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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허상

오피셜 대죄식자 AU

S by 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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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지 마. 난 진심이야.

…….

내 영웅은 너뿐이야.

 

*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쐐기에 카엘이 질겁하며 몸을 틀었다. 춤을 추듯 빙그르르 돌며 귓가에 울리는 소리에 집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서쪽 오십 미터에 하나. 북쪽 십삼 미터. 공격 태세에 들어간 건 북서쪽 육 미터. 날아다니는 적을 노려보며 방아쇠를 당긴다.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지는 그것을 능숙하게 피하는 걸음엔 망설임이 없다. 주위를 짧게 둘러본 카엘은 이윽고 소리 높여 외쳤다.

“더 쫓지 마! 이 이상은 너무 깊어!”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 나가던 총사령부 병사들이 움칫한다. 차츰 속도를 줄여 멈추는 병사들을 한번 훑어본 카엘의 시선은 이윽고 바닥으로 향했다.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사체를 신코로 툭툭 밀친다. 움직임은 없다. 잔뜩 쪼그라든 날개를 유심히 살피던 카엘은 이내 깊이 한숨을 쉬었다.

“저, 영웅님.”

“왜? 부상자가 많아?”

“아, 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요. 그.”

어물거리는 목소리에 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막사에서 저들끼리 둘러앉아 떠드는 걸 몇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정도였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는다. 아마도 거점과의 통신을 맡던 통신병이던가. 카엘의 눈썹이 불쑥 솟았다. 모르는 병사가 스스럼없이 굴 정도였던가. 카엘은 눈치가 기민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았다. 다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지. 이곳에서, 적어도 저 병사에게 자신은 허물없이 사담을 나눌 만큼 친근하지 않다. 제게 말을 건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으리라. 카엘은 손을 털며 병사를 향해 섰다. 왜, 하고 재차 묻자 병사가 머뭇대며 말을 이었다.

“그, 죄송합니다. 방해하려고 한 게 아니라요.”

“괜찮으니까 말해봐. 후퇴해야 해. 너 여기 있다가 다친다.”

걱정 아닌 걱정에 병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 네, 그럼요, 따위의 대답이 간헐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다시금 재촉하려던 찰나에 꿈지럭대던 병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제 낯을 연신 힐끔대는 꼴이 조금 가엾을 정도로 소심해 보였다.

“그, 방금 막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른 영웅님께서 오셨다고 하는데요…….”

“모노가?”

카엘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사정이 있어 모노와는 따로 행동하고 있으나 그들의 관계는 여전했다. 같은 장소에 있다면 인사 한 번쯤은 해줄 수 있지 않나.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좀 서운했다. 하지만 카엘은 빠르게 섭섭함을 밀어낸다. 아니지. 좋은 게 좋은 거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모노는 이래저래 바빴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굴만이라도, 포옹 한 번만이라도 하고 조금만 있다가 가라고 졸라봐야겠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카엘이 물었다.

“어디 있는데? 지금 온대?”

“아, 아뇨.”

병사는 이제 거의 죽어 나자빠지기 직전이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카엘을 연신 훔쳐보던 병사가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게 무슨 죽을병 걸린 사람 같았다. 빨리 말하고 쉬러 가지. 뭘 이리 질질 끈담. 태평하던 생각은, 그러나, 병사가 울상으로 이은 말에 단숨에 날아갔다.

“연구 시료가 필요하시다면서 혼자 태내에 들어가셨다고 해서요…….”

“뭐?”

“영웅님이, 그러니까, 카엘님은 전투 막 끝냈을 거니까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그런데 거점 측에선 혹시 모르니까 연락했다고…….”

카엘은 이어진 제 행동을 정확하게 설명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만 귓가를 가득 메운 채였다.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언약 반지에 입을 맞췄다. 어어, 하는 통신병의 당황한 탄식을 끝으로 아찔한 부유감이 찾아든다. 좌표를 계산하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시야가 일렁이다 뒤집힐 때. 카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낯선 빛이 한가득 쏟아졌다. 기다렸다는 듯 욱신거리는 눈을 성마르게 문지르며 카엘이 한 걸음 내디뎠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빛살에 눈이 시려 시야가 흐렸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내뱉지 못한 부름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만일 정말로 이곳이 태내라면 큰소리는 내지 않는 편이 좋다. 제대로 맞지 않는 초점을 도로 잡으려 몇 번이고 얼굴을 흔들 때였다.

누군가의 손이 눈가에 닿는다. 손을 감싼 장식에 달린 보석들이 잘게 부딪히며 조용한 소음을 냈다. 시리던 시야를 어둡게 감싸는 손길에 카엘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닫자 어둡게 번지는 세상 그 너머에서 따스한 에테르가 눈을 조심스레 감쌌다.

“눈 떠도 돼.”

숨죽인 목소리에 카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뿌옇던 시야가 장막을 걷어낸 것처럼 깔끔하게 변한 채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초점도 쉽게 잡혔다. 괜찮냐고 물어오는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상대를 가득 끌어안았다.

“카엘.”

“혼자 행동하지 말라고 했잖아. 위험하다고.”

상대, 모노는 짧은 침묵 끝에 말했다. “미안. 급한 일이어서.”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카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노의 차림을 보아하니 정말 급한 건은 맞는 듯했다. 전투복 대신 알라미고 가운을 대강 걸친 차림이 영 눈에 밟혔다. 완전 일상복이잖아. 영락없이 스태프만 쥐고 뛰쳐나온 모양새였다. 하다못해 안대도 없었다. 제 차림을 낱낱이 뜯어 살피는 카엘을 느낀 듯 모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모노, 하고 부르자 사과는 곧장 나왔다.

“이것도 미안. ……진짜 급한 일이어서.”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카엘은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일에 꽂히면 그것만 주야장천 파고 들어가는 모노의 버릇을 모르는 건 아니다. 사실 카엘만큼이나 그 버릇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특유의 몰입이 전투할 때도 어김없는 영향을 미치는 탓에 안대를 고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번 사태에서도 모노를 전투 인원이 아닌 연구자로 계산한 것에도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고팠던 마음이 조금쯤 섞여 있었다. 카엘은 모노가 죄식자들을 상대로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 잘 알았다.

결정을 조심스럽게 권유했을 때. 모노는 의외로 담담히 수긍했다. 너는 전선에서, 나는 연구실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는 거지. 내가 거부할 이유는 없어, 하고 말하는 평온한 목소리에 카엘은 되레 조금 불안해졌다. 정말 괜찮은 거냐고 거듭 묻고 나서야 조금쯤 안심했다. 모노는 너의 불안을 이해한다는 듯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랬기에 카엘은 모노의 답을 믿었다.

여태껏 큰 사고는 없었다. 모노는 종종 시료와 증거물이 필요하다며 카엘과 새벽을 닦달했으나 그뿐이었다. 전선에 직접 뛰어들기에는 모노가 짊어진 짐이 컸다. 전선은 예측하기 어려운 급류처럼 잠잠하고 거칠기를 반복했으나 모노가 지내는 올드 샬레이안 대학 특설 연구부실은 항상 혼란의 도가니였다. 수많은 가설과 제안들이 기포처럼 솟았다가 터지기를 거듭하는 곳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노를 보며 아주 잠깐 결정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카엘은 슬슬 궁금해졌다. 어떤 급한 일이기에 연구부실에 붙잡혀 얼굴조차 드문드문 비추던 모노가 자리를 박차고 태내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전선이나 다름없는 숲의 경계선과는 달리 태내는 더욱 깊고 은밀한 곳이었다. 농도 짙은 에테르로 인해 밖에서의 탐색은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카엘에게조차 단신으로 이곳을 들락거리는 영 꺼림칙한 일이었다. 이 모든 사태가 터졌을 때부터 지지부진한 전쟁이 이어지는 지금까지, 태내는 유일무이한 미지로 남아 있었다.

제 낯을 슬그머니 살피는 듯한 모노에 카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뭘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하자 모노의 표정은 곧장 오묘해졌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가늘게 좁힌다. 나직이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직전까지 보였던 걱정스러움과 염려의 빛은 말끔히 사라진 채다. 그 빈자리를 묵직하고 날카로운 연구자의 면모가 메웠다. 제 머리칼을 정리하며 모노가 진중하게 대답했다.

“석 달 전 이 숲에서 갑작스럽게 죄식자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지. 처음엔 한두 개체에 불과했지만 빠르게 모습을 불렸고, 지금은 우리가 1세계에 있었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카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첫 목격담 이후 일곱 시간 만에 새벽은 숲을 찾았다. 그리고 빛의 고치에서 태어나는 죄식자를 목격했다. 단순한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다. 빛의 범람으로 인해 태어난 1세계의 괴물이 원초 세계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태내는 이 모든 사태가 초래된 직후에 나타났어. 관측은 초기에도 가능했지. 어렴풋했지만. 빛 에테르에 잠식되어 가는 숲에서도 유달리 농도가 짙은 곳이었고…… 관측계에서도 그저 하얗게 보일 뿐이라 그 내부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모노가 스태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눈을 내리깐 채 무어라 중얼거리던 모노가 고개를 들었다. 고심과 신중함과 미비한 흥분 따위가 어지럽게 뒤섞인 눈이 카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태내에서 강한 파형이 관측됐어.” 잠시 숨을 고른 모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흰 빛살에 얼굴이 창백하게만 보였다. “관측계는 상대적인 에테르의 농도를 계산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계야. 주위 환경에 따라 값이 쉽게 달라지지. 물론 실제 농도를 어림하는 기능도 있지만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측정하고자 하는 범위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게 무슨 뜻이냐면, 카엘.”

모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목소리를 내리깐 그가 중얼거리듯 말을 마쳤다.

“농도가 짙어서 제대로 살필 수 없었던 태내의 에테르조차 우습게 할 만큼 거대하게 응축된 에테르가 태내에 나타났다는 거야.”

카엘은 잠시 입을 다문다.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카엘 또한 모노와 함께 1세계에서의 난관을 헤쳐 나간 어둠의 전사이자 영웅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카엘은 곧장 좌절하지 않는다. 느리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었다. 유백색 장막을 펼쳐놓은 듯 울렁이는 빛의 심연. 호흡 한 줌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 문득 숨이 턱 막혔다.

“……대죄식자?”

“그럴 가능성이 크지.” 카엘의 중얼거림에 모노가 답했다. 이어진 말은 조금 음울하게까지 들렸다. “우리가 이전에 상대해 온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거야. 말 그대로 별이나 다름없을지도 몰라.”

카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쁘게 뛰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혔다.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온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으며 카엘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모노를 봤다. 익숙한 긴장이 몸짓 하나하나에 묻어난다. 그러나 그건 사태의 심각성에 지레 움츠러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잔뼈 굵은 용병들이 종종 보이는, 전장을 구르고 생과 사를 넘어가며 자연히 체득한 본능적인 경계와 닮아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힌다. 모노가 고개를 기울인다. 왜, 하는 물음이 날아오는 순간 카엘은 깨달았다.

모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눈동자에 깃들어 흔들리는 광기 어린 빛은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그걸 알면서 혼자 왔어?”

참을 수 없어진 카엘이 입을 열었다. 날것의 감정이 목구멍에서 툭 튀어나왔다. 서운함과 속상함과 그 모두를 아우르는 공포까지 적나라하게만 느껴졌다. 평온하던 모노의 표정에 금이 갔다. 눈을 찡그리는 모노를 보며 카엘은 망울진 숨을 토해냈다.

“모노. 네가 위험한 건 싫어.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나한테 말 한 번 해줬으면 됐잖아. 아니면 차라리 언약 텔레포트를 사용하던지.”

“카엘.”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위험하다고. 우리가 이전까지 상대했던 대죄식자들과는 다를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제대로 채비도 하지 않고 혼자서…….”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새하얀 하늘에서 새하얀 것이 침묵과 함께 떨어진 탓이다. 모노가 홀린 듯이 손을 뻗는다. 빛을 낚아챈다. 주먹을 펼치고 나서야 깃털임을 알았다.

모든 것이 느리게만 보였다.

손바닥에 놓였던 깃털이 북풍에 몸을 싣는다. 숲속으로 훅 날아가 사라진다. 모노가 고개를 든다. 눈을 크게 뜬 채다. 얇은 입술이 잘게 떨린다. 벌어진 입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나온다. 카, 엘……. 솜털이 비쭉 선다. 등에 진 연발 권총을 향해 손을 뻗는다. 조, 심……. 숨이 끓는다. 근육에 힘이 들어가 팽팽해진다.

이 감각을 익히 안다.

새하얗고 거대한 돌풍이 모노를 단숨에 낚아챌 때. 카엘은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긴다. 바람을 찢는 발포음과 함께 덩어리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멀지 않은 곳에 처박힌다. 다음 드릴을 장착하는 매끄러운 손길을 모노의 외침이 가로막았다.

“카엘! 위!”

고개를 치켜든다. 쨍한 빛에 눈이 시리다. 일그러진 시야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나 카엘은 안다. 무언가가 그를 노리고 있다. 이곳은 곧 공격으로 뒤덮일 것이다. 안전지대를 찾아야 한다. 안전한 곳으로 가야. 모노를 구해야. 생각과 생각이 수 초에 연달아 겹친다. 균형 잡힌 근육에 터질 듯한 힘이 들어간다. 무기를 꼬나쥐고 몸을 숙인다. 저 멀리 덩어리가 육중한 몸을 뒤튼다. 카엘은 확신한다. 모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엘을 불렀다.

땅을 짓쳐 달린다. 걸음을 떼는 순간 대지가 크게 울렁인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섬광에 파이고 쓰러지고 뒤집힌다. 이를 악문다. 몸을 튼다. 섬광을 피한다. 물성을 가진 빛인 줄 알았거늘 창의 형태임을 뒤늦게 확인한다. 어쩐지 익숙하다. 그래서 이상하다.

다음 순간 카엘은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몸을 맡겼다. 아찔한 인력에 눈을 감았다 뜨면. 카엘은 자신을 힘껏 끌어안은 모노를 느낀다. 숨이 거셌다. 귀에 맞닿은 가슴 너머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휴식은 짧았다. 호흡을 고르며 튕기듯 일어났다. 무기를 단단히 붙잡고 사위를 훑는다. 착시 현상 같은 공격이었으나 땅에는 확실한 흔적을 남겼다. 한 대라도 맞았다간 중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선 구역만이 온전했다. 스태프를 움켜쥔 모노의 숨죽인 영창에 내심 안도하며 카엘이 깊이 심호흡했다. 목표물은 명확하다. 적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얀 덩어리였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욱신대는 오른눈 탓에 상대를 제대로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각적 정보가 차단되자 알 수 있는 건 단순해졌다.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거친 사부작거림. 아마도 하체를 뒤덮은 깃털들이 부딪히는 소음일 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잘그락거림. 장신구를 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순풍과 함께 불어오는 마른 볕 냄새. 축축하게 젖은 땅. 요람처럼 덩어리를 감싼 찬란한 헤일로와 손에 쥔 거대한 창…….

“대죄식자야.”

모노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카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다. 모노를 본다. 숨죽인 영창을 끊고 우두커니 선 모노는 대죄식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풀린 시선이 그 육중한 윤곽을 타고 떨어지고 솟는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신음에 카엘은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대체 무얼 보고 있기에. 내 반쪽짜리 눈엔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대체 무엇이기에.

너는 저 대죄식자에서 무엇을 보기에 그토록 간절한 표정을 짓지.

이름 모를 죄인이 고개를 든다. 그렇게 그들을 응시한다. 모노는 전투태세에 들어가지 않으며 죄식자 또한 움직임이 굼뜨다. 카엘은 어쩐지 모노와 대죄식자가 서로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건 분명하고도 찝찝한 불유쾌함을 입안 한가득 남겼다.

“모노.”

카엘의 부름에 모노는 뒤늦게 응한다. 느리게 고개를 꺾었다. 여즉 풀려 있던 초점은 한 박자 늦게 또렷해진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모노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알라미고 가운의 술이 떨린다. 카엘은 손을 뻗으려다가 주먹을 움킨다. 모노는 명백히 떨고 있다. 그러나 지금 카엘로서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대신 카엘은 대죄식자를 응시하기로 한다. 반쪽짜리 눈으로 모노가 보았던 것을 찾아내고자 시선을 좁힌다. 집중한다. 욱신거리는 눈알을 끄집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 들불처럼 인 건 그맘때쯤이었다. 분노와 비슷한 형태로 타오르는 불꽃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같은 것을 보았을 때 모노의 반응을 영원한 몰이해로 남기고 싶지 않다. 제가 알지 못하는 두려움과 떨림을 남겨두고 싶지 않다. 그건 너무 외로우니까.

덩어리가 고개를 꺾는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다.

카엘은 그 순간 깨닫는다. 죄인은 울고 있었다.

깨달음보다도 한 걸음 빠르게 대죄식자가 움직였다. 거친 돌풍이 부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리자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공격의 전조일까 하는 마음에 몸을 굳히나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감각을 벼려도 돌아오는 건 한 줄의 확신뿐이었다. 대죄식자가 도망쳤다.

침묵이 빛의 입자처럼 흩어진다. 카엘은 무기를 도로 집어넣으며 모노를 향해 섰다. 여전히 조금 몽롱한 낯이었다. 대죄식자가 서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사리 문 입술에 피를 볼까 걱정스러웠다. 손을 뻗는다. 엄지로 아랫입술과 턱을 살살 문지르자 힘이 풀렸다. 깨물었던 입술을 놓으며 모노가 슬그머니 시선을 옮긴다. 카엘을 본다. 그러더니 곧 낯선 표정을 지었다.

“미안.” 얼굴을 일그러트린 모노가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여간 복잡한 낯이었다. 땅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카엘을 힐끔거리더니 한숨과 함께 말을 잇는다. “내가……. 아니, 그냥 미안해.”

“알면 됐어.”

더 캐묻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기실 누구보다도 절실했다. 하지만 카엘은 안다. 모노가 저토록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는 건 제 안에서도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모노에게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그를 다그치는 건 싸움의 불씨를 키우는 것과 진배없다. 카엘은 모노를 믿었다. 가설에 대답을 얻거든 제게 말하리라. 그때 가서 궁금한 걸 물어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모노가 확실한 답을 찾을 때까지 곁을 지키는 건, 언제나 그랬듯 제 몫이다. 숨을 가볍게 골랐다. 모노의 뺨을 대강 문지르자 그가 눈을 감고 기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퍽 피로해 보였다. 대죄식자를 마주했으니 이만 돌아가자고 막 입을 열 참이었다.

카엘과 모노는 동시에 한 곳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시선이 좁아진다. 인기척을 느꼈다. 태내에 들어올 만큼 간 큰 인간이 저들 둘 말고 또 있을 리 만무했다. 모노의 뺨을 만지던 손이 황급히 내려가 그의 어깨를 쥔다. 한 걸음 내디디며 자연스럽게 모노를 뒤에 숨겼다. 적일까? 아군일 리는 없을 텐데? 하지만 인기척을 너무 대놓고 드러내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습격 방법은 누가 보아도 기습이다. 카엘과 모노는 직전까지 경계를 반쯤 놓고 있었다.

수풀이 다시 흔들렸다. 카엘의 손이 느리게 연발 권총으로 향한다. 뒤에서 잘그럭거리는 소음이 낮게 울렸다. 모노 또한 느리게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다시금 사부작거린다. 이윽고 수풀을 헤치고 무언가가, 아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사람이었다. 낡고 헤진 검정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방랑자였다. 행색은 남루했으나 등 뒤에 짊어진 거대한 대검이 그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했다. 꼿꼿하게 선 자세와 후드를 누르는 손끝에서조차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상당한 실력자다. 그리고 카엘의 기준에서 실력자라는 건 즉, 어지간한 사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뜻이다. 그게 설령 훈련받은 병사든, 죄식자든, 절망이든.

상대를 향한 가늠이 끝나자 남는 건 물음표였다. 그렇다면 저만 한 실력자가 이제껏 어디에 있었는가? 어째서 한 번도 들어보질 못했을까? 아니, 사실, 이 모든 의문을 차치하고서라도. 저 모험가는 어째서 태내에 있는가? 진입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총사령부의 정예 일원들이 보초를 서고 있을 텐데도.

방해를 뚫고 태내에 들어갈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를 지그시 관찰한다. 카엘은 제 뒤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공격을 대비하는 모노의 영창임을 안다. 숨죽인 속삭임에 맞추어 들숨, 날숨, 다시 들숨, 날숨. 호흡을 맞춘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와도 곧장 대응할 수 있게끔.

검은 사람이 느리게 고개를 든다. 이어지는 건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었다.

“……카엘?”

그리고 다음 순간. 카엘은 멍청하게 대꾸했다.

“모노?”

 

*

 

처음 원초 세계에 죄식자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라하는 자신이 느꼈던 아득한 절망감을 감히 언어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백여 년간 수정공으로 살아왔던 그라하 티아에게, 원초 세계에 나타났다는 죄식자는 어떠한 좌절의 기표나 다름없었다. 의문과 두려움과 막막함과 미약한 희망을 겹겹이 두른 채 그라하는 힘껏 뛰어다녔다.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모노를 도와 연구에 집중했다. 그러고도 견디기 힘든 날에는 야슈톨라나 산크레드를 붙들고 어렵사리 고민을 꺼내놓곤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시간만은 쏜살같았다. 석 달이 지났을 무렵. 그라하 티아는 더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으나 여전히 근심이 많은 연구자로서 특설 연구부실에 처박혀 있었다. 연구부실에서 가장 많은 가설과 가장 많은 실패와 그런데도 가장 가능성 있는 예시를 제시한 그라하였기에, 계측기를 검토하다 돌연 사라진 모노가 가져온 소식에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라하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눈을 깜빡였다. 카엘과 모노와 낯선 남자는 일렬로 주르륵 서 그라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라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크리스탈 타워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일단은.”

모노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다소 복잡한 표정이었다. 연신 카엘을 힐끔대는 게 꼭 둘이 싸웠던 날처럼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장난이라도 칠 법한데. 카엘은 팔짱을 낀 채 눈길 한 번 던지지 않는다. 얘네 진짜 싸웠나. 심각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스운 생각에 잠깐 빠질 뻔한 그라하는 잽싸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원초 세계의 에테르가 정상적인데 죄식자가 나타났다는 건…… 크리스탈 타워의 영향이 맞을지도 몰라.” 그라하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누가 침입했다면 내게 경고가 왔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 설치해 둔 결계도 있는걸. 하지만 여태껏 크리스탈 타워는 완전히 정상이었어. 특이점은 느끼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밖에서 침입한 게 아니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여태 입을 다물고 있었던 남자였다. 낡은 로브를 깊이 눌러 쓴 탓에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라하는 설명을 요구하기 위해 모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모노는 입을 다문 채 남자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담한 목소리로 남자는 말을 이었다. 침입자는 애초에 없었으니 너도 이변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는 말을 조곤조곤 설명하는 어투가 퍽 자연스러웠다. 그는 마치 이 모든 사건의 개요를 완벽하게 파악한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확신에 차 있었으나 동시에 불유쾌하고 스산한 감정이 목소리 곳곳에 얼룩처럼 끼어 있었다. 우습게도 그라하는 그 순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네 목소리에 낀 곰팡이 같은 얼룩의 정체를 알 것 같다는 게 바로 그 정체였다. 수정공으로 살고자 하는 결심을 갓 내렸을 때. 그 또한 저 비슷한 목소리와 어투로 이야기했으리라는 자각은 희미하게, 그러나 확실히 존재했다.

“이야기는 잘 알겠어. 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게 크리스탈 타워에서 솟구치던 빛이라면, 확실히 조사해 볼 만해. 크리스탈 타워에는 차원 도약 기능이 있으니……. 만일 정말로 크리스탈 타워가 가동했다면 죄식자들이 돌연 나타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이야기를 믿어주어 고맙다는 인사가 작게 뒤따랐다. 그라하는 카엘과 모노를 한번 힐끔 곁눈질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영웅들이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믿음직스러웠다. 지금 그라하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남자는 말이 없었다. 거절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라하는 다시 모노를 훔쳐보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는 크리스탈 타워가 보이는 숲 근처를 거닐다가 섬광을 봤다고 했지.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태내였다고.”

“나는 거기가 태내인 줄 몰랐어.”

“응.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라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저 목소리 구석구석에 묻은 피로감이 무엇인지 밝혀줄 열쇠이기도 했다. 남자의 기색을 면밀히 살피며 그라하가 느리게 물었다.

“너는 원초 세계 사람이 아닌 거지?”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카엘과 모노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카엘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뿐이었다. 남자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느리게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폈다. 무언가를 다짐하듯 호흡을 삼키고 나서야 대답은 돌아왔다.

“내가 아는 세계는 이렇지 않았어.” 생뚱맞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라하는 말을 끊는 대신 기다렸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빛살 같은 우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끼어들 수 없었다. “시종일관 빛뿐이었지. 그래서 세계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천천히 손을 든다. 후드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뒤로 넘긴다. 짙은 머리칼이 드러났다. 그라하는 놀라지 않는다. 다만 입술을 세게 짓씹는다. 용서받았던, 그래서 감히 잊고 있던 죄악감이 파도처럼 그를 덮친다. 고개를 들 수 없음과 동시에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끄트머리가 희게 빛나는 새까만 장발. 버석한 피부와 알지 못하는 흉터들. 투명하리만치 하얗게 빛나는 두 눈을 접어 웃으며 그가 말했다.

“반가워, 그라하 티아.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모노야.”

“그 눈은…….”

신음처럼 중얼거린 말에 ‘모노’가 어깨를 으쓱인다. 미소는 태연자약하며 표정엔 실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은 것처럼. 그라하는 잠시 입을 어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저도 모르게 카엘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희게 부서지곤 하는 그의 오른눈을 반추한다. 그리고 다시, ‘모노’. 빛 번짐 없던 검정과 하양은 빛살을 담은 듯 유백색으로 유려하게 흔들리고. 뺨에는 제가 알던 모노에게서 찾을 수 없던 길쭉한 균열이 나 있고.

그라하는 고개를 떨구며 ‘모노’의 자기소개를 곱씹는다. 반가워, 그라하 티아.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모노야. 상대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한발 먼저 입에 담음으로써 그러니 억지로 신뢰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듯한 그 한 줄.

다정함이나 사려 깊음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짤막한 한 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빛바랜 체념뿐이다. 주먹을 세게 그러쥐며 시선을 든다. 조도 낮은 연구실이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으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직시하는 희뿌연 눈길에 우습게도 그라하 티아는 안도하고 만다. 네 표정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리고 너는 이 생각조차 알 수 없다는 것에 그토록 마음이 놓인다.

“협력을 부탁해.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모노’가 말했다. 덤덤한 목소리였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후드를 깊이 눌러 썼다. 다시금 얼굴을 완전히 가리자 그라하는 그제야 떨리는 숨을 뱉는다. 이윽고 제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이 또한 ‘모노’의 배려일까. 묻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사실에 그라하는 희미한 절망을 맛본다.

그러나 ‘모노’는 그라하의 좌절 따윈 안중에 없다는 듯 태연자약했다. 얼굴을 가린 탓에 표정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반응 또한 쉽사리 추측하기 쉽지 않았다. 협력을 부탁한다고.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즉 ‘모노’는 이 세계를 자신의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굳은 머리를 차츰 돌려 생각을 이어갔다. 자신이 있던 세계, 자신이 일군 1세계는 카엘과 모노 덕에 재앙에서 벗어났다. 모든 대죄식자를 물리쳤으며 어둠을 되찾았다. 죄식자들의 개체 수 또한 급감하는 중이었다. 토벌되는 수만 있을 뿐 새로 태어나는 개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선에서 쏟아지는 죄식자들은 달랐다. 개체는 한도 끝도 없이 많았으며 그건 꼭 백여 년 전의 1세계를 회상하게 했다. 한창 빛이 들끓던 시절. 삶과 죽음이 빛 한 줄기로 갈리던 그때. 희망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기와 닮았다. 제가 아는 1세계에는 이제 이만한 죄식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라하 티아는 수정공 이전의 자신을 떠올린다. 8재해를 막기 위해 도약했던 과거를 생각한다.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힌 세계들을, 원초 세계와 일곱 갈래의 물줄기들을 조합하고 흩뿌리길 거듭한다. ‘모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추론하는 건 어려우면서도 간단한 일이었다.

“도울게.”

그라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말을 뱉고 난 직후 카엘과 모노의 반응을 살피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그라하의 말을 막지 않는다. 다만 ‘모노’와 그라하를 신중하게 살필 뿐이다. 그들의 무심하고도 든든한 방관에 그라하는 미약한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말을 이었다.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하면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도 이 사태를 종식하기 위한 방도를 찾는 중이었으니 이건 우리를 위한 실마리이기도 해. 알려줘서 고마워, 모노. 그리고…….”

그라하는 다음 말을 뱉기 전 잠시 고민한다. ‘모노’가 어떻게 반응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그라하는 하는 수 없이 입꼬리를 올린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아는 그라하 티아를 대신해서 사과할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내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거겠지. 수습도 뜻대로 잘 안된 모양이고.”

잠시 뜸을 들인 그라하는 이내 느리게 말을 마쳤다. “돌아가면 카엘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줄래? 그러니까, 네가 아는 카엘 말이야.”

‘모노’는 반응하지 않는다. 우두커니 서 일정한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그가 마치 나무 인형처럼 느껴졌다. ‘모노’는 이곳에 서 있으나 실존하지 않는 사람처럼, 강렬한 섬광에 잠시 일어나버린 허상처럼, 혹은 뙤약볕에 피어난 아지랑이처럼 그저 가만히 자리를 지킬 뿐이다. 말도, 움직임도, 하다못해 숨소리마저 거칠어지지 않고 일정하게.

한참 후에야 ‘모노’가 입을 연다. 그렇게 말한다. 한 치 티도 없는 매끄러운 목소리는 녹음이라도 된 것처럼 부드럽다. 그래서 더욱 이질감이 컸다.

“너를 원망하지 않아, 그라하 티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한 듯 높낮이 없이 상냥했다. 끼어들 틈을 주지 않은 채 ‘모노’는 여상처럼 말을 마쳤다. “그러니 속죄도 필요 없어.”

단호하게 그이는 선에 그라하는 얌전히 물러나기로 결심한다. ‘모노’가 표한 건 엄연한 거절이며 그라하는 그 금을 섣불리 넘고 싶지 않았다. 일견 매몰차게까지 보이는 반응이나 그라하 티아에겐 놀라우리만치 당연하게 느껴졌다. 제 욕심과 부실한 계획에 영웅들이 휩쓸린 것에 불과했다. ‘모노’와 본 적 없는 그의 ‘카엘’ 또한 같으리라.

‘모노’가 느리게 몸을 틀었다. 이제껏 말 한마디 없이 그들의 담소를 지켜보던 카엘과 모노를 향해서였다. 팔짱을 낀 카엘은 어딘가 심드렁해 보였고 모노는 그 반대였다. 저들끼리 몇 마디를 나누는 듯도 했으나 정확한 목소리가 고막까지 와닿지는 않는다. 익숙한 배척감이나 그라하는 저들이 배타적인 분위기를 의도하지 않았음을 안다. 그렇기에 실망도 서운함도 느끼지 못한다. 그라하는 대신 ‘모노’를 살폈다. 깊게 눌러 쓴 후드 너머로 숨은 유백색 시선이 어떤 궤도를 그리며 연구실을 떠돌고 있을지 상상했다. 그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모노’가 입을 열었다. 직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피로에 절어 탁해진 채였다. 어울리지 않게 걸걸한 목소리로 ‘모노’가 말했다.

“너희도 내 힘이 필요하겠지. 나도 너희가 필요해.”

덤덤한 문장이었다. 모노가 눈을 얼핏 찡그렸다. 무언가 성에 차지 않을 때 모노는 종종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라하로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카엘은 알까?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카엘과 눈이 딱 마주친다. 그는 고개를 내젓곤 어깨만 으쓱였다. 본인도 모르겠다는 뜻이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일련의 흐름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은 채 ‘모노’가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힘을 빌려줄게.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너희가 죄식자 사태를 수습할 수 있도록. 대신 조건이 있어.”

“너무 많은 건 들어주기 힘들어.”

모노가 선수 쳤다. 말끝에서 뾰족한 가시가 느껴졌다. 그라하의 눈에 모노는 상대를 예리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감각을 벼리고 상대방을 주시하는 모노의 눈이 선명하게 빛난다. ‘모노’를 수상하게 여기는 걸까. 그 또한 그라하로서는 알지 못할 일이었다. 극비로 취급되는 연구실에 데려왔기에 ‘모노’를 신뢰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짧게 스치고 사라졌다.

‘모노’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제 말을 끊은 모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을 뿐이었다. 퍽 침착한 태도였다. 그러고 보면 ‘모노’의 차분함은 몸짓에서부터 묻어났지. 제가 아는 모노와는 조금 다른 결의 신중함이었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세 가지 정도야.”

‘모노’가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역시나 제가 알지 못하는 흉터로 뒤덮인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첫째. 나를 애쉬라고 부를 것.” 손가락을 하나 잡은 ‘모노’가 말했다. “내 세계에서 이제 나는 모노가 아닌 애쉬야.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날 그렇게 부르지. 게다가 이 세계에서 모노가 둘이면 곤란하잖아. 이건 널 위한 일이기도 해, 모노.”

이제는 애쉬가 된 ‘모노’가 설명했다. 마지막 이름을 힘주어 부르자 모노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반박은 이어지지 않는다. 모노는 이런 때일수록 머리 회전이 빨랐고 감정을 배제해 생각할 줄 알았다.

“둘째. 태내 안의 대죄식자를 토벌하지 말 것.” 두 번째 손가락을 접으며 애쉬가 말했다. “대죄식자는 일반적인 죄식자와 결이 달라. 그들이 품은 빛은 너무 짙은 나머지 자연으로 흩어지지 못하고 토벌한 자에게 넘어가지. 우리 세계에서도 어찌할 방도를 몰라 방치했던 괴물이야. 너희에게 뚜렷한 해결책이 있지 않는 한, 그를 토벌하지 않았으면 해.”

“방치?”

카엘이 작게 중얼거린 말에 애쉬는 곧장 반응했다. 이제껏 바닥을 향했던 고개가 눈에 띄게 카엘 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을 아끼는 듯하다가 희미하게 웅얼거렸다.

“어쩔 수가 없었어. 적어도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애쉬는 또 한참 뜸을 들였다가 말을 끝마쳤다. “여유도 무엇도 없었으니까.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를 내버려 두는 게 우리의 최선이었어.”

그라하는 그 순간 제 손끝을 찌르르 울리는 강렬한 착각에 휩싸였다. 기묘하고도 불가능한, 어쩌면 조금 우습기까지 한 착각이었다. 토벌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속삭일 때.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애쉬가 절규하는 듯했다는 것이 바로 착각의 정체였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세 번째 손가락을 접을 때. 그라하가 짧게나마 느꼈던 처절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직전과 같은 평온한 목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이건 너희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데.”

셈하던 손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애쉬가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너희, 건강검진은 제때 받고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인 듯 카엘이 낮게 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진지하게 찌푸렸던 얼굴에서 힘이 빠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그라하는 작게 웃었다. 진중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데도 저 질문 하나에 분위기가 풀리는 감각이 퍽 선연했다. 약간의 장난기와 조금의 진심을 담아 그라하가 거들었다.

“그래, 너희도 영웅이라고 건강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돼.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는 게 좋아.”

“라하…….”

“알아서 잘하고 있어.”

모노가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카엘이 옆에서 코웃음 쳤다. 뾰족한 시선이 곧장 날아간다. 왜 웃어, 하고 쏘아붙이는 모노의 뺨은 살짝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카엘과 몇 번 말씨름하던 모노는 이윽고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모노의 생활 습관은 확실히 고칠 점이 많았지. 카엘의 지적은 제법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애쉬가 말했다.

“담배 그만 피워.”

“안 그래도 누구 덕분에 하루 한 개비만 피우거든.”

“단것도 적당히 먹고.”

“……그건 안 돼.”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궁극적으론 나를 위해서기도 하지.” 애쉬가 차분히 말했다. “건강을 좀 챙겨.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중에 후회해도 늦어.”

뜻밖에도 모노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애쉬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다. 찰나의 간극을 그라하가 잽싸게 벌리고 들어섰다.

“자자, 말싸움은 이만하고. 좋은 정보 고마워. 덕분에 막혀 있던 연구에 진척이 좀 생길 것 같아.”

“싸운 적 없거든.”

“모노.”

“넌 누구 편이야?”

“당연히 네 편이지.”

카엘과 모노가 시답잖게 떠드는 소리를 가볍게 넘기며 그라하가 웃는다. 후드를 눌러 쓴 애쉬는 여전히 얼굴도, 낯빛도, 반응 하나 보기도 힘들지만 그라하는 어쩐지 직전보다 그가 조금 풀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짙은 그림자가 진 얼굴에서 언뜻 희미한 미소를 본 듯도 했다.

“다들 피곤할 테니 슬슬 돌아가는 게 어때? 모노, 애쉬가 지낼 만한 곳이 있을까? 마땅찮다면 푸르슈노 씨께 부탁해서 휴게실 중 한 곳을 비우는 방법도 있어.”

“휴게실이라면, 이 대학 안에 있는 곳?”

모노가 대답하기 전 애쉬가 한 발 치고 나왔다. 그라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며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올드 샬레이안 대학의 휴게실은 논문과 강의와 공부로 죽어가는 학부생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논문 심사 기간에는 그곳에서 며칠씩 숙박하는 학부생들이 많았으므로 대학 휴게실치곤 호화로운 편이었다. 그 사실을 전부 설명해도 애쉬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휴게실이 아닌 조금 더 다른 것, 이를테면 여태껏 조용히 있던 카엘에게 쏠린 듯했다.

“휴게실은 괜찮아. 나는 숲으로 돌아갈 거야.”

노골적으로 카엘을 바라보며 애쉬가 말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덧붙였다.

“전선이라는 걸 알아. 너희의 싸움을 도울게. 천막 하나면 돼. 아니, 그조차 없어도 돼. 그냥 전선에서 지내게만 해줘.”

시종일관 무뚝뚝하던 목소리에 희미한 간절함이 깃든다. 그라하는 대답하는 대신 카엘을 응시했다. 눈을 찡그린 카엘이 모노와 애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입을 연 사람은 모노였다.

“그렇게 해.”

“모노.”

“애쉬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도 결국엔 나야, 카엘.” 모노가 카엘을 똑바로 보며 섰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지금 너는 전선에서 혼자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있어. 나는 네가 혼자 싸우다가 다치는 게 두려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꾹꾹 내리누른 듯한 목소리였다. 두렵다는 한마디로 포장한 감정은 파헤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애쉬가 느린 숨을 뱉는다. 모노는 그런 애쉬를 곁눈질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애쉬는 강할 거야. 내가 그렇듯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카엘의 손을 강하게 쥔 모노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돌려 애쉬를 본다. 여전히 말라붙은 고목처럼 우뚝 선 애쉬를 향해 묻는다. 질문보다는 독촉에 가까운 형태의 물음이었다.

“전투 도중에 카엘 하나쯤은 지킬 자신이 있지?”

그 순간 애쉬가 움직인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선 고개를 숙인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여태껏 들은 것과 조금 다른 목소리가, 조금 다른 울림을 가지고 흘러나왔다.

“그러기 위해서 든 대검이야.” 애쉬가 속삭인다. 떨리는 숨을 머금은 채 그가 말을 마쳤다. “내가 널 돕게 해줘, 카엘. 부탁이야.”

그라하는 본다. 짧게 앓은 카엘이 모노를 힐끔거리는 것을. 한숨을 내쉬는 것을. 애쉬가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는 것을. 모노의 재촉을. 그리하여 내리는 카엘의 결정을.

“나랑 천막 나눠 써야 할지도 몰라. 부상자들이 많아서. 그래도 괜찮다면야.”

이윽고 말라비틀어진 잿더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2.

“완전히 지쳤어!”

알리제가 천막을 들어서며 우렁차게 외쳤다. 널찍한 천막 안에 제각기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들에게서 날아드는 애정 어린 타박과 걱정을 일일이 주워섬기며 알리제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천 뭉치를 뭉쳐둔 것에 불과하나 이런 전장에서는 소파라고 불리기에 아깝지 않았다.

천막 가운데에 놓인 난로가 따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간다. 저 구석에선 야슈톨라와 위리앙제가 각기 모서리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들 곁에 쌓아둔 낡은 책더미는 아마도 산크레드가 모노의 부탁을 받아 가져온 것일 테다. 산크레드는 자리를 비운 건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검붉은 러그를 발로 비비적거리며 알리제가 투덜거렸다. 곁에 앉은 알피노가 어색한 손길로 치유술이 필요하면 말해, 하고 말을 걸었으나 곧 알리제의 사나운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알리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좀 더 체계를 되찾아야 한다는 거야. 요즘 전선은 좀 이상해. 아무리 부상자들이 많다지만 싸우는 사람만 싸우고 있고. 다들 열의도 없어 보여.”

“그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안일한 태도가 누군가의 목숨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건 맞죠. 정당한 지적이에요.”

위리앙제와 야슈톨라가 번갈아 말했다. 알리제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쩐지 익숙한 감각이었다.

싸움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다행스러운 건 그들에게 든든한 아군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일까.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졌던 카엘이 돌아왔을 때 소개한 애쉬라는 사람. 항상 후드로 얼굴을 가리는 정체불명의 암흑기사를 떠올리며 알리제가 뒤척였다. 평소에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깊이 쓰고 다니고. 전투 와중에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검은색 투구를 고집하는 탓에 지금껏 애쉬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새벽에서도 손에 꼽혔다.

그런 수상한 자를 어떻게 믿느냐던 여론은 애쉬가 나선 첫 전투를 보고 단숨에 뒤집혔다. 그건 싸움이라기보단 학살이었다. 애쉬는 커다란 대검을 마치 제 몸인 양 휘둘렀다. 몇십 번, 몇백 번도 아니었다. 몇천 번을 내리긋고 가로지르며 자연히 몸에 붙은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유려한 움직임은 마치 정성스레 깎고 다듬은 하나의 춤처럼 보였다.

알리제를 포함한 새벽은 저런 움직임을 익히 알았다. 손짓과 발돋움, 무기를 휘어잡는 방식과 공격이 보이는 것처럼 능숙하게 피하는 예리한 감각. 어떻게 해야 저 경지까지 오를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아득한 경외감.

애쉬는 꼭 영웅들처럼 싸웠다. 믿을 수 없었으나 그게 사실이었다.

“뭐 하는 사람일까?”

알리제가 중얼거렸다. 몸을 다시 뒤척이자 곁자리에 앉았던 알피노가 반응했다.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알리제가 한숨을 내쉰다. 알리제는 애쉬를 상상할 때마다 이유 모를 아찔한 부유감에 휩싸이곤 했다.

“애쉬 말이야. 카엘이 데려온 그 사람.” 알리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나타난 이후로 뭔가 심상치가 않아. 카엘이나 모노도 애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도 해주지 않고……. 카엘과 모노를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애쉬는 너무 수상해.”

“확실히. 영웅이 데려왔다는 이유로 단숨에 믿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위리앙제가 거들었다. 읽고 있던 책을 덮은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찡그렸다. 알리제는 그런 위리앙제의 반응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렇지? 그날 이후로 모노의 연락도 줄었댔어. 안심했다는 거잖아. 우리로도 안 되는 일을 정체 모를 애쉬가 단숨에 해냈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려.”

“카엘과 모노는 그의 실력을 믿는 걸지도 몰라.” 알피노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애쉬의 실력은 영웅들과 견줄 수준이니까. 게다가 애쉬는 카엘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바로 그게 더 수상하다는 거야!”

알리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흠칫하는 제 오빠를 힐끔 바라본 알리제는 곧 열성으로 제 의견을 털어놓았다.

“카엘의 안전에 신경 쓰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모노는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지. 그런 와중에 나타난,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애쉬가 카엘에게 신경을 쏟는다는 이유로 연락이 줄어들 만큼 마음을 놓는다고? 그 투구 아래 무언가 큰 걸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는 건 좋지 못해, 알리제.”

“무턱대고 의심하는 게 아니야! 난 그냥,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는 거야.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고.”

알리제가 투덜거렸다. 알피노와 위리앙제는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으며 야슈톨라는 대화에 큰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데에 열중한 채였다. 알리제의 시선이 야슈톨라에게로 향했다. 주술사 부대와 함께 굳건한 전선의 포탑 중 하나로 활동하는 마녀 야슈톨라는 때때로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관점에서 문제를 관찰하곤 했다. 같은 사물을 볼지언정 색다른 시점이 주는 의식의 환기는 결코 무시할 게 못 된다. 그렇기에 알리제는 야슈톨라의 의견이 궁금했다.

“야슈톨라, 어떻게 생각해?”

직접 이름을 부르자 야슈톨라는 그제야 느리게 반응했다. 흐리게 풀렸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온다. 알리제는 그제야 야슈톨라가 어쩌면 책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지평선 저변에 펼쳐졌을 짙은 빛 에테르라던지. 죄식자들은 에테르로 이루어진 이들이니 에테르안을 지닌 야슈톨라만큼 그들을 손쉽게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야슈톨라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이 뒤따랐다. 확실히. 천막 안이 아닌 바깥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알리제는 제 의문을 되풀이했다. 정체불명의 애쉬와 수상함과 신뢰도에 관한 이야기를 야슈톨라는 신중하고도 흥미롭다는 듯 경청했다.

“일리가 있어요. 그는 확실히 돌연변이 같은 존재죠.”

알리제가 말을 끝마쳤을 때 야슈톨라가 말했다. 짙은 미소가 함께였다. 알리제가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며 그렇지, 하고 외쳤다. 마침내 동의를 얻자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쯤 풀리는 듯했다. 알리제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사랑해 마지않는 영웅들이 혹사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알리제. 이번만큼은 그들을 한번 믿어봐요. 카엘과 모노 말이에요.”

그러나 상기된 감정은 오래 가지 않는다. 야슈톨라가 책을 덮으며 말한 것이다. 동시에 알리제가 눈을 찌푸렸다. 당신도 수상한 걸 인정하지 않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알리제는 천막 안을 성마르게 둘러보며 주먹을 쥐었다. 이들은 마치 카엘과 모노가 겪었던 모든 고생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생판 모르던 사람을 믿고 배신당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듭하며 영웅들은 서서히 마모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걸까? 평화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인정해야 한다. 기실 영웅들을 위한다고 포장했을 뿐 이건 알리제 개인의 불안이었다. 알리제는 평화로운 시간을 맛보았다. 골머리를 앓게 만들던 문제들을 전부 해결하고, 더는 생과 사를 오가지 않아도 되는, 매 순간 나의 숨과 타인의 삶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를 겪었다. 카엘과 모노는 지독히도 행복해 보였으며 알리제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구는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영웅이라고 칭송받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알리제는 이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도 그들이 이전과 같은 형태이기를 바란다. 영웅들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았다. 어떤 사건은 영영 봉합되지 못한 채 남기도 하며 열린 상처는 어느 순간 딱지도 없이 떨어져 나간다. 영웅들은 이미 너무나도 많이 패여 있다. 그들이 움푹한 상처를 더듬다가 이보다도 손상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알리제는 그들을 지키고 싶으며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결심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을 실행에 옮길 힘을 얻었다.

알리제는 이 천막 안에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영웅들이 새벽에 의지하는 만큼 새벽 또한 영웅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죽음과 삶을 넘나들며 별바다까지 함께 헤엄친 동료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답답했다. 애쉬라는 존재는 꼭 1세계에서의 수정공을 떠올리게 했다. 그라하의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알리제는 1세계에서 빛을 품은 채 하루하루 말라가던 영웅들을 기억한다. 카엘이 제 눈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모노가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경계해야만 했다. 카엘과 모노가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라도. 느닷없는 죄식자의 출몰은 알리제로 하여금 1세계에서의 악몽을 반추하게 한다. 알리제는 정말로, 진심으로, 더는 카엘과 모노가 괴로워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지친 표정으로 내쉬는 한숨 소리 따위는 질릴 대로 질렸다.

눈을 질끈 부라린다. 책을 곁자리에 내려놓은 야슈톨라의 눈이 언뜻 흔들렸다. 곁에 선 알피노가 제 어깨를 잡는다. 손길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제가 듣기에도 조금 거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상황으로 봐선 1세계 때와 크게 다를 것 없잖아! 모노는 그때도 수정공을 믿었어. 라하의 잘못이라는 건 아니야. 나는 그저……!”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 거죠. 알아요.”

야슈톨라가 말을 마쳤다. 알리제는 주먹을 지그시 쥐며 숨을 골랐다. 야슈톨라나 위리앙제에게 제 불안을 쏟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제 손등을 덮는 알피노의 손에 크게 심호흡하며 알리제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나는 두려워. 지난번에 카엘은 눈을 잃었어. 이번에도 그들이 무언가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아.”

위리앙제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는 목소리가 다소 침울하게 들렸다. 알리제는 위리앙제를 바라보다가 덧붙인다. 그렇다고 당신 잘못이라는 건 아니라고. 위리앙제는 희미하게 웃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죄책감과 죄악감은 이렇듯 포자처럼 그들의 폐부에 스며 있었다.

“그들이 무언가를 새로이 짊어지게 되는 건 제 쪽에서도 사양이에요.”

야슈톨라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하고 이어지는 말은 뜻밖에도 조금 부드러웠다.

“난 진심이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문제는 없을 거예요. 카엘과 모노로 부족하다면 나의 믿음까지 더하도록 해요.”

“어째서?”

알리제가 묻고 싶었던 말은 오히려 어떻게, 라는 물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야슈톨라가 제아무리 호기심이 많다고 한들 얼굴 가린 누군가를 철석같이 믿을 위인은 아닐진대. 그는 흥미로워할 뿐 흥미에 휘둘리지 않는다. 필요할 땐 냉정하고 엄격한 결정을 내릴 줄 알며 그렇기에 알리제는 야슈톨라의 선택을 신뢰했다.

제 질문에 야슈톨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하고 중얼거린 그는 곧 제 머리를 한 번 정리한다. 그러곤 익살맞게 어깨를 으쓱이며 짐짓 장난스레 말했다.

“어떤 수상함이 극에 다다르니 되레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더군요. 믿어요, 알리제. 애쉬는 우리를 배신할 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뜻 모를 말이었다. 알리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야슈톨라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제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목구멍 속에서 불분명한 말들이 들끓었다. 나의 걱정은 고작 그런 말들로 나아지지 않으리라고 외치고 싶은 동시에. 알리제는 알았다. 때로 어떤 불안은 소화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어떤 조급함은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알리제는 영웅들의 발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날개를 붙들어 찢고 싶지도 않았다. 알리제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들이었다. 질끈 주먹을 쥔다.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잠시 흉통을 크게 부풀린다. 떨리는 숨을 고르는데 천막이 들썩였다. 누군가가 들어온다. 카엘이었다.

“여기 있었네.”

“카엘?”

“무슨 일이에요?”

야슈톨라가 물었다.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카엘에게로 향한다. 그에게선 옅은 화약 냄새가 났다. 전투의 여파가 아직 묻어나는 것이다. 조금 지친 표정으로 카엘은 제 머리를 한번 흐트러트리더니 나직이 앓았다. 그러더니 물었다.

“애쉬 못 봤어?”

“몰라. 전투 끝나고 난 이후로는 없어졌어.”

가장 마지막까지 전장에 남아 있었던 알리제가 나섰다. 애쉬는 항상 그랬다. 싸움이 끝나면 돌아갈 채비를 하는 저들을 지그시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때로 애쉬는 새벽에 할 말이 있다는 듯 주위를 배회했으나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기색은 짧게 이어지며 곧 피로하기 그지없는 쇠한 목소리가 별것 아냐, 미안해, 하고 사과할 뿐이었지.

카엘은 제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눈을 찌푸렸다. 어딜 간 거야, 하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떠나려는 그를 알리제가 막아섰다. 손을 뻗어 카엘의 팔뚝을 붙잡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괜찮은 거 맞아?”

조급한 마음에 괴상한 질문이 튀어 나갔다. 카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되물었다.

“뭐가?”

“애쉬 말이야! 난 걱정이야. 너희가 애쉬의 무얼 믿고 그를 신뢰하기로 한 건지 모르겠어!”

“아아.”

카엘이 가볍게 탄식한다. 그러곤 웃었다. 눈길은 알리제를 스쳐 지나친다. 알리제는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더듬었다. 끝에는 야슈톨라가 있었다.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인 야슈톨라가 말한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제야 카엘은 다시 알리제를 본다. 그리고 말했다.

“언젠가 알게 될걸.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가 말하기는 하겠지만.” 멋쩍은 듯 뒤통수를 몇 번 긁적인 카엘이 덧붙였다. “알리제. 걱정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 정말 그럴 필요 없어. 애쉬는…….”

“카엘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아.”

조용한 목소리가 말을 마쳤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천막의 공기가 일순 얼어붙었다가 녹는다. 아주 찰나였다. 알리제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향하던 손길을 거두며 입구를 응시했다. 로브가 아닌 투구였다. 뾰족한 첨탑 같은 뼈대에 고정한 검은색 천이 얼굴을 휘감듯 감싸는 형태의 머리 장비.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투명한 암흑 너머로 희뿌연 섬광이 언뜻 빛났다.

“애쉬.”

“어디 갔었어?”

카엘이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카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든 애쉬는 잠시 침묵했다. 대답은 느리게 나왔다.

“태내에.” 그로는 부족하다 느꼈는지 짤막한 설명이 뒤따랐다. “고치가 있나 확인하려고.”

말을 마친 애쉬는 다시 입을 다문다. 카엘도 다시 말을 걸지 않는다. 알리제는 입구에 우두커니 선 애쉬를 보다가 문득 그에게서 느끼던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대로 흩어질 것 같다. 존재감이라는 게 없었다. 공기를 얼기설기 묶어 사람의 형태로 빚어내면 꼭 저런 느낌일 성싶었다. 그만큼 옅었다. 그만큼 고요했다.

사람이 저다지도 희미할 수 있는가. 알리제는 확실한 대답을 안다. 그럴 수 없었다. 일부러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 한. 카엘과 모노 같은 실력자들은 가만히 서 있어도 느껴지는 노련함이 있었다. 애쉬는 영웅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거늘 호흡 한 줌마저 희뿌옇다. 이름대로였다. 사람이 정말로 잿더미와 닮았다. 다 타고 남은 잔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도 없이 흐트러지는 중인 것만 같았다.

어색한 침묵이 천막을 감쌌다. 어느 순간 애쉬가 고개를 돌렸다. 야슈톨라 쪽을 바라보더니 다시 바깥을 향해 섰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야슈톨라가 아, 하고 탄식한 건 직후의 일이다. 야슈톨라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태프를 들고 가볍게 목을 꺾으며 말했다.

“채비하도록 해요. 다시 몰려오고 있어요. 난전일 거예요.”

천막은 금세 부산스러워진다. 늘어졌던 이들은 모두 장비와 무기를 챙겨 자리를 박찼다. 알리제는 알피노의 부름에 걸음을 뗀다. 천막을 열고 나선다. 저 멀리서 다급히 뛰어오는 병사 하나가 보였다. 얼굴에 깃든 현실적인 공포가 말해주고 있었다. 또 다른 습격의 시작이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끝나고 찾아뵙겠습니다.”

“다치거든 주저하지 말고 찾아오게.”

제각기 한마디씩 던지며 사라지는 새벽을 응시한다. 세검을 움킨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색무취의 존재감. 고개를 팩 든다. 애쉬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체불명의 어둠이 속삭였다.

“날 믿지 않아도 돼.”

걸걸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잔뜩 맛이 간 목소리였다. 목소리에서 비린 맛이 났다. 애쉬가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간다. 이어진 말은 꼭 허상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카엘을 지킬 거야. 이번에는. 반드시…….”

알리제는 입술을 악물고 그 등을 뒤따른다. 어쩐지 조금 익숙한 감각이라는 자각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찾아왔다.

 

 

피비린내가 났다. 귓전에서 연이어 터지는 비명과 절규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카엘은 이를 악문다. 재빠른 손길은 무기를 정비하고 새로운 탄환을 갈아 끼운다. 동서쪽 이십 미터. 착탄까지 남은 시간은 삼 초가량. 드릴이 닿기에 무리 있는 거리는 아니다. 판단을 마치고 다시 시선을 돌린다. 조준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아득히 퍽,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와 절규는 갈레말과의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카엘은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뱃속이 울렁거린다. 토기가 치솟으나 멈출 수는 없다. 그때와 같은 일은, 그러니까, 모노가 갑자기 저를 두고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속으로 그 한마디만을 하염없이 뇌까리며 다음, 그 다음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카엘은 알리제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엇비슷했다. 애쉬를 볼 때마다 카엘은 1세계에서의 그들을 반추했다. 에테르에 민감한 체질인 모노는 응달이 없는 곳에선 남들보다 배로 힘들어했다. 빛 에테르를 흡수하는 듯 투명하게 빛나던 모노의 피부와 눈은 카엘의 목구멍에 거대한 가시를 심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하다못해 호흡 한 줌마저 가시에 턱턱 걸렸다. 찔리고 베이며 나간 말과 숨들이었다. 온전할 리 없었다.

이번에는 달라, 하고 카엘은 속으로 읊조린다. 모노는 올드 샬레이안 대학의 특설 연구부실에서, 그라하와 조수와 교수들과 함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전장으로 떨어진 모노가 크게 다치거나 다른 세계로 떨어져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권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발치에서 엉겨 붙는 죄식자의 파편을 강하게 내려친다. 이번만큼은.

결심하자 시선은 자연히 애쉬를 찾는다. 잿더미라는 가명을 뒤집어쓴 채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또 다른, 모노를 향해.

카엘은 애쉬가, 그러니까, ‘모노’가 숨긴 말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징하다. 추론은 어렵지도 않다. 모노는 속내에 응어리진 말들이 있을 때면 저토록 기력 없이 굴었다. 제 걸음걸이마다 진득하게 눌어붙던 시선이며 차마 떨치지 못하던 입술 따위가 모든 증거였다. ‘모노’의 두려움은 종종 카엘의 언약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며칠 전 돌연 언약 텔레포트를 탄 모노는 네가 빛의 범람에 휩쓸리는 꿈을 꿨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토로했었다…….

‘모노’의 검이 허공을 가른다. 찌르고 베고 돌리며 휘둘러 친다. 죄식자들을 상대하는 몸짓은 몇백 번씩 거듭한 양 능숙하다.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그렇기에 이질감이 들었다. 제가 아는 모노는 전위가 무섭다고 했다. 등 뒤에 있을 사람이, 그러니까, 제가 걱정이 되는데도 돌아보지 못한다는 게 끔찍하리만치 두렵다고. 대검을 버리고 스태프를 든 까닭도 그것이다.

‘모노’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싸움이 전부 끝났을 때 이름을 부르면 몸을 흠칫 떨었다.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가자고 말을 걸면 아, 그렇지, 가야지, 하고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카엘은 ‘모노’의 태도에서 익숙한 고독을 읽었다. 그건 어릴 적 자신과 닮아 있었다. 제 등 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로 모자라 익숙해진 사람의 태도였다.

그렇다면 의문은 한 갈래로 다시금 모인다. ‘모노’에게 카엘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세계의, 어떤 모습의 자신이라고 한들. 한 번 만난 모노를 혼자 두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모노는 당연하지 않았으나 모노가 당연한 사람이 아니기에 더더욱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카엘 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동시에 ‘모노’의 대검이 직전까지 서 있던 땅에 박힌다. 억센 손길에 휘둘려 땅을 디디고 선 순간. 솜털이 비쭉 선다. 너울 같은 빛이 저 멀리서 일렁인다.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섰다.

“괴물, 괴물이……!”

대죄식자였다.

죄식자들이 일순 멈춘다. 그들의 고개가 삐걱삐걱 돌아갔다. 구름을 가르고 나타난 대죄식자는 전장을 굽어살피듯 눈을 내리깐다. 희끄무레한 빛살이 그의 뺨을 타고 후득 떨어진다. 기척이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 카엘은 본다. 나타나고도 움직이지 않는 대죄식자를 향해 누군가가 활을 겨눈다. 미지를 향한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된 낯은 잇새에서 비어 나오는 괴성과 끔찍하게도 궁합이 잘 맞았다.

병사가 시위에 먹인 활을 있는 힘껏 당긴다. 활이 부러질 듯 팽팽하게 꺾인다. 쿵. 굉음이 울린 순간. 카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제 심장과 같은 박자로 다시 한번, 쿵. 쿵.

쿵.

“아아악!”

활시위를 우지끈 부러뜨리며 쇄도한 애쉬의 대검이 병사의 목젖을 관통하기 직전. 카엘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강한 반동에 몸이 움찔 뒤로 젖힌다. 물러나지 않는다. 애쉬를 본다. 일직선으로, 정확하게, 병사를 노리던 대검이 순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드릴을 흘리듯 튕겨내고 몸을 훌쩍 물린다. 대검을 땅에 박아 속도를 늦춘 애쉬가 느리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든다.

반투명한 어둠 너머에서 유백색 빛이 일렁인다. 뒤로 넘어간 병사가 엉망진창으로 나자빠지며 의식을 잃는다. 어디선가 달려온 위리앙제가 급히 치유술을 넣고. 몰려왔던 병사들이 자신과 애쉬를 둥글게 감싸며 주춤주춤 물러나는 찰나에.

카엘은 지금, 이 순간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개를 돌린다. 대죄식자를 올려다본다. 유유히 하늘에 부유하는 대죄식자는 꼭 점멸하는 별을 닮았다. 애쉬가 땅에 박았던 대검을 뽑으며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걸음걸이는 모노를 닮았다. 일정한 박자로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차근히 걷다가 어느 순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다. 쏜살같이 달려든다.

“이거 빌린다.”

주인 모를 창을 땅에서 집어 든다. 땅을 짓쳐 달려 나가며 카엘은 이를 악문다. 꼬나쥔 창이 무겁다. 정신이 피로했다. 모노가 보고 싶었다.

첫 충돌은 가볍게 끝난다. 창과 대검이 맞부딪히며 번쩍 빛이 튀었다. 눈을 찡그리며 크게 몸을 젖혀 물러난다. 대검에 휘둘리듯 비틀거리던 애쉬가 곧 무릎을 꿇었다. 무기가 흔들리더니 땅에 깊이 박힌다. 투구를 쓴 얼굴을 쥐어뜯듯 가린 애쉬의 등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거듭했다. 카엘은 다가오려는 알피노에게 고개를 저음으로써 만류하곤 느리게 걸음을 뗐다.

애쉬는 ‘모노’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모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쩌면 영영 말해주지 않을, 의문스러운 까닭으로 인해.

손을 뻗는다. ‘모노’의 투구 위에서 한참을 배회하다가 힘겹게 정수리에 닿았다. 까끌까끌한 천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의 감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귀마저 욱여넣는 이 투구를 벗고 나면 ‘모노’는 한동안 귀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걱정스러웠다. 가쁜 숨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충분히 들렸다.

그때 ‘모노’가 고개를 들었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호흡이 불안정한 탓에 무릎이 한번 꺾였다. 크게 휘청이며 다시 바닥에 쓰러진다. 반사적으로 뻗은 손을 뿌리치며 ‘모노’는 다시 우악스럽게 다리에 힘을 준다. 땅에 박힌 대검을 지팡이처럼 짚으며 후들거리는 몸을 폈다.

그렇게 하늘을 본다. 그리고 손을 뻗는다. 대죄식자를 향해. 하늘 위 부유하는 백색왜성을 향해.

카엘은 확신했다. ‘모노’는 대죄식자에게 속삭이듯 애원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든 채. 새까만 장갑으로 허공을 움키듯이 허우적거리며. 마치 대죄식자 본인이 손끝에 닿아 있는 듯 무언가를 어루만지듯이.

가지 말라고.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라앉은 분위기가 뺨을 간질인다. 산크레드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의자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던 알리제가 힘없이 왔어, 하고 반긴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알리제의 곁에는 항상 그래왔듯 알피노가, 멀지 않은 곳엔 위리앙제가 앉은 채였다. 쿠루루와 타타루는 원탁에 둘러앉은 채였으며 그라하는 그들 곁자리에서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구석진 벽면에 기대자 야슈톨라가 입을 열었다.

“산크레드까지. 전부 모였군요.”

“급한 일이라며. 사태가 사태니만큼 좀 서둘렀지.”

산크레드가 팔짱을 꼈다. 시선은 모노에게 꽂힌 채였다. 뜻밖이었다. 모노는 한창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집한 게 바로 엊그저께였다. 믿을만한 정보통이었으니 잘못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카엘의 어깨에 머리를 눕히듯 기대어 눈을 감은 모습을 보아 그는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맞는 듯했다. 아마도 그런 모노마저 소집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는 거겠지. 상황을 가볍게 정리한 산크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슈톨라가 느리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에오르제아 총사령부 측에서 애쉬에 관해 묻더군요.”

누군가가 엷은 한숨을 쉬었다. 산크레드는 모노가 감았던 눈을 느리게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졸음 가득한 동공이 드러난다. 흐린 초점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어리광 부리듯 카엘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애쉬를 처벌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다만 제법 곤란해하더군요. 그날 애쉬의 행동은 그들 입장에서 또 하나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알리제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카엘과 모노를 힐끔거리던 그는 곧 고개를 무릎에 처박았다. 답지 않게 소심한 태도였다. “애쉬는 그날 총사령부의 병사를 공격했어. 그것도 대죄식자를 견제하려던 사람을. 공격받은 사람에겐 아무런 귀책 사유가 없어.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말이지.”

“총사령부가 애쉬를 궁금해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느닷없이 공격당한 것일 테니 말입니다.”

위리앙제가 침울하게 덧붙였다. 야슈톨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울한 분위기에 타타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과를 좀 가져올게용, 하는 목소리와 함께 서둘러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산크레드가 곧 고개를 내저었다.

문제는 명확했다. 전장에 대죄식자가 나타났던 그날. 애쉬는 대죄식자를 향해 활을 매기던 병사 하나를 공격했다. 조금이라도 단련한 사람이라면 애쉬의 움직임에서 선명한 살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만큼 애쉬는 그 짧은 순간 병사를 죽이고자 했다. 진심으로 살의를 가지고 휘두른 대검을 카엘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사태는 훨씬 복잡해졌을 터였다.

산크레드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애쉬와는 첫 만남은 이상하리만치 뿌옜다.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님에도 그랬다. 애쉬를 데려온 카엘은 당분간 함께 지내며 전투를 도울 거라는 설명 외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애쉬도 마찬가지였다. 로브를 깊이 눌러쓴 사내는 새벽을 느리게 훑어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게 전부였다. 인사는 건네는 족족 거절당했다. 일부러 무시한다기보단, 뭐랄까. 겉치레와 꾸밈에 능한 산크레드의 눈에는 오히려 애쉬가 친근함을 낯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익숙하지 않으니 겁을 먹는 것이다. 또 어쩌면. 너무 오랜만에 와닿았기에 당혹스러워하는지도 모르고. 어찌 되었든 애쉬는 지금까지도 새벽에 잘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실력만큼은 발군이었으나 전장이 아닌 곳에서 애쉬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타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산크레드의 미간이 복잡한 심경대로 구겨졌다.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산크레드는 침묵했다. 그는 애쉬를 잘 알지 못했다. 애쉬가 오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모노의 부탁을 받아 출장을 다녀온 탓이었다. 산크레드가 없는 며칠 동안 사건이 터졌다. 상대를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면 말은 아낄수록 좋은 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쉬를 신뢰한 사람이 다름 아닌 카엘과 모노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뇌에 차 있던 산크레드를 일깨운 건 쿠루루의 한마디였다.

“총사령부의 입장은 타당해. 하지만 우리끼리 이렇게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해.” 쿠루루가 주먹을 꾹 쥐었다. 그의 시선은 이내 카엘과 모노에게로 향했다. “혹시, 지금 애쉬가 어디 있는지 아니?”

모두의 시선이 영웅들에게로 쏠린다. 제게 기댄 모노의 머리를 쓰다듬던 카엘이 눈썹을 불쑥 올렸다. 동시에 모노가 눈을 떴다. 피로가 덕지덕지 눌어붙은 낯을 한번 쓸어내린 모노는 곧 느리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는 손길이 퍽 능숙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카엘의 천막에 있기로 했어.” 모노가 대답했다. 잠기운에 낮아진 목소리는 살짝 쉬어 있었다. “약속을 깨트리고 돌아다닐 사람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그러니 천막에 있겠지.”

“그렇다면 직접 묻는 게 좋지 않을까?” 쿠루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그러나 단단했다. “우리끼리의 추론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애쉬를 잘 알지 못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걸.”

시선의 물결이 방안을 한번 크게 돈다. 그러나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카엘과 모노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모노는 눈을 내리뜨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엘은 그런 모노를 관찰하는 데에 열중한 듯했다. 염려의 빛이 눈에서 떠나질 않는다. 산크레드는 카엘이 모노의 어깨를 붙들 듯 부축하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상과 같았다. 모노를 걱정하는 카엘. 괜찮다며 태연히 구는 모노…….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수는 없어요.”

그때 야슈톨라가 말했다. 의뭉스러운 말이었다. 산크레드는 야슈톨라를 응시하지 않는다. 카엘과 모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야슈톨라의 말에 모노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더듬는다. 엷은 한숨과 함께 그의 몸이 기운다. 언뜻 찌푸린 미간으로 보아 두통에 시달리는 듯했다.

카엘이 모노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그러더니 담담히 말했다.

“우리를 믿어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믿고 있어!”

알리제가 벌컥 외쳤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그는 잠시 주먹을 질끈 쥐었다. 입술을 아프게 깨물고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평소의 알리제였다.

“나는 당신들을 믿어. 내게 필요한 건 확신이야. 당신들이 괜찮을 거라는 확신. 이 모든 일이 끝나고서 모든 걸 말해줄 거라는 확답 말이야! 모두가 그래!”

알리제가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젖혔다. 마침내 산크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나도 그렇노라고 말하자마자 산발적인 긍정이 방안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말해줘.” 알리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카엘과 모노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엔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괜찮은 거야?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

카엘과 모노가 잠시 시선을 마주친다. 다소 힘이 들어가 있던 낯이 서서히 풀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퍽 기꺼운 일이었다. 카엘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모노가 입을 열었다. 직전의 피로감은 여전하나 그래도 조금은 들뜬 목소리였다.

“약속할게. 우리는 괜찮아. 일부러 숨기고자 하는 것도 아니야. 내게도 확신이 필요해. 서투른 결론을 내려서 너희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완전히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다. 하지만 그로도 충분하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리제가 자리에 앉았다. 방안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진다. 때마침 돌아온 쿠루루는 다과와 찻잔을 한가득 든 채 고개를 갸웃댔다. 그새 좋은 일이 생겼냐는 질문엔 모두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산크레드는 쿠루루에게서 찻잔을 받아 옆으로 건네는 것을 도우며 생각한다. 새벽의 분위기는 딱 이 정도가 좋았다.

잠시 차를 홀짝이는 소리가 가득 찼다. 모노는 찻잔을 쥔 채 넋을 놓은 채였으며 카엘은 그 곁을 지키며 연신 말을 걸었다. 숨죽인 속삭임 몇 마디만으로도 모노의 얼굴이 풀리고, 낮은 너털웃음이 흘러나오며, 카엘의 표정 또한 편안해진다. 실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용은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다행인 건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조급해했는지도 모르지. 산크레드가 찻잔을 기울이며 가만히 생각했다. 카엘과 모노가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기에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람처럼 불어와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내곤 한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조각과 형태가 되어 구멍 난 마음에 꼭 맞게 들어찼다. 삶에서 만나는 유일하고도 단일한 존재가, 몸과 마음과 호흡 한 줌까지 모조리 빼앗겨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대상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형태로 빚어낸 듯한 사람이란 어떤 감각인지 산크레드는 안다. 그 자신은 지키지 못했다. 자신이 겪었던 절망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카엘과 모노는 이미 숱한 좌절을 지나왔다.

수면에 제 얼굴이 비친다. 찻잔을 느리게 흔들어 수면을 깨트렸다. 느리게 찻잔을 기울인다. 조금 피곤했다. 이건 몸의 피로와는 무관한 마음의 지침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잠시간 후에 야슈톨라가 입을 열었다. 질문은 간결했다. “애쉬는 어떡하죠?”

부드럽게 풀렸던 분위기가 다소 팽팽해진다. 새벽은 곧 저마다의 고심에 빠졌다. 낮게 앓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산크레드는 찻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애쉬를 떠올렸다. 말로만 얻어들은 그의 돌발 행동과 애쉬의 평소 행적을 반추한다. 카엘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암흑기사를 들었다고. 누구에게서 얻은 정보였지. 눈을 찡그린다. 어쩌면 타인에게서 전달받은 정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찻잔을 문지르던 손길이 멈춘다. 산크레드는 그때 별안간 깨닫는다. 전해 들은 게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산크레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카엘을 지키기 위해 암흑기사를 들었다. 카엘을 위해 대검을 버리지 않았다.

어떻게 본다면. 이번의 돌발 행동 역시 그와 같은 선상에 있지 않을까.

산크레드가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이 벌어졌던 입은 곧 닫힌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 선명히 스치는 이채에 산크레드는 직감한다. 지금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대죄식자가 관건이군요.” 야슈톨라가 가장 먼저 말했다. “애쉬에게 직접 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고요.”

“내가 물어볼게. 그나마 날 좀 편해 하는 것 같았으니까.”

카엘이 나선다. 야슈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노는 여전히 신중한 표정이나 그 순간 카엘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산크레드는 방안을 한번 훑어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는 태내를 살펴보겠어. 카엘, 모노, 태내에서 대죄식자를 만났다며? 뭐든 없는 것보다는 나은 법이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긁어모으겠어.”

“알리제와 나도 돕겠네. 태내는 홀로 들어가기에 위험한 장소야.”

“나도 도울게. 관측계를 가져가면 조금 더 수월할 거야. 푸르슈노 씨께 부탁해 볼게.”

“저는 1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기록지를 다시 되읽어 보겠습니다. 무언가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번에 서고 위치를 옮기면서 조금 변동이 있었어. 혼자서 찾아내긴 힘들 거야. 나도 함께 찾아볼게.”

“그렇다면 저는 돌의 집에서 여러분의 소식을 전달하겠어용!”

분담은 순식간에 끝난다. 산크레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모노가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이마를 짚더니 눈을 찡그린다. 곁에 있던 카엘이 곧장 반응했다. 그의 어깨를 짚으며 부축하는 손이 얼핏 떨렸다.

모노가 관자놀이를 짚은 채 눈을 감는다. 긴 머리칼이 낯 위로 후드득 떨어지며 얼굴을 가렸다. 괜찮냐는 질문이 산발적으로 터지는데도 모노는 대꾸가 없다. 입술을 길게 물어 대답을 머금던 모노는 얼마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언뜻 탁한 눈동자가 몇 번 흔들리더니 느리게 초점을 잡았다.

“애쉬에게서 연락이 왔어.”

모노가 느리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카엘 쪽으로 향했다. 탐탁잖은 듯 눈을 얼핏 찡그린 모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고 말을 마쳤다.

“너를 보고 싶대, 카엘.”

3.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

세계를 구하려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 영웅이라고 불리는 것에 들뜬 나머지 내 힘을 과대평가했던 걸까.

…….

이 순간까지도 나는 너만 있으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

그러니 눈을 돌려줘.

나의 남루한 종말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시해 줘.

…….

부탁이야. 보지 말아, 카엘.

 

*

 

“안녕.”

카엘은 제 앞에 앉은 ‘모노’를 가만히 응시한다. 드물게도 로브를 벗은 모습이다. 반쯤 희게 물든 머리칼이며 얼굴 군데군데 남은 낯선 흉터들도 물론 익숙하지 않지만. 카엘에게 가장 큰 괴리감을 남기는 건 어둠 속에서 잘게 부서지는 유백색 눈이다. 모노는 본디 양쪽 눈의 색이 달랐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하얗다. 어두운 장소에서 발광하지도 않았다. 그건 오히려 시력을 잃은 제 쪽에 가까웠다.

‘모노’가 짊어진, 카엘이 알지 못하는 지난한 세월은 그의 겉모습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겼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묻고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처럼 싸움과 전투를 거듭하는 사람들은 종종 망각하지만. 흉터는 본래 갈라진 사연에서 탄생한다.

‘모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엔 표정 없던 낯에 옅은 웃음기가 엿보였다. 카엘은 조심스럽게 앞자리에 앉았다. ‘모노’가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 엊그제였다. 새벽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모노가 제게 전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이 겹치고 뒤섞이는 바람에 복귀가 늦었다. 사정을 설명하려 들었으나 ‘모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간결하게 일축하고는 그저 자리를 권했다. 그래서 지금에 다다랐다.

그들 앞에는 초라한 물병 두 개가 놓여 있다. 전장에서 차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추레한 모노의 모습과 제법 잘 어울렸다. 이질감은 없었다. 카엘은 물병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든다. ‘모노’를 본다. 등 뒤에서 천막이 펄럭일 때마다 흐린 빛이 그 혀를 날름거렸다.

“날 찾았다며.”

진척 없는 고요를 견디지 못하고 카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노’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모노’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며 카엘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날 일을 기억해? 같이 나갔던 마지막 전장.”

대답은 느리게 나왔다. “……기억하지.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몽롱한 목소리였다.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힘이 풀려 있었다. 실금처럼 비어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던 모노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진다. 내리깐 눈과 그 위를 덮는 속눈썹이 흔들렸다.

“나는 만류했지.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설득했지. 그러자 너는 웃었어.”

“모노.”

“너는 웃었어, 카엘.”

카엘은 입을 다문다. ‘모노’는 카엘을 보고 있으나 자신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사건 해결의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벼락같은 깨달음이 카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문 채 침묵을 유지한다. ‘모노’의 탁한 눈동자가 바닥에 진 그림자를 더듬었다. 그 궤적을 따라 그리며 부드럽게 선회한다. 이야기는 박자에 맞추어 차츰차츰 흩어졌다.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너는 잘 웃었어. 동방의 전쟁터에서 어디 한 구석이 맛이 가버린 것처럼. 자꾸만 웃었어.”

“…….”

“네가 웃을 때마다 난 두려웠어.”

“…….”

“화를 냈다면. 웃지 말라고 윽박이라도 질렀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몇 번이고 생각했지. 길고 지리멸렬한 세월 동안.”

희미한 숨이 바람처럼 새어 나온다. 모노의 몸은 점점 쪼그라드는 듯했다. 그렇잖아도 희미하던 존재감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이 아니었다. 호숫가에 피는 물안개처럼,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모여 있던 것이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점차 뿌옇게 번지는 모노를 바라보며 카엘은 반사적으로 입 안을 씹었다.

“정말 길었어. 어느 순간부터인가 네 얼굴이 기억 나지가 않아서…….”

짧은 간극. 그리고 하얀 두 눈은 눈꺼풀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이건 아마도 벌이겠지. 널 지키지 못한. 네게 안식도 주지 못하고. 세계와 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그 오랜 기간을 허비한 것에.”

“모노.”

“네가 웃을 때마다 나는 진정한 영웅이 되고 싶었어. 네가 품은 빛과 절망과 두려움까지 전부 떠안아도 거뜬한. 겉치레뿐인 영웅이 아니라.”

눈을 내리깔고. 한숨처럼 내뱉고.

꼭 네가 그랬던 것처럼…….

이윽고 ‘모노’가 입을 다문다.

카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때마침 저 멀리서 들려온 비명이 우습게도 기꺼웠다. ‘모노’가 투구를 쓴다. 대검을 든다. 모든 유백색 절망은 검은 투구 아래로 가려진다. 그렇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습을 숨긴다. 마치 이 모든 게 허상이었다는 듯이.

카엘은 ‘모노’를 뒤따랐다. 천막을 젖히고 나선다. 머리 위에서 죄식자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아우성과 절규가 연이어 터진다. 날뛰는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지도자들을 지나친다. 일선으로 향한다. 대검을 단단히 꼬나쥔 채 걸음을 옮긴다. 시선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끝에 무엇이 망울졌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에, 카엘은 따른다.

날갯짓 소리가 퍽 컸다. 육중한 깃털들이 서로 부딪히며 제법 큰 소리를 냈다.

‘모노’가 마침내 걸음을 멈춘다. 눈물 흘리는 부유성이 거기에 있었다.

“날 알아보지 못하겠지, 너는.”

그가 중얼거린다. 대검을 질끈 쥔다. 눈을 내리깔았던 대죄식자의 대리석 같은 피부가 햇살에 희게 부서졌다. 눈이 시렸다. 시야가 뿌옇게 번지는 것을 느끼며 카엘이 연발 권총을 더듬어 쥐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움직일 수 없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대검의 끝이 대죄식자를 가리켰다. 꼿꼿하게 선 ‘모노’의 등을 보는 순간. 카엘은 직감한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왔다. 대죄식자에게 검을 겨누고. 흔들림 없이 직시하고. 그러나 끝내 심장에 박아 넣지 못한 채로.

카엘은 ‘카엘’이 궁금했다. ‘모노’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을 자신이 궁금했다. 제가 무얼 어떻게 하고 있기에 ‘모노’가 이렇게 변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건 사건을 해결하고 하는 의지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호기심이며 흥미이기도 했다.

말 없는 대치를 지켜보던 카엘이 한 걸음 내디딘다. 그러나 직후 이어진 사태는 그가 상상한 어떤 가능성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병사 하나가 장검을 꼬나쥔 채 달려든다. 모든 게 느리게만 보였다. 잇새에서 터져 나오는 괴성과 매섭게 날을 세운 검이 맞물리며 기묘한 장단을 만들었다. 반사적으로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이 멈칫한다. 병사의 낯이 익다. 바로 며칠 전. ‘모노’가 목을 노렸던 그자다.

찰나의 지체였다. 카엘이 땅을 짓쳐 달려 나감과 동시에 ‘모노’가 고개를 돌린다. 얼굴을 가린 투구가 크게 펄럭였다.

명치를 정확히 관통한 장검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들고.

대죄식자를 보았다가.

다시 카엘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안개 같던 몸이 땅에 부딪힌다. 뜻밖에도 둔탁한 소리가 났다.

 

*

 

영웅들의 신뢰를 받던 사람을, 병사 하나가 장검으로 꿰뚫었다. 명치를 깔끔하게 관통당한 채 쓰러지던 그 사람을 영웅이 두 눈으로 목격했다.

당연하게도 난리가 났다. 병사는 곧장 제압당했으며 치유사란 치유사는 전부 카엘의 천막으로 몰려갔다. 총사령부의 지도자들도 차례로 면담을 요청했다. 카엘은 족족 거절했다. 병사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치유사들은 물렸다. 알피노와 알리제, 야슈톨라와 그라하 정도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지도자들에게 들을 건 의미 없는 사죄뿐일 테니 그 또한 고사했다.

새벽은 그날 애쉬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들은 핏기 없는 낯을 보고 눈을 홉뜨거나 입을 가렸다. 그러나 결국엔 입술을 짓씹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애쉬가 ‘모노’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으나 동시에 새벽엔 또 다른 동기이기도 했다. 그를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는 간절함을 촉발하는 심지였다. 새벽의 처치는 빨랐다. 옷을 벗기고 드러난 환부를 지혈했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몸부림치는 애쉬를 붙잡기 위해 카엘이 불려 왔다. 피에 젖은 천을 몇 겹씩 겹쳐 애쉬의 상처에 쑤셔 넣는 동안 카엘은 애쉬를 붙들고 있었다. 손은 떨렸으나 힘은 빠지지 않았다. 흐느낌은 꼭 모노의 것을 닮아 있었고 그건 카엘에게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되지 못했다.

모노는 연락이 닿고 삼십 분 만에 나타났다. 언질도 없이 언약 텔레포트를 타고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그는 현자 소울 크리스탈을 손에 질끈 쥔 채였다. 때마침 애쉬를 보고 있던 알피노와 그라하는 익숙하게 모노를 그 앞으로 데려갔다.

모노는 애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곧장 치료에 돌입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한참이고 자리를 지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보다 못한 카엘이 먼저 입을 열어 모노를 재촉했다. 이곳에서 치유술에 가장 능통한 자를 꼽으라면 단연 모노였다. 현인의 표식도 없이 샬레이안 대학 현학부 명예교수로 재직하게 된 건 단순한 운이나 영웅이라는 위치 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카엘은, 모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애쉬를, 그러니까, ‘모노’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모노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치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냉소적인 표정에 카엘이 눈을 얼핏 찡그렸다. 모노의 성격은 이렇지 않았다. 제아무리 철천지원수라고 한들 무방비한 상태의 부상자라면 우선 치료부터 하던 게 모노였다. 그 공식에 들어맞지 않은 건 여태 제노스 정도였다. 제노스에게 품었던 것만큼 강렬한 증오를 가진 건가. 애쉬를 향해서? 이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카엘이 다시금 재촉하려는데 모노가 입을 열었다.

“야슈톨라.” 축 늘어진 애쉬를 내려다보던 야슈톨라가 눈동자만 굴려 모노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치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기묘하고도 팽팽한 분위기가 오가는 와중 모노가 물었다. “어떻게 보여?”

“글쎄요.”

야슈톨라가 짧게 중얼거렸다. 상처를 지혈하던 그라하가 모노와 야슈톨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톱을 질끈질끈 깨물던 알리제가 성마르게 외쳤다. 그게 무슨 뜻이야, 하는 외침에도 모노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저 야슈톨라를 지그시, 아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며 말했다.

“내겐 확신이 필요해.”

끝끝내 야슈톨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틀어 모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당신 추측이 맞는 것 같네요.” 흘린 시선이 애쉬에게 향한다. 야슈톨라가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에테르가 엉망진창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어?”

말은 이어지지 못한다. 당혹스러운 그라하의 탄식에 야슈톨라는 입을 다문다. 모두의 시선이 그라하에게 쏠렸다. 그가 피투성이 천을 허망하게 들어 올린다. 검붉은 체액이 얼룩덜룩 묻은 천이었다. 직전까지 피를 잔뜩 흡수한 덕에 그라하의 허벅지를 타고 점성 있는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출혈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라하는 더욱 당황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상처가…….”

몸을 조금 틀자 곧장 보였다. 드러난 명치는 피투성이였다. 채 닦이지 않은 혈흔으로 얼룩진 몸을 내려다보던 알리제가 헛숨을 삼킨다.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목구멍에서 역류했다. 카엘도 보았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문제에 관한 답은 너무나도 아리송한 나머지 그게 답인 줄도 모른다는 생각을.

빛이 번진다. 울렁울렁 흘러나온 엷은 파장이 환부를 느리게 닫았다. 치유술에서 비롯된 빛이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빛 에테르 그 자체와 닮아 있었다. 죄식자들로부터, 혹은, 1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하늘을 가득 메웠던, 농도 짙은 빛 그 자체가 ‘모노’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환부를 닫고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끔히 닦아냈다.

“내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군요.” 야슈톨라가 중얼거린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모노를 응시했다. “당신이 찾던 확신이 여기에 있었어요.”

모노는 대답하지 않는다. 내리깐 눈은 한 치 흔들림이 없으나 카엘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모노의 것을 질끈 움키자 시선이 느리게 돌아온다. 무표정한 낯에서 카엘은 모노의 피로를 읽는다. 얼굴 구석구석에서 찌든 오래된 우울과 묵은 비탄을 헤아린다. 그리고 끝내 입가에 맺히는 작은 미소로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야슈톨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어요. 적어도 제 눈엔 말이죠. 혼이랄 것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빛 에테르에 잠식된 덩어리처럼 보였죠. 마치 1세계에서 카엘과 모노를 처음 재회했을 때처럼 말이에요.”

“그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서 야슈톨라에게 부탁했던 거야. 뭐가 보이냐고.” 모노가 덤덤히 말을 받았다. 맞잡은 손이 차가웠다. “처음부터 애쉬는 다른 시간의 나였어. 그게 어떤 가능성의 세계라고 가정하면 애쉬의 존재 자체가 의문점이 됐어. 애쉬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냐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지.”

모노가 시선을 내린다. 두 눈을 감은 채 누운 창백한 애쉬를 내려다본다. 희게 질린 얼굴은 조도 낮은 조명에 닿을 때마다 반투명하게 빛난다. 상처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남은 건 얼룩덜룩한 혈흔이다. 그마저도 빛에 좀먹혀 없어지길 거듭하는.

희미한 한숨과 함께 그가 중얼거렸다.

“이게 대답이었구나.”

 

*

 

기억한다.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어느 순간부터 너와 나는 우리로 불렸다. 사람들은 우리를 하나의 집합으로 인식했다. 무턱대고 집을 나와 배를 곯던 나를 발견한 너는 그때부터 줄곧 내 곁에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이 치고 벼락이 내리꽂혀도 우리는 우리였다.

네가 웃음이 많아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쾌활하게 구는 게 이상하다고도 생각했다. 아무 일도 아니란 것처럼 손사래를 치던 널 보며 속상해도 했으나 그때는 나 또한 여유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네가 입에 달고 살던 말들을 내 혀로 굴려본 후에야 낱말의 조합에서 쓴맛이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제와 생각해 보면. 예정된 결말이었다. 우리의 멸종은 빛과 함께 찾아와 어둠을 데리고 떠났다.

 

 

‘모노’는 눈을 뜬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 깜빡, 뜨고 감을 때마다 흐린 초점이 점차 선명해졌다. 바싹 마른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지며 버석한 표피가 갈라진다. 혀로 입술을 훑으면 비린 피 맛과 함께 찌릿한 통증이 그를 반긴다. 다시 깜빡, 깜빡.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부풀고 쪼그라드는 흉통에 집중하며 ‘모노’는 스스로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숨을 쉰다는 게 이상하다.

직전의 기억은 선명했다. 날카롭게 벼린 검이 제 명치를 꿰뚫는 순간. ‘모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두려워하지도, 증오에 불타지도, 슬픔에 젖어가고 있지도 않았다. 우습게도 그때 ‘모노’는 반쯤 부유하고 있었다. 의식은 희뿌연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사라지는 중이었고 그렇기에 ‘모노’는 쇄도하는 검을 보며 어떠한 감상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아니. 간신히 생각해 보면. 애써 상황을 헤집어 놓으면. 실낱같은 후회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는 것도 같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네게 멸종한 줄만 알았던 우리네 사랑이나 속삭여 보는 게 좋았을까, 하고.

박제된 사랑도 괜찮아?

네 앞에 앉아 돌아오지 않을 대답이나 하염없이 기다려 볼 것을, 하고.

후회를 후회라고 인식한 순간부터 ‘모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제 안에 아직도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한다.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것뿐이 아니다. 미약하게나마 열망하고 의지하고 절규하며 사랑하는 사람됨이 제 안에 잔재해 있음을 불현듯 도출해 내는 것이다. 그건 ‘모노’가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린, 적어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안녕.”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모노’는 반응하지 않는다. 제 것보다 조금 더 높은, 쉬지 않아 깔끔하게 떨어지는 음성이다. 이곳의 모노는 조곤조곤 말할 때마다 문장 끝에 선명한 마침표를 찍었다. 쇠한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숨기고자 말을 얼버무리는 자신과는 다르다.

“살아있어?”

모노가 물었을 때. ‘모노’는 참지 못하고 조소한다. 그러며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침묵은 길게 이어진다. ‘모노’는 눈을 도로 감는다. 모든 감각을 차단하며 제 안으로 기어들어 간다. 심상은 간단하다. 거대한 등껍질 안에 몸을 말아 넣는 희고 긴 지렁이 한 마리. 껍데기 안으로 기다란 몸을 꾸물꾸물 욱여넣으면 도래하는 것은 짙고 영원한 어둠이다. ‘모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밤을 꿈꿨다.

불멸하는 칠흑 속에 파묻힌 ‘모노’를 향해. 모노가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너를 살리지 않았어. 우리 중 누구도 너를 살리지 않았어.”

“알아.”

“야만신을 소환하는 데 필요한 건 세 가지야.” 모노가 돌연 말했다. 짧은 틈에 숨을 고른 그가 말을 잇는다. “너도 알겠지.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를 리가. ‘모노’도 결국 모노였다. 그는 이곳의 모노와 제법 엇비슷한 삶을 살았다. 닮은 궤적을 걸었으나 어느 순간, 어느 찰나에 선택 하나로 모든 것이 갈렸을 뿐이었다. 추측과 심증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모노’에게도 필요한 건 확신뿐이었다.

“운이 나빴던 거야. 크리스탈 타워가 오류를 일으켰어. 네 세계의 크리스탈 타워와 우리 세계의 타워가 이어졌어. 좌표를 조정할 사람이 없는 탓에 죄식자들이 무분별하게 끌려왔겠지. 너와 함께.”

‘모노’는 입을 다문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괴롭힌 피로감이 엄습한다. 눈두덩이를 무겁게 문지르다가 한숨처럼 떨어진다. 그러면 ‘모노’는 곧 자신이 없어졌다. 이다지도 무거운 숨을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손끝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간질거렸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카엘의 손을 잡고 싶었다.

“네 혼은 오랜 시간 빛 에테르에 노출된 탓에 불안정했을 테지. 세계 도약에 휘말리게 되자 쇠약한 혼은 견딜 수 없었을 테고. 하지만 네 파편은 어찌저찌 원초 세계에 닿았고, 그러자 살고자 했을 거야.”

짧은 침묵 끝엔 담담한 선고가 이어졌다.

“때마침 조건도 충족했어. 마구잡이로 도약에 휘말렸던 죄식자들로부터는 에테르를. 깨진 네 혼으로는 제물을. 그리고 네가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마음으로 소원을.”

야만신을 소환하기 위한 준비물은 세 가지. 대량의 에테르와 제물. 그리고 간절한 염원.

‘모노’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깃든 건 우습게도 카엘이다. 짓궂고 바보 같던 웃음을 떠올린다. 카엘은 온통 희었기에 멀리서도 아주 잘 보였다. 빛이 가득한 세계였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눈을 찡그려야 했다. 입술을 질끈 짓씹으며 ‘모노’가 잘게 떤다. 카엘을 보기 위해 ‘모노’는 항상 얼굴을 찌푸렸다. 너를 보기 위해서였다.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후회로 남았다. 잘 보이지 않아도 좋으니 웃는 얼굴부터 보여줄 것을. 가까이 다가간 후에. 네 뺨을 어루만지며. 그제야 너를 들여다보아도 좋았을 것을.

빛과 후회로부터 태어난 야만신이 조소한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토록 꾸역꾸역 살아난 결과가 이것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니. 속으로 뇌까리면서도 ‘모노’는 느리게 몸을 뒤척인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너와 나였다. 우리는 옛날 옛적에 분열되어 하나의 객체가 되었다. 너와 나는 이제 더는 돌아갈 수 없었다.

실없는 모험을 이어가던 때로. 개울 하나를 두고 서로의 옷을 잡아 뜯던 시절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밤으로. 눈보라 속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산을 타던 겨울로. 새로운 땅을 밟으며 눈을 빛내던 시간으로.

재회에 기뻐하며 눈물 흘리던 찬란한 어둠 속으로는.

몸을 누이고 눈을 감은 채. 모노는 직감한다. 진정한 종말은 이곳에 있었구나. 내가 그리던 후회는 그저 신기루였구나.

눈을 감으면. 숨을 들이켜면. 그에겐 여전히 유백색 허상이 보였다.

“희생이야.”

‘모노’가 말한다. 이렇다 할 용기도, 결심도 필요치 않다. 묵혀 왔던 말은 팽팽하게 부푼 풍선을 터트리듯 약간의 압력만으로도 튀어나왔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으나 상대가 귀를 기울이고 있음은 확실하다. ‘모노’는 그 순간 흐리게 웃는다. 이상하리만치 우스웠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면죄된 희생. 대죄식자의 이름 말이야.”

“…….”

“사람이었을 적에는, 그래. 영웅이라고 불렸지. 어둠의 전사이기도 했고.” 다음 말을 내뱉기 위해 ‘모노’는 잠시 숨을 고른다. 몸 위에 무언가가 내려앉은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카엘이었어.”

그건 일종의 선고였다. ‘모노’는 텁텁하게 막혀오는 제 숨에 실소한다. 지쳤다. 완전히 지쳐버렸다. 기나긴 세월이었다. 카엘이 카엘일 적부터.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된 그때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모노’는 카엘의 곁을 맴돌았다. 면죄된 희생과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그때부터 ‘모노’는 차마 희생을 토벌하지 못했다. 그건 어떤 불분명한 계시와도 같은 것이다. 영원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속삭임이었다. 그러나 가장 닮은 꼴을 찾는다면, 네가 희생에게 검을 겨누지 못하는, 차마 소화하지 못한 채 입에 머금고만 있을 머뭇거림의 시간일 거라는 읊조림이었다.

정말로 그러했다. 희생을 토벌하지도, 그렇다고 남에게 그 역할을 맡기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책임감과 죄악감에 시달려 하루하루 마모되며. ‘모노’는 그렇게 살았다. 죄식자들을 베고 제거하는 일에만 열중하다가 어느 순간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머리를 쥐어뜯듯 움켰다가 카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어디선가 카엘이 달려올 것 같았다. 종종 ‘모노’는 카엘의 이름을 부르고 속으로 삼 초를 셌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고개를 들면. 그러면.

뙤약볕보다도 따가운 빛살에 달아오른 대지 위에. 유백색 허상이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 카엘이 서 있었다. 움직임 없이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로는 부족했다. 카엘을 끌어당겨 품에 한가득 안고 싶었다. 두고 가지 말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우리에게 이다지도 잔인한 종말은 필요치 않다고 호도하고 싶었다. 뺨을 붙들고 호흡을 맞추고팠다.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 ‘모노’는 인정했다. 허상이면 되었다. 그로도 충분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모노’는 덧붙였다. “너는 이미 결론을 내렸겠지. 네 선택이 궁금해.”

상대는 오래도록 침묵한다. 짧은 들숨과 날숨이 일정한 박자로 몸을 통과해 나왔다. ‘모노’는 기다린다. 그는 기다리는 데에 정통했다. 긴 시간은 아니다. 이전에 비하면. 이 정도는 눈 감고도 기다릴 수 있다고, 이 정도 낮 따위야 안온하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다. 모노가 입을 열었다. 그가 차분히 말했다.

“우리 쪽 크리스탈 타워를 가동해서 문을 닫을 계획을 세웠어. 남아 있는 죄식자들은 토벌하면 되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그리고 잠시간의 머뭇거림. ‘모노’는 작은 간극에서 희뿌연 다정을 읽으나 구태여 지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타워를 가동할 동력이야. 그만큼 충분한 에테르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하물며 우리 세계가 빛 에테르로 균형이 깨진 지금은 더더욱.”

모노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모노’는 작게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다. 어쩌면 자신이 이 세계에서 눈 뜬 그 순간부터 이미 점지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다지 슬프지도 유난스럽지도 않은. 그러나 콕 집어 말한다면 조금 고독할 것 같기는 하다는.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마무리가 모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희생을 토벌하기로 했어. 그가 품은 에테르로 크리스탈 타워를 가동할 거야.”

미루고 외면하던 숙제를 직면하게 된 아이처럼.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꼬마처럼. ‘모노’는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어떤 웃음은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모노의 이야기가 느리게 이어진다. 새벽의 조사와 본인의 연구. 카엘의 경험까지 더해진 근거는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모노는 설명한다. 토벌한 희생의 에테르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토벌한 자에게 답습되지도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돌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여분의 방법 또한 준비할 것이다. 조곤조곤한 이야기를 한 귀로 넣고 한 귀로 흘리며 ‘모노’는 상상한다. 하얗고 옹골찬 네 심장. 씨앗처럼 딱딱하게 굳었을 네 심장에 대검을 박아 넣는 생각.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아니. 기실 제 감정은 이렇든 저렇든 중요치 않다. 카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모노’ 그 자신이어야 한다. 영원은 없어도 불변은 있으니까. 네가 제아무리 날 뿌리치고 떠났다 한들. 우리가 우리인 건 변치 않았으니까.

내가 아직 너를 놓지 않았으니까.

생각해 보라는 말과 함께 모노가 떠난다. 천막은 닫힐 때 크게 펄럭이며 바깥의 빛을 그림자처럼 덮었다. ‘모노’는 긴 생각에 빠지는 대신 눈을 감는다. 졸음 없는 잠은 무섭도록 빠르게 쏟아진다. 그렇게 ‘모노’를 삼킨다.

그날 ‘모노’는 꿈을 꿨다. 바다였다.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까끌까끌한 모래가 발가락 구석구석을 간질였다. 때때로 깊이 스민 파도가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노’는 한참을 걸었다. 해안가를 따라 길고 끝없이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수면에 비친 짝짝이 눈을 내려다보던 ‘모노’는 희미하게 웃었다. 눈 하나를 잃었던 순간. 너는 날 닮은 것 같다며 즐거워했어. 우스운 일이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이제 그에겐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진다. 후회와 비탄과 절망과 피로는 물결에 휩쓸려 사라진다. 빛바랜 고독에 발을 담가 물장구치며 ‘모노’는 곁자리를 쓸어본다. 모래를 헤집어 한 사람분의 자리를 다진다. 평평하게 깎고 두드려 네가 있을 곳을 그려본다.

두려움은 잔재한다. 그래도 괜찮겠지. 안일한 마음과 어떤 종류의 내려놓음은 제법 닮았다. 괜찮을 것이다. 나의 영웅 됨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야말로 그 시작을 맞이하는지도 모르니까.

고결한 영웅이자 모두의 구원자 같은 게 될 자신은 없어.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너라는 선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네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아가다 보면. 나는 어느 순간 영웅이 되고. 너와 닮아가고. 그러다가 어느 날,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다시금 네 손을 맞잡을지 모르고.

네가 놓음으로써 변모한 너와 나에서 우리로 돌아갈지 모르고.

그건 제법 희망찬 추론이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결론이기도 했다.

눈을 뜬 새벽. ‘모노’는 차분히 기다린다. 해가 뜨기를. 날이 밝기를. 아침이 오기를.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기를. 눈이 부시기를.

그림자가 길어진 어느 낮에 그는 모노를 찾는다. 제 앞에 우두커니 선 상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역시, 하고 웃는다. 조금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계획에 협력하고 싶어.”

“괜찮겠어?”

“응.”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모노’는 제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내린다. 담담한 독백에 괜히 웃음이 난다. 너는 모르겠지만, 카엘. 점점 빛으로 물드는 내 머리칼을 보며 나는 너를 상상했다. 네가 나를 닮아갔듯 나 또한 너를 닮고 있음을 깨달았다.

“희생을 토벌하는 건 내 몫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

오래간만에 진심으로 미소를 지으며 ‘모노’가 말했다.

“이번 영웅담은 내게 양보해 줘.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

 

채비는 빠르게 이루어진다. 의사를 밝히자마자 자리가 내정된다. 새벽이 하루도 빠짐없이 돌아가며 천막을 찾았다. 그들은 인사를 건네고 제각기 염려와 걱정을 쏟아내다가 끝내 웃으며 떠났다. ‘모노’는 그들을 반기고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웃음으로 화답하며 그들을 보낸다. 새벽이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설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기실 너희를 보는 것도 퍽 오랜만이다.

‘모노’의 세상에 더는 새벽은 없다. 그들이 비에라족만큼 오래 살지 못하는 까닭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원론적인 사유는 따로 있다. 죄식자들을 토벌하고 1세계에서 머물며 오래도록 빛 에테르에 노출된 ‘모노’는 제 본래의 몸 또한 어느 정도 사람의 범주를 벗어났으리라 추측한다. 백발이 성성했던 제 머리칼을 더듬어 반추하면. 어둠 속에서 잉걸불처럼 흔들리던 제 하얀 눈을 떠올리면. 사실 인제와 생각한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모든 단서는 명징하다.

때를 기다리며 ‘모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대체로 눈을 감은 날을 지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자리에 걸터앉았다. 조촐한 탁자에 앉아 바람 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땅이 밟힐 때마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낙엽을 들으며 오래된 옛이야기를 상상했다. 수정공이 아직 살아있을 적. 크리스타리움에서 읽었던 이야기. 괴물을 퇴치하는 어둠의 전사 동화를 아이들은 아주 좋아했다.

카엘과 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모노’는 어둠의 기사가 그려진 삽화를 더듬으며 꼭 카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이 조금 후회스럽기는 했다.

‘모노’는 자신이 알던 카엘을 더듬는다. 기억의 윤곽을 따라 느리게 걸어본다. 그림자가 지는 곳은 손수 빗금을 치며 빛이 닿는 곳은 손날로 가다듬는다. 어설픈 상상으로 되새기는 카엘은 여전히 웃고 있다. 굴곡진 미소가 어울린다. 조금 더 개구진 표정이면 좋을 것을. 성에 차지 않거늘 고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원본이 전부 낡고 헤지고 부스러지고 녹아 없어진 탓에 기억과 파편으로 이루어진 복제품에 만족해야 하는 것들. 그 복제의 복제의 복제들마저 일그러지고 깨지고 흩어지고 묻힌 탓에 이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것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섣불리 손댈 수 없는 것들이. 잘못 건드렸다가 아예 망쳐버리면 어떡하지, 망쳐버렸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가 내가 존재마저 망각하면 어떡하지, 하고 두려워지는 것들이.

카엘이 ‘모노’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발음하며 ‘모노’는 눈을 뜬다. 아슴푸레한 황혼이 찾아온다. 이윽고 밤이 오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에 둘렀던 로브를 벗는다. 낡고 헤진 옷 대신. 타타루가 준비해 준 새 옷을 입는다. 이곳의 모노와 수치가 비슷해서 금방 만들 수 있었다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라던 타타루를 한번 깊이 안고 감사 인사를 전하자 타타루는 이제 제 역할이니까용, 하고 대답했다.

타타루의 옷은 여전히 품질이 좋았다. 마음이 편했다. 걸리는 곳 하나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몸을 느리게 풀며 ‘모노’는 심호흡한다. 준비는 진작 되었다. 때만을 기다렸다. 그게 지금일 뿐이다. 가벼운 들숨. 엷은 날숨과 함께 흉통이 크게 꺼진다. 허파 속 담겼던 비탄과 음울과 서글픔은 모두 두고 갈 것이다. 몸을 무겁게 하는 여타 감정들은 필요치 않다.

대신 ‘모노’는 고민 끝에 목걸이를 걸었다. 검은 보석에 흰 내포물이 점점이 번진 원석 목걸이였다. 알맹이를 손에 쥐고 눈을 감는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작은 알에 마음을 띄운다. 그렇게 몸을 가벼이 한다.

정각이 막 지날 무렵. 모두가 잠든 천막을 지나 ‘모노’는 소리 없이 움직인다. 태내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곁에 선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이곳의 카엘과 모노. 새벽의 일원들. 저 뒤에서 따라나서는 건 총사령부의 지도자들. 기묘한 감각이다. 그들을 등에 둔 채 한 걸음씩 나아가며 ‘모노’는 꼭 저들에게 배웅받는 것 같다는 착각에 휩싸인다.

숲 어귀에 다다랐을 때. 이곳의 모노가 그를 불러 세운다. 그를 잠시 훑어보던 모노는 곧 손을 내민다. ‘모노’는 잠시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맞잡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타인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맞잡은 손을 느리게 흔들자 모노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

작별은 그로도 충분하다. 카엘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애써 비운 마음이다. 도로 무거워진 채로 희생의 심장을 노릴 자신이 없다. ‘모노’는 웃으며 물러난다.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등을 돌린다. 그렇게 태내로 들어간다. 최초이자 최후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빛이 짙었다. 한밤중임에도 정오처럼 밝았다. ‘모노’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백여 년이 넘도록 밝은 밤 아래서 살았다. 환한 밤을 거닐며 ‘모노’는 귀를 기울인다. 온갖 것이 귓속을 파고든다. 산짐승. 채 잠들지 않은 죄식자. 바람과 물. 풀잎과 낙엽. 그리고 날갯짓.

잠시 걸음을 멈춘다.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시 발을 뗐다.

무슨 말을 할까. 너를 이다지도 가까이서 보는 건 퍽 오랜만일진대. 보고 싶었다고. 오랜만이라고. 날 기다렸냐고. 인사말을 신중히 고르며, 어쩌면 이 또한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제 무의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간간이 잠기다 빠져나오며, ‘모노’는 걷는다. 듣는다. 가까워지는 날갯짓. 두툼한 깃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잔떨림을. 고민한다. 긴장한다. 결심한다. 그렇게 다다른다.

모퉁이를 꺾는 순간. 저 먼 곳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희생을 보며. ‘모노’는 불현듯 깨닫는다. 너도 내게 오고 있었구나. 내가 너를 찾았듯이. 계시처럼 내려온 자각과 함께 그 모든 고민과 긴장과 결심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가 이윽고 그마저 아니게 된다. 힘겹게 고르고 골라 간신히 마음먹었던 인사말은 새하얗게 잊은 채. ‘모노’가 가슴팍을 가만히 쥔다. 심장께를 부여잡듯 쥐고는 긁어내린다.

이 모든 시간이 지났음에도. 온갖 역경과 변화에 휩쓸렸음에도. 돌아올 수 없는 형태로 손상되었음에도.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아름답다.

대검을 잡는다. 손잡이를 꼬나쥔다. 네가 나를 보고 있다. 발바닥에 힘을 주어 땅에 박아 넣는다. 몸을 낮춘다. 네가 나를 본다. 숨을 고른다. 눈을 감는다. 오감을 날카롭게 벼린다. 너는 날 보고 있다. 숨을 들이켠다. 참는다. 온몸의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한다. 더욱 힘을 준다. 몸을 부풀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네가 날 보고. 대검을 꼬나쥐고. 입안을 짓씹고. 내가 너를 보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짓쳐 달린다.

검과 창이 맞닿는 순간. 폭죽처럼 튀는 빛 속에서 그는 찰나 같은 과거를 본다. 공격을 흘리고 숙이고 후퇴했다가 반격하는 일련의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희생이 날아오른다. 크게 선회하더니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내리꽂힌다. 물러나지 않는다. 대검을 단단히 꼬나쥐고 검은 밤을 몸에 두른다. 그렇게 온몸으로 맞부딪힌다.

첫 충돌과 함께 별이 흔들린다. 헤일로가 깨지고 검에 금이 간다. 몸이 튕겨 나오나 몸을 바닥에 굴려 견딘다. 그리고 다시. 검을 쥐고. 어둠을 두르고. 뛰쳐나가고.

두 번째 충돌. 날개가 길게 찢어진다. 몸체에서 떨어진 깃털 뭉텅이는 바닥에 떨어지기 전 산산이 조각난다. 그 또한 다시 구른다. 검을 가로지르는 균열이 벌어지며 쩍 소리가 난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자 검붉은 것이 후드득 떨어진다. 다시 일어선다. 검을 쥐고. 헌신을 두르고. 뛰쳐나가고.

세 번째 충돌. 뿔과 장신구가 부러지며 바닥을 나뒹군다. 희생이 길게 울부짖는다. 이해할 수 없는 비명이 태내를 찢어질 듯 울린다. 그는 볼썽사납게 구른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 반사적으로 바닥에 내리꽂은 대검이 견디지 못하고 괴성을 지른다. 몸을 바로 세우기도 전. 저 멀리서 빛이 쏟아진다. 자신을 노리는 거대한 창을 올려다보며 그는 생각한다. 너를 닮았다. 널 닮아 꼭 별 같다. 내 목숨을 노리는 게 별이고 너라면. 나는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그러니 내게도 네 심장을 줘.

공격을 막고자 대검을 방패처럼 내세운다. 몸을 수그리고 이를 짓씹는다. 갈리고 터진 입술 새로 피비린내가 난다.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할 수 있나. 해야지. 가능성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지. 어떻게든 해내야지. 내가 아는 너는 그랬으니. 나는 네 궤적을 따라 걷고자 마음먹었으니. 견뎌야지. 이겨내야지. 그래야 영웅이지.

절규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터트리며 모노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창과 검이 맞물리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파장에 휩쓸려 종잇장처럼 날아가며 모노는 직감한다. 어쩌면 이제껏 경험한 그 어떤 순간보다도 죽음에 가까운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저를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이 있다. 아늑한 요람처럼, 푹신한 침대처럼, 또 어쩌면 그리던 돌아갈 곳처럼, 불분명한 향수를 일으키는 미온한 온기가 있다. 희끄무레한 의식을 애써 틀어쥐며 눈을 뜬다. 제 뺨이 삽시간에 축축해진다. 만지작대고 나서야 알았다. 눈물이었다.

땅에 내려선다. 멀어지려 자리를 박차나 얼마 가지 못해 바닥에 쓰러진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구르더니 미동도 하지 않는다. 부풀고 꺼지는 기색조차 없다. 숨조차 쉬지 않는 희생을 올려다보며 모노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아찔한 현기증에 눈앞이 크게 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는 자각은 아주 느리게 온다. 멈추지 않는다. 바닥을 더듬는다. 완전히 깨진 대검 조각을 바투 잡고 발을 질질 끌어 걷는다. 그렇게 네 앞에 다다른다.

절뚝이던 몸에 힘을 주고. 흐린 시야를 애써 찡그려 초점을 맞추고. 쉬어지지 않는 숨을 힘껏 몰아쉬며. 희생 앞에 선 모노는 그 순간 참지 못한다.

투구를 벗어 던진다. 팔에 감각이 없어진 탓에 몇 번이고 헛손질한다. 거듭 미끄러지는 손을 억지로 종용해 간신히, 아주 간신히 얼굴을 드러냈다. 얼굴에 빛이 곧장 떨어진다. 따가운 빛살에도 굴하지 않고 모노가 고개를 든다. 맨얼굴로 희생을 마주하는 건 거진 백오십 년만이다.

“내 얼굴을 기억해?”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떨리고 갈라지는 바람에 제가 듣기에도 볼품없었다. 빛에 눈이 아팠다. 부시다 못해 시렸다. 그래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언젠가 머물렀던 여관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흘렀다.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모노가 되풀이한다.

“나를 기억해?”

희생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탁하고 거대한 눈동자가 모노를 빤히 들여다본다. 흰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진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그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눈물이 멎는다.

그로도 충분했다.

느리게 손을 든다. 검날이 손아귀를 파고든 탓에 손은 이미 피투성이다. 뻗은 손끝이 카엘의 가슴팍에 닿는다. 이렇게 닿는 것도 백오십 년만이야. 네게는 찰나였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억겁이었어. 하지만 지금에서야 알겠다. 선고를 코앞에 둔 순간. 모노는 그제야. 아주 뒤늦게야. 벼락처럼 자각한다. 내가 기다린 건. 내 손으로 널 토벌할 시간이 아니라.

나는 너와 닿을 순간만을 기다려 온 것이다. 그 온갖 고독을 견디며 나는 너와 다시 닿기를 바라왔다. 너와 다시 닿아서. 끊임없이 흐르는 네 눈물을 닦아줄 수 있기를. 그렇게 네 눈물이 멎기만을.

놀랍도록 몸이 가벼워졌다. 뼛속까지 꾸역꾸역 욱여넣었던 무언가가 통째로 빠져나간 것처럼. 그건 황홀한 기분이었다. 발을 떼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고 바람이 불면 그에 몸을 맡길 자신이 있었다. 모노가 웃었다. 빛이 찬란하다. 여전히 눈이 부시고. 여전히 시리고. 여전히 따가우며 여전히 눈물이 난다. 하지만 내 앞엔 눈 감은 네가 있지. 더는 울지 않는 네가 있지. 그러니 빛 따위는 더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빛 그 자체가 헛것이 되는 것이다.

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할 테지.

그러니 우리의 남루한 종말마저 사랑하기를.

빛이 꿰뚫린다.

그날. 새벽에 별안간 하늘에서 빛의 창이 내려꽂힌 그날. 태내에서 별이 태어나고 죽었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모노.”

모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피로에 굳어 있던 얼굴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투정 부리듯 부드럽게 풀렸다. 대답 대신 상대를 향해 손짓했다. 다가온 상대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가볍게 비비며 숨을 골랐다. 상대, 카엘은 익숙하다는 듯 모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좀 자야 하는 거 아냐?”

“거의 다 끝났어…….”

“무리하지 마.”

모노는 대꾸하지 않는다. 대신 카엘의 품에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죄식자 사태가 어영부영 마무리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닌 밤중에 하늘에서 섬광이 내리꽂혔을 땐 종말론까지 다시 나올 정도로 여파가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정상으로 돌아온 태내의 에테르 수치를 시작으로 모든 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죄식자들은 점차 약해지고 개체 수가 줄었다. 토벌은 순조롭게 이루어지다가 바로 어제, 마지막 한 마리를 제거했다는 보고서를 막 받은 참이었다.

토벌대와 함께 움직이던 카엘에게는 휴식이 주어졌으나 유감스럽게도 모노는 아직이었다. 에오르제아 총사령부에서는 사건의 전말과 재발 방지책을 담은 보고서를 요구했다. 보고서에 실어야 하는 자료에 쓰일 연구는 대부분 모노의 손을 거쳤으므로 모노는 지난 며칠간 온갖 곳에서 쏟아지는 연구 자료 요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진행 중이던 연구를 마무리하고 그들의 요청을 검토하며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전달하는 일을 마치고 나면 어느새 동이 트고 새가 울었다.

이렇게 바쁜 건 논문 심사 기간 때뿐이었다. 태생적으로 일정의 촉박함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모노로서는 고역이었다. 나날이 지쳐가는 모습이 눈에 띄게 보이니 카엘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근처를 서성이다가 자료 정리를 도와주겠다고 괜히 손을 거드는 게 최선이라는 사실에 조금 무력감까지 들었다. 입안 가득 남는 씁쓸함을 애써 삼켜낸 카엘이 모노를 힘주어 안았다. 이렇게나마 모노가 편히 쉴 수 있다면야 되레 기꺼운 일이었다.

“오늘 시간 괜찮아?”

품에서 한참 침묵하던 모노가 돌연 물었다. 카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렸다. 모노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말간 시선에 카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오늘, 하고 중얼거리듯 되묻자 모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나야 상관없지. 근데 너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랑 있는 게 쉬는 거야.” 무심한 투로 대꾸한 모노가 훌쩍 몸을 움직인다. 허리에 단단히 감겼던 팔이 조금 아쉽다는 듯 길게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대신 카엘의 손을 꾹 쥔 모노가 앞장서며 말했다. “지금도 괜찮지? 가자.”

정신을 차렸을 때 카엘은 철거 중인 거점을 지나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모노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거침없는 걸음이 멈춘 건 전선이었던 숲이었다. 이젠 정상으로 돌아간 태내이기도 했다. 설명 한마디 없이 당도한 장소에 카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왜 온 거지. 토벌을 완료했다는 보고서는 진작 올라갔을 텐데.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자 온 건가. 아니면 연구에 필요한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얘는 쉬어야 한다니까. 나랑 같이 있는 게 쉬는 거라니. 바보 같은 웃음을 실실 흘리는 카엘의 옆구리를 모노가 쿡 찔렀다.

“뭘 웃어?”

“그냥.” 카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얼버무렸다. 가늘어진 모노의 눈을 태평하게 응시하며 그는 능숙하게 주제를 틀었다. “여긴 왜?”

“전달받은 게 있어서.”

모노는 잠시 숲을 응시했다. 외곽을 따라 느리게 형태를 그리는 듯하다가 한 점에 집중한다. 가볍게 심호흡한 그가 걸음을 내디뎠다. 다소 비장해 보이는 태도였다.

“가자.” 다시 앞장서며 모노가 말했다. “떨어지지 마.”

그들은 다시 걸었다. 숲 초입에선 파견부대를 몇몇 만났으나 깊이 들어갈수록 인기척은커녕 짐승 한 마리 찾기 어려웠다. 시종일관 내리쬐던 빛이 사라지니 숲은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반쯤 본능처럼 숲길을 익힐 만한 표시를 찾아 헤매며 카엘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 소리만 어렴풋이 들린다. 여기서 사냥하기는 까다롭겠는데. 하릴없는 생각은 모노의 뒤통수에 꽂히며 사라진다. 맞잡은 손에 괜히 힘을 주자 모노도 꾹 힘주어 대답해 온다. 그게 기꺼웠다.

앞서가는 모노를 보며 카엘은 무심코 궁금해졌다. ‘모노’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죄식자의 에테르를 동력 삼아 크리스탈 타워를 가동해 문을 닫겠다는 계획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모노’의 자취를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노’는 움푹 파인 거대한 구멍과 깨진 대검 자루만 남긴 채 사라졌다. 누군가는 충돌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죽어버린 것이라 말했고 또 누구는 본인이 모습을 감춘 게 분명하다고 했다. 모노는 그 모든 의견에 귀 기울이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카엘은 ‘모노’가 걱정이었다. 자신의 모노는 아니더라도 그 또한 모노였다. 애쉬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 짧은 순간에마저 카엘에게 그는 ‘모노’였다. 걱정스러운 건 당연했다. 제 반려를 닮은 사람이었다. 카엘은 모노를 잘 알았다. 영웅이라고 불리며 성격이 이래저래 닳고 마모되었을 뿐 실상은 외로움을 잘 탄다는 것을 알았다. 고독을 잘 견디는 편도 아니었으며 사람을 곧잘 믿었다. ‘모노’를 보자마자 단박에 깨달았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 버티지도 못하는 적막을 얼마나 오래 견뎌왔는지. 카엘로서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모노’는 낡아빠진 골동품 같은 눈을 하고 있었으며 카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낯설기도 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도 의아한 부분은 여전히 찝찔한 실금처럼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노가 멈춘다. 카엘도 뒤따라 멈췄다. 시야가 갑자기 트였다. 드높은 나무들이 눈높이로 꺾인 탓이었다. 카엘은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다가 주위를 훑었다. 대죄식자와 ‘모노’가 마지막으로 충돌한 곳이었다. 섬광 같던 거창이 꽂힌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노가 올 이유는 없는 흔적이었다.

“여긴 왜?”

카엘이 물었다. 모노는 곧장 답하는 대신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여길 탐사했던 대원에게서 연락이 왔어.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아.”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 특유의 탄식과 함께 모노가 손을 놓는다. 카엘은 저도 모르게 떠나는 손을 움키려다가 간신히 거뒀다. 어찌 되었건 모노에겐 이게 일일 테니까. 일하는 중의 모노는 누군가의 간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빈손이나 몇 번 쥐었다 펴는데 모노가 그를 불렀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다가가자마자 카엘은 모노가 무얼 찾았던 건지 단숨에 알아차린다. 길고 짙게 진 모노의 그림자 아래 익숙한 투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네 손님이 쓰고 있던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잘 챙겨 나와도 자꾸 여기서 다시 발견된다고 하길래.”

모노가 투구를 들어 올렸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듯 첨탑 같던 장식이 죄다 부러지고 깨진 채였다. 얇은 검정 천은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렸다. 거의 뼈대만 남은 수준이었다. 그걸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모노는 곧 고개를 들었다. 투구를 쥔 손등이 하얗게 일었다.

모노가 걸음을 옮긴다. 카엘도 뒤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모노는 자리에 섰다. 투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응달이 짙은 곳이었다. 날이 아무리 밝아도 이곳만큼은 짙은 그림자가 질 것이다. 동시에 충돌 흔적이 잘 보였다. 조금만 자리를 옮겨도 나무들에 가려지는데도 이곳만큼은 훤히 들여다보였다.

카엘은 손을 뻗어 모노를 품에 안았다. 이유는 없었다. 구태여 꼽아보자면. 모노가 외롭지 않았으면 해서. 우스운 핑계였다. 그러나 모노는 뿌리치지 않는다. 맞닿은 팔에 손을 얹고 깊이 호흡을 골랐다.

“돌아가자.”

한참 후에 모노가 여상처럼 말했다. 그들은 손을 잡고 숲을 나왔다. 철거 중인 거점에 들러 천막 정리를 돕고 샬레이안 대학에 들러 모노의 서류를 챙겼다. 마찬가지로 혹사당하는 그라하와 야슈톨라에게 현인 주스를 한 잔씩 사주었으며 라스트 스탠드에서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포장했다. 그리고 여전히 손을 잡은 채 라벤더 거주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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