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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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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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써니는 형의 친구.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친구의 동생.

우리 둘은 친구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친구……도 맞긴 맞겠지. 써니는 다른 애들이 동생이란 존재가 지독하게 귀찮아서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 올려두고 도망쳤다가 어머니에게 볼기짝을 두들겨 맞던 시절에도 곧잘 나를 끼워 놀아주었고, 그건 나이를 더 먹은 뒤에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많은 경우 루카도 함께였지만, 써니는 그가 자리를 비운 날 놀러와서도 그냥 돌아가버린 적이 없다. 공통 화제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해 다 지고 버스 끊기기 직전까지 대화가 이어지곤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정 이야기할 게 없으면 게임기라도 가져오라고 하던 얼굴이 자라며 변해가는 과정을 그의 동갑내기 친구들만큼이나 가까이서 지켜본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어제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이모가 너한테 하실 말씀이 뻔할 뻔 자긴 하지만.”

묵직한 재킷과 양쪽 디자인이 다른 장갑이 툭,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 장갑 한 짝을 주운 뒤에야 그는 뒤돌아 ‘그럴 필요 없다’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써니는 생긴 것보다 정리정돈에 소질이 없어서, 처음 독립했을 때는 놀러올 때마다 방이 개판이었다. 바닥에 늘어놓은 옷가지며 찬장이 모자라 대충 테이블 구석에 쌓아둔 식기를 본 루카가 기절초풍해서 다시는 너 보러 오지 않겠다며 유사 절교 선언까지 불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나는 형의 친구가 혼자 사는 집에 형보다 몇 배는 더 자주 놀러오는 이상한 사람이 됐다. 버릇이 무섭다고, 써니가 퇴근할 때쯤 들어와 있다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주면 새삼스럽게 귀가 빨개져서 허둥거리는 모습에도 익숙해졌다.

현관 비밀번호를 바꿀 때마다 나한테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도, 가끔 이모마저 ‘써니네 가서 걔 코트 좀 가져와라, 내버려두면 절대 세탁 안 맡길 놈이다‘라고 심부름에 하소연을 덤으로 얹어주시는 것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다 보니 문득 목구멍에 무언가가 미적지근하게 걸려 내려가질 않게 되었다.

“그으래? 뭐가 그렇게 뻔한데.”

“어떻게 애인 한 번 안 데려오냐고 뭐라고 하신 거 아냐? 이모 맨날 그러시던데. 형제가 쌍으로 부모를 서운하게 만든다나 뭐라나……귀뜸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고……뭐 그런 거?”

“그런 말을 너한테 해, 엄마가? 상대를 잘못 골랐네. 양심 좀 아프셨겠어요, 브리스코 대장님.”

허물 벗듯 몸에서 떼어낸 것들을 재킷에 둘둘 말듯 해서 세탁 바구니에 내던진 써니가 셔츠 단추까지 한 개 더 풀어버리는 광경을 코앞에서 보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는 나도 해봤다. 정확히는, 이상하게 느끼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매 여름마다 속옷과 다름없는 수영복 한 장 달랑 입고 하루 열 시간씩 바다에 들어가 놀던 사이에 이딴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의식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나는 이미 몇 년도 더 전부터 아주 이상한 현상에 시달려 왔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는 써니만의 공간이 문제일 것이다. 그의 옷, 그의 물건, 그가 매번 쓰고 손을 대는 것들뿐인 작은 집에서 궁둥이라도 붙이고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무릎이며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앉아야 하기 때문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 이런 거 공짜로 봐도 되나 몰라, 맥락도 없는 헛소리가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붙잡는 살 떨리는 경험을 할 필요는 없었지 않겠는가……심지어 그때 난 교복 입은 학생이었다고. 그 말을 정말 해버렸으면 써니가 날 얼마나 발랑 까진 놈으로 봤을지.

“잘못 고르긴. 난 정말로 애인 같은 거 없으니까 이모가 잘 알아보신 거지.”

별 뜻도 없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 함께 있는 사람의 안색을 자연스레 살피는 다정한 눈빛, 의자 등받이 두 개를 한꺼번에 쥐어 당기는 커다란 손……

“넌 저번에 그……무슨 동기랬던가? 그 여자애 있었잖아. 걔랑 연락하는 거 이모가 보신 거 아니야?”

그런 것들이 누구 것도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다시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화가 나는 건지 민망하고 서운한 건지 씁쓸하고 당황스러운 건지 모를 기분이었다. 발랑 까진 놈은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무언가는 된 듯한 착각에 홀로 시달리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걔는 그냥 동기야.”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너무 진부해서 소름이 다 끼칠 지경이었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써니는 얄밉도록 태평하기만 했다.

“목 말라서 그래?”

남의 속도 모르는 말도 앉은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뒤지는 뒷모습도 다 그랬다. 누구의 것도 아니란 건 어쨌든 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전에는 내가 마실 커피가 그리 크지도 않은 써니의 냉장고 한 단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너무 당연해서 난데없이 목덜미가 뜨겁고 뱃속이 불편해질 때면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곤 했다.

써니가 저런 소릴 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새벽에 애인 데리고 집에 갈 수는 없어서 작은 방을 빌린 적이 있으니까……사실 두 번쯤……처음엔 여자애였고 그 다음엔 남자 선배였던가? 아, 젠장, 왜 그러고 살았지? 넌 또 그걸 왜 내버려뒀던 거야? 나라면 진작에 비밀번호 바꾸고 스페어키도 뺏었어.

“커피 마실 거야? 너 요즘 자주 마시는 거 사다놨는데. 곧 저녁이니까 그냥 물 마실래? 콜라도 있긴 해.”

나라면 절대 용서 안 했어. 놀라서 소리를 지르든 어이 없어서 화를 내든 했을 거라고. 커피고 콜라고 알 게 뭐야, 물 한 모금도 주기 아까워했을 텐데.

다신 안 볼 것처럼 배신감도 느끼고 왜 그러고 사는지 따져 물어야만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도 곱씹고, 그러다가, 형체도 없고 기원도 없는 감정에 거나한 카운터를 맞고 엉망진창으로 생각의 한복판에 드러누워서 문득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진부한 만큼 강력해서 떨쳐낼수도 없는 미련 따위를.

“진짜 아니라니까.”

“안 마신다고?”

“아니. 그건 줘.”

목이 타긴 했다. 눈치는 더럽게 없으면서 얼렁뚱땅 정답에 근접하긴 하는 써니를 보는 건 늘 즐거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갈증이 이는 이유가 바로 너라고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커피 반 캔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동안 평소보다 좀 더 긴 시선이 머무르는 것도 같고……이젠 뭐는 진짜고 뭐는 또 착각이고 하는 것도 하나도 모르겠다. 차갑고 진한 커피가 몸 안쪽을 마구 두들겨 패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내달렸다. 이런 긴장감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절대 즐길 수 없을 게 뻔하다.

“엄마가 뭐라고 했냐면.”

“응. 이모가?”

도로 앉으려고 하는 써니의 손을 잡아 멈추게 했다. 앉으면 그는 나와 눈을 맞추려고 들 것이다. 아무리 뿌옇고 지저분한 창이라도 어렴풋한 그림자만은 알아볼 수 있는 법이고, 나는 그런 사소한 몸부림마저 들키기 싫어 버둥거린다.

내가, 그가, 그리고 둘만 남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타이틀이 붙어 있는 우리 둘을 온전히 채우기 위한 다른 모든 사람이 평생 똑같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형의 친구, 친구의 동생, 그 사이를 채워주는 많은 이들과 함께 우리는 여름마다 바다에서 놀고 비 오는 날에 정글짐에서 놀다 미끄러져 떨어지고 병원 실려가면 누가 다쳤든 다같이 대성통곡하고……그는 다정하지만, 결국 고만고만한 사내자식들끼리라 종종 짓궂게 괴롭히기도 하고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도 하고.

나도 가끔은 떼를 쓰고 토라지는 시늉도 하고, 그러다 몇 분을 채 못 가서 써니, 나도 같이 가, 같이 놀아, 하굣길이 겹치면 좋겠어, 다른 교복을 입어도 주말에는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어느 대학 갈 건지 말해줘, 집에 들어가게 해줘, 내게 네가 그런 만큼 네게도 내가 당연하다고 해줘, 그런 자충수를 두고도 나는 내가 멍청한 줄 모르는 바보로만 평생을 이어져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같이 살 거면 미리 얘기하래.”

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남들이 먼저 알고, 너에게 가장 당연한 사람은 내가 아닐 수도 있는 걸까?

이래서 눈 마주치기 싫었던 건데. 고개를 들어 보니 써니는 아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만 뻐끔거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잘난 얼굴이 모처럼 우스워졌다. 웃지 않을 때면 오금이 저려올 만큼 차갑기만 한 파란 눈도 지금은 얼떨떨한 심정에 잡아먹힌 것처럼 아리송해 보인다. 진정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황당한 소리라는 듯이.

맞는 말이지, 나도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머리 터지게 잡념에 빠져 살진 않거든. 세상엔 균형이란 게 있어 한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걔랑 만나는 거 아니냐’ 따위나 지껄이고 있으면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몫까지 고통받기 마련인데, 그러면 이게 다 누구 탓이 되겠는가?

“같이 살아?”

“웃기지? 나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그런다는 게. 누가 보면 아들 집에서 못 내쫓아 안달난 사람인 줄 알겠어. 써니한테 그런 것도 떠보는 말이었겠네, 우리 엄마 그러는 거 진짜 별로라니까……봐, 아무 사이도 아닌데 옆에서 더 난리인 거 웃기지. 너는 진짜로,”

“네가? 누구랑?”

이게 누구 탓이겠냐고, 그러니까.

“야, 써니 브리스코!”

나는 써니 앞에서 뭔가를 해 놓고 곧장 후회하는 버릇이 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고,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고. 계속 이러고 살다 보면 무뎌지기라도 하겠지, 체념하고 내버려뒀더니 갖가지 장면으로 층을 이루며 퇴적된 미련 위에 나날이 새롭게 부끄럽고 억울하고 울 것 같은 순간만 화려하게 덧칠되었다.

기대는 늘 사람을 배신한다. 하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분에 못 이겨 버럭 소리를 질러 놓고서 써니의 눈이 커지는 걸 보자마자 또 후회했다. 인정하기 싫은 건지 세상이 다 알아줬으면 하는 건지 모를 모순된 마음이 멀미처럼 속을 뒤집어 놓았다. 형의 친구를, 내 친구를, 써니를, 이대로 평생 좋은 사람으로만, 지금 그대로만 가까이 두기도 모자란데 나는 그가 너무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평생을 좋아해온 사람 앞에서 가장 못나게 구는 내가 토하고 싶을 만큼 싫은데도 입과 혀가 멈출 줄을 몰랐다.

“나랑 장난해? 누구랑 사냐니, 보자보자 하니까……형은 내가 그렇게 가벼워 보여? 너한텐 내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당연해? 야! 너 학창시절에 나랑 사귀냐는 말 몇 번 들었어. 이 정도면 너 빼고 온 세상이 다 알아! 지나가는 개도 내가 누구 집 열쇠 가지고 있는지는 알 거라고! 엄마가 너한테 그런 얘길 왜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모는 너 왜 가만 두는 것 같은데? 사지육신 멀쩡하게 낳아준 아들 놈이 생전 누구 사진 한 장 보여주는 법이 없어도 아무 말 안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한 건데?”

“아, 알반.”

“내가 누구랑 살긴 누구랑 살아! 넌 내가 다른 사람이랑 나가서 살면 좋겠어? 넌 그래도 괜찮아? 당연히……!”

당연히 괜찮겠지. 나오는 대로 마저 뱉어버렸으면 무언가 아주 끝장을 내버렸다는 후련함이라도 있었을 텐데, 의식도 못 하는 사이에 내 두 손목은 훨씬 뜨거운 손에 붙들려 버둥거리며 뿌리치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니……아니다. 써니의 손이 특별히 뜨거운 게 아니라, 내가 차가운 캔을 여태 쥐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테이블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캔 표면을 타고 미끄러지는 물방울과 비슷한 온도일지도 모른다. 손바닥이 얼얼하고 축축했다. 머리에는 열이 올라 뜨거웠다. 이마나 관자놀이 어디쯤에 땀이 맺힌 것도 같았다.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만을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물론 펑펑 울거나 뛰쳐나가기에는 우리가 너무 오래 알아온 사이라, 그토록 오래 별 일도 없던 사이라, 형의 친구와 친구 동생이었을 뿐이라 내 눈은 건조해 뻑뻑할 지경이었고 써니는,

“너 이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봐.”

뭐가 그렇게 신기하다고 불쑥 다가와 나를 죄다 들여다보는 써니는,

“……너 때문이잖아. 나도 이렇게 화내본 거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너무 좋아해서 도무지 이길 수가 없는 써니는,

“알반……알비.”

손목을 붙들고 있던 손을 달궈진 물방울처럼 미끄러뜨려 어깨와 등을 감싸고, 바짝 다가온 얼굴은 그늘이 되어 무더위 땡볕 대신 천장 등을 가리고, 긴 속눈썹이나 얇은 입술 틈으로 깊이 내쉬는 숨 따위가 무엇 하나쯤은 반드시 내게 닿을 것처럼 가까이서 코끝을 간질이며, 평생을 함께 본 여름처럼 웃었다.

코끝이 정말 스치기라도 한 것처럼 솜털이 삐쭉 서는 것과 동시에 그가 나를 완전히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심스럽게, 무언가 소중하거나 어려운 것을 대하듯, 그러나 당연하게, 너무나 당연한 다음 순서라는 양.

“나랑 같이 살 거야?”

“써니……형.”

“그럴 거라고 하면 오늘 집에 못 가. 나랑 여기서 사는 거야.”

“써니?”

가장 좋아하는 두 눈이 정오에 스미는 볕뉘처럼 빛나는데 나는 또, 화도 내다 말고 후회도 하다 말고 애먼 데 정신이 팔려서 무슨 뜻인지 묻지도 못했다.

“네가 온 거야, 알비.”

지금 닿은 거, 진짜로 입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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