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과 마탑의 사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듣자하니 북쪽 국경 끝에서 암약하던 마왕을 잡아왔다고 한다. 제국의 누구 하나 그 사실을 기뻐하지 않는 자는 없을 분위기였다. 제국의 궁성 깊은 곳에 존재하여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흑마법사의 탑을 제외하면 그랬다. 물론 그들에게도 소식은 들려왔다.
그러나 탑의 주인인 흑마법사와 그 밑에서 일하는 마도서의 관리자는 제국 전체를 들썩이는 소식에 지극히 회의적인 감상을 보였다. 그 마왕이 진정 악한 존재라면 그 자리에서 처리했어야지, 왜 수도까지 끌고 왔느냐는 게 회의감의 정체였다. 전 국민의 위에 군림하는 황제폐하께서는 그 마왕이란 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음이 분명했고, 그것이 마왕이 지녔을 초월적인 힘과 관계가 있다면 흑마법에 조예가 깊은 그들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탑이 세워진 이래 굴곡없이 존속해왔던 그들의 일상도 이에 얽혀 매우 바빠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생이 다할 때까지 연구나 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데 왜 괜한 일을 만들어서 귀찮게 만드느냐, 란 얘기다. 실제로 마왕을 생포해 온 기사단이 수도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부터 마왕을 격리할 감옥을 그들의 탑 지하에 만들고 결코 도망칠 수 없게 준비하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말이야 쉽지, 그 마왕이란 자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힘은 또 얼마나 되는지도 잘 모르는데 대비책을 어떻게 만들란 말인가? 그러나 흑마법사는 궁정에 소속된 이였고 그의 밑에서 일하는 마도서 관리자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머리를 굴려 지하감옥을 개조해야 했다.
그들이 아닌 자가 만지면 살이 타들어가도록 창살에 저주를 걸고, 반항의 기색이 보이면 극심한 격통에 시달리도록 해 마왕의 손발을 구속할 도구를 만들고, 만약 그걸 모두 감수하고 감옥에서 빠져나오더라도 쉽게 마탑을 나갈 수 없도록 감옥으로의 전송마법진이 숨어있는 함정을 잔뜩 깔아놓았다. 그 작업을 끝냈을 때 둘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덕분에 개선 퍼레이드에도 나가지 못하고 마왕의 이송은 기사단에 맡기기로 했다. 마왕이 도착하면 깨워달란 부탁과 함께 흑마법사는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고, 마도서의 관리자 역시 도서관 구석에 놓아둔 소파에서 쪽잠을 청했다.
그라고 흑마법사처럼 모든 걸 아랫사람에게 떠넘긴 채 숙면을 취하고픈 마음이 어찌 없었겠느냐만은, 안타깝게도 흑마법사에게 있어서의 아랫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기사단이 마왕을 끌고 온 것을 흑마법사에게 보고하니 이제 네가 자라며 침상을 교대해 준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마왕이 지하감옥으로 이송되고 감옥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과정 내내 자신의 방에서 그토록 그리웠던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더더욱 다행으로 일주일 동안 고민해 만든 장치들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도중에 깰 일도 없었다. 다시 눈을 뜨면 바빠질 테니 푹 자둬야 했다.
이것이 흑마법사의 탑에서 마도서를 관리하는 사서 아이크 이브랜드가, 한낱 인간에게 잡혀와 흑마법사의 탑 지하감옥에 갇힌 마왕 복스 아쿠마를 만나기 전까지의 경위이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아이크는 아직 자고 있을 슈가 남겨놓은 지시사항을 확인했음. 감옥 보강에 필요한 자료를 내가 깰 때까지 준비해 둘 것. 그리고 감옥에 내려가 마왕의 상태를 한 번 보고 올 것. 내가 왜 굳이 마왕의 상태까지 점검해야 해, 하고 투덜대면서도 우리의 충실한 공무원 아이크는 랜턴을 챙겨서 지하로 내려갔음. 슈가 부탁한 자료야 뭐, 이런 일도 있을 거 같아서 미리 준비해둔 것에서 뽑아서 주면 되니까.
뭣보다도 이쪽이 더 아이크의 흥미를 끌었음. 대체 어떤 마왕이길래 인간 기사단에게 잡혀왔나. 우리 제국 기사단이 그렇게 셌나? 어쩌면 마왕도 뭣도 아닐지도 몰라. 그저 공적을 원해 아무나 잡아와서는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걸지도. 마왕을 잡았으니 어명을 받아 감옥을 만들라고 온갖 유세를 떨던 기사단의 전령을 떠올리고 아이크는 그래 분명 그런 걸거야 라고 생각했으나 지하 감옥으로 가기 위한 계단에 발을 들인 순간 깊은 어둠 속에서 확 끼쳐오는 요기를 느꼈음. 슈가 사용하는 각종 저주보다 더 불길하고 마탑의 거주자로서 악한 것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자신조차 순간 숨이 턱 막힐 만큼 진했으며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접근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을.
아이크는 확신했음. 아, 이 아래에 있는 건 진짜 마왕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음. 잠시 심호흡을 하고 아이크는 랜턴을 앞세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음. 그 길 끝에 있는 지하감옥 앞에 서 랜턴을 감옥 안으로 비췄을 때 아이크는 다시 숨을 가다듬어야 했음.
마왕은 슈가 만든 족쇄를 팔다리에 찬 것도 모자라 봉인의 천으로 온몸을 완전히 묶인 채 벽에 매달려 있었음. 그를 감싼 어둠을 닮은 흑발이 어깨 아래로 구불져 흘러내렸고 랜턴의 빛을 감지하고 뜬 눈은 흉흉하게 빛나면서도 그 속에는 아이크가 좋아하는 딸기사탕의 색이 깃들어 있었음.
-오, 어제는 못 본 손님이군.
그리고 입이 열리자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짙은 어둠의 향기가 났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뭔가 또한 있었음. 흑마법사의 밑에서 일하며 흑마법에 익숙한 아이크라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아이크는 어제 이 감옥을 찾아왔던 이들이 했듯 마왕에게 온통 적개심만을 가질 수는 없었음. 그래서였을까. 계단 위에서 그의 힘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떠올랐던 의문, 원래는 내뱉지 말고 속으로 삭혀야만 했을 의문을 너무나도 쉽게 입에 올리고 말았음.
-당신, 목적이 뭐야?
아이크의 질문에 마왕은 벙찐 표정을 지었음.
-무슨 뜻이지? 인간.
-말 그대로야. 무슨 의도로, 왜 여기 갇혀 있는 거야?
-왜냐니. 너희 제국의 용맹한 기사들이 나를 쓰러뜨려 굴복시켰으니 여기 와 있겠지.
-당신, 어마어마하게 강하지? 역전의 용사가 와도 당신을 무사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걸. 평범한 인간은 당신의 숨결 하나로도 죽어버릴 거라고.
두려워하면서도 거침없이 던진 말에 마왕은 그저 흥미롭다는 듯 웃기만 했음. 그 침묵의 미소가 긍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아이크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음. 눈앞의 이 마왕은 슈나 자신이 일주일 동안 급조한 감옥으로 가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음.
-즉, 난 어떤 의도가 있어 여기 갇혀있는 거다?
-나한테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아.
-그럼 그 의도가 뭘까?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
-질문을 바꾸지. 내가 뭘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질문을 받으면 고민하게 되는 것이 학자의 습성임. 코트 속 방어구를 꽉 쥔 채 아이크는 생각에 잠겼음. 저 정도로 강하다면 자기 힘으로 뭐든 가질 수 있을 테니 한낱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린 없고. 그럼 변덕이라던가? 절대적인 강자이니, 한낱 인간에게 붙잡혀 수모를 한 번 겪어보는 것도 재밌겠다 여긴 게 아닐까? 이 감옥의 시큐리티 따위는 눈 감고도 돌파할 수 있을 테니. 그 뒤로 생각을 더 해봤지만 그 이상의 결론이 나오질 않았음.
-혹시...
-너, 이름이 뭐지?
응? 이름? 답을 하기도 전에 새로운 질문이 들어와서 순간 벙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아이크는 대답해줬음.
-아이크 이브랜드. 이 탑에 있는 마도서를 관리하는 사서야.
-그럼 어제 본 장발의 소서러는 네 상관인가?
-그런데, 왜?
-아니, 조금 감탄했거든.
뭘 말이야. 주제가 휙휙 바뀌어서 정신이 없었음. 마왕이라 말이 안 통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그냥 흥미본위로만 움직여서 생각나는 질문을 다 던지고 있을 뿐인가? 어느쪽이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음. 아이크는 마법구를 꼭 쥔 채로 그건 또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지만 마왕은 미소만 지었음.
-그래서, 내 목적에 대해선 생각해봤나?
또 주제가 바뀌었음. 이쯤되면 이 자가 그냥 날 갖고 놀고 있을 뿐이란 게 훤히 보였지만, 화를 내며 대화를 거절했다 심기를 거스르는 게 더 문제가 될 거라 아이크는 대답함.
-심심풀이. 자길 토벌하러 온 인간들을 그저 놀려먹고 싶었을 뿐. 아니야?
지금 나하고 대화하는 이 상황 자체가 말이지. 알량한 자존심으로 자신이 놀림받고 있다는 얘긴 꺼내지 않았지만 아마 그게 답일 거라고 생각했음. 흠, 하고 또 목을 울린 마왕은 아이크의 답에 이런 점수를 내놨음.
-389점.
-뭐야, 그 애매한 점수는... 몇 점 만점인데?
-나머지 공부가 필요하겠어.
완전 틀려먹었단 뜻인가? 아니, 그럴 리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마왕의 얼굴은 아이크에게 자기 추론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음. 그러니까 즉, 이것 역시 날 갖고 노는 거라 이거지. 확 짜증이 나 아이크는 퉁명스레 쏘아붙임.
-무슨 목적인진 몰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사람 갖고 놀지 말고 꺼져.
-입이 험하군. 예쁜 얼굴이 아까워.
-그거 안됐네. 험하게 살아서 그렇거든? 기껏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괜한 일이나 만들고 말이야. 당신 변덕에 어울려줄 만큼 난 도량이 깊지 않아.
-그 트집은 좀 서운한걸. 내가 이 감옥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잖나.
그건 맞는 말이지만!
-게다가, 내가 지금 여기서 탈출한다면 너나 네 상사는 꽤 곤란해지는 것 아닌가? 마왕인 날 굳이 생포해온 걸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은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는 듯하던데.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반박을 못해 분해 죽겠단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아이크를 보자 마왕은 기분 좋은듯 하하하 웃었음.
-뭐가 그리 웃겨.
-아니... 이거 실례했어. 너는 꽤 유쾌한 인간이군. 맘에 들어.
-당신 장난감이 되어줄 생각은 없는데.
-자, 자. 그러지 말고. 아이크. 부족한 점수를 채우기 위해 나와 내기하지 않겠어?
-...내기?
왜였을까. 순간 들어줘선 안 된단 생각이 들었음. 이 역시 저자에겐 유희의 하나고 자신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 꼴이 될 게 뻔하다고 말이야. 그런데도 아이크는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음.
-무슨 내기?
-네가 내 목적을 알아내거나 혹은 내 스스로 말하게 만든다면 너의 승리.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지. 기한은 내가 질리기 전까지. 어때?
뭘 선심쓰듯 말하는 거야. 생각해볼 가치도 없었음. 애초에 답을 아는 건 마왕 자신뿐이니 거짓말로 얼버무리면 이쪽은 손 쓸 도리가 없을뿐더러 또 기한이 자기가 질릴 때까지라니. 이쪽이 지극히 불리한 내기가 아닌가!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싫다면?
-글쎄... 당장 오늘 여길 빠져나가 줄까?
역시 협박이다. 자기 유희에 어울려주지 않는다면 이 감옥에서 탈출해, 진노한 황제의 칼끝을 마탑으로 돌리겠단 소리임. 분하게도 마왕은 자신과 슈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있었음. 이를 갈며 아이크는 마왕을 노려보았음.
-내가 졌을 땐 어떻게 되는데?
-그건 그 때를 위한 즐거움으로 남겨두지.
영혼이라도 요구하시려고?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음. 만약 이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마왕은 즉시 감옥에서 탈출할 것이고 슈와 아이크는 책임을 물어 처형당할 테고, 그렇다고 내기에서 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름. 어느 쪽이던 파멸밖에 없는 선택이라 아이크가 기댈 곳은 내기에서 이겨 얻는 소원권밖에 없었음. 출구 없는 함정을 만들어놓고 의기양양 웃는 마왕의 면상에 죽빵을 날려주고싶단 충동을 억누르며 아이크는 다시 심호흡을 했음.
-내가 이길 가능성, 혹은 방법은 보장해주는 거겠지?
-네 머리가 얼마나 좋으냐에 달렸지. 네 수완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달렸고.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하라고?
-설마. 나도 그렇게 악독하진 않아. 이건 어떨까. 내일부터 매일 이 감옥에서 나와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하는 거야. 네 질문엔 뭐든 솔직하게 대답해 주지. 거기서 힌트를 찾아서 정답을 유추해 내는 건 어때? 너 같은 학자에겐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몰라.
진짜로 말은 잘한다. 마도서의 허점이나 숨겨진 단서를 찾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남의 마음을 어떻게 읽으라고. 하지만 아이크에겐 선택지가 없었음.
-다만 두 가지 조건을 걸겠어. 하나, 내가 정답을 내놨을 때 거짓말로 부정하지 말 것.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머지 하나는?
-내가 정답을 맞히지 못하고 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슈를 끌어들이지 말 것. 이건 당신과 나의 내기니까 괜한 사람 휘말리게 하지 마.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만... 좋아. 약속하지. 그 두 가지 조건을 지키겠다. 내기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않겠다는 약속은 서비스로 붙여줄게.
서비스 좋아하시네. 이쪽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 자기 필드로 사람을 끌여들인 주제에. 뭐, 그렇기에 마왕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아이크는 돌아섰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마왕의 웃음소리에 자기가 정말 위험한 일에 발을 들였음을 깨달았지만 이제와서 돌이킬 수도 없었음.
실수였어. 슈가 찾아달란 자료부터 준비해 놓고, 마음을 좀 가라앉힌 다음에, 그냥 내려가서 상태만 보고 돌아왔어야 하는데. 왜 쓸데없이 말을 걸어서 이상한 내기에 휘말렸냔 말이야.
-...정말로, 왜 그랬을까...
짙은 후회 속에 태어난 의문을 껴안고 아이크는 도서관으로 돌아갔음.
일단은 여기까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