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숙녀 여러분
👹x🖋
2월 14일, 두 사람은 작은 해변 카페 발코니석에.
오전 중에 비가 그친 하늘은 맑았지만, 바닷바람은 전날보다 한층 더 차가워졌다. 오래된 덱을 누군가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옅은 물소리가 배었다. 비, 추위, 점심시간도 꽤 지난 애매한 오후, 장사 공치기에 딱 좋은 요소만 모아둔 카페는 사람이 만드는 소음 대신 어디에나 듬뿍 얹어둔 조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제라늄, 팬지, 장미, 튤립, 라벤더, 달리아……그 밖에도 진짜와 닮아 보이게 만들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온갖 가짜 꽃들이 말도 안 되게 알록달록한 색으로 나이 든 건물을 뒤덮었다.
증조할머니가 손수 만드신 거예요. 입술 피어싱을 한 카페 사장이 자랑인지 변명인지 모를 설명을 늘어놓았다. 플라스틱도 아니고 진짜 꽃을 피우기 위해 온실을 돌릴 필요도 없죠. 이 얼마나 환경친화적인지! 왜 변호하는 것처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는데도 젊은 사장은 어딘가 불만스럽고 초조해 보였다. 뭐, 무지개보다 더 알록달록한 꽃장식이 돌과 약간의 잿빛 모래, 절벽으로 이루어진 한적한 해변과 어울리는 건 아니었지만……그래도 마음에 든다고 말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 전에, 몸을 앞으로 기울여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만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바닷바람도 놀라 도망갈 만큼 크게 웃었다.
아이크는 스카프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복스는 타자기에서 벗어나 바람 타고 날아가 버린 종이를 주워오는 중이었다. 채도 낮은 빛깔로만 골라 입은 스웨터와 코트는 관광지로는 영 모자란 해변에도 그럭저럭 잘 어울렸지만, 바람이 흐트러뜨린 머리카락을 큰 손으로 대강 넘기는 그 남자 자체보다 더 근사하지는 않았다. 보이는 나이대보다 훨씬―좋게 말하자면―고풍스러운 취향의 시계가 그럭저럭 괜찮은 광량과 만나 번쩍거리는 것을 바라보다 아이크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생전 남 수발들어본 적 없을 것처럼 생겨서는 발이 빠르네, 복스.”
“무슨 소리야. 난 평생 신사로 살아왔다고, 아이크.”
“평생?”
“음, 인간 기준으로 그쯤은?”
실없이 웃고 있지만 정말일 것이다. 뻣뻣한 프록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쓰고, 눈부시게 흰 장갑도 잊지 않고 값비싼 지팡이까지 든 복스를 상상하는 건 혼슈의 군주를 그려보려는 시도보다 훨씬 쉬웠다. 그는 남의 생각을 멋대로 읽기라도 한 것처럼 문득 웅변하기 시작했다.
“신사라고 하니 정말로 옛날 생각나네. 1920년, 혹은 오차 몇 년 정도. 그쯤 되었을 거야. 약간의 불행과 일련의 우연이 겹쳐서 겨우내 북미에서 지내야 했지. 오, 런던과 비교해 시카고가 특별히 더 싫었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줘. 지금과 비교하자면 그 시절은 육지에 있나 바다 한가운데 있나 다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물론 신사라면 불타는 비행기에 탄 채 태평양 한가운데서 일광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품위를 유지해야만 하지. 거지 같은 일정과 끔찍한 날씨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동부를 횡단하는 내내 완벽한 매너를 선보였다는 뜻이야……그래, 나 지금 변명하는 거 맞아. 아까 그 사람이 젊고 매력적인 여성분이 아니었어도 나는 기꺼이 도왔을 거라니까? 유니온 역, 아니지. 그때는 그런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1920년 겨울 그 역에서만 내가 나이 든 숙녀들 짐가방을 몇 번이나 들어줬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젠장, 전부 숙녀들이긴 했군. 내가 일등석만 탔다는 점을 고려해줘. 돈깨나 있다는 신사들은 본질적으로 쪼잔하고 근시안적이라 정부에게 줄 보석이 든 가방을 정체 모를 놈팽이에게 맡기는 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거든.”
“아까부터 말했지만, 복스. 난 네가 그 사람 도와주느라 영문 모르는 날 이십 분이나 기다리게 한 데 아무런 유감도 없는데. 문자라도 한 통 보내줬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아까부터 말했지만, 아이크. 내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주고 싶다. 악마의 심장에 그런 말을 써 붙일 수만 있었다면!
하지만 악마라도 흔해 빠진 일등석 신사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는 시대였지. 그런 시대였고말고. 유니온 역으로 대체되기 전에는 플랫폼 한쪽에 부유한 고객들만을 위한 대기 장소가 있었는데, 맑은 날에나 비 오는 날에나 대충 이 비슷하게 생긴 덱 위에 어울리지도 않는 융단을 깔고 파라솔을 세워두더군. 역 바깥의 두 배 정도 되는 비용을 들이면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커피나 샌드위치를 가져다줬어. 세상에서 가장 공명정대한 장소였다고나 할까. 일등석 고객은 거기서 막 서빙된 형편없는 샌드위치에 매연을 발라 먹고, 삼등석 고객은 플랫폼 가장자리에 까치발을 하고 선 채 말라비틀어진 빵이나 감자 조각에 묻혀 먹는 거야. 아, 나름대로 근사했어. 아가리만 없을 뿐 베오울프가 맞닥뜨린 용과 다를 게 없는 철의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거대하고 공허한 플랫폼에 처음 들이닥치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거든. 몇 년을 봐도 질리지 않았는데…….
그래, 시카고였나. 뉴욕행 열차가 빼곡히 늘어선 시간표에서 눈을 떼면 커다란 파라솔 아래 테이블은 대체로 나이 든 신사·숙녀로 채워져 있었지. 개중에 꼭 한 테이블에만 젊은이들이 몰려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아주 아름답고 부유한 숙녀와 그녀의 친구들―다소 형편이 어려운 듯한―, 그리고 시시껄렁한 구혼자들이었던 것 같아. 요란할 만큼 화려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한 모자가 어딘가 잘못되었는지, 그 아가씨는 몇 번이나 모자끈과 챙을 만지작거리며 머저리 같은 남자들이 치근덕거리는 걸 훌륭히 무시하고 있었어. 지갑뿐 아니라 기개도 두둑한 숙녀였던 모양이지. 그리고 그런 숙녀에게도 기차역은 퍽 공정하게 굴더군.
그 이른 아침에 급히 뉴욕으로 떠나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나름의 곤경과 곤란을 껴안고 있기 마련이야. 보석과 깃털로 몸을 휘감은 아가씨라도 예외 없이 값비싼 모자가 날아가 버리는 불운 정도는 감수해야 했지. 플랫폼 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바람이 순간 불어닥치는 바람에 그 거대한 파라솔이 쓰러질 뻔하고, 실제로 인파가 몰린 쪽에서는 좀 더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 같은데. 흠, 이쪽이 더 그럴싸한 구경거리가 될 것 같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하면 네가 경멸할 것 같긴 하지만……진실이 그런 것을 난들 어쩌겠어? 내 사랑. 나의 좁은 시야와 유치한 호기심을 용서해주길. 요즘으로 치면 천 달러쯤은 우습게 호가할 것 같은 모자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신데렐라처럼 날아가 지저분한 선로에 풀썩 내려앉는 데서 눈을 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악마도 그렇고.
양떼 같은 구혼자 무리를 거느린 숙녀라면 아끼는 모자 때문에 벌떡 일어서는 일 따위는 없어야만 하는 법. 기특하게도 그녀는 아주 침착했어. 긴 비단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몹시 곤란한 기색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만 이리저리 굴렸지. 그리고 어떻게 되었냐면……내가 좀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신사란 글러 먹은 사내들을 모아 일컫는 단어라고. 어린 숙녀분들 곁에 바글거리던 그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번듯한 신사의 차림새였지만, 그런 만큼 선뜻 모자를 향해 달려가는 용기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더군. 비굴하고 비겁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살피며, 그래. 나 대신 어떤 놈이든 가서 비싼 재킷을 더럽히고 번쩍이는 구두를 골동품으로 만들어주지 않으려나.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는 놈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부유함이 누구의 홍복이 될지가 너무 뻔해지니까 그것도 견제해야만 하고. 뒤통수에나 이마에나 아주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어. 근대 이후로 문학을 비롯해 여러 가지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그토록 구역질 나는 문장을 찾기는 지금도 힘들다고 생각해.
오, 물론 인류애를 잃기는 아직 일러, 아이크. 양떼가 크면 개중에 거세하지 않아도 될 만한 수놈이 하나 정도는 있을 수밖에 없지. 그리고 그런 놈들은 봄이 되기 전, 그러니까 새끼 양을 분류해 거세할 때가 오기 전까지는 거의 뭉쳐 자는 무리 가장자리까지 밀려나 있는 법이거든. 추위와 바람을 의연하게 견디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릴 줄 아는 수컷이라면 인간이나 가축이나 크게 다를 것도……알았어, 들어봐, 들어봐. 긍정적인 의미로 한 말이었다고. 그 덜떨어진 구혼자 무리 가운데, 숙녀분께 쓸데없는 소릴 하는 대신 맞은편에 앉아 터무니없이 비싸고 맛없는 커피가 버려지지 않게 애쓰던 놈이 하나 있었다니까. 숙녀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 것과 동시에 선로로 뛰어든 건 바로 그 녀석이었지.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나머지는 전부 도착할 때까지 십오 분은 더 기다려야 하는 기차 따위에 지레 겁먹은 채였으니까.
아이크, 아이크. 생각해봐. 1920년대였어. 대공황이 있기도 전이었다고! 아름답고 부유한 숙녀에게 구혼하려면 안전 수칙 따위는 잠시 잊어야 하는 시대였다는 뜻이지. 그래, 그런 시대가 한 천 년쯤은 갔던 것 같네. 원래 끝물에 달콤한 포도가 진짜배기인 법이잖아. 녀석은 그런 시대의 마지막 총아였던 거야. 꾸벅꾸벅 졸던 늙은이들까지 깜짝 놀라 오, 저런, 아이고머니나,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모자를 향해 달려간 남자와 그제야 벌떡 일어선 여자만이 의연했고, 그는 개선장군처럼 먼지와 검댕으로 지저분해진 어깨를 쫙 편 채 돌아왔지.
중요한 건 이때부터야. 내 생각엔 그 아가씨도 과묵한 청년에게 얼마간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고작 모자 한 번 주워줬다고 뺨을 석류처럼 붉히기에는, 뭐라고 할까. 요즘 기준으로도 모자란 감이 있지 않나? 나는 교외에 사는 주책맞은 독신의 고모할머니가 된 것처럼 혀를 차며 속으로만 중얼거렸어. 이봐, 아가씨. 추워서 얼굴 빨개진 거라고 둘러대기라도 해. 절대 그 녀석에게 키스해주지 말라고.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하란 말이야. 장갑 낀 채 악수나 해. 당연하다는 듯 모자를 받아 들고, 저놈을 파티에 초대할지 말지는 일단 열차에 타고 당신 친구들이 모두 입회한 하에 면밀한 평가를 거친 뒤에나 결정해야지!
음. 내가 그 무렵에 젊고 정신 빠진 남자들을 좀 심하게 싫어하긴 했어. 전부 징집된 뒤에는 싫어할 필요조차 없었지만. 난들 알겠어? 악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쟁은 알아서 일어난다고. 사백 년 전에도 나는 내 성에 틀어박혀 궁둥이나 덥히고 있었는데 그놈들이 먼저……이건 또 너무 먼 옛이야기가 되는군. 근대적인 기사도에 집중하도록 할까.
그래, 그 멍청한 기사도. 사랑에 빠지면 멍청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법칙에 지극히 충실한 사내였지. 내가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필요도 없었어. 녀석은 플랫폼으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어쩔 줄 모르고 뺨을 붉힌 채 손을 접었다 폈다 하는 아가씨에게 모자를 건네주더군. 손끝 한번 닿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겁쟁이들이 사방에서 환호를 빙자한 야유를 퍼붓는데도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 미덕까지 선보이며.
모두가 젊음을 핑계로 숙녀에게 감사의 키스를 권했지. 문장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선동가가 되고자 하는 놈들은 어느 시대에 봐도 역겹기 짝이 없어. 내 사랑, 듣기에 고리타분한 이야기겠지만 결국 진짜 신사란 그런 녀석들에게만 쥐여주어야 하는 감투라니까. 그는 숙녀분보다 더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도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지. 플랫폼으로 훌쩍 뛰어 올라오면서, 몸에 묻은 먼지를 직접 털면서, 잡아끄는 지저분한 손들을 단호하게 물리치며, 아니요, 미스 베이커. 전 당신께 아무것도 받지 않을 겁니다. 이미 감사 인사를 하셨잖아요. 당신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는 걸 압니다. 난 당연한 일을 했고, 자네들이 그렇게 멍청한 것 보듯 눈을 흘기든 말든 상관없네. 내 명예는 자네들 입씨름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 오직 신과, 내 당연한 헌신의 주인이신 미스 베이커만이 증명해주실 수 있는 문제야. 더 이상 숙녀가 모자 아래로 얼굴을 숨기게 하지 말게. 그녀가 손수건 따위를 철로에 떨어뜨린다면 기꺼이 내 손과 발을 한 번 더 지저분하게 만들 용의는 있지만, 그건 전부 숙녀분이 언제나처럼 편안하고 당당하고 아름답길 바라서니까. 오직 그뿐일세.
오직 그뿐이라고!
훌륭했지. 아주 훌륭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 그러니까 나이 지긋한 일등석 승객들과 근처에 기웃거리던 신문팔이들, 역무원들, 길 잃고 헤매던 아이들, 산책할 장소를 잘못 골라 미적미적 배회하던 모든 멍청이와 함께 열렬히 손뼉이나 치고 있었어. 바가지 쓰고 산 신문 따위는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그래……백 년은 일등석 신사 흉내를 내던 악마가 이런 외진 카페에 앉아 바쁜 작가에게 치근덕거리는 백수 취급을 받게 되기 충분한 시간이란 말이야. 아마도 나는 그사이에 형편없는 로맨티시스트가 되어버린 모양이지. 그날 식당칸에서 점심으로 제공했던 아스파라거스의 풍미까지 기억나는 걸 보니 확실해. 난 물론 가짜 신사지만, 본받을 만한 진짜를 본 일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
흠. 너도 알다시피, 좋은 걸 흉내 내는 건 내 특기잖아?”
그러나 아이크의 종이는 말 그대로 텅텅 빈 종이일 뿐이었다.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타자기는 거의 건드리지도 않았다. 겨우 가제만 쓰인 종이 한 장, 어쩌면 첫 장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이는 종이 쪼가리 하나 주우려고 그렇게까지 멀리 달려갔다 올 필요는 사실 없었다. 천 달러쯤 되는 모자는 어린 숙녀에게 분명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을 테지만, 아이크의 소설은 전부 머릿속에 들어있다. 아직 문장으로 빚지도 못해서 누가 훔쳐 갈 수도 없는 것들. 잃어버린다면 그건 온전히 그만의 잘못이 될 것이다. 어쩌면 자책할 필요조차 없이 잊어버려야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회상에 잠긴 복스는 곧장 덱에 올라오는 대신 큰 바위틈에 박아둔 기둥에 몸을 기댔다. 뭉툭한 목제 난간에 팔을 걸치고 먼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두 눈을 고정한 채, 아이크는 잔잔한 수평선이 쉴 새 없이 커다란 윤슬로 반짝이는 풍경이 유독 그럴듯한 배경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렇게까지 멋진 바다는 아니지만, 런던에서나 뉴욕에서나 백 년 전에나 오늘날에나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근사한 코와 강단 있는 턱이 그 번쩍거리는 빛무리를 뚝 가르고 천천히 미소 짓고 있으니 정확한 날짜나 역의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느끼게 되었다. 복스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라고 둘러대고 싶어 하겠지만 분명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다. 한 사람, 어쩌면 두 사람에게서.
그는 중절모를 쓰고 있지도 않았고 코트는 아마도 백 년 전에 유행한 것보다는 훨씬 가벼울 것이고 시계는 작년에 새로 산 것이고 그들은 모든 칸의 비용이 같은 기차를 고작 두 시간 탔을 뿐이지만, 카페를 장식한 꽃은 모두 가짜고 이 남자는 물론 비컨 타워스의 부자나 브르타뉴의 트리스탄은커녕 인간조차 아닌 악마일 뿐이지만, 그래도 아이크는 종이를 건네받기도 전에 벌써 무언가를 돌려주고픈 충동을 느낀다. 함께 바다를 보러 올 사람이 꼭 그린 듯한 신사일 필요가 있겠는가.
“복스.”
“음?”
이름을 부르면 쉽게도 올려다보는 두 눈에 가득 담긴 감정의 밀도만을 곱씹으며.
“그냥 키스해달라고 해도 돼.”
“……내 이야기 듣긴 한 거야?”
어떤 것들은 분명 숨길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법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새기며.
“어쨌든 네가 뭔가 주워 오기는 했잖아. 음, 아직 아무것도 안 쓴 종이일 뿐이고, 내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바닷바람은 계속해서 세게 불어왔다. 아직은 찬바람이다. 카페 지붕과 덱을 풍성하게 장식한 꽃들은 모두 누군가 공들여 만든 가짜이기 때문에 긴 세월 그런 바람을 맞으면서도 떨어지고 나부껴 사라지는 일 없이 알록달록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크는 카페에 들어설 때부터 한땀 한땀 바늘과 실로 꿰매어 만든 팬지며 제라늄이 정말 예쁘다고 진심으로 감탄했기에 문득 솟구친 충동을 굳이 억누르지 않았다.
근엄하게 눈매만 씰룩거리던 남자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려 웃을 때까지 의연하게 기다렸고, 그가 팔을 뻗은 뒤에야 고개를 숙여주었다. 멀거나 가까운 데서 무언가 계속 반짝거리며 심장을 동동 두드리는 건 결코 착각일 수 없다.
“사랑해. 그러니까 키스해줘.”
“이것도 흉내,”
“이건 내가 아는 한 가장 좋은 거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테니까.”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마른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바람과 파도와 가짜 꽃 흔들리는 소리 뒤에만 오직 먹먹한 그림자를 비추고, 그뿐이었다.
1920년 시카고의 어느 젊은 신사는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숙녀의 모자를 목숨 걸고(과장 좀 보탬) 주워주었지만, 2023년 악마와 문호는 어느 쪽이나 20세기 이전의 신사도 아니고 숙녀도 아니고 아이크가 놓친 건 천 달러짜리 모자가 아닌 빈 종이 한 장뿐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당연한 책임이나 부채가 되지 않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죠. 하지만 여러 의미로 이미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데다가 유명한 향락의 시대에 신계급주의며 천박한 자본가적 논리 따위와 결탁한 지 오래인 일등석의 철딱서니 없는 멋쟁이 신사숙녀 탈을 벗겨낸 뒤에 남는 건 결국 순전한 애정에서 비롯된 헌신과 열망뿐이지 않겠습니까? 고작 종이 한 장 날아갔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후다닥 달려간 어떤 놈팽이처럼, 아마 백 년 전 점잖은 신사분도 좋아하는 아가씨가 비싼 모자나 레이스 손수건이 아닌 골무 하나만 떨어뜨렸더라도 주워주려고 허리를 숙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수컷 양을 대부분 거세하는 이야기와 대조점으로 가져온 개츠비 모티프는...인정합니다 너무 뻔하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2차에 뻔한 얘기나 하지 도대체 뭔 참신한 소릴 하란 것임 (ㅈㅅ) 그리고 2차 아니어도 피츠제럴드는 아무데나 맨날 끌려나옴 (ㅈㅅㅈㅅ)
그러므로 아이크는 순전한 충동으로 복스를 부르고, 복스는 주워왔으니까 키스해달라고 하는 대신 그냥 사랑하니까 해달라고 합니다. 둘다 신사일 필요도 숙녀일 필요도 없고 뭔가 대단한 매개를 요하지도 않는다는 거죠. 미니멈 400년 묵은 악마는 중절모 쓰고 프록코트 입지 않아도 아주 번듯한 신사 행세하며 살 수 있겠지만,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흉내 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라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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