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
아무리 미천해도 사랑만이 나를 살게 하기에
낯선 품에 안겨 체사레 에스포지토는 사랑을 떠올린다.
사랑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히도 미켈레의 사랑이다. 한때 자신을 기꺼워하는 품과 다정한 눈빛, 묵묵한 배려를 가진 한 사람에게 모든 삶을 다 바치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건성으로 지은 가명에 불과했던 미켈레는 어느새 에밀을 향한 사랑으로 다시 정의되었고, 그땐 사랑이야말로 미켈레의 모든 것이었다.
체사레는 미켈레가 아니다. 미켈레의 사랑은 체사레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여전히 그의 모든 것이다. 체사레는 세상의 모든 나약함을 사랑한다. 어떤 신념은 욕망을 기반으로 하며, 또 어떤 신념은 줏대에서 비롯되지만, 체사레의 신념의 근간은 그 어처구니없는 사랑이었다. 완전한 신념, 무결한 신념을 으레 동경하고 소원하거나 질투하지만 글쎄, 단 한 가지를 절대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아니, 그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신념을 가질 자격을 갖춘다. 간절하거나 무모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설 수 없다.
체사레는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버린 사람이다. 체사레가 되기 위해 미켈레의 껍질을 버렸고, 애먼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에밀을 버렸다. 그에게 사랑은 한없이 간절하고 무모해서 작은 심장 안에 두 개의 사랑을 넣을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몰라서. 나의 사람들,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선량한 그 사람들 앞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당신을 버릴 수 있다. 어쩌면 우스운 일이다.
이렇게 눈을 감고,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될 텐데. 그러면 루는 기꺼이 오래도록 체사레를 사랑하고,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그를 하염없이 기쁘게 할 텐데. 희고 순결한 꽃잎처럼 떨어지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의 세례가 영원토록 그를 애탄으로부터 지켜줄 텐데.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과 달싹이는 틈새로 엿보이는 혀와 입천장, 고르게 나열된 이에 시선을 보내면서도 체사레는 오늘의 키스가 그렇게나 실수였다고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이제 갓 나는 법을 배운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만져 보는 사랑의 형체를 더듬어 서툰 마음을 내미는 남자. 어쩔 줄 모르겠다며 서성대면서도 의연한 듯 고백하고 맹목적으로 껴안았다가도 고집을 꺾지 않는 일련의 행태를 그가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체사레는 뻔한 감정을 어리석게 부정하지 않았다. 미켈레가 끝까지 에밀을 사랑한 것처럼, 체사레도 이 순간 루를 사랑한다.
마주 껴안고 싶다. 다시 입 맞추고 싶다.
…… 사랑하고 싶다.
질고를 겪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참으로 길고 허무한 짝사랑이다. 안타깝게 여겨 성에 받아준 메이드가 끝내 잔에 독을 타듯이, 체사레의 애정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지거나 배신당하기 일쑤다. 앞으로도 그들로부터 이 연민과 애정을 돌려받을 일은 없다고, 체사레는 직감하고 있다. 삶을 한 조각씩 잘라 나눠준 다음 헌신짝처럼 바닥에 내팽개쳐진 삶을 다시 주우려 눈먼 소년처럼 길거리를 헤집고 다니는 것이 체사레가 선택했거나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뿐인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신의 행복을 좇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가 건넨 삶을 더욱 쉽게 조각내서 땅에 버릴까봐, 이 땅에 단 하나의 불빛도 밝히지 못할까봐 함부로 재단하는 시선 속에 그는 자신을 칭칭 묶는다.
우습다. 이렇게 눈을 감고,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당신은 내 마음을 귀한 보석처럼 소중히 가슴에 박아 간직할 텐데. 당신을 어루만질 때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그 보석이 새끼 손가락에 걸려서 씁쓸하게 웃으면, 알지도 못한 채 부드러운 온기로 나를 감싸올 텐데. 끝이 없는 안락함으로 이루어진 천국에 도착한 것처럼 날개를 접고 환희에 취해 여생을 악기처럼 연주하며 살다 죽을 텐데.
익숙한 품에 안겨 체사레 에스포지토는 명예에 관해 생각한다. 못 이기는 척 불완전한 사랑 두 개를 한 심장에 담고 살아볼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체사레의 신념에는 명예가 묶여 있다. 사랑하면서는 사랑할 수 없다며 삶에서 내보낸, 에밀의 명예. 그런 모습으로는 사랑할 자격 없다며 과거로 떠나보낸, 미켈레의 명예. 그리고 이러한 신념에 목을 매고 살아가기로 결정한 체사레의 명예. 아무런 근거도 없이 루 아난케를 사랑하는 삶을 선택한다면, 특정한 개인에 대한 애정이 다른 개인적인 애정을 덮고, 어떤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른 자아를 덮어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체사레는 끝까지 가야만 한다.
“당신이 상처받는 게 싫어……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냉혹할 수도 매몰찰 수도 없겠지만.”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불에 덴 듯 뜨겁다. 타다 만 장작처럼 성대를 타고 오른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져 있다.
“그러지 마…….”
사랑하지 마.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일그러진 표정을 그림자 속에 감추며 미약한 손길로 체사레는 루의 어깨를 밀어낸다. 갓 태어난 새의 날개를 꺾지는 못하고 그저 날아가지 마, 애원하는 것처럼. 날아오를 것을 알면서. 이 사람에게 순전히 사랑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알면서. 그 사랑의 대상이, 부던히 조용하던 알을 깨고 새를 꺼내 손 위에 올려 놓은 자신일 수밖에 없는 것도…… 알면서.
터지기 직전인 심장을 부여잡는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데 무엇도 포기할 수 없어 그저 미천해진다. 피 대신 못다한 애정이 발 밑에 고인다.
“제발, 내 말 들어줘…….”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사람.
체사레는 언제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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