히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손등을 조금 덮는 넉넉한 소매를 괜히 한 번 구겼다.
VSF 로고가 수 놓인 정복 재킷은 어쩐지 써니가 입고 있는 것으로만 상상된다. 다른 VSF 소속 경찰들, 그러니까 써니의 부하들을 만나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전에 한 번은 다 같이 잔뜩 취했을 때 유고가 잠든 써니의 재킷을 홀랑 벗겨다 망토처럼 걸치고 '깡패 경찰이다 손 들어' 따위 유치한 장난을 치기도 했었는데……눈으로 보아 기억하는 것들은 고집스러운 관념 앞에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었다. 이 재킷은 그러니까, 알반에게 있어서는 'VSF 정복'이 아니라 '써니의 옷'인 셈이다.
어쩌면 시각적인 이미지는 그리 오래 남거나 강하게 인식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얼었던 몸이 아주 천천히 녹아가는 와중에 코를 한 번 더 훌쩍거렸을 뿐인데 써니의 냄새가 훅 끼쳤다. 낯설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가깝고, 불쾌한 것도 아니지만 놀랄 만큼 짙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조금 나고, 종일 입고 일하던 옷이라 체향과 땀 냄새가 섞여 배었고.
사이즈는 두 단계쯤 건너뛰는 것 같은데, 알반은 제 옷을 살 때도 늘 큰 옷을 헐렁하게 입길 선호하기 때문에 넉넉한 품과 다소 긴 소매에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키 차이는 그리 크지 않지만 체격차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두툼하고 주머니도 많고, 재질이 좋은 만큼 묵직해 종일 입고 뛰어다니려면 체력도 꽤 좋아야겠다는 생각이나 멍하니 하다가 알반은 문득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온몸이 차게 식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뜨겁다. 이마만이 아니라 뺨과 목과 어깨와……익숙하고도 낯선 오감에 둘러싸인 피부가 다 그랬다. 강한 체향, 순식간에 가늠해버린 체격, 어깨 위로 툭 떨어지듯 둘러진 묵직함, 타인의 하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들, 언제나 써니의 옷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재킷을 입는 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한 가지 결론으로만 수렴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써니랑 안고 있는 것 같다."
포장된 음식을 주렁주렁 양 팔에 걸고 돌아온 써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리 달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알반에게는 조금 긴 소매를 빤히 보다가 가장 작은 봉투 하나만 팔뚝에 걸어주었다. 성인 남성 네 명이서 먹을 양이라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도 그는 가뿐히 어깨동무를 해 왔다.
"이렇게? 포옹이라면 자주 하잖아."
"어, 그렇긴 하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 같다고 해야만 하는데. 아무리 알반이 능청스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지만 대놓고 말하기에는 너무 멋쩍었다. 어디 열원이라도 있는 것처럼 따끈따끈 달아오른 이마와 뺨을 문지르기만 해도 바쁜데 써니가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더 가까이 당겼다. 걷기 불편하다고 밀어내는 시늉을 해도 꿈쩍도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웃고 친근하게 굴고 장난치는 남자가 너무 좋고 또 너무 싫어서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VSF 재킷은 써니를 상징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반짝이는 머리카락, 섬세하게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발을 재게 놀릴 때도 어쩐지 심드렁해 보이는 걸음걸이, 숨 막힐 정도로 강하게 안아주는 포옹 따위나, 낯선 세상에 뚝 떨어진 뒤에도 기어이 이런저런 방법 다 동원해 다시 경찰이 될 정도의 뚝심인지 고집인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갑을 도둑맞은 행인의 비명에 저도 모르게 눈을 부라리며 용의자를 찾아내고, 그러면서도 그 도둑놈이 어려 보이고 몹시 굶주렸단 이유만으로 어설픈 훈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표현하고 또 증명하는 무수한 조각 중 하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름도 모르는 도둑놈과 동생 같은 존재 앞에서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 사람이 되는지 전부 알기 때문에, 어쩌면 전부 알고 싶기 때문에 알반은 때때로 기묘한 열기와 낯 뜨거운 상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초조함인지 심술인지 욕심인지 무엇인지 모를 삐죽삐죽한 감정이 몸 속 여기저기서 널뛰는 바람에 무언가를 게워내듯 말하고야 말았다.
"나 저번에."
"응?"
"언제였더라……아무튼 저번에, 써니 옷장에서 하나 슬쩍했는데."
솔직하게 말해놓고는 히히 웃으며 단어 하나만 살짝 고쳤다.
"빌렸다고 해도 돼? 네가 작년에 자주 입었던 그 검은색 재킷 말이야."
"아……네가 가져갔었어? 달라고 말했으면 줬을 텐데 왜 굳이."
"요즘 아침저녁으로 쌀쌀하잖아. 너무 추워서 그랬어."
'추워서'는 '왜 굳이'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알반은 그렇게만 대꾸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우렁차게 낄낄거렸더니 써니도 더 이상 지적하거나 하지 않았다. 편하게 따라 웃으며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는 손길이 살가웠다.
"넌 그래도 돼."
"진짜?"
"나한테서는 뭐든 훔쳐 가도 돼. 안 잡아갈 테니까."
빌려갔다고 해도 좋고, 그냥 가져갔다고만 해도 괜찮고, 심지어는 훔쳐 가도 된다고, 경찰과 도둑으로 처음 만났던 남자가 더없이 다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때 써니가 입고 있었던 재킷은 지금 알반의 몸을 감싸고 있다. 품이 크고, 꽤 묵직하고, 익숙한 냄새가 난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것도 아닐 텐데 욕심껏 전부 껴안고 허덕이니 얼룩덜룩 대강 기워놓은 써니 브리스코처럼은 보였다. 그렇다고 착각이라도 하고 싶었다. 딱 그만큼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가지고 싶었다. 빌려서든, 훔쳐서든.
한여름, 쾌청한 날, 한낮의 태양 아래서나 초가을, 쌀쌀한 날, 저녁 어스름 가운데서나 변함없이 빛나는 사람이 있고, 그런 그를 애끓게 바라보다 밑천도 남기지 못한 채 벌거벗겨진 알반 자신이 또 있었다. 가져본 적 없는 남자의 허물을 덮어쓰듯 알반은 어깨를 움츠리고 조금 떨었다. 달아올라 붉게 물든 얼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써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많이 추워? 그 정돈 아닌 것 같은데……혹시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써니, 왜 훔쳤는지는 안 물어봐?"
뭐라고 대답할까? 서로가 속을 알 수 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써니를 읽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속이 답답해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아. 추워서 그랬다며. 내 옷이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야? 또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 지갑이나 미술관에 걸린 그림 같은 거 훔치고 다니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동생이니까 괜찮아. 써니가 한 적도 없는 말들이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 머릿속에 쟁쟁 울렸다.
정말 물어본다면 알반도 마땅한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상상해 본 그 어떤 말도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써니를 모르는 만큼이나 알반은 그 자신도 헤아릴 수 없어 한참이나 숨을 참았다. 진작에 우뚝 멎은 걸음처럼, 도무지 웃고 떠들고 걷고 달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길 기다리며 힘껏 살아갈 수 없어 아득해질 때까지.
익히 아는 큰 손이 소매에 덮인 그의 손을 강하게 쥐었을 때에야 숨통이 트였다. 오래 참았던 만큼 뜨겁게 데워진 숨은 서늘한 미풍과 뒤섞여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들끓는 모든 감정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경쾌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뇌리를 관통했다.
"귀여우니까 괜찮아."
“…귀엽다고?"
"네가 내 옷 가져가서 입는 거, 귀엽잖아."
그러려고 한 거 아니야? 되묻는 써니에게 할 말 따위는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 반응에 얼빠진 알반은 그 자신이 입을 헤 벌린 채 다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써니는 그를 비웃지 않았다. 귀여워도 좋고 심각해져도 좋고 멍청하게 굴어도 좋기만 하다는 듯 충분히 따듯한 눈으로 알반을 살피다가, 걸음마를 돕는 것처럼 천천히 발을 떼어 앞장섰다.
"밥 다 식겠다. 가자, 알비."
언제나 써니 브리스코를 떠올리게 하는 VSF 재킷 없이도 앞서가는 어깨는 반듯하고 등은 널찍했다. 알반은 막 불이 들어온 가로등이나 달과 별 옆에서 함께 빛나는 인공위성 따위와 박자를 맞추어 눈을 깜빡였다.
쌀쌀한 계절, 어둑한 시간에도 어디선가는 빛이 들고 무언가는 하염없이 반짝거린다. 그의 이름을 알고 그가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알반이 따라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느리게 걸었다. 누구도 그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지 않고, 더 좋은 것을 욕망하고 갈구하는 마음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가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남자의 체온, 무게, 냄새, 그를 유추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알반을 감싸고 있다. 넉넉하고 따듯하게, 돌려받거나 보답받길 바라지 않는 분명한 애정과 똑같은 방식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옆구리나 차여가며 좀도둑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인 뒤에는 터무니없이 가벼운 존재의 무게에 허덕였다. 어떻게든 살아있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 둥둥 떠 허우적거리며 영영 표류할 것만 같았다.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삶에 두 발로 다져 길을 내는 일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빛나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까마귀처럼 훔치고, 꼭 붙어 잠들었던 친구와 형제가 아침이면 차게 식은 시신이 되어 있던 기억 탓에 더 밝고 더 따듯한 곳으로 가고 싶어 되는 대로 발버둥 쳤다. 닥치는 대로 탐내고 허풍 같은 별명을 내세우고 심장을 차게 식힌 채 소리 없이 발악했다. 전부 가지고 몰래 숨기고 단단히 껴안고 있어야만 제 것이 된 것 같고 그마저도 돌아서면 사라지고 버려질까 봐 늘 춥고 뱃속이 허했다. 달리 말해 외로울 뿐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살아왔다.
알고 나니 비로소 깨닫기를, 어쩌면 나누어 가지고 좋은 것을 건네고 누군가에게 단단히 안기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빌려도 되고 가져도 좋고 훔쳐도 괜찮다면, 그런 써니가 손 닿는 거리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뛸 수밖에. 가쁘게 몰아쉰 숨이 무덥고 얼굴은 온통 발갛게 달아오르고, 그가 기다리는 만큼 성큼 달음박질쳐 괜히 어깨를 한 번 세게 부딪쳐 보기도 했다.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이 눈물겨울 만큼 든든해 알반은 크게 웃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쾌활하고 요란한 웃음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라 딸꾹질처럼 튀어나온 말은 무척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곧 알반 녹스고 그의 진심이었다.
"써니, 나 네 재킷 너무 좋아."
"그 정도야? 달라고 안 할 테니까 너 입어."
"진짜야. 진짜 좋아. 내가 지금까지 훔쳤던 것 중에 그게 제일 좋아. 그리고 이것도, 그러니까……"
네가 가장 좋아.
짙어져가는 밤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빛나는 두 눈을 손에 쥐지 않아도 좋았다. 천천히 걷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듯 고개를 기울인 알반은 약한 딸꾹질이 멎도록 숨을 골랐다. 깊게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써니가 엉겁결에 그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너무 좋아서, 이번에는 정말로 좋기만 해서 몇 번이고 키득거리는 바람에 두근거림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마치 정말로 그 단단한 품에 안겨있기라도 한 것처럼 끝모르게 가슴이 뛰어 영영 살아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기쁜 일이라, 알반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눈을 맞춘 채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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