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 군주 x 밴드부 보컬 아이크로 복사이크 캠퍼스물 (1)
이미 유행이 지났으면 어쩌죠 빼애애앵
갑작스러운 존잘님의 연성 한장으로 갑자기 탐라의 붐이 되었던 너드복스…
지금도 붐이 다 사라지지 않았기를 기대하며 예전에 풀었던 썰에 살을 붙여 봅니다
영화 제작밖에 관심 없었던 너드대학생 복스 아쿠마… 당연하지만 같은 과 다른 과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의 관심 밖에서 의외로 편안한 캠퍼스 라이프를 보내고 있던 그였지만 과 학생 전원이 참여하는 학교 축제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고… “넌 목소리 하나는 좋잖아w” 라는 과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한 마디와 함께 과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의 안내담당을 맡게 된 복스는 자신에게 떠넘겨진 지루한 인고의 시간을 버틴 뒤 간신히 자유를 획득, 언젠가 영화에 써먹게 될지도 모르는 축제 배경을 샅샅이 관찰하다 학교 광장의 가장 큰 무대에서 벌어지는 밴드 동아리의 야외공연을 보게 되는데…
밴드 동아리의 공연은 복스가 스테이지 관객석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한창 진행중이었지. 관객석에 있는 모두가 숫제 비명으로 들리는 환호성을 지르게 만든 장본인은 당연하지만 그 밴드의 보컬이었고, 문제의 보컬은 언젠가 영화에 쓸만한 인간상을 관찰하는 것 외에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던 복스 아쿠마의 시선마저도 사로잡고 말았던 것이었다. 다른 악기를 맡은 학생들에 비해 다소 체구가 작고, 하지만 누구보다도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활짝 웃으면서 마이크 잡고 관객들과 호응하며 노래하는 보컬을 본 순간 복스의 머릿속에서는, 왜였을까, 그동안 봐 왔던 수많은 영화의 명장면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고 지금껏 봐왔던 일반인과 배우를 통틀어 모든 사람 중에서 지금 환하게 웃으며 노래하는 저 보컬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매직이 펼쳐지고 머리 위에서 상투스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관객석에 입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연에 완전히 홀려버린 복스의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가관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두 눈은 커지고, 벌어진 입은 다물리지 않고, 귀에는 오직 노랫소리만 들리고, 양손으로 백팩 끈 꽉 붙잡은 채 얼굴 새빨개져서는, 두꺼운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밴드 보컬의 모습에 그야말로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복스가 정신을 차린 건 “감사합니다!” 란 인사와 함께 밴드가 무대를 내려간 뒤의 일이었지. 겨우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아차린 뒤에도 복스는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 밴드가 떠나버린 무대에는 이미 다음 공연자가 올라와 다른 공연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고 있었지만 복스의 귀에는 아직도 그 보컬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음.
복스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경험은 축제가 끝난 뒤에도 짙은 여운을 남겼음. 평소처럼 자고 일어났어도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현실감이 없고, 내가 본 게 진짜 있었던 일인가 하는 생각을 틈만 나면 하게 되고, 그런 밴드 동아리가 이 학교에 있다는 건 확실했지만 동아리실에 찾아가 “그 날 노래하신 분 누군가요!” 를 시전하기에 복스 아쿠마는 너무나 너드인 대학생이었습니다. 결국 하루하루 정신을 빼놓고 살던 어느 날, 그날 역시 멍하니 길을 걷다가 코너를 도는 누군가랑 부딪혀서 서로 넘어지는 대형사고(*주: 복스 기준입니다)를 치고 마는데…
그런데, 어라.
귀에 들어오는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하는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해.
넘어지고 나서도 우물쭈물하던 복스가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어느새 먼저 일어섰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한 남학생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음. 복스보다 작은 체구에, 품 넓은 오버핏 니트와 그 안쪽에 민무늬 셔츠를 입고, 동그란 알의 안경을 쓴 귀염상의 남학생. 아는 얼굴이 아닌 걸 보니 다른 과 학생이겠지만, 이 건물에 있다는 건 같은 예술대학 학생… 까지 생각했던 복스의 눈에 바닥에 잔뜩 흩어진 책들이 들어왔지. 자기는 항상 메고 다니는 백팩에 온갖 짐을 쑤셔넣고 다니니 이 흩어진 책들은 방금 부딪힌 이 귀여운 남학생의 것임이 분명했음. 그럼 나한테 부딪혀서 자기 짐을 다 쏟은 거야? 그런데 오히려 나한테… 사과를…?!
-저기, 괜찮으세요?
-괘괘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복도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연속해서 숙이고 황급히 짐을 주워주던 복스의 눈에 노트에 적힌 이름이 들어왔음. 아이크 이브랜드. 참 예쁜 이름이란 감상을 품기도 전에 짐을 같이 줍고 있던 남학생에게서 저기, 그거 주시겠어요? 란 말이 들려와서 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노트를 건네주었음. “고맙습니다.” 싱긋 웃는 예쁜 얼굴에서는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지. 이 얼굴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익숙하단 말이야. 어디서 이런 목소리를 들었는지 떠올리기 일보 직전에,
-어?! 저기, 손에 피나요!
상대의 외침에 어라? 싶어서 보니 땅에 손을 짚었을 때 돌에 까졌는지 손바닥에서 아주 적은 양이지만 정말로 피가 나고 있고,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불쑥 다가온 그 학생이 주머니에서 새하얀, 참 자기 같은 깔끔한 손수건을 꺼내서 황급히 피를 닦아주었음. 갑자기 남이 불쑥 자기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자기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주는 상황이 원래는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러웠을 텐데 가까이 다가온 상대에게선 뭔가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나고, 손도 정말 너무 작고, 피부는 부드럽고, 코앞에 있는 얼굴은 너무 예뻐서… 예뻐서… 히이익!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기분으로 피가 멎기까지 손수건을 톡, 톡, 두드려주는 그 애를 보고 있었음.
-죄송해요, 아프진 않으세요?
-괘, 괜찮아요. 제, 제가 더 죄송합니다… 정신을 빼놓고 걷느라…
-아뇨, 저야말로 주변을 안 보고 있었어요. 혹시 이 뒤에 시간 되세요? 제가 마실 거라도 살게요.
-아니아니아니! 정말로 괜찮은데요!
-아뇨. 이대로는 제가 죄송해서 안 돼요.
아니 이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의 대체 어디에서 이런 단호함이 나오는 건데요? 저 극 I라서 이런 상황 너무 송구스럽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는 또 없었던 복스는 결국 그 학생에게 이끌려 재학 중 한 번도 안 가본 교내 커피숍을 방문했고… 졸지에 커피를 한 잔 대접받았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눈은 핑핑 돌아가고… 그러는 사이 일순 떠올랐던 기시감은 점점 흐려져서, 이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만 복스는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커피가 나오고도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두 사람은 커피가 반 정도 줄어들었을 즈음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시작했음. 이 학생의 이름은 아이크 이브랜드. 복스와 같은 예술대학 신입생이고, 소속은 문학부. 딱 거기서 끝난 신상 파악은 다음 수업이 있다며 아이크가 자리를 뜨면서 끝이 났음.
-혹시 어디 잘못된 데 있으면 연락주세요.
아니, 거기서 끝이 아니었지. 복스가 넘어졌을 때 단순히 손바닥 까진 걸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이크는 복스에게 자기 연락처를 가르쳐주었, 아니, 억지로 쥐어주었고, 남들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복스는 그렇게 아이크의 연락처를 겟한 것도 모자라 자기 연락처마저도 알려주고 말았다…
그렇게 아이크가 먼저 커피숍을 나간 뒤에도 자리에 멍하니 앉아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 좋은 날에 하고 있는 복스… 평소 첨 보는 사람이랑 번호 교환할 일이 없어서 모든 게 새롭고 얼이 나간 것 같고, 원래의 나라면 당황해하며 거절하는게 당연했을 텐데 왜 받아버렸을까, 그런 의문에 시달리다 보니 잔 속의 커피는 이미 다 식어 버렸지. 그래도 버리기 아까워 끝까지 다 마시고 쭈그러든 채 커피숍을 나와 갈길을 가다 문득 머릿속에, 아, 근데 그 애, 정말 귀엽게 생겼었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 복스는 내가 미쳤냐며 대낮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절규하다가도, 이 번호가 핸드폰에 있는 거 자체가 부담스러우니까 얼른 지워버려야지 하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이것은 과의 아웃사이더 너드 대학생 복스 아쿠마가 그전까진 꿈도 못꿔봤던 뉴 캠퍼스 라이프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핸드폰에 저장된 열한 자리의 비밀번호와 낯선 이의 이름은 한동안 복스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부모님을 제외하고 학연 및 지연으로 얽힌 몇몇 타인의 연락처 외에 고작 며칠 전까지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사람의 연락처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일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겪어 보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복스는 그 작고 귀엽고 예쁘게 생긴 남학생이 준 연락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면서도, 자기가 먼저 안부 인사를 건네는 등의 용기 있는 행동은 취할 수 없었다.
선뜻 연락하지 못하는 이유라면 또 하나 만들 수 있었다. 분명히 상대는 복스더러 ‘(몸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락하라’ 고만 했지 ‘언제 어디든 연락해도 좋다’ 고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복스의 몸 상태는 이 갑작스런 연락처 획득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듯 혼란스러운 것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차라리 손목이라도 삐었다면 그걸 구실로 연락할 수라도 있었겠다만-정녕 복스 아쿠마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위인인가는 둘째 치고라도-. 심지어 아이크 쪽도, 적극적으로 연락처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그 뒤에 ‘혹시 괜찮으셨어요?’ 라던가 ‘어디 아픈 덴 없으세요?’ 같은 질문을 던질 만큼 사교적인 성격도 아닌 모양인지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는 일도 없었다.
결국 연락처를 주고받고도 서로의 핸드폰에 서로가 보낸 메시지 창이 새로 생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여름방학마저 게 눈 감추듯 사라져 갔다. 이 세상에 연애, 백 번 양보해 거기까진 아니라도 썸타기의 신이 있다면 복스 아쿠마의 지금 이 행태를 보며 고구마 수십 개를 씹어먹은 기분으로 가슴을 퍽퍽 치며 사이다 내놓으라고 외쳤을 법한 상황이었다.
문제의 그 신은 분노한 끝에 이대로 두면 내가 답답해서 돌아가실 테니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까?
복스 아쿠마에게는 또 다른 우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된 뒤의 첫 수업은 교양 수업이었다. 물론 자타공인 영화제작 오타쿠인 복스 아쿠마가 영화와 관련 없는 수업을 들을 리 없었다. 영화의 역사라는, 예술대학 영상영화제작학과 정규 커리큘럼에서도 고루한 수업 취급받아 결국 교양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수업이었고 그 비인기성을 고려하여 월요일 오전 10시에 강의가 시작된다는 비인기 강의 루트를 그대로 밟은 수업이었음에도 나름 장점도 있었다. 일단 교양 수업이니만큼 과제와 시험이 그렇게 빡세지 않고, 수업 자체는 조금 지루하기는 할지언정 한 달에 한 번씩 영화를 감상한 뒤 전문적인 시선이 아니더라도 나름 괜찮은 감상문만 써 오면 학점이 보장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이 장점을 노리고(라기보다는 영화를 수업 과제라는 명목 하에 한 달에 한 번은 볼 수 있다는 것이 더 컸을 것이다) 이 수업을 굳이 자신의 시간표에 끼워넣었던 복스는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강의실에는 복스 자신을 빼면 총 열다섯 명 정도의 학생만 들어와 있었다. 최대 정원이 서른 명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용케 강의 자체가 폐지되지 않았다 싶을 만큼 적은 인원수다. 담당 교수도 이 정도 인원만 들어와도 감사하다 생각했는지 강의실은 그 열다섯 명이 각자 하나씩 자리를 잡고 앉아도 꽉 찰 만큼 작았다. 커리큘럼에는 시각자료로 영화를 몇 편 틀어주는 걸로 되어있던데, 이 강의실에서 사운드가 생생히 전달되기나 할까? 그 점만은 좀 문제라 생각하며 복스는 앉을 만한 자리를 강구했다.
영화=데이트 코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강의실에 있는 총 열여섯 개의 책걸상 중 열네 개는 모두 강의의 시작보다 아침부터 딱 붙어 있을 구실을 찾아 행복하기 그지없어하는 커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딱 하나, 교수 단상 바로 앞자리에-그 역시 커플들이 보기에는 피하고 싶은 자리였을 것이다- 혼자 앉아 있는 남학생이 있었다. 복스가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더라면, 어라, 어디서 많이 봤는데, 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다가갔을 테지만 커플들로 가득한 강의실에 이미 인내심의 한계치를 느낀 복스는 재빨리 혼자 앉아 있던 남학생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척 보기에도 뭉툭한 백팩이 툭, 하고 놓이자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옆자리 학생이 옆을 돌아보았고,
“…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들은 이래로 시도때도없이 복스의 기억 속에서 끓어올라와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 를 반복해서 말하게 만든 목소리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하기에 강의실은 커플들이 서로 붙어앉아 속닥거리는 목소리 외에는 소음이랄 게 없었기에, 바로 옆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작은 두상. 전체적으로 귀여운 얼굴 생김새. 아직 늦여름이라 그런지 오늘은 셔츠 한 장만 걸친 다소 가벼운 복장. 동그란 눈동자 앞에 유리로 세워진 동그란 안경 렌즈. 복스는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자마자 상대의 이름을 떠올려냈다.
“어… 아이크, 씨?”
“복스 씨… 였죠?”
다행히도 아이크 이브랜드는 복스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라기보단 본인이 먼저 복스를 알아보고 ‘어?’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사소한 사실이 기뻤다. 다만 복스가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반응하리라는 법은 없다. 이른 낮 시간 강의인데도 초롱초롱함을 유지하는 아이크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복스는 여느 너드 속성의 학생들이 다 그러하듯 힘차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이크를 당황하게 만들고도 남았을 태도였지만 고개를 홱 돌려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거기에 더해 시선을 내리깔았을 때 여름 복장 특유의 얇은 셔츠와 그 셔츠의 팔뚝 폭보다 0.5배는 얇은 것 같은 새하얀 팔뚝이 눈에 들어와 그건 그것대로 눈을 둘 곳을 못 찾았을 정도다. 복스가 어색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아이크는 상냥하게도,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복스를 향해서 생긋 웃어주었다.
“이런 데서 다 만나고, 우연이네요.”
“그, 그렇네요…….”
뭐가 그렇네요냐, 좀 더 좋은 말 할 수 없냐! 연애… 아니 썸타기의 신이 있었더라면 또다시 고구마를 한가득 입에 넣고 그렇게 외쳤으리라. 그러나 평범한 인간인지라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복스는 겸연쩍게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의자를 빼 앉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 때 다친 건 괜찮으셨어요?”
타이밍을 못 맞추는 건 아이크 이브랜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니면 제대로 자기 쪽을 쳐다보지 못하는 상대를 옆에 앉혀 놓고 할 수 있는 말이 그 정도밖에 없었던가. 이미 시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걱정을 입에 올리는 아이크에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괜찮아요… 하고 중얼거렸을 때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강의실 문이 열리고 교수가 들어왔다. 교수의 등장에 등을 꼿꼿이 세우는 아이크를 곁눈질로 지켜보며 자세도 참 바르고 예쁘다, 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교수의 입에서 강의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요즘 세상에 태블릿 대신 양장 노트를 펼쳐놓고 손으로 일일이 오리엔테이션 기록을 남기는 아이크를 보며 복스는 또 한 번 감탄했다. 엄청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아.
운명의 신의 장난처럼 같이 수업을 듣게 된 두 사람은 대학 강의의 백미, 조별과제를 같이 수행하게 되는데… 다행히 교수님은 융통성이 있는 분이셔따. 자기 강의에 수업과 데이트를 같이한다니 일석이조다 개꿀 을 노리고 온 커플들에게도 아량을 베푸시어 나란히 앉은 학생들끼리 한 조를 짜서 2인 1조로 앞으로의 과제를 수행하라는 명을 내리셨고… 물론 (아직은)커플이 아닌 두 사람에게도 은혜는 은혜였을 것임. 자기 남친 혹은 여친이랑 떨어져서 같은 조 짜게 되면 온갖 불평불만을 다 털어놓을 애들이랑 한 조가 안 된 게 어디이며… 아이크야 괜찮았겠지만 복스는 만약 자기가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기대에 가득차 수강신청한 강의를 드랍하고 말았을 것이 분명함…
여튼 같은 조가 된 두 사람은 오리엔테이션 수업이 끝난 동안 앞으로 한 학기 동안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지에 대해서 논의하게 되는데…
교양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교수의 열의가 있었는지 커리큘럼은 빵빵하게 차 있었다. 일단 2주 동안 총 두 번의 강의에서 연도별로 나눠 영화의 역사에 대해 강의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2주일에 한 번씩, 교수가 수업한 시대에 상영된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 과제가 고작 이것뿐이라니 꿀 빨았다며 환호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복스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러니까, 지금 졸지에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같은 영화 오타쿠와 한 조가 되어버린 이 비운의 남학생과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이 리포트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 거다! 거기서부터 복스는 이미 아이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으나 정작 아이크는 교수가 말하는 내용을 착실히 메모하고 있을 뿐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어쩌지, 나, 어릴 적 부모님 손 잡고 영화관에 가 본 것 외에는 누구랑 같이 영화 본 적이 없는데. 누군가 들었다면 사교 활동이란 걸 정말 1도 안 했냐고 따지고도 남을 발언을 혼자서만 곱씹는 동안 강의가 끝나버렸다. 다만 문제는 이미 일이 벌어진 거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할지는 다음 주부터 좀 생각해 보자, 라고 결심하고 가방을 챙기던 복스에게 아이크가 혹시 이 뒤에 시간 있느냐고 물어본 일이었다.
복스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이 강의 이후 월요일 시간표는 모조리 오후 수업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시간 있어요, 라고 대답한 복스를 아이크는 기꺼이 예의 그 커피숍으로 데리고 갔다. 서로의 일정을 상의해 보고 과제를 수행할 스케줄을 잡자는 것이 이유였다. 딱히 발표를 하는 게 아니고 리포트도 각자 제출하지만, 같은 영화를 봐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다. 마침 수업은 월요일이다. 남은 화~일의 시간 동안 영화를 보는 날을 잡아서 같이 영화를 보고 리포트를 준비하자는 게 아이크의 주장이었다. 지극히 타당한 주장임에도 복스가 괜히 미안해졌던 것은, 자신은 정말 아무 날이라도 상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수업 끝나면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영화밖에 안 보는 걸 뭐… 물론 그런 사교성 제로의 발언을 아이크 앞에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커피숍에 들어와 마주보고 앉은 상태에서 아이크는 자신의 시간표를 기꺼이 복스에게 보여주었다. 성실한 인상대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꽤 빼곡한 시간표가 들어차 있었다. 물론 몇 바퀴 돌리는 것만으로 시간이 돌아가 동시에 여러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편리한 모래시계 목걸이가 없는 만큼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알차게 끼워넣은, 그야말로 정석적인 대학생의 시간표다. 영화를 보려면 나름의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웬만한 수업은 다 낮 시간대에 몰아넣고 저녁 시간을 알차게 비워 둔 복스의 시간표와는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음… 시간표를 고려했을 때 목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저녁이 제일 적당할 거 같은데, 어때요? 주말에 저는 동아리 활동이 있거든요.”
“아… 네,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만약 복스 아쿠마가 조금 더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무슨 동아리 활동을 하는지 물어봤다면 앞으로의 전개는 꽤나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와’ ‘영화를 보기 위해’ ‘약속을 잡는다’ 란 행위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복스가 초지일관 소심하게 나오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까지 발전하지 못했고, 더불어 아이크에게 괜한 배려를 끼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 금요일 저녁엔 과 행사나 모임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목요일 저녁이 좋겠네요. 일단 이걸 기본으로 잡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월요일에 강의 끝나고 다시 조율하기로 해요.”
“넵, 그걸로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갑작스레 미안하지만, 말 놓지 않을래? 한 학기 내내 같은 조로 활동할 텐데, 존댓말은 오히려 불편하잖아.”
이 세상에 썸타기의 신이 있다면 이 대목에서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아이크가 조심스레 꺼낸 제안에 복스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예엡?! 하고 되묻는 코미디의 한 장면이 지나가기는 했을지언정, 이전 아이크의 연락처를 반 강제로 받게 되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아이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몸을 굽히고 으응, 하고 대답하는 복스를 앞에 두고서도 아이크는 성모처럼 미소지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복스. 아, 나도 편하게 아이크라고 불러.”
생긋 웃으며 테이블 위 놓인 두 개의 머그컵을 가로질러 아이크가 손을 뻗었다. 여전히 작고 고운 손이라 차마 마주잡기 황송해지기까지 하는 기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손을 향해 제 손을 뻗는 데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곧 마주 잡고 악수를 나누자 아이크는, 너 꽤 손이 크다, 라며 귀엽게 웃었다.
아이크 이브랜드와 함께하는 한 학기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보게 되지만, 앞으로도 질릴 일이 없을 미소였다.
정말이지 너드남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투비컨티뉴인 것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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