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온] 고백

캐치프레이즈 인용 : 파리둔은 아스타리온을 사랑한다. 그것 하나만큼은 거짓 없는 그의 온전한 의지였다.

* 여기에서 ‘그’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로 쓰였음을 밝힙니다.

** 하야님과의 연성교환으로 쓴 글입니다.

고백


있잖아, 나는 버그에서 태어난 존재야. 이 세상은 사실 비디오 게임이고, 너랑 나는 전부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지.

파리둔은 아스타리온을 껴안은 채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홀로 붕 떠 있는 느낌. 세상에서 오로지 그만이 이토록 다른 존재다. 그러나, 파리둔은 명백히 이 세상의 일원이었다. 메모리를 잡아먹고 섹터 위에 걸터앉아…—음,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말자.— 아무튼, 그 또한 살아 숨쉬는 전자 생명체(그러나 오류가 있는)인 것이다. 물론 존재에 오류가—아니, 근데 이걸 오류라고 불러야 돼? 내가 프로세스라도 죽였어? 아니잖아. 그러니까 워닝 정도로 타협하자고. 어때?— 좀 있다 해도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그를 보라. 제법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잠깐! 그에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모른다. 당신은 왜 당신이 당신으로 태어났는지 아는가?—와, 방금 라임 좀 쩔었다. 뭐? 아니라고? 인정하지 그래? 웃었잖아, 솔직히.—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파리둔은 상자를 벗어나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고로, 상자 바깥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파리둔은 그 사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알고 있는가? 아이템 코드에 교묘하게 손을 대면 이것저것—야, 그거 알아? 에텔 이모네 집 근처에 깨진 공간이 있거든. 거기 손 넣고 뒤적거리면 멀쩡한 사과 나온다?—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뭐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텔 이모네 집 근처에서 멀쩡한 사과가 나온다는 것은 그가 곡괭이질—이거 무슨 얘긴지 알지?—을 좀 한 끝에 알아낸 사실이었고, 파리둔에게 그 이상 데이터를 캐낼 마음은 없었다. 왜 없어졌냐고? 간단하다.

파리둔은 아스타리온을 사랑하니까. 그것 하나만큼은 거짓 없는 그의 온전한 의지였으니까.

그래. 그는 예쁘장한 뱀파이어 스폰을, 아니, 세월이 가져온 고통에 닳고 부서져 버린 아스타리온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가 존재하는 이 세상마저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더는 세상에 손대고 싶지 않게—아, 그런데 ‘포도주’를 ‘이스뱅크’로 바꾸는 정도는 할 거야. ‘포도주’가 얼마나 맛없는지 알아?—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듯 태어나 존재하게 된 세상이라 해도, 그 안에 속한 채로 살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파리둔은 그 동안 모아 둔 금붙이며 보석을 주섬주섬 모아서 다몬을 찾아갔다. 그의 전공이 무기라는 건 잘 알고 있으나 달리 찾아갈 만한 곳이 없었으니까. 파리둔은 그답지 않게도 쭈뼛거리며 대장간의 문을 두드렸다.


파리둔과 아스타리온은 옛 자르 저택의 다락방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상부 도시가 완전히 작살난 지금은 그들이 서 있는 이 성채가 발더스 게이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아무 것도 없는 이 새카만 하늘 아래, 오직 달과 별과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그래서, 무슨 얘길 하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주고 싶은 것도 있고.”

파리둔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아스타리온을 향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벨벳을 곱게 두른 상자 안에는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파리둔의 거친 손에 조그마한 화상과 멍 자국이 새로 생겨났음을 알아차렸다.

“자기가 밤마다 어디로 사라지나 했더니, 이걸 만든다고 그랬던 거구나.”

“어때? 나 제법 힘냈어. 마음에 들어?”

“그래, 마음에 들어. …정말 좋아.”

파리둔은 아스타리온의 약지에 조심스레 반지를 끼웠다. 반지는 연인의 손에 딱 맞았다.

“아, 참. 제안하고 싶은 건 말이지, 여기에 불을 질러 버리자는 거야.”

파리둔은 턱짓으로 자르 성채를 가리켰다. 갑자기 튀어나온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아스타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뭐?”

“이거 남겨둬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그러니까 스트레스도 풀 겸 싹 태워버리자는 거지.”

“그거 진짜 정신나간 생각이네. …당장 하자.”

“그럴 줄 알았어. 사실 내가 미리 기름 싹 뿌려 뒀거든. 잘 했지?”

“그래. 잘 했어, 달링.”

알고 있는가? 연금술사의 불꽃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우면 최대 4개까지 들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손바닥 위에도 하나를 더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단단히 쥐여 있다 해방된 스무 병의 혼돈이 자르 성 곳곳에 신나게 충돌한다. 새카만 도화선을 따라 화염이 질주한다. 카자도르의 성이 화려하게 불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불꽃이 잘 보이는 건너편 지붕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긴 채 작은 장난의 결과를 구경했다.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 소방대의 출동을 알리는 종소리…. 제 손으로 만들어낸 혼란 속에서 아스타리온이 신나게 웃어젖혔다.

이제 그를 속박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아스타리온의 눈빛에서, 표정에서, 몸짓 하나하나에서 해방감이 넘쳐흐르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파리둔은 그런 아스타리온을 보며 씩 웃었다. 친절한 행동을 통해 희망의 빛을 밝힐 것. 완벽하게 맹세에 들어맞는 행동이 아닌가.

“사랑해, 아스타리온.”

파리둔은 연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파리둔.”

달빛 속에서 아스타리온이 그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두 사람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인다. 끝내주게 화려하고 끝내주게 성공적인 고백이었다.

파리둔은 아스타리온을 사랑하고, 아스타리온은 파리둔을 사랑한다. 이것은 세상이 뒤집히고 소수의 규칙이 밝혀진대도 변하지 않을 진실. 그러니… 속으로 삼켜 버렸던 다른 고백도, 털어놓을 수 있게 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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